c1 2011.06.23

9. 소결·선재·열연 신설과 파이넥스 3공장 준공

이 시기 국내 제철 플랜트는 광양 5소결 신설, 포항 4선재 신설, 광양 4열연 신설 프로젝트 등을 통해 제선과 열연 분야의 기술력을 더욱 다졌다. 제2공장 준공으로 상업화에 성공한 파이넥스는 제3공장 준공으로 경제성을 확보했다.

2009년 8월 착공, 2011년 2월 준공된 광양 5소결 신설사업은 사업비 3102억 원 규모로, 화상면적 600㎡의 세계 최대급 소결기를 신설하는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공기단축과 원가절감의 성과를 달성했다. 재하시험에 기초한 경제적 파일 설계로 123억 원의 원가절감과 세계 최단기간 공기단축에 성공했다. 그 결과 포스코가 시행하는 성과공유제(Benefit-Sharing)의 최초 수혜 대상이 됐다. 특히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으로 소결 EPC 기술력을 확보했다.

2011년 6월 착공, 2013년 7월 준공된 사업비 6120억 원, 200만톤 규모의 3세대 파이넥스 3공장은 경제성 확보를 위한 슬림 파이넥스였다.

2011.06.23 포항 파이넥스 3공장 착공식

2011.06.23 포항 파이넥스 3공장 착공식

슬림 파이넥스를 위해 포스코건설은 그 동안의 연구개발과 가동경험을 바탕으로 설비를 보다 단순화하고, 차별화된 요소기술들을 대거 채용했다. 가루 철광석을 순수한 철성분으로 전환해주는 설비인 유동환원로를 기존 4단에서 3단으로 간소화했으며, 벨트컨베이어를 이용해 이송하던 분철광석을 자체 발생하는 가스로 운송 투입하는 등 차별화된 기술을 적용했다.

그 결과 파이넥스 2공장과 동일한 투자비를 유지하면서도 생산량은 33%나 높아졌다. 더욱이 포항제철소 전체 철강 생산량의 25%인 410만톤을 파이넥스 공법으로 생산함으로써 저가원료 사용에 따른 연간 원가 절감액이 1772억 원에 이르렀다.

2012년 1월 착공, 2013년 5월 준공된 포항 4선재 프로젝트는 사업비 4735억 원, 연산 70만 톤 규모의 선재공장 신설사업이었다.

시공 과정에서는 설계에서 늦춰진 공기를 만회하기 위해 기전에서 돌관공사를 추진했으며, 토목에서는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하는 패스트 트랙 공법을 적용했다. 또 공기단축을 위해 일부 설계를 변경하기도 했다. 전기실과 수처리 설비의 경우 일반 콘크리트로 설계됐는데, 공기단축을 위해 전기실은 철근 콘크리트로, 수처리 설비는 콘크리트 파일에서 스틸로 변경했다.

그 결과 공기 준수는 물론, 15일 공기단축이라는 성과를 달성했다. 특히 포항 4선재 신설 경험을 바탕으로 선재 분야 EPC 기술력을 확보했다.

2011년 1월 착공, 2014년 10월 준공된 광양 4열연 프로젝트는 연산 330만 톤 규모의 신설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75%의 열연공정에 이어 제강과 연주공정도 25%나 포함된 초대형 프로젝트로, 사업비 규모만 1조 4000억 원에 이르렀다.

포스코건설은 자력 엔지니어링을 위해 패밀리사와 협업체계를 구축했으며, 선진사 퇴직 인사 중 이 분야 최고 전문가를 긴급 채용하는 등 검증프로세스를 구축했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원가절감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있었다.

원가절감을 위해 중국산 설비를 분할 발주했으며, 품질 확보를 위해 중국 설비업체에 직원을 파견함으로써 철저한 사업관리로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했다. 그 외 18개로 나눠진 하우징에 대해 조립 테스트를 실시하는 등 품질 확보에 만전을 기했다.

그 결과 자력 엔지니어링 확보에 성공했으며, 특히 열연 분야 EPC 기술력을 기반으로 브라질 CSS사의 압연공정을 수주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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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2. 제철 플랜트 시동, 건설업계 판도를 뒤흔들다

# 싹쓸이 괘씸죄, 50%만 먹어라

인류는 석기와 청동에 이어 철기시대를 열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극빈층으로 전락했을 때 그들은 철에서 희망을 찾았다. 산업의 ‘쌀’인 철은 위대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좋은 철이 있었기에 조선 강국도, 자동차 강국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 제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비웃었다. 힘 있는 나라가 기술과 자금을 제공해도 그걸 만들고 지킬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들은다름 아닌 위대한 대한민국이었으며, 위대한 포스코였다. 그리고 제철신화의 숨은 주역으로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가 있었다. 그들은 신화창조의 출발선인 포항제철소 건설의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광양제철소를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994년, 그들이 다시 모여 포스코건설을 만들었다. 그들의 실력은 이미 검증을 받았다. 우향우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다진 실력이었다. 그 기세에 눌려 포스코건설이 영업을 시작하던 날, 건설업계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포스코건설이 출범하면서 포스코의 설비를 시공해왔던 대형 건설사들의 철강사업부가 된서리를 맞았다. 포스코는 외자설비만 직접 발주하고 내자설비와 공사 전부를 포스코건설에게 맡겼다. 그러자 대형 건설사들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공기업이 그렇게 방만하게 경영해서 되겠느냐!”

“국민기업이라면서 문어발식 확장이 왠 말이냐!”

하루아침에 일거리를 잃고 철강사업부를 유지해야 할지, 폐쇄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 그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이 같은 노골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포스코가 한발 물러섰다. 1996년 중반 포스코건설 직접 발주 물량을 50%로 제한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나머지 물량에 대해서는 포스코건설도 대형 건설사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입찰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50% 가이드라인도 무용지물이었다. 게임이 되질 않았다. 포항과 광양에서 8기의 제철소를 건설하면서 쌓은 실력이다 보니 경쟁을 해도 포스코건설의 성적이 월등히 높았다. 입찰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면 경쟁사들은 닭 쫓던 개마냥 먼 산만 바라보았다.

 

#광양 5고로, 우리기술로 세계 최강 제철소 만들다
광양 5고로 착공식

광양 5고로 착공식

출범 시작부터 건설업계를 바짝 긴장시켰던 제철 분야는 포스코건설이 성장기반을 구축해가던 1997년까지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용광로나 고로에 철광석을 녹여 선철을 만드는 제선 분야에서는 대표적으로 광양 5고로 신설, 포항 2고로 2차 개수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고로를 대체할 새로운 제철공정으로 코렉스 프로젝트도 수행했다.

광양제철소 5고로 건설은 포스코가 조강생산 능력 총 2800만 톤 체제를 구축, 세계 1위의 철강기업으로 도약하는데 디딤돌이 된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로서는 설계에서 기자재 조달, 시공, 성능 보장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자체 기술로 완벽히 수행한 사업으로, 제철 플랜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였다.

먼저 광양 5고로는 정부의 요청에 따라 사업이 발굴됐다.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 4기 준공 이후 포항과 광양을 비롯해 총 8기에서 2100만 톤 생산체제를 갖추고, 가동률도 95% 이상을 유지하는 데도 철강 수요가 계속 급증하면서 철강 부족 현상이 해소되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주력 산업인 조선과 자동차 산업의 철강재 공급 차질을 우려하면서 포스코에게 제철 생산량 확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정부의 요청과 수요 예측에 따라 1995년 6월 포스코는 연산 300만 톤 규모의 고로 1기와 연산 200만 톤 규모의 미니밀 1기 신설에 대한 투자를 결정했으며, 포스코건설은 포스코로부터 이 사업을 수주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러나 사업 수행 도중 포스코건설은 IMF 위기를 맞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 마디로 비상 상황이었다. 환율이 치솟으면서 자고 나면 환차손이 커져갔다. 우리는 확보된 기술력과 사업관리 능력을 총동원해 수익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설비의 합리적인 구매 필요성이 강조됐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발주 단위를 세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발주 단위가 무려 160개로 늘어났다. 비슷한 규모의 포항 4고로 1차 개수 때의 발주 단위 16개와 비교하면 그 노력이 참으로 대단했다. 발주의 세분화와 함께 국산 기자재 사용 비율도 대폭 늘렸다. 이 같은 조치를 통해 손실 폭을 줄이고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고영균 전 부사장)

국산 기자재 사용 비율을 대폭 늘리면서 포스코건설은 고로 설비의 국산화에 크게 기여했다. 고로 설비에 사용되는 기자재의 경우 국제적으로도 제작업체가 한정돼 있고, 높은 신뢰성이 요구되는 전문 설비들이어서 주요 설비의 국산화에는 신중한 기술검토와 검증 과정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코건설은 설비별로 국내 전문 제작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국내업체들이 고로의 조업과 수명 결정에 필요한 핵심설비 국산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광양 5고로 건설공사는 1996년 10월 착공 이후 포스코건설의 자력 엔지니어링 기술에 의해 1999년 3월말 준공됐다. 6-1특징으로는 소결공장과 코크스공장을 신설하지 않고 기존 설비를 사용했기 때문에 별도의 부대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어 경제적이었고, 특히 인공지능 시스템과 미분탄 취입 기술 등을 최대한 활용한 최신예 고로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 수행을 통해 포스코건설은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우선 기술축적의 성과가 있었다. 고로 개수와 광양 5고로 신설과정에서 습득한 각종 기술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는데, 그 성과물이 무려 총 37건, 4만 2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사업관리에 있어서도 ISO 절차에 의한 프로젝트 관리기법을 적용했다. 더욱이 미국의 엔지니어링사인 레이시온의 프로젝트 관리기법을 전수받아 대형 고로 프로젝트의 종합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공사 안전관리와 시공 품질 면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엄격한 시공 품질관리를 통해 공사 기간을 대폭 단축함으로써 시운전 기간을 6개월 이상 확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광양 5고로 신설 경험을 바탕으로 포스코건설의 기술력이 고로를 상품화해서 판매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는 점이었다. 이후 포스코건설은 최신 고로 기술로 무장하고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 첫 성과가 이란 타바존 프로젝트에서 나타났다.

광양 5고로 준공

광양 5고로 준공

 

#광양 1미니밀, 친환경과 저원가 시대를 열다

철강 생산 공정은 처음 쇳물을 만드는 제선공정에서 출발, 쇳물에서 불순물을 제거해 강철로 만드는 제강공정으로 넘어간다. 이 시기 포스코건설은 포항과 광양제철소에서 용선 예비처리 설비, 용강 승온설비, 탈가스 설비(RH-OB) 등 제강공정 중 쇳물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노외정련 공정에서 설비 설치공사를 여러 차례 수행했다.

제강공정 중 주요 프로젝트로는 광양 1미니밀 설비가 있었다. 미니밀 설비는 전기로에서 고철을 녹여 얇은 슬래브를 만든 뒤 가열로와 조압연설비를 거치지 않고 사상압연설비에서 열연강판을 생산할 수 있는 제철 설비이다.

광양 미니밀 공장 전경

광양 미니밀 공장 전경

광양 5고로 추진배경 때와 마찬가지로 국내 강재 소비가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자 포스코는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설비 증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철강 수요가 2000년을 전후로 고비를 맞아 2010년이 되면 쇠퇴기로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예측됨에 따라 포스코는 생산량을 조절하기 어려운 고로보다는 미니밀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사업에서 일부 설비공급과 시공을 맡았는데, 이 사업은 연산 180만톤 규모에 수주 금액이 외자를 제외한 설비공급과 시공을 합쳐 2880억 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1995년 1월 착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돌입해 굴착 102만㎥, 항타 1만 300본, 콘크리트 22만 4000㎥, 기계설치 4만 2000톤, 케이블 포설 3891㎞ 등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고 많은 설비를 도입했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는 난관도 많았다. 항타와 굴착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 수처리 설비 스케일 피트 굴착(GL-23m) 완료 시점에 시간당 30㎜ 이상의 폭우가 3시간에 걸쳐 100㎜나 쏟아져 토질이 변형되고 매몰되면서 굴삭기 1대가 침수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주야를 가리지 않는 복구작업에도 불구하고 7일 정도의 공정이 지연되고 경비도 많이 소요됐다.

기계 기자재 중 연주의 신설비인 코일 핸들링 시스템은 제작과정에서 문제점이 발견돼 납품이 지연됐으며, 고압가스 설비 중에서는 인허가를 받지 않은 제품이 반입돼 이를 교체하는 작업에도 많은 시간과 인력이 낭비됐다.

그뿐 아니라 일부 협력업체의 임금 체불로 인해 근로자들의 농성이 발생했으며, 일부 협력업체는 부도를 맞아 후속업무가 지연되기도 했다. 환경단체의 고발을 해결하는 데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렸다.

비록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도 많았으나 모두가 합심해 불철주야 노력을 경주한 끝에 당초 준공일 대비 15일을 단축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1996년 10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이 성대하게 거행됐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미니밀 전 설비에 대한 시운전은 아니었지만, 제강설비와 수처리 설비에 대해 포스코건설이 자력으로 주어진 일정에 무사히 시운전을 마침으로써 포스코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특히 내부적으로도 많은 경험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연 인원 86만 명이 동원돼 포항 지역 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는 당시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지 않아 도급계약 21개 차수에 45개 협력업체와의 202건에 달하는 계약을 관리하느라 고초가 많았다. 특히 협력업체 월 기성 지급 때는 현장소장이 350~400회 이상 결재를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포스코도 성과가 많았다. 광양 1미니밀은 제철소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용광로에 의한 일관제철 방식을 완전히 탈피해 고철을 주원료로 해서 전기로로 쇳물을 생산하기 때문에 용광로, 코크스, 소결설비가 지니는 환경오염 배출 요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아울러 두께 90㎜ 이하의 박슬래브를 고속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고속 연주기가 연결돼 있어 고생산성과 저원가 조업이 가능해졌다.

결과적으로 포스코는 이 설비를 통해 기존의 고로설비 대비 최고 50%의 설비비를 절감할 수 있었으며, 제조 기일도 8일이나 단축할 수 있었다. 특히 에너지를 40% 절감시키고, 노동생산성을 30%나 증가시키는 등 포스코건설은 발주자 포스코가 저원가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 광양 4냉연, 엄청난 규모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철강 생산 공정은 제선과 제강공정을 지나 연주공정으로 넘어간다. 연주공정은 액체 상태의 철이 고체가 되는 과정인데, 이를 반제품이라고 한다. 반제품은 다시 압연공정으로 넘어가 열연코일, 후판, 선재 등 철강 제품이 된다.

압연공정은 열간압연과 냉간압연으로 나뉘는데, 특히 냉연강판은 미려한 표면과 정확한 치수, 가공성 등의 장점을 지녀 자동차, 가전, 가구, 사무용품, 건자재 등 이용범위가 넓고 일상생활에 가장 가까운 철강 제품이다.

출범 이후 3년간 포스코건설은 연주공정으로는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열연에서는 포항 1열연 신예화와 포항 3후판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냉연에서는 광양 4냉연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 중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광양 4냉연을 꼽을 수 있었다.

포스코는 가전용, 건자재용, 자동차용 등 냉연강판의 수요가 급증하자 1977년 2월포항 1냉연공장을 준공한 이후 포항 2냉연공장과 광양에 1~3냉연공장을 건설하는 등 냉연강판 생산능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왔다.

5개의 냉연공장을 가동하면서 포스코는 ‘냉연 제품이 회사의 사활과 직결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냉연 품질 혁신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러나 광양 3냉연공장 가동 이후에도 자동차, 가전제품 등 냉연제품 수요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포스코는 조만간 국내 냉연시장의 공급부족을 전망하고 광양 4냉연 건설에 착수했다.

연간 180만 톤의 생산 능력을 갖춘 광양 4냉연공장은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공장 길이가 1㎞가 넘고, 공장 폭이 300m에 이르렀다. 토건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는 하루 수행 인원만 4500여 명에 달했고, 평균 3800여 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포스코의 투자 금액이 무려 9812억 원에 달했고, 포스코건설의 수주 금액도 6280억 원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로서는 포스코건설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플랜트라 할 수 있었다.

광양 4냉연 EGL(전기도금설비)

광양 4냉연 EGL(전기도금설비)

1995년 9월 착공해 1997년 8월 준공한 이 공장은 냉간압연설비(PL/TCM), 연속소둔설비(CAL), 전기도금설비(EGL), 정정설비(RCL) 등으로 구성됐다. 포스코건설은 공기 준수를 위해 공사관리에 총력을 기울였다. 규모에 비해 1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콘크리트 49만 7000㎥, 철골 4만 4200톤, 기계 및 배관 설치 5만 2000톤, 케이블 포설 6800㎞ 등의 엄청난 물량을 처리하느라 심신이 고달팠다. 그래도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공기를 맞춰나갔다.

특히 토건공사의 공기 준수가 전체 공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여러 설비 중에서 기초 구조물이 복잡하고 협소한 지역에 대규모 물량이 집중돼 있는 TCM(냉간압연기)의 경우 압연지역 공장건설 사상 최초로 타워크레인을 설치해 사용했다. 더구나 포항 지역에서는 구조물 설치업체를 찾을 수 없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마땅한 업체를 찾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또 복잡하고 많은 구조물을 단기간에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밀도에 오류가 발생해 기계설치 작업 전에 많은 수정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나중에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냉연설비의 구조물 시공 기준을 정립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난관을 하나씩 극복해나가면서 1996년 2월 철골 입주식을 무사히 마쳤고, 이어서 8월에 압연기(Mill Housing) 입주식도 순탄하게 마무리 지었다. 압연기와 함께 연속소둔설비, 전기도금설비, 정정설비 등도 성공적으로 설치 완료했다.

포스코건설은 기전공사에 이어 기자재의 적기 수급을 위해설계, 제작, 시공 TFT를 각각 구성하고 제작사 상주관리, 1일 입고현황 관리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설치 중 발생하는 설계 및 제작 오류를 즉시 해결하는 운영체제도 가동했다. 그 결과 1997년 8월, 광양 4냉연공장이 성공적으로 준공됐다.

광양 4냉연 신설에서 가장 큰 성과로는 포스코가 독자 개발한 두께 및 형상 자동제어시스템 등의 첨단 기술을 채택함으로써 세계 최대치인 두께 0.4~2.3㎜, 폭 700~1860㎜의 후물광폭재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를 통해 제품의 두께 편차를 종전보다 32% 향상시켰으며, 후물광폭재의 평탄도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1994년 12월 출범 이후 3년간 포스코건설은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한 제철 플랜트에서 눈부신 성과를 달성했다. 포스코의 투자가 활발한 가운데 광양 5고로 신설, 광양 1미니밀 신설, 광양 4냉연 신설 등 사업규모가 1000억 원이 넘는 대형 프로젝트를 10여건이나 수행하면서 회사가 성장기반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97년의 경우 회사 전체 수주액이 1조 8000억 수준이었는데, 여기서 제철 플랜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1조 6000억 원 규모로 무려 91%를 차지했다. 이를 기반으로 제철 플랜트는 출범 직후 37위에 불과하던 회사의 시공능력을 7위로 끌어올렸다.

광양제철소 4냉연공장 전경

광양 4냉연공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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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4. 글로벌 시동, 플랜트 강점 살려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다        

# 신시장을 찾아 중국, 베트남으로 Go Go!

포스코건설이 출범하던 1990년대는 이데올로기 장벽이 붕괴하면서 소위 공산권이라고 불리던 북방국가에서 순풍이 불어왔다. 1992년 한국과 중국,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음으로써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들 국가들은 경제성장의 모델로 한국을 선택하고 한국기업들의 대대적인 투자를 희망해왔다.

포스코건설은 신생기업이었지만 출범 직후부터 해외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여건과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먼저 글로벌 영토 확장에 나서는 든든한 포스코가 있었고, 포스코건설의 전신인 거양개발과 PEC가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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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9.15 베트남 VPS 준공

포스코건설이 집중적으로 개척하고 들어간 시장은 중국과 베트남이었다. 거양개발과 PEC의 경우 베트남시장부터 개척에 나섰다. 거양개발은 1993년부터 비나파이프 건설공사를 수행하고 있었고, PEC는 VPS 압연공장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비나파이프는 1994년 7월에 준공됐고, VPS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바통을 이어받아 1995년 9월에 준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포스코건설은 베트남사업을 확대했다. 출범 직후 베트남 철강기업과 합작으로 포스리라마를 설립하고 철골공장을 건설했다.

제철 플랜트 외에도 거양개발은 자체 개발사업으로 건축사업을 추진했다. 호치민 중심지에 위치한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주상복합빌

딩인 다이아몬드플라자는 1995년 10월에 착공해 2000년 8월에 준공했다. 베트남에 이어 중국에서도 건축사업을 추진했는데, 상하이 중심지의 랜드마크인 포스플라자는 1996년 4월 착공에 들어가 1999년 1월에 준공됐다.

포스코건설 출범 직후 포스코의 주무대는 베트남보다는 중국이었다. 1992년 광양제철소 준공 이후 포스코는 증강된 생산능력을 소화할 만한 시장으로 세계의 공장 중국을 선택하고 집중 투자에 나섰다.

다롄 CGL, CCL 공장 전경

다롄 CGL, CCL 공장 전경

이집트 아르코 특수강공장 전경

이집트 아르코 특수강공장 전경

포스코건설은 포스코의 중국 진출에 따라 포스코 현지법인의 발주 물량을 기반으로 성공적으로 중국시장 개척에 성공했다. 중국시장 첫 프로젝트는 라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 CGL이었으며, 이어서 장쑤성(江蘇省) 장자강(張家港)에 진출해 CGL과 STS 플랜트를 수행했다.

중국, 베트남에 이어 포스코건설의 해외사업은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비롯해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와 브라질로 확대됐다. 이집트 아르코(ARCO) 프로젝트는 PEC가 개발한 사업이었다. 1993년 PEC는 아르코가 14만 톤 규모의 특수강 플랜트 건설을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1995년 2월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최저입찰자로 선정됐으나, 프로젝트 컨설팅을 맡은 일본의 NKK가 자격미달을 선언하고 포스코건설을 배제시켰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부당함을 호소했고, 우리 정부도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상황은 포스코건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시가 한-이집트 수교 직전이라 이집트정부가 부담을 느꼈고, 결국 무바라크 대통령이 재입찰을 지시했다. 더욱이 아르코는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 NKK를 컨설팅에서 제외시켰다. 재입찰 결과 1996년 1월 포스코건설은 아르코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베네수엘라 포스벤 공장 전경

베네수엘라 포스벤 공장 전경

베네수엘라 포스벤(POSVEN) 프로젝트도 PEC로부터 출발했다. 1994년 미국의 방산업체 레이시온이 미니밀 고철 대체원료인 HBI 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개발해 PEC에 사업추진을 제안해왔다. 당시 포스코가 2기의 미니밀 건설을 준비 중이어서 사업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마침내 1997년 1월 포스코를 최대주주로 하는 다국적기업 포스벤이 탄생했고,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사업관리와 엔지니어링 분야를 수주했다.

브라질 코브라스코(KOBRASCO) 프로젝트는 포스코 사업이었다. 포스코는 광양 5고로의 조업용 펠릿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1996년 3월 브라질 국영 철광석회사와 합작으로 코브라스코를 설립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설계와 설비공급을 맡았으며, 펠릿 공장은 1997년 7월 착공에 들어가 1998년 11월 준공됐다.

이처럼 포스코건설은 신생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제철 플랜트 강점을 십분 활용해 중국과 아시아를 넘어 저 멀리 북아프리카, 지구 끝 남아메리카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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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코브라스코 공장 전경

1998.11 브라질 코브라스코 준공식

1998.11 브라질 코브라스코 준공식

 

 

 

 

 

 

 

# 영일만 철강신화, 베트남에서도 통한다

“우리는 포스코와 박태준의 신도!”

1992년 도무오이 당시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말이다. 국가 쇄신을 위해 ‘도이모이’(베트남 개혁개방 정책)를 외쳤던 베트남이 경제성장 모델로 선택한 것은 한국식 경제개발과 포스코의 철강신화였다. 그들은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먼저 한국과 수교를 맺었고, 포스코를 첫 해외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들에게는 철강산업 육성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도무오이 서기장이 박태준 회장에게 철강산업 투자와 기술지원을 요청해옴에 따라 포스코도 베트남 진출을 준비했다. 1992년 3월 포스코는 베트남 정부와 철강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는 포스코의 베트남 투자가 임박했음을 시사하는 움직임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한 PEC는 조직을 갖추고 프로젝트 수주를 위한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프로젝트의 윤곽은 1993년 들어 더욱 구체화됐다. 1993년 1월 황경로 당시 포스코 회장이 철강산업 협력을 위해 베트남을 방문했다. 베트남 정부는 포스코의 투자결정에 강한 신뢰와 함께 다이아몬드플라자의 공동 추진을 제의해왔다. 다이아몬드플라자는 베트남 정부가 호치민시 중심부에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랜드마크 건축사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말레이시아의 젠팅그룹이 강한 의욕을 가지고 사업 참여를 희망했는데, 베트남 정부는 젠팅을 제치고 철강 프로젝트와 건축 프로젝트를 모두 포스코에 넘겼다. 그 결과 베트남 프로젝트는 원플러스원(1+1) 효과를 가져와 PEC가 철강 프로젝트를, 거양개발이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됐다.

포스코는 베트남과 철강협력 과정에서 베트남철강공사(VSC)와 함께 현지법인으로 VPS(VSC POSCO Steel Corporation)를 설립했다. 따라서 베트남 철강 프로젝트는 일명 VPS 프로젝트로, 7만 톤 규모의 철근과 6만 톤 규모의 선재를 비롯해 총 20만 톤 규모의 압연공장을 건설하는 제철 플랜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수주전에는 PEC 외에도 이탈리아의 다니엘리, 우리나라의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이 참여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PEC는 정확한 정보력과 오랜 준비, 그리고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1993년 11월 지명경쟁 입찰에서 국내외 경쟁사를 물리치고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PEC가 VPS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거양개발이 PEC로부터 시공 부문을 수주함으로써 엔지니어링과 건설을 대표하는 양대 패밀리사가 팀워크를 이뤄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됐다. 더욱이 두 회사의 합병으로 EPC 전문기업이 탄생하고, 이 기업이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함에 따라 VPS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처음으로 수행하는 해외사업이란 기록을 남겼다.

1994 베트남 VPS 착공식

1994 베트남 VPS 착공식

VPS 압연 플랜트는 가열로, 압연기, 정정설비의 주설비와 수전설비, 운송설비, 롤숍기기, 수처리 및 계장설비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였다. 1994년 4월 착공에 들어가 1995년 9월 완공됐다. 자국 내 최대 규모인 철강공장인 VPS 압연공장이 본격 가동에 들어감에 따라 베트남의 철강생산량은 연간 50만 톤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의 철강 수요는 연간 90만 톤에 육박했고, 개혁개방과 경제개발 정책에 따라 1996년 이후에는 그 수요가 150만 톤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이를 기회로 보고 베트남에 투자했다. 1994년 12월 베트남 건설성 산하 리라마와 철골 합작사업 계약을 체결하고, 1995년 6월 포스리라마 법인을 설립했다. 이어서 1995년 10월부터 철골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1996년 10월 준공된 포스리라마 철골공장은 총 부지면적 8만여 ㎡, 공장면적 1만여 ㎡에 용접기, 절단기, 프레스 등의 2차 가공제작 설비와 각종 운반장치, 중기, 시험장비 및 다양한 공구를 설치해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를 갖추었다.

공장 준공 이후 포스리라마는 도무오이 서기장이 현장을 방문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할 정도로 베트남 정부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았으며, 베트남 후알론 방직공장 건립공사의 1차 철골제작 설치공사 수주를 비롯해 철골, 배관, 탱크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해나갔다.

 

# 다이아몬드플라자, 도이모이의 상징이 되다

VPS 프로젝트가 포스코건설의 1호 해외사업이었다면 다이아몬드플라자는 해외 건축사업 1호에 해당되는 프로젝트였다.

1995년 4월 포스코건설은 베트남 철강공사 VSC와 합작으로 다이아몬드플라자의 건설과 운영을 위해 IBC(International Business Center)법인을 설립했다. 포스코건설이 투자자금을 출자하고, VSC가 토지를 현물 출자하는 조건이었다. 포스코건설이 40년간 임대 운영한 뒤 VSC에 지분을 무상으로 양도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1995년 10월 착공된 다이아몬드플라자는 지하 2층, 지상 20층 규모에 상가시설과 업무시설, 그리고 주거시설인 아파트로 구성된 복합건물이었다.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주상복합 건물이며, 건물 전체를 철골조로 제작함으로써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었다.

건축 분야 해외 첫 프로젝트였던 만큼 경험 미숙으로 인한 어려움이 많았다. 전반적으로 업무처리가 매끄럽지 못했고, 주요 설비자재를 한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데다 시공방법이 베트남과 상황이 달라 투자비가 상승하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선진기업들을 벤치마킹 하면서 차츰 시행착오를 줄여나갔다.

자금조달도 쉽지 않았다. 1996년 2월 차입을 통해 초기 건설자금은 확보했지만, 이후 베트남 리스크와 저팬 프리미엄에 따라 IBC의 자금 조달여건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이 지원에 나서 전액 지급보증을 함으로써 추가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분양과 준공 마무리였다.

“1998년 8월 1일, IBC 법인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다이아몬드플라자의 상가와 사무실, 그리고 아파트는 준공을 한 후 모두 임대 분양하기로 돼 있었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 게 가장 큰 임무였다. IMF 시절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본사에 있을 때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암 3기이니, 악성 종양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다 보니 호치민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문표 전 전무)

당시 다이아몬드플라자는 공정이 80% 정도 마무리되고 마지막 마감공사가 한창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분양이었다. 마케팅 에이전트인 BHP는 추진력이 부족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영국의 체스터톤으로 교체하고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적극적인 마케팅 결과, 아파트는 오픈 초기부터 인기를 끌어 금새 분양이 완료됐으며, 업무시설도 개관 초기 계약기준으로 입주율이 80%를 넘어섰다. 한국기업들의 의리가 대단했다. KOTRA, SK, 대한석유공사 등은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먼지가 풀풀 날리는 상황도 개의치 않고 즉시 입주해주었다.

그러나 상업시설 분양은 쉽지 않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포스코건설은 현지 자료조사를 통해 상가의 개념부터 재정립했다. 레이아웃과 운영방식을 현지에 맞게 수정했으며, 품질을 위해 인테리어 공사를 추가했다. 무엇보다 기존 개별분양 방식의 상가계획을 전면 수정해 백화점 방식으로 변경했다. 인테리어 공사는포스코건설이 직접 시공했다. 그 결과 베트남 첫 현대식 백화점이 탄생했으며, 준공 시점에서100% 임대 분양에 성공했다.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전경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전경

다이아몬드플라자는 호치민시 최고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옛 대통령궁과 노트르담 성당이 마주보고 있으며, 건물의 3면이 도로와 접한 사통팔달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2000년 8월 25일 준공된 이 복합건물은 미국·베트남 무역협정(2000.7.14), 베트남 증권거래소 개장(2000. 7.20) 등과 함께 베트남 경제개방 3대 상징으로 통한다.

다이아몬드플라자가 종합 준공되던 날, 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이 일대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는 주변 도로와 공원까지 점령했다. 도이모이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급기야 백화점 출입문을 통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사람들은 백화점 입구에 줄을 서 있다가 구경을 마치

2000.08 베트남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준공식

2000.08 베트남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준공식

고 나오는 사람 수만큼만 들어가야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다이아몬드플라자의 성공적 준공으로 포스코건설은 한류 전도사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국 건설의 수준 높은 기술을 베트남에 전파하는 민간외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베트남의 기준을 넘어 국제적 공사품질 관리기준을 준수하는 등 엄격한 시공관리를 통해 현지인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 결과 베트남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골든퀄리티메달(Golden Quality Medal)을 수상하기도 했다.

 

 

# 중국 철강시장에 표면처리 기술 우수성을 알리다

베트남이 도이모이를 외치며 외국 자본을 유혹하기 이전에 이미 중국은 흑묘백묘론(白猫黑猫論)을 앞세워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거대 중국의 이 같은 개혁개방 소식에 전 세계 자본이 앞다퉈 차이나 드림을 좇아 불나방처럼 모여들었다.

포스코와 포스코건설도 전략적 요충지로 중국을 선택하고 만리장성을 넘었다. 포스코의 경우 광양제철소 준공 이후 늘어난 생산물량을 소화해낼 만한 큰 시장이 필요했는데, 거대 시장 중국의 개방과 한중 수교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가 건축 분야까지 노렸다.

베트남 건축 프로젝트 추진으로 자신감을 얻은 포스코건설이 중국 내 건축시장 진출의 타깃으로 삼은 곳은 상하이였다. 당시 상하이는 개혁개방의 선두주자로, 가장 먼저 변신에 나섰다. 영국의 홍콩 반환을 앞두고 중국 정부는 상하이를 제2의 홍콩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으며,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푸동(浦東) 루자주이(陸家嘴) 지구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상하이는 외국인 투자유치가 봇물을 이뤄 점차 세계적 금융과 무역,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로 변모해갔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중국시장의 변화를 발 빠르게 읽어내고 한국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단독 투자에 나서 초고층빌딩인 포스플라자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94년 7월부터 사업추진 검토에 들어가 1994년 11월 상하이시와 토지매입 계약을 체결하고 50년간 토지사용권을 취득함에 따라 프로젝트 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건축 프로젝트에 순풍이 부는 가운데 포스코도 계획대로 중국 진출에 성공했다. 먼저 화북, 화동, 화남지역에 3대 거점을 삼각편대로 확보하고 점차 내륙으로 진출한다는 전략을 세웠으며, 그 첫 시작은 화동으로 정했다.

1995년 11월 중국 동북지역 CGL 수급 불균형을 기회로 삼아 랴오닝성 다롄에 컬러강판(CGL)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어서 1996년과 1997년에 장쑤성 장자강에 포항강판(CGL)과 포항불수강(STS) 현지법인을 각각 설립함으로써 화동지역에 코일센터로 구성된 복합 철강 생산단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상의 세 포스코 현지법인이 발주한 공사는 모두 포스코건설이 수주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다롄 CGL은 1995년 11월 착공, 1997년 9월 준공했다. 회사 내부에서는 사업 초기 경험이 부족하니 기본 엔지니어링을 선진기업에 맡기고 프로젝트를 추진하자는 일부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자신들만의 작품을 만들자는 의견이 더 많았으며, 결국 정예 인력을 구성하고 자력 엔지니어링을 실행에 옮겼다.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포스코건설은 경제적 설비 조달에 이어 35일의 공기단축 성과를 달성했다.

1996년 11월 착공, 1998년 5월 준공한 장자강 CGL은 일반 건자재는 물론 가전 용도의 고품질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로서, 중국 내에서 설비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철강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빈번하게 방문하는 CGL의 모범 사례로 인기를 끌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순수 자력 설계로 설비를 공급하고 성능 인증까지 수행함으로써 표면처리 분야 설계기술에 대한 경쟁력을 국제 철강시장에서 드높일 수 있었다.

1999.01.22 장자강 STS 준공식 석상에서 휘호

1999.01.22 장자강 STS 준공식 석상에서 휘호

1997년 2월 착공, 1999년 1월 준공한 장자강 STS는 사업 초기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 문화’라는 암초에 걸려 곤혹을 치렀다. 포스코건설은 만만디로 인한 업무 지연을 막기 위해 강한 의지로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했으며, 그 결과 오히려 착공에서 상용생산에 이르기까지 21개월의 짧은 공기로 중국 내 최대 STS 냉연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자체 기술력 향상은 물론, 국내외에서 다시 한 번 그 기술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중국 진출 이후 3개 제철 플랜트의 성공적 수행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장자강 항만 투자사업에 나섰다. 이 사업은 포스코건설이 수행하고 있던 바로 그 3개의 프로젝트들이 이용할 항만건설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1997년 8월 항만 건설을 위한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곧바로 건설공사에 들어가 1998년 7월에 준공했다.

이후 장자강 항만을 1년간 운영하다가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포스코 현지법인인 장자강 포항불수강에 매각했다. 비록 운영 1년에 그쳤지만 이 항만은 포스코건설이 해외에서 첫 SOC사업에 투자했다는 데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 상하이 포스플라자, 입주하려면 자격심사부터 받아라!

중국 내 제철 플랜트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상하이 건축 프로젝트 추진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토지사용권 취득에 이어 1995년 4월 한국은행으로부터 투자 승인을 획득했으며, 6월에는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후 포스플라자 건립을 위해 한국 건설사로는 처음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건설면허를 취득함으로써 향후에 중국 건축시장에 본격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1996년 2월 포스코건설은 중국 정부로부터 프로젝트의 초보설계비준서를 취득했다. 초보설계비준서는 중국의 건축 관련 법규상 착공 허가와 각종 인허가를 얻기 위해 필수적으로 취득해야 하는 사전심사로서 우리나라의 건축허가에 해당되며, 상세설계는 이 초보설계 비준내용을 기초로 해서 진행된다.

초보설계비준서 취득과 함께 건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건설공사에서 토목이나 골조공사는 현지업체가 수행했으나, 당시 중국의 설비기자재나 고급 마감재 기술수준이 부족해 불가피하게 많은 한국업체들이 설비기자재 공급과 시공에 참여했다. 강관파일 원자재와 철골소재는 포스코 제품을, 철근은 인천제철에서 수입했다. 외장 커튼월은 현대알미늄에서 공급과 함께 시공을 맡았다.

시공 과정에서는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파일 신공법을 현지업체와 공동으로 개발해 시공에 적용함으로써 상당한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이 공법은 신기술로 지정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건축 설계에 심혈을 기울였다.

“상하이는 참 역동적이다. 그러나 건물만 이야기하자면, 시골 처녀가 봄바람이 나서 도시로 나들이를 가고 있는 것 같다.”

포스플라자를 설계한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페이(I.M. Pei)의 말이다. 상하이의 건물이 겉으로 봤을 때는 아름다운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세련되지도 못하고 기능성도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페이의 설계에 따라 포스코건설은 미적인 요소와 함께 기능성을 강조했다. 이중바닥을 설치하고, 기둥 없는 사무공간을 구현했다. 또 중국에서는 최초로 스테인리스 마감재를 활용해 미려한 건물 외관을 완성했다.

포스플라자는 건설 과정에서 품질과 안전관련 수상실적도 12건이나 올렸다. 1997년 상반기 우수현장으로 선정됐으며, 1998년 상하이 건설위원회로부터도 우수현장으로 선정됐는데, 이는 외국기업으로서는 최초의 영광이었다.

중국 상해 포스플라자 전경

중국 상해 포스플라자 전경

1999년 9월 준공과 함께 마침내 지하 4층, 지상 34층 규모의 포스플라자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2000년 5월 포스플라자는 푸동개발 10주년을 맞아 21세기 사무환경에 걸맞는 공간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아 상하이시로부터 건축 금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초기 운영 과정에서는 임대가 잘 안 돼 고민도 많았다.

“포스플라자 완공 직전인 1999년 8월에 상하이로 발령받았다. 포스플라자는 ‘코리아 센터’라는 개념에서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기업을 상대로 임대사업을 하겠다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준공 때까지 입주율이 저조했다. 준공 2개월이 지나도 계약율이 8%에 불과했다.” (박래권 전 상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스플라자 법인은 독특한 전략을 펼쳤다. 기상천외한 입주조건을 내걸었다. 글로벌 500대 기업일 것, IT나 BT 업종일 것, 서양 회사일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면 특별 우대를 하고, 조건 충족에 따라 조금씩 차등을 둔다는 단서도 달았다.

그러자 상하이 부동산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부동산업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포스플라자는 품질에 자신이 있었다. 10년, 15년 앞을 내다보고 설계했으며, 주차장도 법정 규모가 345대인데 790대가 들어가도록 지었다. 사무실 공간도 매우 실용적이어서 같은 분양 평수라도 다른 건물보다 실 평수가 훨씬 더 나왔다. 이런 내용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등 포스플라자는 최고급 전략을 펼쳐나갔다.

효과는 마케팅 5개월만에 나타났다. 미국 컴퓨터의 대명사 컴팩이 들어왔다. 컴팩을 시작으로 GM과 독일상공회의소 등이 속속 입주했다. 뒤이어 코닥과 인텔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텔은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입주하지는 않았지만,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인텔이 OK할 정도로 IT환경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입주가 러시를 이뤘고, 2001년 말 마침내 완전 입주를 달성할 수 있었다.

1994년 말 출범 이후 3년간의 성적을 놓고 볼 때 신생기업 포스코건설은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 중국과 베트남을 시작으로 해외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으며, 그 영역은 아시아를 넘어 북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이르렀다. 국내사업에서도 최고 경쟁력을 확보한 제철 플랜트를 기반으로 건설업계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업계 순위 10위 이내에 진입하며 향후 폭풍 성장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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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1. “기술력으로 IMF 파고를 넘어라!”

# 축배를 들 찰라 불청객이 찾아오다

한보철강의 부도와 기아자동차의 경영위기 등 1997년은 출발부터가 다소 불안정했지만, 그렇다고 IMF 불청객이 찾아오리라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브레이크 없는 페달을 밟으며 대한민국은 경제성장이 영원하리라고 믿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마법에 푹 빠져 안개 자욱한 한치 앞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했다.

건설판에 뛰어든 지 3년차를 맞은 포스코건설 입장에서 1997년은 나름대로 선전한 한 해였다. 수주액이 전년도에 비해 다소 줄긴 했지만, 위축된 건설경기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시공능력 10위권에 진입하면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출범 3년 만에 성장기반을 확보하고 12월 1일 창립 3주년을 맞아 축배를 들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축제는 없었다. 불청객의 방문으로 냉혹한 IMF 외환위기 상황을 맞았다.

창립기념식 열흘 전인 11월 21일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막기 위해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했으며, 마침내 12월 3일 자금지원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이 사태를 맞아 온 국민이 절망했다. IMF의 요구조건 수행에 급급한 정부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한일합병과 같은 치욕을 느꼈다.

IMF 관리체제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금리와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는 바닥을 기었다. 책상을 빼는 것이 최선이라는 씁쓸한 구조조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M&A와 빅딜 등 기업들의 생사에 변화가 많았으며, 금융기관들도 구조조정으로 힘든 시절을 보냈다.

IMF 위기극복을 위한 대한민국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나라의 빚을 갚겠다고 온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이 같은 현상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아나바다 운동’이 펼쳐졌으며, 정부와 기업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IMF 위기극복에 온 역량을 쏟았다.

2001년 8월 23일, 마침내 모든 구제금융 빚을 상환하고 대한민국은 IMF 관리체제에서 졸업했다. IMF 위기극복과 함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금리와 환율은 안정을 찾았으며, 주가도 예전 수준으로 돌아왔다. 오히려 내실은 더욱 탄탄해졌다. IMF 위기 2년 만에 고성장, 저물가, 경상수지 흑자를 달성했으며, 기업들의 경쟁력이 크게 향상되면서 일자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IMF 위기를 극복하기까지 기업들은 부침이 많았다. 극동건설, 우성과 건영 같은 건설사들을 비롯해 많은 기업들이 청산과 매각 절차를 밟았다. 대우그룹은 공중 분해됐으며, 현대그룹은 계열 분리가 가속화됐다. 이 과정에서 건설업계 1·2위 기업이던 현대건설과 대우건설이 법정관리의 운명을 맞기도 했다.공기업들의 민영화도 급물살을 탔다. 그 과정에서 2000년 9월 포스코가 민영화됐다.

 

# 포스코 투자 중단으로 존폐 위기에 몰리다

IMF 위기를 맞아 믿고 의지했던 제철 플랜트 발주가 급감하면서 포스코건설은 크게 흔들렸다. 1997년 1조 8000억 원 규모의 수주액이 IMF 위기를 맞아 1998년에 4000억 원대로 뚝 떨어졌다. 제철 플랜트에 집중된 전략이 결국 족쇄로 작용하고 만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출범 직후부터 줄곧 이 문제를 우려하고 있었다. 포스코와 제철 플랜트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사업 포트폴리오 구성상 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건축과 토목 분야 사업 확대를 지속적으로 검토했지만, 시도가 쉽지 않았다. 경쟁사들의 견제와 포스코의 만류로 대외사업을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국가적 위기 사태를 맞아 포스코는 신규 투자를 연기하고 기존의 투자사업도 중단하기 시작했다.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5767억 원 규모의 광양 2미니밀 중단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포스코란 샘물의 고갈은 포스코건설을 기아로 내몰았다.

실적이 적어 사업추진 자체가 쉽지 않았던 토목과 건축 분야는 IMF 위기에도 기본을 유지했다. 그래 봤자 1000억 원 미만의 초라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건축이었다. 실적 부족으로 경쟁입찰 참여가 쉽지 않았던 포스코건설은 자체 개발사업 추진으로 건축 분야를 키워나갔다. 그러나 IMF 위기를 맞아 포스코처럼 투자를 축소하거나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손실이 발생했다.

거양개발 시절 운영하던 아스트론 공장

거양개발 시절 운영하던 아스트론 공장

포스코건설 역사에서 구조조정은 IMF 위기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1996년 포스코 차원에서 경영진단과 함께 구조조정이 실시됐는데, 이때 회사 출범 이전 거양개발에서 하던 철구공장과 아스트론공장을 매각했다. 인력도 260명이나 내보냈다.

IMF 위기를 맞아서는 희망퇴직의 형식으로 700여명을 감축했다. 사업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건축 분야가 벌여 논 자체 개발사업들을 정리했다. 대규모 복합단지 건립을 위한 분당 프로젝트 부지 매입계약을 해지했고, 하와이 콘도사업도 중단했다. 또 건설 중이던 가락동 IT벤처타운과 유성콘도 프로젝트 공사도 중단했다.

이 풍전등화의 시기에 박득표 회장이 사령탑을 맡았다. 1998년 6월부터 거센 파고에 흔들리는 함선의 키를 잡게 된 그는 기술경쟁력 확보를 강조했다. 감래(甘來)를 위해 어떻게든 견뎌야 하는 이 시기를 기술력 확보의 기회로 활용했다. 기술력 확보와 함께 그는 다음과 같이 과

공사가 중단되었던 가락동 프로젝트

공사가 중단되었던 가락동 프로젝트

감하게 결단했다.

“취임하기 바쁘게 경영현황 전반을 돌아보니, 한마디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절체절명의 아찔한 위기에 내몰려 있었다. 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회사의 존폐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1500여 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생계가 걸린 중대한 갈림길이었다. 포스코에서 나오는 제철플랜트만 할 것이냐, 제철플랜트와 정부발주공사, 주택사업 등을 모두 하는 명실상부한 종합건설업체로 나아갈 것이냐. 양자택일이 놓여 있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박득표 전 회장)

 

 

 

 

 

 

#종합기술계획 확정, 기술력으로 중무장하다

중장기 기술 마스터플랜 성격인 종합기술계획은 포스코건설만의 독특한 R&D활동이다. 이 활동은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출발했다. 포스코건설은 신생기업이지만 신생기업답지 않은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포항제철소 1기 설비의 착공 시점을 따진다면 1990년대에 이미 제철 플랜트 30년의 기술적 연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포스코건설만의 경쟁력이었다.

반면에 회사 출범 당시 국내 엔지니어링 분야는 용어 정의나 업무영역에 대한 개념 정립마저 애매모호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발전이나 석유화학 플랜트에 비해 제철 플랜트 분야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포스코건설은 이를 체계화하고 정리할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제철소 건설과 조업을 통해 축적된 기술들이 아직 다듬어지고 포장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현장에서 엔지니어들의 머릿속에서 빛을 발하면서 숨쉬고 있었다.

종합기술계획은 제철소 건설 경험기술을 바탕으로 기술전략과 달성목표를 설정하는 작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종합기술계획을 통해 주력사업을 선정하고 이를 중점 육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POSRI와 합동으로 ‘E&C 기술력진단’을 실시해 66건의 확보대상 기술을 발굴하고 전사기술 전략과제로 등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7년 10월 처음으로 종합기술계획을 수립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더 가져야 하며,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종합기술계획의 화두는 박득표 회장의 경영시기를 맞아 더욱 구체화됐다. 그는 IMF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경쟁력 강화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이며, 포스코건설의 경쟁력은 기술력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박득표 회장은 취임 직후 전 사업본부별로 본부장과 팀장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일일이 추진계획을 직접 보고 받고 방향을 설정하는 등 종합기술계획에 한층 더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최고경영자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R&D 요원들은 회사의 보유기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며, 또 확보해야 할 기술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찾아 정량화된 기술발전 목표를 설정했다. 그 결과물이 종합기술계획 롤링플랜과 보유기술집 94권, 그리고 보유기술의 수준과 발전계획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기술 레이아웃’이었다.

“1999년 11월에 발간된 ‘기술 레이아웃’은 R&D 요원들의 수 많은 토론과 아이디어의 결정체이며, 국내 최초의 ‘기술 로드맵’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성과물을 보고 받은 박득표 회장은 ‘즉시 포스코 최고경영진과 주요 부서에 성과물과 함께 설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를 보고 받은 포스코는 우리의 기술성과를 크게 격려했다.” (김현배 전 전무)

포스코건설은 이처럼 IMF 위기 때 R&D에 집중 투자하며 종합기술계획을 확정하는 등 기술력으로 중무장하고 내일을 준비했다. 이후 종합기술계획은 매년 롤링플랜을 거쳐 현재까지 포스코건설 보유기술의 기초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현장 엔지니어들의 머리에서 정리돼 정제된 종합기술계획은 지금까지도 제철 플랜트 분야의 바이블이 되고 있다.

 

#파이넥스, 철강 제조설비의 혁신을 불러오다

종합기술계획 수립을 통해 기술력 확보에 나선 포스코건설은 제철 플랜트 분야에서 고로, 노외정련, 연주, 표면처리, 파이넥스 분야를 5대 핵심사업으로 선정하고 기술개발에 나섰다. 그 중에서 파이넥스, 시험연주기 설비, 스트립 캐스팅 상용화 기술을 비롯해 표면처리 분야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했다.

파이넥스 공정개발은 제철소 내 환경오염 제거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1980년대 이후 환경운동이 본격화되고 전 세계에서 환경규제가 엄격해지면서 이 문제는 포스코를 비롯해 모든 선진 철강회사들의 고민거리였다. 특히 제선 공정에서는 철광석을 찌고(소결), 석탄을 굽는(코크스) 과정에서 환경오염이 발생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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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1.01 코렉스 공장 착공

코렉스 공장 전경

코렉스 공장 전경

파이넥스가 개발되기 전포스코는 기존 고로를 대체할 방안으로 용융환원 제철법을 선택하고 신제선 프로세스인 코렉스 도입을 추진했다. 코렉스는 소결과 코크스 공정을 생략할 수 있어 친환경적이었으며, 아울러 2개의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어 경제적이었다.

포스코는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알피네와 설비도입 계약을 체결하고 1993년 11월부터 설비 건설에 들어갔다. 코렉스 공장 건설은 포스코건설이 맡아 1995년 11월 차세대 혁신 제철기술로 불리던 용융환원 제철법을 적용한 60만톤급 신제선 공장을 성공적으로 준공했다.

그러나 코렉스 기법은 어딘가 아쉬움이 있었다. 고로공법의 소

코렉스 공장 공사 현장

코렉스 공장 공사 현장

결과 코크스 공정은 생략할 수 있었지만, 고로와 마찬가지로 값비싼 원료인 덩어리 상태의 철광석과 석탄을 사용했다. 또 공정 중에 발생하는 가루형태의 석탄을 처리해야 하는 단점도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스코와 푀스트알피네가 손을 잡았다. 코렉스와 마찬가지로 소결과 코크스를 생략하면서도 비교적 가격이 싼 가루형태의 철광석과 석탄을 사용할 수 있는 파이넥스 공정은 가루형태의 원료를 가공 없이 직접 사용해 쇳물을 생산함으로써 설비투자와 오염물질 배출을 대폭 줄일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친환경적 용융환원 제철법이었다.

우선 RIST 주도로 하루 15톤 생산 능력의 실험로 개발에 들어갔다. 실험로 개발을 통해 기술적 타당성과 경제성을 검증한 포스코는 이어서 하루 150톤 생산 규모의 파일럿 플랜트 개발에 착수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푀스트알피네가 기본설계를 담당하고, 포스코건설은 상세설계와 설비조달, 그리고 설치공사를 수행했다.

1998년 2월 착공에 들어간 이 프로젝트는 마지막 순간까지 설계변경이 잦았다. 따라서 공기 지연을 방지하고 효율적인 공정관리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포스코건설은 패스트 트랙 기법과 P3(공정관리시스템)를 이용한 CPM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건설 공기를 10일이나 단축했다. 또 기본설계 검토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내화물의 재질 변경 등을 통한 원가절감과 함께 타워 구조물 등 설계 오류를 사전에 제거함으로써 포스코와 푀스트알피네로부터 기술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파이넥스 파일럿 플랜트

파이넥스 파일럿 플랜트

1999년 8월 준공된 파이넥스 파일럿 플랜트는 이후 1년간의 시험조업을 통해 상업화 개발 가능성 검증에 성공했다. 포스코는 파일럿 플랜트의 성공에 힘입어 후속사업으로 준상업화 규모인 연산 60만톤의 데모 플랜트 개발에 들어갔다. 이 프로젝트 역시 포스코와 푀스트알피네가 손을 잡았으며, 더욱이 파일럿 플랜트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은 포스코건설도 일정부분 투자금을 분담하고 개발에 참여했다.

개발 과정에서는 포스코건설의 역할이 파일럿 플랜트 때보다 좀더 넓어졌다. 푀스트알피네가 기본설계를 담당하고, 포스코건설이 상세설계와 설비조달, 그리고 설치공사를 수행하는 등 기본 패턴은 같았다. 그러나 데모 플랜트를 구성하는 설비 중의 하나인 성형탄 제조설비에 대해서는 포스코건설이 기본설계를 포함해 개발과 건설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2001년 1월 착공에 들어간 데모 플랜트 공사는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수행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으며, 코렉스 노체 보수공사의 셧다운 작업을 75일간이나 수행하느라 이중고를 겪기도 했다. 더구나 2002년 12월부터 약 4개월간 포항지역에 30년 만의 혹한이 찾아온 데다 계속되는 야간작업으로 프로젝트 수행자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이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스코건설은 작업별 특별 안전관리 항목을 선정·운영함으로써 2002년 11월 무재해 100만 시간을 달성했다. 그리고 2003년 6월 마침내 성공적으로 파이넥스 데모 플랜트를 준공했다.

 

# DSR 슬래브 캐스터, 차세대 연주시장 주도하다

“주조 속도 4.1, 4.2, 4.3, 4.4, 4.5m/min!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각 공정 담당자들의 긴장된 얼굴은 서서히 환하게 변했고, 끝내는 환호하며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들의 눈가엔 지난 5년이라는 각고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2002년 12월 3일, 한국 철강사의 새 장을 연 역사적인 이 날은 우리나라가 순수 독자기술로 고속 연주기 개발에 성공한 날이었다.” (정인화 전 이사보, 당시 시험연주기PJT PM)

연속주조 설비는 제철 공정의 핵심설비 가운데 하나이며, 제강 공정에서 불순물을 제거한 용강을 일정한 형태로 굳혀 슬래브로 만들어내는 설비이다.

이 설비기술은 세계적으로 강재 생산량과 원료이용 효율 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술이지만, 우리나라는 설계 기술력이 취약해 선진 엔지니어링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기업들은 연주공정의 경쟁력 우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욕심에 기술이전을 꺼렸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조강 생산량 세계 6위, 조강 생산량 중 연속주조 설비로 제조되는 비율이 98.7%에 달하는 등 조업기술이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지만, 연속주조 설비기술의 취약은 아킬레스건이었다.

결국 1998년 정부는 연속주조 설비의 설계기술 확보를 국책과제로 삼고 포스코, 포스콘, 로템 등 총 11개 기업과 연구소, 대학 등으로 대단위 산학연 협력체제를 구성했다. 포스코건설도 이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포스코건설은 한국 고유 모델로 개발된 시험연주기 설비인 DSR 슬래브 캐스터의 꾸준한 시험조업을 통해 연주기의 내구성과 정비성(整備性)을 파악하고, 주조시험을 통해 설비 성능 및 주편 시험평가를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설비의 생산성이나 품질 면에서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우리나라는 슬래브 연속주조 설비의 엔지니어링 기술을 확보했으며, 이는 해외 기술종속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국내 제철소 연속주조 설비의 턴키 베이스 자력 엔지니어링 및 건설도 가능해졌으며,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수주해 국내업체의 고용창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반도 마련했다.

2004.06.04 포스트립 데모 플랜트 착공식

2004.06.04 포스트립 데모 플랜트 착공식

파이넥스, 시험연주기 설비와 마찬가지로 스트립 캐스팅 상용화 기술 확보를 위한 노력도 이 시기 중요한 성과 중 하나였다. 스트립 캐스팅 상용화 기술은 연주설비와 열연설비를 한 공정에 통합할 수 있는 차세대 기술로 각광받았다. 주조기에서 생산된 슬래브를 연속적으로 열간 압연기에서 압연해 열연 코일을 바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로, 꿈의 주조법이라고 불릴 만큼 혁신적인 공정이었다.

포스코는 스트립 캐스팅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소규모 파일럿을 이용해 40만 톤급 상업화 규모의 데모 플랜트 설비 건설을 결정하고, 그 설비명을 ‘포스트립(poStrip)’으로 정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투자예산이 부족해 사업 참여를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철 플랜트 E&C기업으로서 스트립 캐스팅 설비의 신기술 축적이 필요하다고 판단, 적자 여부를 떠나 프로젝트 수행에 참여했다.

포스트립 데모 플랜트는 2004년 6월 착공해 2006년 6월 준공했다. 이후 포스코와 포스코건설은 상업화를 위한 조업 테스트를 시행하면서 생산제품의 상용화를 실현해나갔다

 

# 마이다스아이티, 벤처신화 이룩하다

제철 플랜트 외에도 포스코건설은 환경사업, 에너지사업, SOC사업 등의 요소기술 개발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IMF 위기를 극복해나가던 새천년 초기에는 사회적으로 벤처 열풍이 일었는데, 이를 계기로 각 기업들은 사내 벤처제도를 두고 기술개발을 독려했다. 인터넷 통합검색 대표주자 네이버도 그렇게 탄생했다.

포스코건설도 이 시기 사내 벤처제도를 운영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토목건축 분야에서는 구조설계 및 해석 프로그램인 마이다스의 상용화에 성공했고, 환경 분야에서는 슬러지 고화제를 개발하던 ‘3R’이라는 사내 벤처가 있었다. 이 중 마이다스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벤처신화를 일궈냈다.

“마이다스 신화는 1992년 4월 대한건축학회 발표회장에서 마이다스를 이용한 철골조 초고층 아파트 건축설계에 관한 연구가 소개되면서 성공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저명한 구조 엔지니어가 당시 정명식 포스코 회장에게 ‘마이다스 프로그램이 좋으니 일반인들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이형우 마이다스아이티 사장)

마이다스 개발은 핵심기술에 대한 갈망에서 출발했다. PEC 시절 외국 의존에서 벗어나 핵심기술의 자체 개발을 갈망했던 이형우 사장 같은 구조 분야 엔지니어들이 뭉쳐 프로그램 개발에 나선 것이 발단이었다.

프로그램 개발은 PEC를 지나 포스코건설로 이어져 마침내 1996년 11월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 기술은 건설 분야의 국가 기술수준을 대변하는 척도로 평가될 정도로 중요한 기술인 만큼, 선진 몇몇 국가만이 상용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이다스는 건설 분야 설계기술 자립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핵심기술이었다.

마이다스는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유명한 포스코센터의 실무 프로젝트에 적용된 결과 신뢰성과 기능의 우수성이 확인됐으며, 특히 강구조 분야에 적용성이 뛰어나다는 전문가 평가를 받았다. 포스코건설은 1996년 11월 상용화를 기점으로 우수 건설기술 인력양성에 기여하고자 교육부와 공동으로 국내 150여개 대학 토목건축학과에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기증했으며, 마이다스가 다수의 대학에서 전산구조공학의 교과목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마이다스 조직은 마이다스센터라는 사내 벤처로 활동하다가 2000년 9월 포스마이다스로 독립했으며, 2001년 2월 지금의 상호인 마이다스아이티로 거듭났다. 이후 마이다스아이티는 미국, 일본, 중국, 인도, 영국 등지의 현지법인과 35개국의 전 세계 네트워크를 통해 110여개 국가에 공학 기술용 소프트웨어를 수출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건축, 토목, 지반 등의 분야에서 시장 점유율 세계 1위라는 선도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2000.9.1 포스마이다스 창립식

2000.9.1 포스마이다스 창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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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4. 제철 플랜트, 앞선 기술력으로 해외에서 선전하다

# 50% 가이드라인 폐지, 더 이상 믿을 회사가 없다!

제철 분야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아무리 IMF 위기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포스코가 투자를 축소했다고는 하지만, 실적이 무너져도 너무 무너졌다. 주택사업의 반전 드라마가 없었더라면 회사 경영위기의 역적이란 소리를 듣고도 남았다.

포스코의 빙하기는 좀체 풀리지 않았다. 2004년 들어서야 겨우 IMF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는데, 그때까지 장장 6년 동안 실적이 낮은 포복 수준이었다. 회사에서 기여도도 건축 분야에 밀려 20%대로 떨어져 맏형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집트,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등에서의 프로젝트 실패로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포스코건설이 이 정도라면 다른 건설사들의 제철 사업은 어땠을까? 그렇잖아도 포스코건설의 장벽이 만리장성처럼 느껴지던 시절, IMF 위기와 포스코 투자축소 사태를 맞아서는 아예 사업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리 퇴각하고 말았다. 그 사이 포스코건설은 기술을 연마하면서 IMF 모진 세월을 고스란히 견뎌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포스코로서는 더 이상 믿을 만한 회사가 없었다. 어려울 때 묵묵히 옆을 지켜주는 파트너, 오직 포스코건설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다른 건설사들의 생떼에 못 이겨 포스코건설이 50% 이상 프로젝트를 수주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두었던 가이드라인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철강 침체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꾸준히 기술력을 다진 결과 해외에서 소중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고로와 표면처리 분야에서 기술 수출의 자랑스런 성과를 달성했다. 고로의 경우는 광양 5고로 신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열사의 땅 이란에 고로를 포함해 제선설비 일체를 수출했다.

표면처리 분야에서는 CGL과 CCL이 많았다. 철강재는 공기나 습기를 만나면 쉽게 녹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아연이나 알루미늄 등으로 강판 표면을 도금하는 설비가 꼭 필요하다. 강판 표면에 아연을 녹여서 도금하면 CGL이 되고, 색깔을 입히면 컬러강판이라 불리는 CCL이 된다. 포스코건설은 1990년대 말 광양 4CGL 신설 과정에서 주요 설비의 국산화에 성공했고, 이 같은 기술과 노하우를 자력 엔지니어링 도구로 체계화해서 해외시장을 적극 공략했다. 주요 무대는 중국과 대만이었다.

국내에서도 철강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유독 CGL 사업만은 경기가 좋았다. 광양제철소에서만 4CGL에 이어 5CGL과 6CGL이 연속으로 쏟아졌으며, 포스코강판에서도 CGL 합리화에 이어 2CGL 신설 프로젝트가 나왔다.

 

# 발전에너지 분야 성과, 남제주화력 3, 4호기 수주
2004.7.6 남제주화력발선소 착공식

2004.07.06 남제주화력발선소 착공식

에너지사업에서도 작지만 소중한 성과가 있었다. 2004년 4월 한국전력공사의 발전 자회사인 남부발전으로부터남제주화력발전소 3, 4호기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포스코건설이 에너지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회사 출범 직후였다. 포스코에서 많은 발전설비를 수행했던 경험을 살려 플랜트 사업을 에너지 분야로 확대하고자 하는 강한 의욕이 있었다. 1995년에는 전문 인력을 대거 영입해 에너지사업본부를 신설했고, 포스코 물량을 중심으로 대외사업 수주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러나 IMF 위기를 맞아 의욕이 많이 꺾였다. 1997년 에너지사업본부를 플랜트사업본부의 팀 조직으로 축소하고 포스코 물량에만 집중했다. 그 사이 포항과 광양에서 LNG복합화력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침체를 겪던 에너지사업에 재충전의 기회가 찾아온 건 철강경기의 해빙기가 시작된 2004년이었다. 당시 남제주화력 프로젝트에 발전소 건설 실적이 많았던 상위 건설사들이 모두 참여했다. 포스코건설도 강한 의욕을 가지고 현대중공업과 컨소시엄을 구성했으며, 역량을 집중한 결과 마침내 수주에 성공했다. 남제주화력 3, 4호기는 2004년 7월 착공, 2007년 3월 준공됐다.

“2002년 조직이 해체되면서 흩어졌던 인력들이 다시 모여 감회가 새로웠다. 건설 과정에서는 기후변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바람이 강하고 비가 잦은 데다 날씨마저 변화무쌍해 공사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마을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는 데만 3개월이 소요됐다. 결국 공기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돌관공사를 통해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김충경 전 이사보, 당시 현장소장)

 

# 이란에 고로 수출, “무조건 깎아주는 그런 회사 아니다!”

국내 제철 실적이 부진하고 IMF 위기 여파로 이집트와 남미에 벌여 논 해외사업마저 죽을 쑤는 민망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 멀리 이란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국내 제철 역사상 최초로 고로를 수출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고로 수출은 일관제철소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는 만큼 그 의미가 남달랐다. 포스코건설은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내용적의 증강 없이도 출선량을 10만 톤이나 늘린 포항 2고로 2차 개수의 성공적 완료 경험이 있었으며, 더욱이 설비계획부터 시공까지 전 과정을 자체 기술로 완벽히 수행한 광양 5고로 신설의 소중한 경험이 있었다. 이를 통해 고로 분야의 필수적 요소기술을 100여 건이나 보유할 수 있었다.

고로 수출의 진원지는 이란의 국영 철강기업 니스코였다. 니스코는 자회사 에스코의 에스파한 제철소 3고로 신설을 추진했으며, 이란어로 ‘균형’이란 뜻의 타바존을 프로젝트 명칭으로 정했다.

프로젝트 범위는 고로 1기, 소결 1기 및 부대설비의 설계, 설비 공급, 기술지도, 시운전 및 감리까지 수행하는 조건이었다. 입찰 과정에서는 신일본제철, 영국의 크베너 메탈, 독일의 만네스만 데마그 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입찰에 참여하기까지 많은 고뇌가 있었다. 예상 가격이 썩 좋지 않았다. 경쟁 출혈이 과열될 경우 최저가를 감수해야 하는데, IMF 위기 시기여서 결단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포스코건설은 최초 고로 수출이라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또 하나 미끼도 있었다. 이란 정부가 당시 700만 톤 규모의 생산능력에서 2010년까지 2500만 톤으로 추가 확장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1999.12.21 이란 TAVAZON 프로젝트 계약식

1999.12.21 이란 TAVAZON 프로젝트 계약식

결국 포스코건설은 최초 고로 수출에 의미를 두었으며, 이란에서의 향후 후속작을 기대하고 과감하게 결단했다. 당당히 입찰에 나서 경쟁자들을 제치고 타바존 프로젝트를 수주하는데 성공했다. 그 소식이 세기말 새천년을 코앞에 두고 빅뉴스로 타전됐다.

“포스코개발, 2억 3300만 달러에 고로 해외 첫 수출”(연합뉴스, 1999.12.21)

한편 최종 가격 확정에 얽힌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고로 및 부대설비를 공급하는 이란의 타바존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몇 차례 제안서를 내고, 금액을 디스카운트해서 우리 회사가 수행하기로 합의가 됐다. 최종 사인은 한국에서 박득표 회장과 하기로 약속했다. 이란의 차관이 서명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차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최종 금액에서 2% 정도 디스카운트한 후에 사인을 하기로 합의했다.”(이찬우 전 전무)

이 사실을 이찬우 전무는 한국으로 돌아와 박득표 회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막상 양측이 대면한 자리에서는 이란 차관이 당초 약속을 깨고 5.6%의 가격 인하를 요구했다. 계산을 해보니 1000만 달러 규모였다. 차관의 요구에 박득표 회장은 단번에 거절했다.

“깎아달라면 무조건 깎아주는 그런 회사 아니다. 그런 요구를 계속 한다면 여기서 이야기를 그만 끝내자.”

박득표 회장의 단호한 태도에 이란의 협상단은 당황했고, 그대로 1차 협상이 결렬됐다. 이후 그들은 포스코건설측 협상단에게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용인 즉, 이란에서 계약이 끝나고 나서 일본 경쟁업체에서 로비가 들어왔는데, 그들이 제시한 조건이 포스코건설과 계약한 것보다 1000만 달러 인하된 금액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초 약속한 2%선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체면이 안 선다는 내용이었다.

상대측의 사정을 들어보니 유연성을 가지고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박득표 회장은 실무선에서의 재협상을 지시했다. 밀고 당기는 재협상 결과 당초 2%에서 0.9%를 추가로 깎아주는 선에서 합의가 성사됐다. 후일담으로는 이란 협상단이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예전에 만난 한국의 어떤 기업은 협상 과정에서 깎아달라고 하면 요구대로 다 깎아주었다. 그런데 포스코건설은 다른 것 같다.”

 

# 중국과 대만에서 포스코정신의 저력을 보이다
2005.3.11 청도 STS준공식

2005.03.11 청도 STS준공식

고로 수출의 희소식과 함께 중국과 대만에서도 낭보가 날아들었다. 중국에서는 포스코를 배경으로 많은 냉연 플랜트를 수행했다. 랴오닝성 다롄 CGL(1995.11-1997.9), 장쑤성 장자강 CGL(1996.11-1998.5)과 STS 플랜트(1997.2-1999.1)를 시작으로 광둥성 순더(顺德)에서는 다기능 표면처리 설비인 MCL(2001.10~2003.2)을, 산둥성 칭다오(靑島)에서는 STS 프로젝트(2003.1~2004.12)를 수행했다.

비록 포스코를 쫓아 중국에 진출했지만, 포스코건설은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중국 철강기업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포스코건설이 주목한 분야는 냉연 표면처리 기술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이를 무기화해서 중국 철강시장을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 가시적인 성과가 2000년 9월 처음 나타났다. 유럽과 일본의 엔지니어링사 일색의 중국 철강시장에서 당당한 경쟁을 통해 자국 내 최대 가전업체로 유명한 하이얼사의 CCL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프로젝트의 범위는 주설비의 설계와 설비를 공급하는 EP 수행이었다.

하이얼 CCL(2000.10~2001.9)의 성공적 수행은 곧바로 입소문을 타고 중국 철강시장으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2002년 말에서 2003년 초까지 단 2달 만에 CCL 3기와 CGL 1기를 수주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세계적 엔지니어링사들과 경합을 통해 2002년 12월 한단강철 CCL 2기를 수주했으며, 이어서 2003년 1월 곤명강철 CGL과 CCL를 수주했다. 4기의 냉연 설비는 하이얼사와 마찬가지로 모두 EP 수행이었다.

2000.10.12 중국 청도 하이얼 CCL 계약

2000.10.12 중국 청도 하이얼 CCL 계약

2002.12.10 한단강철 칼라강판 설비공급 계약체결식

2002.12.10 한단강철 칼라강판 설비공급 계약체결식

2기의 한단강철 CCL(2003.4~2004.6), 각각 1기의 곤명강철 CGL과 CCL(2003.1~2004.8)은 착공과 준공을 비슷한 시기에 본 인연만큼이나 중국 내에서 포스코건설의 저력을 보여준 대표적 프로젝트였다.

한단강철의 경우 발주처와 신뢰를 쌓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프로젝트 초반 계약 2달 만에 설계도면을 제출하라는 등 무리한 일정을 요구해왔다. 심지어 도면을 검토하겠다는 구실로 20명이나 서울사무소로 몰려와 진을 치고 눌러

2003.2.2 프로스페리티사와 CGL 공급계약 체결

2003.02.02 프로스페리티사와 CGL 공급계약 체결

앉았다. 이들을 상대로 도면 수정 검토를 받느라 진땀을 흘렸으며, 주말이면 서울관광을 시켜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휴일도 없이 수발을 들어야 했다.

특히 2003년은 중국발 사스 공포가 한창일 때였다. 포스코건설 사내 통신망인 ‘모아광장’에서는 계약을 파기해서라도 그들을 회사로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연일 빗발쳤다. 그러나 프로젝트 요원들은 질병을 두려워할 여유조차 없이 호텔로 회의장소를 옮겨 발주처와의 교감을 형성해나갔다.

가장 큰 문제는 설비제작이었다. 85%가 현지 제작업체로 발주됐는데, 대부분의 제작사들이 납기일정을 지키지 않았다. 포스코건설이 제작한 설비는 이미 도착해 몇 개월째 비만 맞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설치가 완료되고 시운전 단계에 이르렀는데, 또 다시 발주처에서 무리한 일정을 요구해왔다.

“갑자기 공장장이 찾아와서는 보름 만에 제품을 생산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우리는 며칠 밤을 새고 13일 만에 첫 번째 시제품을 생산해냈다. 그러자 발주처가 크게 놀라며 우리의 운전기술과 설비의 우수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서용구 전 부장, 당시 한단강철PJT PM)

중국에서의 성공 스토리는 다시 입소문을 타고 대만으로 퍼져나갔다. 대만 역시 중국처럼 제철 플랜트는 일본과 유럽 엔지니어링사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런 관례를 깨고 2004년 2월 포스코건설은 대만 철강기업인 프로스페리티사와 CGL 설비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대만 제철 플랜트 진출은 이것이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미 입찰경쟁을 통해 일본과 유럽의 엔지니어링사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펼쳐 최종 낙찰자까지 선정돼 있었다. 그 상황에서 돌연 발주처가 포스코건설을 방문했으며, 상담 두 번 만에 전격적으로 수의계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선택 받은 자의 입장에서는 실적과 기술력을 믿고 맡겼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여러모로 따져볼 때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결국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의문점이 풀리기 시작했다. 당시 발주처 제철소에서는 3개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는데, 포스코건설 외에도 일본과 유럽 기업도 포함돼 있었다. 다시 말해 발주처는 각 나라 기업의 프로젝트 수행 능력을 쉽게 비교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발주처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고, 중국에서처럼 다시 한 번 포스코 우향우 정신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결과 발주처는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으며, 당시 CGL 프로젝트 수행(2004.2~2005.9) 때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2007년에 PGL 프로젝트(2007.9~2009.6)를, 2008년엔 CCL 프로젝트(2008.2~2009.6)를 다시 한 번 맡겼다.

“우리는 발주처가 3개 나라 기업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더욱 열심히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계약 직후 물류 개선, 조업 및 정비 효율성, 건설 공사비 절감 등을 모두 반영한 수정 레이아웃을 제안하자 발주처가 크게 감동했다. 엔지니어링, 설치, 시운전 등 각 단계에서 발주처가 직접 수행해야 하나 능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마치 그들의 직원처럼 일했고, 그 결과 적기에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있었다. 이것이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최종담 전 부장, 당시 냉연팀 근무)

 

# 중국 장자강에 STS 포스코왕국을 건설하다

중국 진출에서 최대의 성과는 포스코 현지법인이 발주한 장자강 STS 상공정 프로젝트 수행이었다. 그 범위가 전기로에서 제강, 연주, 열연, 소둔산세 공정까지 이르는 방대한 규모였다. 외국회사가 자국의 본토에서 쇳물을 뽑아 특수강을 생산하는 체제를 갖춘 것은 중국 역사상 포스코가 처음이었다. 포스코 역시 해외에서 상공정 구축이 최초였는데, 투자 금액이 10억 달러로 당시로서는 해외투자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포스코가 스테인리스스틸(STS) 사업을 처음 추진한 건 1980년대 말이었다. 강도가 뛰어나고 녹이 슬지 않는다는 특수강의 장점으로 점차 수요가 늘어나자 국산화에 나서 1990년대 초까지 42만 톤의 생산체제를 갖추었다. 그럼에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1990년대 중반 증설사업을 추진했는데, 이때 42만 톤 규모의 STS 증설사업을 포스코건설이 수행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소중한 경험을 축적했다. 최신 환경설비 기술을 축적했으며, 고순도 청정강을 생산할 수 있는 최신 정련로를 구비하고 극박재 형상제어 기술, 고광택 강판제어 기술 등의 신기술도 도입했다. 이런 소중한 경험과 기술축적을 바탕으로 중국에 진출해 장자강 STS 프로젝트, 칭다오 STS, 그리고 대망의 장자강 STS 상공정을 수주할 수 있었다.

“장자강 STS 상공정은 최초 정보 입수부터 수주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진행상황을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대응하면서 발주처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했기에 최대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발주처의 원가절감 요구를 반영하고 우리의 참여 범위를 최대화하기 위해 분할 발주를 제안했으며, 효율적인 사업관리를 위해 현지법인을 설립하기도 했다.”(최석용 전 상무)

포스코가 막대한 투자를 통해 중국에 STS 상공정 건설을 추진한 근본 배경은 원가절감에 있었다. 당시 포스코 현지법인은 2기의 STS 냉연 설비를 운영하면서 소재 전부를 한국에서 수입했다. 그러다 보니 운송비 부담이 만만치 않았으며, 특히 중국의 수입 소재에 부가하는 관세도 큰 부담이었다.

포스코건설은 포스코가 이런 속앓이 과정에서 상공정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직후부터 자청하고 자문 역할 수행에 나서 적정 설비사양 및 투자비 등을 검토해 자료를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경험과 기술수준을 감안할 때 전체 공정을 일괄 수행한다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했으며, 발주처의 원가절감 측면에서도 분할 발주가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무엇보다 포스코는 투자비 최소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포스코의 또 하나 걱정거리는 세금이었다. 2003년까지 STS 사업은 중국 정부의 권장 사업이어서 외국 설비에 대한 세금이 없었다. 이는 STS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STS 수요가 안정화되자 중국 정부는 곧바로 외국 설비에 대한 세금 부과를 계획했다.

결국 원가절감을 위해서는 중국에서 설비를 조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포스코건설은 이런 포스코의 심중을 정확히 읽어내고 가장 이상적인 방안으로 장자강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국내에서 대부분의 설비를 자신들이 조달했듯이 중국에서도 그런 역할을 전담하겠다는 의도였다.

마침내 포스코건설의 제안대로 장자강 STS 상공정 프로젝트가 제강 및 연주설비, 압연설비, 소둔산세 등 3개의 패키지로 분리돼 발주됐다. 이 프로젝트 입찰에는 유럽과 일본 등 쟁쟁한 엔지니어링사들이 참여했으며, 포스코건설은 3개 패키지 모두 참여했다.

입찰에서는 제강 및 연주설비에서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알피네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수주에 성공했으며, 압연설비에서는 일본의 미쓰비시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수주에 성공했다. 특히 소둔산세 프로젝트는 푀스트알피네와 경쟁해 단독 수주에 성공했다. 그 결과 앞서 두 프로젝트의 일부 지분참여와 소둔산세의 단독 추진으로 전체 발주 금액의 56%를 확보할 수 있었다.

2002.12.02 중국 장가항 STS안전기원제 및 기전착공식

2002.12.02 중국 장가항 STS안전기원제 및 기전착공식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단독으로 수행했던 소둔산세(燒鈍酸洗)의 성공적 완료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이 공정은 소둔과 산세로 구분되는데, 소둔은 열처리를 의미하고, 산세는 산으로 세척하는 과정이다. 냉연공장에서 품질을 높이는 주요 공정이라 할 수 있다. 포스코건설은 자력 엔지니어링으로 설계에서 설치, 감리, 시운전까지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완료(2004.12~2006.10)함으로써 그 기술력을 널리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중국 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해 첫 공정인 토목공사가 계속 늦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코건설은 설비의 적기 공급과 품질이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초기부터 3명의 전문가를 중국 제작사에 파견해 현지 기술지도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제작 기간도 단축하고 품질도 높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착공이 늦어지자 전체 공기 만회를 위해 설비제작과 시운전 과정을 3개월이나 단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해외 현지 제작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프로젝트 요원들은 제작사로 달려가 도면을 검토하고 직접 수정까지 하면서 휴일 밤낮을 잊은 채 온 열정을 쏟았다. 그 결과 예상 공기보다 4개월 보름이나 앞당길 수 있었다. 특히 소둔산세뿐 아니라 전체 프로젝트 관리를 수행한 현지법인의 숨은 노력이 돋보였다.

“우리는 모든 설비 공급을 중국 내 350여개에 달하는 설계회사들의 가격을 일일이 조사한 끝에 최저입찰로 수주해 조달했다. 이에 포스코로부터 대단한 성과라는 칭찬도 받았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각 설비별로 PM요원을 배치하고 밀착 관리했다. 아울러 30여명의 현지 직원들을 현장에 파견해 프로젝트 수행을 지원했다.”(안해성 전 전무)

 

<생각하는 페이지>
-출범 초기 플랜트 해외사업과 건축 자체 개발사업의 교훈

흔히 10년 단위로 정리되는 우리나라 기업사의 특징은 성과 위주의 서술이 대부분이었다. 기록 보존의 의미도 분명히 표방했지만, 그 보다는 기념비적 축제의 의미나 홍보에 더 치중하다 보니 그런 결과들이 나타났다.

포스코건설 20년사는 이 같은 경향을 따르지 않고, 실패에 대한 기록도 서술했다. 그렇다고 누구누구의 잘잘못을 가리자는 것은 아니었다. 실패나 실수를 분명히 밝혀 반성과 함께 교훈을 얻고자 했다. 특히 교훈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패사례를 더 큰 회사로 성장하기 위한 소중한 자료로 기록하자는 의도가 있었다.

실패나 아쉬운 이야기는 본문에도 많이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자칫 소중한 성과들이 실패사례의 기세에 묻힐 우려가 있어 그렇게 많이 담아내지는 못했다. 실패사례라도 정확한 반성과 함께 극복사례가 나타나면 적극적으로 서술했으나, 그렇지 못한 내용들은 기술을 자제했다. 대신 ‘생각하는 페이지’라는 코너를 만들어 시기마다 주요 실패사례를 전반적인 시각에서 정리했다.

1994년 12월 출범 이후 3년간인 사업기반 구축기(1995-1997)에는 이렇다 할 실패사례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실적 부족과 경쟁사들의 견제로 건축과 토목 분야가 시련을 겪었다는 것 정도가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러나 위기극복과 성장기(1998-2004)에는 그 동안 잠재돼 있던 과오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플랜트 부문의 해외사업과 건축 부문의 자체 개발사업에서 뼈아픈 실패들이 있었다. 플랜트부터 소개하자면, 이집트 아르코 프로젝트와 베네수엘라 포스벤 프로젝트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출범 초기 대단한 성과로 선전했던 아르코 프로젝트는 공기지연과 설비 품질문제가 분쟁의 씨앗이었다. 공기지연이야 현지 시공업체의 능력부족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쳐도, 설비품질 저하에 대한 책임은 피해갈 수가 없었다.

발주처 아르코는 판매부진으로 경영이 악화되자 바짝 독이 올라 포스코건설을 압박했다. 설비품질과 불완전한 조업을 문제 삼으며 준공 승인(FAT)과 미수금 지불을 거부했다. 더구나 37개나 되는 설비 추가 공급과 2년간 소모품 무상 공급을 요구했다.

포스코건설이 이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계약금 반환 청구소송으로 대응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집행금지 신청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이 사건은 파리에 있는 ICC 국제상사중재원으로 넘어가 2년을 허송세월해야만 했다.

이 소모적인 분쟁은 2003년 5월 양측이 조건 없이 아르코 프로젝트 종료를 선언하면서 마침내 막이 내려졌다. 포스코건설로서는 금전과 시간, 특히 정신적 상처까지 많은 손실을 보았던 프로젝트였다.

아르코 프로젝트의 실패 요인은 저가 수주, 사업타당성 분석능력 부족, 리스크 관리능력 부족, 발주처 소통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프로젝트 수행능력 부족이었다. 실력에 비해 너무 큰 욕심을 부려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포스벤 프로젝트는 포스코와 포스콘(2010년 1월 포스코ICT로 합병)까지 관련된 패밀리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의 지분까지 합치면 포스코패밀리는 60%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였다.

이 프로젝트 역시 공기지연과 조업품질이 문제였다. 시공과 시운전 과정에서 20개월이나 지연됐다. 시공 과정에서는 현지 노동생산성도 문제였지만, 강성 노조로 파업이 잦았다. 멕시코 파트너사의 능력부족으로 시운전 과정에서도 7개월이나 공기가 지연됐다. 공기지연과 조업품질 저하로 판매까지 부진하자 발주처는 준공 승인을 연기했으며, 그 결과 포스코건설은 차입금 상환 부담을 떠안았다.

더 큰 문제는 포스코의 철수였다. 노조 파업으로 공장 가동중단과 법정 공방까지 이어지자 포스코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선언했다. 이에 포스코건설 역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포스벤 프로젝트도 아르코와 마찬가지로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사업관리 능력부족이었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강성 노조 파업과 같은 현지 국가 리스크에 대한 학습이 부족했다.

분당 프로젝트는 사업계획에 앞서 부지부터 매입한 것이 화근이었다. 5년 상환 조건으로 토지공사에 계약금 280억 원을 지불한 이후에도 사업계획이 갈팡질팡했다. 스키장 유치를 구상하다 실패하고, 월드컵 축구경기장 구상도 검토에만 그쳤다.

마지막으로 겨우 내놓은 구상이 종합 레저쇼핑단지였으나, 이미 주변으로 삼성플라자와 청구백화점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로 인해 사업성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IMF 위기까지 닥쳤다. 결국 토지공사의 중도금 상환 압박에 시달리다가 사업포기를 결정하고 말았다.

분당 프로젝트의 실패 요인은 사업성 분석능력의 부족이었다. 일을 거꾸로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철저한 사전준비와 사업계획 하에 개발사업을 추진해야 하는데, 무턱대고 땅부터 사놓고 덤비는 신생기업의 경험부족이 화를 자초했다.

유성 프로젝트도 사전준비가 부족했다. 포스코건설은 과학관련 정부청사의 대전 이전과 도심형 레저 수요 확대를 단순하게 연결시켰으며, 포스코 직원용 콘도 유치에 크게 의지했다. 그러나 건물과 토지의 소유주인 지주기업과의 협력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으며, 각종 의혹으로 4차례나 감사를 받기도 했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IMF 위기를 맞아 포스코 콘도 유치가 어려운 상황에서 유성 프로젝트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사업 중단으로 인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이후 지주기업측과의 법정공방으로 손실 규모가 더 늘어났다. 마지막 철골조공사에서 중단됐던 유성 프로젝트는 끝내 포스코건설이 사업권을 모두 떠안고 매각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유성 프로젝트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충분한 사전검토도 없이 포스코만 믿고 사업을 밀어붙였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당시 현지 부동산업자들에 대한 시장조사만 철저히 했더라도 콘도사업이라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부 반성이 있었다.

이 네 프로젝트는 경험과 사업수행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심도 깊은 현지 조사와 철저한 사전준비가 중요하다는 깨달음도 소중한 교훈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소중한 경험을 얻기까지 치러야 했던 수업료 치고는 과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한편 다잡은 물고기인 의정부경전철을 놓친 사건은 이 시기 토목 분야의 대표적 실패사례라 할 수 있었다. G사의 적자운영 결과만을 놓고 내부 일각에서는 놓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지만, 과정을 놓고 볼 때는 분명한 실패사례이자 창피한 사건이었다.

이미 끝난 사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간단하게 펙트를 언급하자면 이랬다. 포스코건설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고 나서 G사측에서 사소한 문서 하나를 위조로 몰아붙였다. 이를 포스코건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적당히 대응했고, G사는 죽기 살기로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결과는 위조란 판결을 받으며 G사에게 의정부경전철을 빼앗겼다. 안일한 생각과 치밀하지 못한 대응에 대한 뼈를 깎는 반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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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5. 경쟁자 없는 제철 플랜트, “기술력 진보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 파이넥스 2공장 준공, 세계 최초 상용화 성공

포스코건설 출범의 기반이었던 제철 플랜트는 전체 사업부서의 맏형으로서 꾸준히 회사 성장에 기여해왔다. 2008년까지 건축 분야와 함께 회사 성장을 리딩해왔으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2009년에 일시적으로 실적이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제철 플랜트는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해 곧바로 부진을 훌훌 털고 일어섰다.

무엇보다 제철 플랜트는 더 이상 국내 경쟁자가 없는 고독한 시절을 맞았다. 그렇다고 기술력 연마를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세계를 상대로 기술력을 다지는 과정은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이 시기 제철 플랜트의 기술력 연마는 제선과 제강 분야에서 돋보였다. 독보적인 친환경 고로인 파이넥스는 2공장 준공으로 그 기술력이 한층 더 향상됐으며, 광양 5고로 신설 이후 고로 신설과 개수 기술력은 세계 최강을 자랑했다. 특히 포항 신제강, 광양 5코코스 등 대규모 신설사업을 수행하면서 새롭게 기술력을 다져나갔다.

“파이넥스 완성은 영일만에 철강산업의 불을 지핀 지 40년 만에 세계 철강사를 새롭게 쓴 쾌거이자, 우리경제가 가야 할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준공식 치사에서)

“세계 주요 철강사들이 대형화, 통합화를 통해 경쟁우위를 회복하고 있고, 후발 철강사들의 도전이 더욱 거세지는 상황에서 파이넥스공장 준공은 포스코의 경쟁력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구택 전 포스코 회장, 준공식 기념사에서)

2007.6.5 파이넥스 준공식

2007.06.05 파이넥스 준공식

세계 최초의 상용화 설비인 파이넥스 2공장이 착공 34개월만인 2007년 5월 마침내 준공됐다. 60만 톤의 데모 플랜트보다 그 용량이 150만 톤으로 커졌고, 데모 플랜트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들을 개선해 설계, 제작, 시공에서의 오류를 최소화했다.

파이넥스 공정은 가루 형태의 철광석을 가스로 환원시켜 순수한 철 성분으로 바꾸어 주는 유동환원로, 환원된 철광석과 석탄을 일정한 모양으로 만드는 HCI 설비 및 성형탄 설비, 그리고 철광석과 석탄을 녹이고 환원에 필요한 일산화탄소와 수소를 만들어 내는 용융로로 구성돼 있고, 이 4가지 공정이 파이넥스 공법의 핵심기술이었다.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에서는 유동환원로와 HCI 설비 개선이 특징이었다. 먼저 데모 플랜트의 HCI 설비를 광폭 HCI로 개선함으로써 원료비와 설비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특히 유동환원로 개선으로 그 동안 용광로의 특성상 사용할 수 없었던 알루미나(Al2O3)나 아연(Zn) 성분이 많이 포함된 철광석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4단 유동환원로에 가스를 불어넣어 가루 형태의 철광석을 날리면서 4차례에 걸쳐 환원시키기 때문에 통기성 문제나 아연 성분의 기화로 노벽에 붙는 현상을 제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원료의 무제한 사용이라는 세계 철강업계의 숙원을 해결할 수 있었다.

파이넥스 2공장 준공 과정에서는 오스트리아 푀스트알피네사가 기본설계를 맡았고, 포스코건설이 상세설계와 제작, 시공을 담당했다. 플랜트 단일공사로는 공사비용 6610억 원으로, 당시로는 최대 규모였다. 시공 물량만도 기계공사 8만 6000톤으로, 300만 톤 고로 2기를 동시에 건설하는 것과 맞먹는 대규모 공사였다.

무엇보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은 프로젝트였다. 해외 유명 철강사들이 신제선 공법을 개발하고도 상업화에 잇달아 실패하면서 포스코의 파이넥스 상용화 성공 여부에 세계 철강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또 정부의 10대 기술과제로도 선정돼 국가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준공 과정에 어려움도 많았다.

“2006년에 포항지역 건설노조의 83일간 장기간 파업으로 공사가 중단된 적도 있었고, 공사 진행 중 본체설비의 엔지니어링 변경으로 약 3개월간 주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장문재 전 이사보, 당시 현장소장)

그럼에도 프로젝트 요원들은 세계 최고의 파이넥스 상용화 성공을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 그 결과 2005년 하반기, 2006년 상반기 연속으로 회사차원의 품질·안전·환경 평가에서 우수현장에 선정됐다. 또 파이넥스 기술개발과 건설을 병행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과업을 완수함으로써 EPC 일괄 수행체제 모범 현장의 선례를 남겼다.

 

# 고로 개수 기술력, 세계가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

“고로 개수는 1992년 포항 1고로 2차 개수부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신일본제철이 고로 개수를 맡았고, 그들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아 기술력을 확보했다. 이후 10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의 기술력은 세계 정상에 올라섰고, 오히려 일본이 우리에게 기술을 배우는 신세로 전락했다.” (진재기 상무보)

고로 개수 실적은 2014년까지 총 14개 프로젝트가 진행됐고, 광양 5고로 1차 개수가 진행 중에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기록으로, 포스코건설만의 경쟁력이었다. 대표적 프로젝트로는 광양 2고로 1차(2005), 포항 3고로 2차(2006), 광양 3고로 1차(2007), 광양 1고로 2차(2013) 개수등이 있었다.

광양 2고로 1차 개수

광양제철소 2고로 전경

광양 2고로 1차 개수의 성과로는 내용적이 3800㎥에서 4350㎥로 그 크기가 14.5% 커졌으며, 쇳물을 뽑아내는 능력도 총 출선량 8400톤에서 1만 100톤으로 연간 46만 톤 증산이 가능해졌다. 아울러 노체냉각방식을 변경해 냉각반 대신 스테이브(Stave)를 설치해 노수명을 향상시켰다.

가장 큰 성과는 공기단축이었다. 66일 만에 완료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최단기간 기록이었다. 공기단축으로 인한 성과는 컸다. 고로 셧다운을 하루 앞당기면 1만 톤을 더 생산할 수 있었고, 10일이면 10만 톤을 더 생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승용차 1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이었다.

당시 공기단축의 배경은 타워크레인에 있었다. 이전까지 60톤 규모의 크레인을 사용해 보통 100일 정도 걸리던 고로 개수 기간을 광양 2고로 1차 개수부터 1000톤의 크레인을 투입함으로써 공기를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광양제철소 3고로 전경

광양제철소 3고로 전경

광양 2고로 1차 개수에서 세운 최단기간 기록은 포항 3고로 2차 개수에서 다시 갱신됐다. 기록 갱신의 배경은 대블록이었다.

“어느 날 이구택 회장이 일본 출장길에 가져온 사진 3장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신일본제철 고로 개수 장면으로, 세계 최초로 대블록 4개를 적용한 것이었다. 이 사진은 세계 최고라는 우리의 자존심에 불을 지폈으며, 우리는 달랑 사진 3장을 갖고 대블록 개발에 들어갔다.” (조운석 전 이사보, 당시 PM)

이전까지 포스코건설은 고로 개수에서 소블록 14개를 적용했다. 그러나 신일본제철에 자극받아 1년여의 연구과정을 거쳐 마침내 세계 최초로 3개로 이루어진 대블록 개발에 성공하고, 이를 포항 3고로 2차 개수 때 세계 최초로 적용했다. 당시 기록한 58일의 공기단축도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이를 통해 포스코건설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기록은 또 다시 깨졌다. 광양 3고로 1차 개수에서 55일만에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또 다시 세계 최단기간 기록을 갱신했다. 이때 기록 갱신의 원동력은 중블록 개발과 낭비요소 제거를 위한 3정5S(3정: 정위치, 정품, 정량, 5S: 정리, 정돈, 청소, 청결, 습관화) 혁신활동이었다.

대블록에서 중블록으로 바꾼 이유는 경제성 때문이었다. 포항 3고로 2차 개수 때는 대블록을 적용하느라 추가비용이 200억 원이나 늘어났다. 이에 고로개수 전담 요원들이 연구개발에 들어가 중블록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고, 광양 3고로 1차 개수 때 중블록 8개를 적용해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증명했다.

3정5S 혁신활동도 공기단축에 큰 힘이 됐다. 공사 잔재가 발생할 때 즉시 처리하는 것이 시간낭비를 줄이고 안전과 품질을 확보하는 지름길이었다. 이로 인해 물류 흐름이 원활해졌고, 작업 능률도 향상됐다. 무엇보다 안전사고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였다.

광양 1고로 2차 개수 때는 그 동안 포스코건설이 축적한 기술과 노하우가 모두 반영됐다. 1000톤에 이어 1350톤의 크레인을 투입했으며, 블록도 효율적인 중블록 8개를 선택했다. 그 결과 계획대비 11일을 단축하고, 무재해 3배수도 달성했다. 특히 광양 1고로 2차 개수의 가장 큰 성과는 내용적 확대 기술력이었다. 3950㎥의 내용적을 세계 최대인 6000㎥로 확장하는 등 세계 최고의 고로 개수 기술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 포항 신제강 신설, 독자수행 EPC 능력 확보
포항 신제강 착공 부지

포항 신제강 착공 부지

파이넥스, 고로의 신설과 개수 등 제선 분야에서는 세계가 따라올 수 없는 기술력을 확보했지만, 제강 분야 기술력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신예화와 합리화 경험은 있었으나, 아직까지 설계능력을 확보할 기회가 없었다.

드디어 그 기회가 2007년에 찾아왔다. 포항제철소가 전로 조업의 호환성 확보와 저원가 생산 및 품질향상을 위해 포항 신제강 신설에 나선 것이었다. 이는 기존 포항제철소의 1제강과 2제강 체제에서 2제강 규모의 신제강을 신설해 465만 톤 생산능력을 구축하기 위한 포스코의 미래 전략이었다.

포항 신제강 신설은 제강 프로젝트로는 초대형급이었다. 신제강 신설을 위해 51개의 프로젝트가 단계별로 추진됐으며, 투자비용만 1조 500억 원에 이르렀다. 그 중 순수 신제강 신설 단독 프로젝트에만 전체 사업비의 53% 수준인 5300억 원이 들었다.

초대형급이었던 만큼 사업추진 준비기간이 1년이나 걸렸다. 사전 설계검토, 견적가 산출, 원가절감 방안 마련 등에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 기간 동안 포스코건설은 EPC 턴키 수주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사업추진 기간 보여준 신뢰와 열정을 포스코로부터 크게 인정받아 2007년 12월 사상 처음으로 제강 분야 신설사업 EPC 수주에 성공했다.

그러나 사업추진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008년 말 갑작스런 글로벌 금융위기로 환율과 원자재 가격이 상승해 대규모 리스크가 발생했다. 발주 설비 가격이 크게 상승했는데, 중국 발주 물량의 경우 145% 이상이나 급상승했다. 이에 포스코는 인도적 차원의 소재비 보전을 추진, 환차손에 의한 원자재 가격 상승 품목을 대상으로 일부 보전을 추진함으로써 모든 협력업체와 고통을 분담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공기연장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기연장이 무려 11개월이었다. 첫 번째 공기연장은 2009년도 상반기였다.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로 포스코가 6개월 공사중단을 지시했고, 이로 인해 일부 협력업체에서 부도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두 번째 공사중단은 2010년도 하반기로, 기간은 5개월이었다. 포항시의 건축 인허가 오류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고도제한에 대한 사전 검토가 미흡했다.

포항 신제강 공사현장

포항 신제강 공사현장

“공사현장이 포항공항 인근이라 건축물의 높이에 대한 규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항시가 실수로 인허가를 냈고, 건축물이 서고 나서 관할 군부대가 원상복구를 요구하자 그때서야 실수를 인지한 포항시가 공사중단 처분을 내린 것이었다. 결국 66.5m 고도제한 규정을 맞추느라 85m까지 올라갔던 구조물을 철거하고 다시 설치하느라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고, 공사중단으로 협력업체들의 고통도 가중됐다.” (오헌주 상무, 당시 현장소장)

한편으론, 11개월 공기연장은 포스코건설에게 소중한 보약이었다. 이 기간에도 프로젝트 요원들은 쉬지 않고 기술검토와 수정을 반복했다. 그 결과 2011년 3월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료됐으며, 준공 후에도 트러블 없이 조기 조업 성과를 달성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제강 분야 EPC 턴키 기술력 확보였다.

“신예화나 합리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맨 땅에 대규모 제강공장 신설사업을 독자적으로 수행해 EPC 턴키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감을 확보했다. 이때 확보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관련 경험인력들이 해외 프로젝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신동철 상무, 당시 PM)

또 하나의 성과는 경영혁신이었다. 경영혁신 시범현장으로 선정돼 수많은 설계 및 시공개선을 통해 원가절감을 실현했으며, 2008년에 경영혁신 최우수 현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경영혁신의 가장 큰 성과는 EPC 통합 운영이었다.

설계와 시공 분야의 분리 운영 관행을 깨고 EPC를 통합 운영함에 따라 엔지니어링 단계부터 시공 분야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시공 과정에서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턴키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감도 확보할 수 있었다.

 

# 광양 5코크스 신설, 위기극복하고 EPC 기술력 확보

제강 기술력 확보에 이어 제선 분야 중 코크스 신설 EPC를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코크스 공정은 유연탄을 고로 선출의 연료인 코크스로 만드는 과정으로, 전체 제철 프로세스 중 가장 먼저 시작되는 공정이기도 하다.

그 동안 포스코는 고로 개수에 따른 출선량 증대로 코크스 부족현상이 발생하자 주로 중국에서 코크스를 수입해왔다. 그러나 수입에 따른 비용부담도 있었고, 또 연료의 품질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자 연간 230만 톤 생산의 광양 5코크스 신설로 방향을 바꾸었다.

광양 5코크스 신설은 오븐, 화성 설비, CDQ 설비, 선탄 설비 등 4가지 패키지로 구성된 대규모 프로젝트로, 여기에 투입되는 사업비만도 5593억 원에 이르렀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대형 프로젝트의 수주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특히 포스코건설의 최대 목표는 EPC 기술력 확보였다. 코크스 신설은 20년 전 광양 4코크스 이후 처음인데다 그 동안 합리화나 신예화도 별로 없어 EPC 기술력을 확보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수주 경쟁에는 코크스 설계로 유명한 독일의 우데(Uhde)사와 광양 4코크스 신설 당시 시공을 맡았던 롯데건설이 뛰어들었다. 포스코는 포스코건설의 의욕과 그 동안의 신뢰관계를 높이 평가해 2008년 중반 전체 EPC를 포스코건설에게 맡겼다. 다만 핵심설비인 오븐과 화성 설비의 설계는 독일의 우데사에 발주했다.

1단계(2008.11~2010.11)와 2단계(2009.12~2011.11)로 나눠 추진된 광양 5코크스 신설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금융위기로 인한 공사 중단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2009년에 공사가 잠시 중단됐으며, 2010년엔 건설노조 파업과 유독 길었던 장마로 많은 곤혹을 치렀다. 그러다 보니 그간 까먹은 공기를 만회하느라 프로젝트 요원들은 불철주야 공기와의 전쟁을 벌였다.” (손용철 상무, 당시 현장소장)

EPC 경험부족도 프로젝트 진행에 고통을 가중시켰다. 모르면 알 때까지, 안 되면 될 때까지 서적을 파고들었다.

토목공사에서도 공기를 많이 까먹었다. 공사현장 부지가 제철 폐기물 매립장이어서 고로의 부산물인 슬러그가 쌓여 있었다. 바다 인근이라 자갈 모양의 슬러그 빈틈을 타고 바닷물이 오랜 세월 흘러들었고, 그러다 보니 땅을 팔 때마다 물이 고였다. 인근의 모든 양수기를 동원해 바닷물을 퍼냈는데, 그 시간이 무려 석 달이나 걸렸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반을 다지기 위해 파일 항타를 했더니, 파일이 박히지 않았다. 이번에도 문제는 철광석을 녹이고 남은 찌꺼기인 제강의 부산물 자금덩어리였다. 자금덩어리 역시 나름 철광석이어서 파일 항타를 견뎌낸 것이었다. 이번에는 대형 장비를 동원해 이걸 다 들어냈는데, 무려 30톤이나 나왔다. 따라서 이 과정이 작업도 더디고 가장 힘들었다. 까먹은 공기를 만회하기 위해 패스트 트랙 공법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 같은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모든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준공 이후 광양 5코크스는 동양 최초의 자동화설비 구축과 함께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고, 아울러 세계적으로도 최신예 제철소라는 명성을 얻었다.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과도 많았다. 가장 큰 성과는 국산화를 통한 원가절감이었다. 가스처리 설비인 굴뚝 모양의 스택(Stack)의 경우 독일의 우데사 설계에서는 높이 178m에 직경이 6m로 나왔다. 이 설비가 너무 고가라 조사 및 연구를 했더니 165m 높이에 5m의 직경이면 충분하다는 결론이 나왔고, 국산화가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결국 국산화에 성공했고, 원가절감에도 성공했다.

그 외 내화벽돌의 국산화에도 성공했고, 스택과 내화벽돌을 연결하는 지지대인 앵커레일(Anchor rail)의 국산화에도 성공했다. 이 같은 연구개발과 국산화는 포스코건설 독단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계사인 우데사와 레터 교신을 통해 기술검토 과정을 거쳤다. 포스코건설이 계속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자 우데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안전관리에서는 현장 특성에 따른 맞춤식 안전활동으로 2011년 5월 플랜트부문 최초로 무재해 5배수를 달성하기도 했다. 특히 포스코건설은 어렵게 확보한 EPC 기술력인 만큼 모든 기술적인 자료를 수집해 데이터로 축적했다. 아울러 이 기술력으로 무장한 경험인력들은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대형 해외 프로젝트 현장으로 달려나가 자신들의 역량을 맘껏 펼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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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6. 해외사업, “기회와 희망 찾아 베트남·중남미로 달려가다”        

# ‘제철소 건설사’ 꼬리표를 떼라!

시공능력 7위, 수주액 4조 원 돌파. 10년 전과 비교하면 국내에서 포스코건설의 위상은 몰라보게 높아졌다. 그렇다면 해외에서는 어떨까? 한 마디로 초라한 실적이었다.

해외사업은 전체 수주액에서 기여도가 채 10%를 넘지 못했고, 그나마 제철 플랜트만의 전유물이었다. 그 외 실적은 건축 분야의 상하이 포스플라자, 호치민 다이아몬드플라자, 그리고 하와이 콘도사업 정도가 고작이었다.

제철 플랜트의 향후 전망도 어두웠다. 포스코를 등에 업고 성공적으로 중국시장 진출에 성공했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최저가로 공습해오는 중국 현지업체들의 인해전술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제철소 건설사’라는 꼬리표를 떼는 것이었다.

출범 당시 포스코건설은 ‘제철소 일만 하는 건설사’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말은 IMF 위기 이후 쏙 들어갔다. 주택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면서 더샵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고, 모두가 주저할 때 과감하게 송도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제 해외사업에서도 그런 딱지를 뗄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특명에 건축과 토목, 그리고 에너지가 첨병으로 나섰다. 건축과 토목은 기회를 쫓아 베트남으로 달려갔고, 에너지는 희망을 찾아 중남미 개척에 나섰다. 중국에서 설 땅을 잃은 제철 플랜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능성을 타진했다.

먼저 건축과 토목의 베트남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외형상으로는 장밋빛이었다. 국내기업으로는 드물게 신도시 건설에 성공했으며, 천년 고도 하노이시의 미래 설계를 맡길 만큼 베트남 정부로부터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토목 분야마저 3개의 고속도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포스코건설은 한류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스플랜도라 신도시가 착공하기까지, 토목 분야가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에서 성공하기까지 그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출발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떠이호떠이와 북안카잉을 놓고 고민했다. 떠이호떠이는 대우건설이 오래 공들인 신도시 개발사업으로, 많은 건설사들이 컨소시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위치는 하노이 시청에서 5km 떨어진 변두리였고, 규모는 208만 ㎡ 정도였다. 대우건설은 이곳에다 한국형 신도시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북안카잉 신도시 개발사업의 정보는 70여개의 계열사를 이끌고 있던 베트남 최대 건설 공기업인 비나코넥스로부터 제공받았다. 북안카잉은 하노이시 경계 지점이자 APEC회의 장소이기도 했던 하노이 컨벤션센터에서 5km 떨어져 있어 향후 신시가지로서 전망이 밝았고, 규모는 떠이호떠이보다 조금 큰 264만 ㎡ 정도였다. 비나코넥스는 호치민시의 랜드마크인 다이아몬드플라자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이 있었고, 이에 포스코건설에게 북안카잉 신도시 공동개발을 제안했다.

포스코건설은 두 건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북안카잉을 선택했다. 떠이호떠이는 도심 변두리여서 인허가, 이주보상 등 향후 사업추진 과정이 쉽지 않으리라 전망했고, 무엇보다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것보다 현지 국영기업을 끼고 주도적으로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정식 명칭이 스타레이크시티와 스플랜도라로 바뀐 신도시 개발사업에서 포스코건설의 스플랜도라가 대우건설의 스타레이크시티보다 착공이 훨씬 빨랐다. 떠이호떠이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컨소시엄도 다 떨어져나가 대우건설만이 고군분투했다.

 

# 베트남서 두 번의 실패 딛고 다시 일어나

스플랜도라는 광채를 의미하는 영어 ‘스플랜도(splendor)’와 금을 나타내는 ‘오흐(Or)’의 합성어로 부귀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사업은 1, 2단계로 나눠 2020년까지 총 2조 6530억 원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포스코건설은 스플랜도라를 선택하면서 첫 번째 단추를 잘 채웠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2005년부터 시작된 물밑 접촉에 이어, 2006년 들어서는 양사간 기본협약을 체결하고 베트남 정부로부터도 승인을 받아 투자허가서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곧 착공에 들어갈 것 같았던 스플랜도라는 이후 사업추진 과정에 시간이 걸렸다.

랑~호아락 고속도로가 발목을 잡았다. 포스코건설이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 비나코넥스, 베트남 정부와 맺은 주요 계약조건은 이랬다. 하노이의 랑과 하노이 인접 하떠이성의 호아락을 연결하는 27.8km의 고속도로를 건설해 주고, 그 대가로 베트남 정부로부터 부지를 제공받는 조건이었다.

이 조건을 포스코건설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히려 고마운 계약조건이었다. 건축과 토목의 동반 진출도 의미가 있었지만, 토목 분야 최초의 베트남 진출이기도 했다. 또 랑~호아락 고속도로는 베트남 최초의 현대식 고속도로이자, 자동차와 이륜차를 분리한 최초의 고속도로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사업경험 부족의 현실은 냉혹했다. 토목 분야는 해외사업에 미숙했고, 현지 사정에도 어두웠다. 2006년 7월부터 파트너인 비나코넥스를 따라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뛰어들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경제성은 나오지 않고 리스크만 커져갔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리스크를 털어내기 위해 랑~호아락 고속도로에서 탈출했고, 대신 스플랜도라는 직접 투자방식으로 사업구조를 바꾸었다.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건설 전 부지 전경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건설 전 부지 전경

랑~호아락에서 호되게 신고식을 치른 건축과 토목 분야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베트남 시장 안착을 위해 새로운 사업개발에 골몰했다. 그 결과 2008년에 토목과 건축 양 전선에서 각각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토목 분야는 카이멥 국제항만공사 프로젝트를 수주했으며, 건축은 베트남 천년 수도 하노이시 마스터플랜 수주에 성공했다.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2008.3-2011.3)은배후부지 48만 ㎡에 안벽 600m를 건설해야 하는 항만공사로, 연간 컨테이너 115만 TEU를 처리할 수 있는 규모였다. 수주금액은 1억 1200만 달러였다. 현장은 호치민에서 남쪽으로 125km 가량 떨어진 붕따우에 위치하고 있으며, 베트남 정부는 이 붕따우 지역에 전체 공단의 절반 가량이 위치한 남부 집중경제구역(SFEA)의 물동량 증가에 대비해 이 사업을 추진했다. 발주처는 세계 1위 해운선사인 덴마크 몰러 머스크(A.P.Moller-Maersk)의 합작법인 CMIT였으며, 포스코건설은 삼환기업과 조인트벤처 형태로 이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건축 분야는 웃었고, 토목은 또 다시 눈물을 삼켰다. 철저한 사전대비에도 불구하고 토목 분야는 이번에도 미숙함을 들어냈다. 불리한 조건에서 계약을 한 데다 외주공사 발주 과정에서 전기설계 용량을 놓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했다. 결국 사업성 확보에 실패하고 적자운영의 전철을 반복했다.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전경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전경

# 천년 고도 하노이의 2050년을 설계하다

“2050년이면 총면적 3300㎢에 인구 1000만 명이 살게 될 베트남의 천년 수도 하노이! 그 하노이광역시의 미래 설계를 당신들에게 맡긴다.”

2008년 9월 23일 베트남총리실에서 날아온 낭보였다. 수주 최종 통보에 2주간의 합숙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던 프로젝트 실무진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이 사업은 당시 921㎢인 수도 하노이의 면적을 이보다 3배 이상 확대해 3300㎢로 설계하는 도시개발 프로젝트였다. 이는 서울 총 면적의 5배를 초과하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규모였다.

베트남 정부는 2010년 하노이 천도 1000주년을 맞아 수도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의욕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했다. 2008년 5월말 베트남 국회 역시 하노이시를 명실상부한 베트남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하노이시 광역도시계획 수립’을 최종 의결했다. 이로써 전 세계 유명 건설사들의 발길이 하노이시로 속속 몰려들기 시작했다.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 600년 전 삼봉 정도전이 한양천도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 수주는 도시계획 분야의 우수한 기술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뿐 아니라, 향후 하노이시의 폭넓은 도시 인프라 건설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김병호 전 전무)

하노이 마스터플랜은 그만큼 매력적인 프로젝트였다. 확장된 도시조성을 위한 신도시 개발, 도로, 상하수도, 전력, 하천정비, 철도, 정보통신 등 많은 프로젝트를 양산해내야 할 로드맵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그러니 수주액이 불과 640만 달러밖에 안 되는데도 미국과 일본, 독일, 프랑스, 호주, 싱가포르 등 8개국 12개 업체가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특히 일본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고, 포스코건설 역시 당시 이구택 포스코 회장과 한수양 사장 등 최고경영층이 수차례 베트남을 방문해 고위층 인사들을 만나는 등 포스코패밀리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포스코건설의 입찰 참여는 베트남 고위층의 요청에서 시작됐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스플랜도라와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외에도 포스코-베트남 냉연공장 등 3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이전에도 다이아몬드플라자를 비롯해 여러 제철 플랜트를 수행하면서 우호적인 인사를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

2008.12.26 하노이 마스터플랜 계약식

2008.12.26 하노이 마스터플랜 계약식

마스터플랜 수립사업의 국회 통과와 함께 본격화된 수주 경쟁에서는 4차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2008년 7월 말 한국, 일본, 미국 등 3개국의 대표 기업들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포스코건설은 뉴욕에 본사를 둔 미국의 글로벌 도시설계 회사인 퍼킨스 이스트만, 그리고 한국의 도시설계 전문회사인 진아건축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입찰경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최종 제안서 제출 보름을 앞두고 저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 개발에 골몰했다. 포스코건설은 2주간 합숙훈련에 돌입, 실무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고 또 짜냈다. 결국 2008년 8월 3일 최종 설명회 당일 포스코건설은 기발한 옵션 하나를 제시했다. 하노이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대형 모형과 그 모형을 전시할 전시관을 지어 기증하겠다는 옵션이었다.

“우리의 제안에 일본은 우리보다 더 큰 모형과 전시관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발 더 나갔고, 심지어 아예 마스터플랜 자제를 공짜로 해주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만큼 일본의 수주 의지도 우리만큼 강했다.” (김창묵 Director)

그러나 2008년 9월 23일 운명의 여신은 일본의 프로포즈를 외면하고 포스코건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포스코건설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우선 제안서의 내용이 좋았다. 개발과 보존을 고려한 생태학적 자연환경 보존계획, 도시의 난개발 방지를 위한 그린벨트 설정, 환경문제를 고려한 적정밀도 계획 등 우수한 마스터플랜이 발주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 하나 더, 동영상 프리젠테이션이 관심을 증폭시켰다. 제안서 작성에도 버거운 짧은 기간에 포스코건설만이 유일하게 야근과 철야를 반복해서 동영상을 완성했다. 더구나 파트너십도 빛났다. 설명회 당일 동영상 프리젠테이션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퍼킨스 이스트만 회장이 직접 사회자로 나서자 장내는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 스플랜도라 착공과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수주

스플랜도라 개발사업은 랑~호아락 고속도로의 리스크를 덜어내고 2006년 12월 비나코넥스와 함께 합작법인 ‘안카잉JVC’를 설립하면서 순항하기 시작했다.

총 6단계로 나눠 2020년에 완공될 예정인 스플랜도라 신도시에는 빌라와 테라스하우스 외에도 아파트 4481세대, 주상복합형 건물 2605세대 등 모두 8593세대의 주거단지가 들어서고, 아울러 호텔, 사무실 용도의 75층 규모의 랜드마크 빌딩이 계획돼 있었다. 또 입주민들의 편익을 위해 관공서, 공원 등도 예정돼 있었다.

그 가운데 1단계 사업이 2009년부터 본격화됐다. 포스코건설은 16~22층 아파트 496가구, 3층 단독빌라 317가구, 4층 테라스하우스 236가구 등 모두 1049가구를 짓는 1단계 사업의 분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2009년 12월부터 착공에 들어갔다.

“분양 과정에서는 한 채에 한국 돈으로 15억 원이나 하는 고급 빌라인데도 물량이 없어 팔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베트남 정부 한 고위층 인사가 ‘왜 내가 이걸 못 사느냐’고 항의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희도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2009.4.25 베트남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착공식

2009.4.25 베트남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착공식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공사 현장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공사 현장

두 번의 수업료를 치른 토목 분야는 베트남 현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아픈 만큼 좀더 성숙해졌다. 카이멥 항만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수주에 총력을 기울였다.

포스코건설은 두 번의 실패 이후 여기서도 실패하면 해외사업에서 토목사업을 접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스플랜도라 파트너인 비나코넥스까지 참가한 결코 쉽지 않은 국제경쟁이었다.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는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역점사업인 ‘메콩유역 개발사업’(GMS)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사업이었다. 하노이와 중국 운남성 쿤밍을 잇는 연결 고속도로로, 하노이 국제공항에 위치한 노이바이에서 출발, 국경지역인 라오까이까지 총 연장 264km에 8개 공구로 구성됐으며, 전체 사업비는 12억 5000만 달러 규모였다.

특히 이 고속도로는 베트남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었다. 베트남 정부는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가 수도 하노이와 하이퐁, 쿤밍시 사이의 운송 기간을 하루 이내로 단축시킴으로써 중국과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과 같은 인접국과의 무역을 활성화할 것으로 크게 기대했다.

하노이 노이바이 첫 구간인 1공구는 27km 길이의 4차선 고속도로로 약 1억 5000만 달러 규모였다. 2009년 3월 입찰에서는 중국, 베트남 등 총 9개 건설사가 참여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결과는 최후 각오를 다지면서 배수진을 쳤던 포스코건설이 수주에 성공하면서 최대 경쟁자였던 비나코넥스를 놀라게 했다.

1공구 수주의 여세를 몰아 포스코건설은 2009년 10월과 11월 입찰에서도 2공구와 3공구를 연속으로 수주하는데 성공했다. 2공구는 22.12km의 4차선 아스팔트 포장공사와 19개의 교량을 건설하는 도로공사였으며, 포스코건설은 1~3공구 수주를 통해 총 81km의 시공물량을 확보했다. 더욱이 8개 공구 중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우리나라 건설사가 6개 구간을 석권함으로써 베트남 현지에서 한국 토목의 기술력을 과시했다.

 

# 지구 끝 중남미에서 찾은 블루오션, 석탄화력발전

건축과 토목 분야가 베트남에서 성공드라마를 써나가는 사이, 신생조직 에너지 분야는 지구 끝 중남미에서 블루오션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경험의 석탄화력발전이었다.

“동남아나 중동에 뒤늦게 뛰어들어서 같이 피 흘리는 것보다 중남미나 CIS 국가 등 우리나라 기업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지역에서 블루오션을 찾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칠레가 바로 그렇게 해서 찾아낸 블루오션이었다.” (김대호 전 부사장)

2004년 7월, 에너지 조직을 재정비한포스코건설은 에너지사업에 대한 연륜은 짧았지만, 의욕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일찌감치 국내시장을 레드오션으로 파악하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먼저 중남미시장에 대해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운명적으로 AES와 인연을 맺었다. 미국 텍사스주 알링턴에 본사를 두고 있던 AES사는 전 세계 27개국에 15개의 전력회사와 124개의 발전소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2005년 당시 110억 달러의 매출과 297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글로벌 전력회사였다.

AES와 관계가 시작된 건 2005년 9월이었다. 중남미 현지조사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칠레의 석탄화력발전 프로젝트와 민간발전사업자인 AES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칠레는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 국가인데다 전체 산업의 50%를 차지하는 광산산업에서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환경규제가 심해 원자력발전은 엄두도 못 내고, 볼리비아에서 아르헨티나를 거쳐 공급되는 가스발전에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폭설로 가스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결국 칠레 정부는 발전능력 확충을 위해 민간발전사업자(IPP) 모집에 나섰고, 포스코건설은 지난 30년간 칠레에 전력을 공급해오면서 전체 발전량의 20%를 점유하고 있던 AES를 가장 매력적인 민간발전사업자로 보았다. 무엇보다 칠레는 앞으로 계속 대규모 발전 프로젝트가 쏟아질 블루오션이었다.

사업정보 입수 직후 포스코건설은 2006년도 발주 예정인 여러 프로젝트 중에서 AES의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를 선택하고 역량을 집중했다. AES를 수차례 방문해 적극적으로 기술력을 홍보하는 등 총력전을 펼친 결과, 2006년 2월 입찰참가자격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수주 경쟁은 치열했다. 프랑스의 알스톰, 캐나다 SNC-라발린, 일본의 미쓰비시 등 세계적 EPC업체 10개사가 경쟁에 참여했다. 그해 5월 제안서 제출 후에는 최종 경쟁에서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미쓰비시, 알스톰 등 3개 업체가 남았다.

막판 수주전은 더욱 치열했다. 포스코건설의 투지도 더욱 달아올랐다. 발주처인 AES의 요구사항은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철저히 반영했고, 지구 끝 정반대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도 메일이 오면 곧바로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런 성실함에 AES가 차츰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포스코건설은 더욱 자신들의 기술력을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심지어 AES측 책임자를 한국으로 초청해 포항제철소 코크스공장의 석탄 설비, 용광로 미분탄 설비, 자가발전 설비 등을 견학시켜 주기도 했다. 당시 견학에 대한 AES측의 만족도는 폭발적이었다. 결국 2006년 9월 AES는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의 EPC 턴키 사업자로 포스코건설을 선택했다.

“석탄보일러 중 우리가 제안했던 PC보일러(미분탄연소)가 수주 성공에 기여한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나머지 업체들은 CFBC보일러(순환유동층)를 제안했는데, 우리는 그들과 다르게 PC보일러를 채택해 가격경쟁력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김원석 상무)

9.E-D-132-00

2007.10.17 칠레 벤타나스 4호기 계약식

10..E-A-A-109-03

2007.6.11 칠레석탄화력발전소 착공식

 

# 돈 다 날려도 좋으니, 공기·품질향상 지켜라!

포스코건설이 수주한 누에바-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는 수도 산티아고에서 북서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칠레의 유력 산업도시 벤타나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전용량 240MW에 사업규모는 3억 7000억 달러였다.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의 수주는 한국 건설계는 물론, 포스코건설 해외진출 역사에서도 많은 의미를 남겼다. 국내 건설사 중 최초의 중남미 진출이었으며, 해외 석탄화력발전소 EPC 턴키로도 국내 최초라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포스코건설 조직에 큰 변화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초대형 해외사업을 수주함에 따라 인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09년까지 경력직만 매년 100명씩 뽑으면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에너지 전문가들을 포스코건설이 싹쓸이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는 한국 건설계로서도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그 동안 불황으로 구조조정 당했던 에너지 전문인력들이 되살아나면서 묵혀있던 기술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벤타나스 수주는 일개 팀 조직을 사업본부로 격상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벤타나스 수주에 힘입어 2006년 12월 에너지사업본부가 출범했다. 국내에서 본부급의 에너지 조직은 당시 포스코건설이 유일했다. 이는 최고경영층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으로, 당시 한수양 사장은 틈만 나면 지구 끝 칠레로 날아가서 직원들에게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이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업비를 다 날리는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회사가 끝까지 지원할 테니 반드시 공기준수와 품질확보의 과업을 완수해주기 바란다.” (한수양 전 사장)

2008.8.27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착공

2008.8.27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착공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공사현장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공사현장

최고경영층의 예상대로 2006년 12월 착공 이후 추진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현지 협력업체 확보였다. 당시 현지업체들은 자국에 처음 진출한 포스코건설의 능력을 의심했다. 그들은 벤타나스 프로젝트를 외면하고 산타마리아나 앙가모스 등 다른 프로젝트를 찾아 다녔다. 그러다 보니 포스코건설의 하도급 입찰장은 텅 비었고, 현장 책임자들은 현지업체들을 직접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모셔와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무시와 천대를 극복하는 데는 단 6개월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포스코건설이 아무 문제없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반면, 당시 같이 출발했던 다른 프로젝트들은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칠레 사회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포스코건설의 실력을 인정하면서 부르지 않아도 같이 일하고 싶다는 현지업체들이 길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발주처 AES의 신뢰도 고무적이었다. 칠레 지역에서 믿고 맡길만한 회사가 포스코건설밖에 없다고 판단한 AES는 벤타나스 이후 모든 프로젝트를 몰아주면서 계약방식도 수의계약으로 변경했다. 그렇게 해서 포스코건설은 캄피체 석탄화력발전소(2007.10-2011.2)와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2007.10-2011.8)등을 연이어 수주할 수 있었다.

캄피체는 누에바-벤타나스와 같은 벤타나스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전용량 270MW에 사업비는 4억 4000만 달러 규모였다. 앙가모스는 캄피체보다 2배의 규모였다.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약 1300km 떨어진 칠레의 북부 항구도시 안토파가스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전용량 520MW(260MW, 2기)에 사업비도 8억 7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처럼 포스코건설은 벤타나스 효과로 단 1년 만에 에너지 분야에서 무려 13억 1000만 달러를 수주하는 놀라운 실적을 달성했다.

 

# 벤타나스, 공기단축·성능향상·동반성장 세 마리 토끼를 잡다
칠레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 Boiler Package

칠레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 Boiler Package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의 성공적 준공은 칠레 국가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성적인 전력난에 허덕이던 칠레 산업에 숨통을 틔워준 데다, 같이 출발했던 다른 프로젝트들보다 먼저 준공해서 칠레 사회에서 포스코건설에 대한 신뢰가 더욱 높아졌다. 앙가모스는 아예 시작도 못했으며, 나머지 두 곳은 기술적인 문제로 준공을 2년이나 연기하면서 우리 회사에 대한 인지도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를 앞질렀다.” (김호섭 전 부사장)

2009년 12월 마침내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가 발전을 시작했다. 벤타나스의 성공적 준공을 통해 포스코건설은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가장 큰 성과는 공기단축이었다. 프로젝트 수행 전부터 공기준수는 회사의 특명이었다. 해외 EPC가 처음인 만큼 적기 공기준수는 향후 해외사업의 지속성이 걸린 중대한 임무였다.

공기준수 특명을 받은 책임요원들은 철저한 사전준비를 통해 모든 자재를 완성품으로 제작해 대형장비로 설치함으로써 작업시간을 최소화했다. 시급한 작업에는 숙달된 국내 전문가를 투입했으며, 현지 근로자에게도 작업표준서를 만들어 지도하는 등 현장 오류를 최대한 막았다. 특히 지반공사부터 24시간 철야 교대근무를 실시했다. 그 결과 공기준수라는 지상과제를 달성할 수 있었고, 덤으로 공기단축의 영광도 얻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지상과제는 품질확보, 즉 성능향상이었다. 먼저 포스코건설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진에 대비해 규모 7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는 내진설계를 적용했으며, 유럽만큼 까다로운 칠레 정부의 인허가 기준을 만족시킴으로써 설계·시공 능력은 물론 친환경 기술력을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성능향상 과정에서는 최저의 비용으로 각 부문의 품질, 공사기간, 안정성 등의 요구조건을 달성하기 위한 VE(Value Engineering) 혁신활동이 큰 힘이 됐다. VE 활동 결과 최종 성능시험에서 계약보증 조건보다 4% 이상 향상된 252.2MW의 발전출력을 달성했으며, 열소비율도 당초 계약보다 크게 향상시켰다.

국내 기자재 적용도 의미 있는 성과였다. 벤타나스 프로젝트에는 90% 이상 국내 기자재와 설비를 적용했고, 인력관리에서도 대부분 국내 협력업체를 활용했다. 그 결과 국산 기자재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국내 협력업체 동반 해외진출 등 포스코건설이 추구하는 동반성장경영을 실현할 수 있었다.

 

# 제철 플랜트, 전 세계에서 가능성을 타진하다

건축과 토목, 에너지 분야가 베트남, 칠레에서 선전하면서 ‘해외사업도 제철소 건설사’라는 딱지를 떼어낸 반면, 전통적으로 해외사업 강자였던 제철 플랜트 분야는 거대 중국시장에서 쫓겨난 이후 향후 전략 마련에 부심했다.

그러나 명예회복을 위한 이들의 의지는 이 시기 어느 때보다 강했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지구촌 곳곳을 누비면서 그들의 신발 밑창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시기 제철 플랜트는 어느 때보다 가장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업가능성을 타진했다.

극동·동남아 지역에서는 일본과 베트남을 넘나들었고, 인도와 함께 중동 지역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포스코를 따라 저 멀리 중남미 멕시코까지 날아가기도 했다.

이 시기 2005년에서 2009년까지대표적으로 7건의 프로젝트 수행 결과 3건에서 수익을 창출하며 43% 정도의 승률을 올렸다. 고무적인 사실은 포스코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인상적이었다. 포스코 물량 2건을 빼고 나머지 5건이 대외사업이었고, 가장 큰 성과는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프로젝트의 성공적 수행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냉연과 멕시코 CGL 등 포스코 물량 2건 모두가 100% 수익 창출에 성공한 반면, 대외 물량 중 아시아특수강을 빼고 나머지 4건의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운 대목이었다.

아쉬움을 남긴 프로젝트는 인도와 중동 지역에 집중됐다. 먼저 중동 지역 사우디아라비아부터 출발했다. 200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 최대 철강사인 하디드사로부터 연산 12만톤 규모의 칼라강판(CCL) 수주에 성공했다. 제철 플랜트의 사우디아라비아 CCL 수주는 창립 10주년 이후 새롭게 각오를 다질 때라, 첫 출발치고는 산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우디 하디드 CCL공장 전경

사우디 하디드 CCL공장 전경

특히 하디드 CCL(2005.4~2007.8)은 비록 수주금액이 350억 원 수준이었지만, 유럽의 철강설비 공급사들이 독점해오던 사우디아라비아에 첫 진출했다는 의미가 있었다. 국제입찰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알피네, 이탈리아의 다니엘리 등 세계적 기업을 제쳐 그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

그러나 너무 산뜻한 출발에 함정이 숨어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사전준비가 부족했다. 먼저 중동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특히 유럽적인 사고로 절차와 규격을 중시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계약서의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승리에 도취돼 유럽의 쟁쟁한 경쟁자들이 갑자기 왜 발을 뺐는지 의심하지 않았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절차와 규격을 중시하는 그들의 문화와 계약 구조상의 문제로 인해 적잖은 손실을 보았다.

승인절차가 까다롭다는 사실만 사전에 파악했더라면 유럽 방식대로 상세설계를 만들어 사전에 잡음을 차단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해 프로젝트 내내 발주처의 수많은 요구사항에 시달려야만 했다. 규격 역시 독일 규격인 DIM이 표준이란 사실을 모르고 KS나 JIS를 내밀었다가 된통 곤혹을 치렀다. 계약에서는 시공에 대한 책임보증이 문제였다. 현지 시공업체의 잘못을 다 떠안고 말았다.

2007.10.16 인도 이스코 고로프로젝트 계약 서명식

2007.10.16 인도 이스코 고로프로젝트 계약 서명식

사우디 첫 진출에 이어 2007년 9월 포스코건설은 인도에 첫 진출했다. 제철 플랜트 중 인도에서 활약한 분야는 제선공정의 핵심 고로였다. 이미 광양 5고로 신설의 기술력을 확보한 포스코건설은 해외사업에서 이 기술의 적용을 의욕적으로 시도했지만, 이란 타바존 이후 별다른 실적이 없었다. 당시 인도와 대만 등에서 고로 물량이 간간이 나왔지만, 강력한 경쟁자인 룩셈부르크 폴워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07년과 2008년에 연속적으로 이변이 발생하는데, 포스코건설이 폴워스를 누르고 인도 이스코 고로와 세일사 고로를 수주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세일사 고로는 중간에 중단됐으며, 이스코사 고로(2007.10~2010.3)는 추진과정이 길어지면서 적잖은 손실이 발생했다.

가격이 문제였다. 세일사는 사업자를 선정하고도 가격을 더 깎으려고 현지업체와 양다리를 걸쳤으며, 이스코의 계약 내용은 불량했다. 계약조건에 선수금이 빠져 있었다. 그러니 폴워스 같은 유럽의 경쟁자들이 입찰경쟁에서 등을 돌린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최초 인도 진출과 실적에 급급해 덥석 고기를 물었지만, 적잖은 손실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 기술이전 받던 나라에 플랜트 역수출, 일본 아시아특수강
2007.12.27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사업 계약식

2007.12.27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사업 계약식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실패사례에 이어 수익을 올렸던 일본과 베트남, 멕시코에서도 아쉬움은 있었다. 그나마 일본은 성공 프로젝트라 할 수 있었다.

2007년 12월 포스코건설은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신설사업 수주에 성공했다. 이 프로젝트는 총 사업비가 약 180억 엔, 한화로는 2347억 원으로, 60톤 규모의 전기로 제강공장, 연간 생산용량 12만 톤의 조괴공장 시공 및 설비공급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신설사업의 위치는 키타규슈 히비키나다 지역이며, 아시아특수제강이란 회사는 포스코P&S와 일본 특수강용 블룸 전문제조회사인 고토부키공업이 설립한 합작회사였다. 엄밀히 따지면 이 역시 포스코패밀리 물량인 셈이었다.

어쨌든 이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먼저 일본 첫 진출이자 전기로시장 개척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 1968년 포항 영일만에 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들어간 기술 대부분이 일본 작품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근 40년 만에 포스코건설이 플랜트 역수출의 가슴 벅찬 성과를 이룩한 것이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없었다. 유럽의 선진 엔지니어링사들도 쉽게 진출하기 힘든 곳이 일본이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짧은 공기와 일본관청의 까다로운 인허가 과정이었다. 모든 문서와 의사소통이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진행해야 하는 것도 해외사업에서는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기술적인 장벽도 높았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의 볼트도 망치로 두드려 풀림을 확인할 정도로 발주처는 완벽한 기술력을 요구했다.

“우리는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열정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발주처와의 약속과 신뢰를 지키기 위해 꼼꼼하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적극적인 기술지원과 설득을 통해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끌어나갔다.” (심재향 Director, 당시 PM)

수주 이후 8개월만인 2008년 8월경 늦게 착공에 들어간 아시아특수제강 프로젝트는 짧은 공기에도 불구하고 까다로운 시운전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2009년 10월 준공을 맞았다. 그간의 노력과 공로에 대해 발주처로부터 감사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멕시코 알타미라 포스코 CGL공장 전경

멕시코 알타미라 포스코 CGL공장 전경

포스코-멕시코 CGL 프로젝트(2007.10~2009.6) 추진 과정에도 시련이 많았다. 포스코와 포스코건설 모두 실수를 범해 어려움을 자처하기도 했으나, 포스코 특유의 정신을 발휘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프로젝트의 시작은 2007년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자동차강판 공급사였던 포스코는 꾸준히 그 영역을 전 세계로 확대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2000년대 중반 멕시코가 북미지역 신흥 자동차생산기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GM과 닛산, 현대, 벤츠 등 글로벌 자동차사들이 대규모 생산라인을 갖추면서 멕시코는 220여만 대의 자동차 생산능력을 확보했다. 특히 멕시코는 미국 남동부 지역과 가까워 최적의 자동차강판 공급기지란 매력이 있었다. 포스코로서는 저렴한 노동력도 구미를 당겼다.

포스코-멕시코 CGL은 멕시코 알타미라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업비 2억 6000만 달러, 연산 40만톤 규모의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였다. 포스코는 비용절감 차원에서 분할 발주를 추진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토목과 건축을 제외하고 설계와 설비공급, 기계·전기공사를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포스코가 사업경험이 없다 보니 토목과 건축이 늦어져 공기가 지연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포스코건설이 토목과 건축을 다시 수행했으며, 돌관공사로 무사히 공기를 준수했다.

포스코건설 측에서도 실수가 있었다. 수주금액이 적어 사업비 규모를 맞추는 과정에서 중국으로 많은 설비를 발주했다. 그 결과 품질문제가 발생해 시운전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자초했다.

 

# 베트남 냉연, 해외 최초 단독 EPC 수행
포스코 베트남 냉연공장 전경

포스코 베트남 냉연공장 전경

포스코-베트남냉연공장은 일본 아시아특수제강이나 멕시코 CGL과 비슷한 시기에 착공·준공된 프로젝트로,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앞서 두 프로젝트보다 베트남 냉연공장이 좀 더 드라마틱하고 의미도 남달랐다.

베트남 냉연공장은 포스코가 동남아 고급 철강 수요를 겨냥해 동남아 최대 규모로 계획한 프로젝트였다. 연산 120만 톤 규모의 PL/TCM 1기, 연산 70만 톤 규모의 CAL 1기, RCL/CPL 각 2기와 유틸리티 설비를 신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호치민에서 남쪽으로 125km 떨어진 붕따우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사업비는 약 2억 2465만 달러 규모였다.

2007년 8월 착공, 2009년 9월 준공된 이 프로젝트는 착공부터 난관이 많았다. 우기를 맞아 빗물과 사투를 벌였으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부지가 초 연약지반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포항과 광양에서 겪어보지 못한 난관으로, 냉연공장이 위치한 강변 맹그로브 숲 늪지의 부지는 갯벌보다도 더 안 좋다는 강벌이었다.

이대로는 결코 공기를 맞출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정밀조사에 착수했다. 정밀조사 결과 포항, 광양과 같은 지하구조물 시공으로는 공기, 비용, 안전성 측면에서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추가 경비를 감수하고 지하구조물 설계를 변경했다. 구조물 레벨을 4~5m 상향으로 설계 변경하고, 가설토류벽 없이 오픈 굴착공법을 적용했다. 최초로 시도된 지하구조물의 상향으로 압연기(TCM), 산세(PL), 소둔(CAL) 설비 등의 구조물이 지상에 떠 있는 형태가 됐다.

구조물 레벨의 상향으로 핵심 리스크는 해결책이 나왔으나, 막상 굴착에 착수하고 보니 파일 변이로 인한 전도사고가 발생함에 따라 연속 시공이 불가능했다. 이 역시 원인은 연약지반에 있었다. 설계 검토 끝에 부지 레벨을 1m 상향해 굴착 레벨 깊이를 1m 줄임으로써 파일 변이를 막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설계 변경으로 연약지반 문제를 해결했지만, 1개월의 공기연장이 발생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24시간 철야작업에 들어갔으며, 주요 공사에는 국내 기술진을 투입했다. 이 같은 노력 덕에 잃어버린 1개월의 시간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사전준비가 미흡했다. 현지조사를 통해 연약지반을 미리 확인했더라면 설계 변경이라는 이중고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에 글로벌 프로젝트 조직을 갖추지 못한 점도 아쉬움이었다. 이런 문제들로 발주처와 갈등을 빚으면서 결국 현장소장이 교체돼 내가 후임으로 왔다.” (임재신 상무)

토건공사에서 리스크가 우기와 연약지반이었다면 기전공사에서는 정밀시공과 품질관리가 리스크였다. 베트남 현지의 건설 인프라 취약으로 품질확보의 어려움이 예상됐다. 현지 시공업체의 제철설비 경험이 전무했으며, 플랜트 시공에 경험 있는 기능인력도 부족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스코건설은 주요 설비를 국내업체에게 맡기고, 현지 인력에 대한 기능교육을 강화함으로써 기전공사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기전공사에서 위기를 넘기나 싶었으나, 수전공사에서 1개월의 공기연장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정도면 베트남에서는 매우 선방한 것이었다. 통상 베트남에서는 유럽이나 일본 기업이라도 기후와 지역 특성상 1년 정도의 공기지연이 기본이었다. 베트남 전력청도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수전을 요청해오면 6개월 늦게 넣어주는 것이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이 같은 관행을 막고자 포스코건설은 수전공사를 앞두고 전력청 간부들을 현장으로 초청해 설명회를 개최했다. 현장 실무진들은 전력청 간부들에게 포스코건설의 전통이 철저한 공기준수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현장을 둘러본 전력청 인사들은 빠른 진행 속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를 계기로 포스코건설은 그 동안의 관례를 깨고 빨리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특히 공기준수 전통이 알려지면서 베트남 사회에서 포스코건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1개월 정도의 공기연장은 이후 철야작업으로 거뜬히 만회했다. 2009년 9월 마침내 초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최초의 공기 준수에 성공하고 경제적 운영으로 수익성을 확보하는 등 포스코-베트남 냉연공장 신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베트남 냉연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성과는 당시로서는 해외 최초 단독 EPC 수행이었다. 더구나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CAL 핵심설비의 자력설계와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냉연공장 EPC 기술력을 세계적으로 과시했다.

2009.7.23 이란 타바존 화입식 초도 출선

2009.7.23 이란 타바존 화입식 초도 출선

한편 1999년 국내 최초 제철 플랜트 수출로 관심을 모았던 이란 타바존 프로젝트가 이후 10년만인 29.2009년 7월 고로에서 첫 쇳물을 생산하면서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공기지연의 원인은 발주처의 자금 부족이었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EP를 맡아 시공이 끝날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계속 기다렸다. 반면 시공을 맡은 현지업체는 공사대금이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며 공기를 지연시켰다.

타바존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성과는 신뢰구축이었다. EP 중에서도 포스코건설은 고로와 소결을 맡았고, 코크스는 우크라이나가 맡았다. 그리고 중국이 발전을 담당했다. 이 세 외국기업 중 중국과 우크라이나는 자금조달이 늦어지자 미련 없이 이란에서 철수했다. 오직 포스코건설만이 고로에서 쇳물이 솟아질 때까지 남아 책임을 완수했다.

그 결과 이란 사회가 크게 감동하며 포스코건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었다. 아쉬운 점은 이런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2006년경 3억 3000만 달러 규모의 이란 철강플랜트 수주에 성공했으나,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제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향후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들의 신뢰가 변치 않는 한 미국과의 긴장이 사라지고 새롭게 봄이 오면 이란의 제철 플랜트시장은 가장 먼저 포스코건설을 초대할 것이다.

 

 

<생각하는 페이지>
건축 분야 부산 불패신화에 대한 오판과 교훈

주택사업 성공에 힘입어 2000년대 들어서며 건축 분야가 포스코건설의 성장을 주도했다. 건축 분야는 어떤 사업 분야보다도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괄목할 만한 성과들도 많이 도출해냈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성과 이면에는 수행 프로젝트 가지 수가 많았던 만큼 실패나 실수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 지역이었다. 포스코건설은 부산 주택시장에서 센텀파크를 시작으로 아델리스, 센텀스타 등으로 불패신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서면 피에스타와 아이온시티에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다.

두 프로젝트 모두 시행사 운이 없었다. 미분양에 이은 시행사 부도로 포스코건설이 건물을 떠안아야 했으며, 미분양 해소와 건물 매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이 두 사건의 교훈은 치밀한 사업성 분석의 중요성이었다. 사전에 시행사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해볼 필요가 있었고, 부산지역 상업시설에 대한 시장조사도 선행돼야 했다. 당시 부산지역 상권은 불황이 심해 분양의 무덤으로 불릴 만큼 상업시설 투자 여건이 좋지 않았다.

경기도 오포아파트 역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실패사례였다. 2003년 토지를 매입하고 사업추진에 나섰으나, 첫 시작부터 인허가 과정이 쉽지 않았다. 2005년경 인허가 로비 의혹으로 곤혹을 치르기도 했으며, 2009년에는 성급하게 사업승인을 예측하고 분양에 나섰다가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토지매입 7년 만에 사업계획 승인이 났으나, 개발사업의 장기간 정체로 사업추진 여건이 악화됐다. 그 동안의 금융비용을 감안한다면 고분양가 책정이 불가피했으나, 부동산 침체로 미분양이 우려됐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사업구조를 변경하는 등 사업정리 수순을 밟았으나, 2012년 함께 사업을 추진했던 정우건설의 법정관리와 자금보충 약정에 덜미가 잡혀 또 한 번 손실을 보았다. 이 사건에서는 복잡한 사업추진 과정에서 진작 결단을 내리고 신속히 부실을 털어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었다.

플랜트 분야는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사우디아라비아 하디드사 CCL, 인도 세일사 및 이스코사 고로 프로젝트 등이 주요 실패사례로 꼽혔다. 이들 프로젝트에서는 현지 국가 문화 분석의 중요성이 소중한 교훈이었으며, 해외 실적에 대한 성급한 판단이 뼈를 깎는 반성 요인이었다.

토목환경 분야는 본문에서 언급했던 베트남 랑~호아락 고속도로, 카이맵 국제항만공사 외에 나이지리아 철도, 고양시 환경플랜트 등도 속을 많이 썩였던 프로젝트였다.

2006년경 포스코건설은 나이지리아 철도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철저한 사전준비와 함께 신속히 현지법인을 설립하는 등 많은 공을 들였다. 정부에서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이지리아를 방문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수주계약 직전까지 갔던 이 프로젝트는 중간에 중국기업이 끼어들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차관 30억 달러에 눈이 먼 나이지리아 정부가 포스코건설과의 계약을 뒤집어버렸다. 포스코건설은 2단계 사업이라도 건지고 싶어 재차 협상을 시도했지만, 한번 공짜 맛을 본 나이지리아 정부는 중국의 차관 제공을 예로 들며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눈물을 머금고 나이지리아에서 철수했다.

고양시 환경플랜트는 설비품질이 문제였다. 준공 후 성능 미달로 개보수를 실시했으나, 그래도 당초 약속했던 성능이 나오지 않았다. 이를 두고 시공을 맡았던 포스코건설과 운영을 담당했던 한국환경공단 간 공방이 벌어졌다.

한국환경공단은 설비의 성능 미달을 주장했으며, 포스코건설은 운영미숙과 쓰레기 질의 불량이 성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준공 2년이 지나도록 고양시는 공사비 지급을 거부했고, 이는 법정 소송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 사건의 교훈은 신공법 도입 때의 사전 철저한 검증 작업의 중요성이었다. 마땅히 그랬어야 할 이 같은 과정을 소홀히 해 포스코건설은 엄청난 사후 관리비용을 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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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3. 에너지와 플랜트의 도전, 동남아 진출과 일관제철소 꿈 이루다

# 칠레에서는 포스코건설이 한국기업 넘버 원으로 통한다

2010.3.30 칠레 산타마리아 발전소 계약식

건축과 토목 분야가 베트남에서 건설한류 전파를 주도했다면 에너지 분야는 중남미에서 한류 전파에 앞장섰다. 포스코건설은 칠레 벤타나스 성공신화를 바탕으로 캄피체, 앙가모스, 엘살바도르에 이어 산타마리아Ⅱ, 코크런, 카스틸라 석탄화력발전소 건설공사를 연속으로 수주했다.

2010.3.30 칠레 산타마리아 발전소 계약식

2010년 3월 수주한 산타마리아Ⅱ는 사업비 7억 달러 규모의 발전용량 400MW급 석탄화력발전소였다. 발주처는 칠레 2위의 전력생산업체인 콜번사이며, 발전소의 위치는 산티아고에서 남서쪽으로 약 450km 떨어진 항구도시 코로넬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수주 배경은 벤타나스 후광이었다. 산타마리아Ⅰ 발전소는 벤타나스와 함께 착공에 들어갔으나, 벤타나스만 준공에 성공하고 산타마리아Ⅰ은 시공을 맡았던 유럽업체가 중도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콜번의 경영층이 도움을 요청해왔고, 포스코건설의 기술력으로 마침내 산타마리아Ⅰ 발전소가 준공에 성공했다. 따라서 산타마리아Ⅱ는 산타마리아Ⅰ에 대한 감사의 선물이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다른 입찰 참가자보다 가격이 높았으나, 콜번측은 이를 프리미엄으로 인정하고 포스코건설을 선택했다.

2011년 11월 칠레 발전사업자 코크런으로부터 수주한 코크런 발전소는 앙가모스 옆 부지에 266MW급 석탄화력 발전설비 2기를 신설하는 EPC 턴키 프로젝트였다.총 사업비는 9억 달러 규모였다.

산타마리아Ⅱ와 코크런에 이어 2012년 6월 포스코건설은 브라질계 다국적 전력회사인 MPX사로부터 카스틸라 발전소를 수주했다. 사업비는 15억 달러 규모이며, 350MW 석탄화력 발전설비 2기를 신설하는 EPC 턴키 프로젝트였다.

카스틸라 역시 산타마리아Ⅱ처럼 벤타나스 후광이 수주 배경이었다. 벤타나스의 성공을 지켜본 MPX는 포스코건설이 자신들의 프로젝트 입찰에 참여하길 원했다.

그러나 벤타나스의 발주처였던 AES가 자사 발전사업에만 집중해줄 것을 요구했고, 포스코건설 역시 벤타나스에 이어 캄피체와 앙가모스를 수행하느라 MPX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앙가모스의 성공적 준공 이후 포스코건설은 마이웨이를 선언하고 MPX의 카스틸라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입찰 결과 가격이 경쟁자였던 SK건설보다 3000만 달러가 더 높았는데도 MPX는 포스코건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산타마리아Ⅱ와 마찬가지로 최고 EPC 기술력에 프리미엄을 인정한 것이었다.

한편 벤타나스 성공신화에 이어 앙가모스 발전소가 또 하나의 성공신화를 만들어냈다. 2011년 11월 성공적인 준공으로 칠레 사회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어려움이 많았던 프로젝트였다. 그 중에서도 칠레 대지진과 근로자 파업이 가장 힘들었다. 그럼에도 조기 준공의 성과를 달성해 발주처로부터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종규 상무)

2010년 2월 발생한 칠레 대지진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이 대지진으로 칠레 연안에는 쓰나미가 덮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524명이 사망하고 31명이 실종됐으며, 300억 달러의 재산 피해가 났다.

해안에 인접한 벤타나스 현장에도 초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공사현장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최고의 내진 설계를 한 포스코건설의 품질 시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칠레 대지진은 공사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위기이면서 포스코건설의 기술력을 알리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대지진으로 인한 아름다운 일화도 있었다. 지진이 발생하자마자 포스코건설은 앙가모스 현장의 현지 근로자들에게 격려금을 나눠주고 대지진이 발생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뿐만 아니라 포스코건설 직원들도 피해 현장으로 달려가 위문품을 전달하는 등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에 칠레 사회가 큰 감동을 받았고, 피해복구 이후 고향에서 돌아온 현지 근로자들 역시 감사의 표시로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45일의 공기 지연은 막을 수가 없었다. 공기 지연을 만회하기 위해 포스코건설은 밤낮을 잊은 채 돌관공사에 들어갔다.

지진의 위기를 넘기자 2010년 8월 노조파업이란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어려운 상황을 맞아 포스코건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최고의 법률팀으로 현지 법원으로부터 불법파업 판결을 얻어내 합법적 해고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결과 3일 만에 노조와의 협상이 타결돼 빠른 시일 내 공사를 정상화시킬 수 있었다.

앙가모스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성과는 조기 준공이었다. 지진과 노조파업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포스코건설은 조기 준공은 물론, 500만 시간 무재해 기록을 세워 발주처로부터 약 70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았다.

그리고 환경과 안전 등을 포함한 각종 규제가 유럽 선진국만큼이나 까다로운 칠레 정부의 인허가 기준을 만족시켜 칠레 사회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얻었다.

특히 벤타나스에 이어 앙가모스에서도 성공신화를 창출해내면서 칠레 사회에서 한국기업에 대한 인지도가 바뀌었다. 한국기업이라면 삼성과 LG만을 떠올리던 칠레인들이 앙가모스 이후 포스코건설을 한국 최고기업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발전플랜트 나비효과, 중남미 날개짓에 이스라엘이 들썩이다

칠레에서 포스코건설의 활동은 금방 입소문을 타고 중남미로 퍼져나갔다. 입소문의 진원지는 KOTRA로, 포스코건설의 칠레 활약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이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나라가 페루였다. 당시 페루 정부는 경제성장으로 2017년까지 매년 10%씩 전력수요 증가가 예상됨에 따라 민간발전사업자를 통한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들 발전사업자 중 이스라엘 인키아에너지사의 페루 현지법인 칼파제너레이션이 칠레에서의 활약상을 듣고 포스코건설에게 입찰참가를 요청한 것이었다.

“2008년 11월경 사업정보를 입수하고 페루로 날아가 보니 이미 지멘스와 한국기업으로는 H사가 한창 물밑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H사가 우리 실적을 자기네 실적으로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 가장 먼저 경쟁에서 탈락했다. 지멘스의 경우 그 동안 페루에서 폭리를 많이 취해 기업이미지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경쟁에 뛰어들었다.” (김원석 상무)

페루 칼파 발전소

페루 칼파 발전소

칠카우노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

칠카우노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

2009년 9월 경쟁입찰에서 포스코건설은 세계 유수의 경쟁사인 아벤고아, 지멘스 등을 제치고 사업비 3억 5000만 달러 규모, 발전용량 830MW급의 칼파 LNG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이 프로젝트는 페루 리마에서 약 62km 떨어진 칠카에 위치한 기존의 발전시설을 복합발전시설로 개조하는 것이 주요 사업내용이었다.

특히 칼파 발전소 수주는 국내 건설사 가운데 첫 페루 에너지시장 진출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칼파에 이어 포스코건설은 칠카우노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에도 도전했다. 프랑스 GDF 수에즈사의 페루 현지법인 에네루수르사가 발주한 이 프로젝트는 사업비 2억 9000만 달러 규모, 발전용량 810MW급의 LNG 복합화력 건설사업이었다.

칼파와 칠카우노 발전소는 각각 2012년 8월과 11월에 성공적으로 준공됐으며, 특히 칠카우노 발전소는 조기 준공의 성과도 달성했다.

칼파 발전소 수행 과정에서는 중남미 EPC 중견기업 산토스CMI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산토스CMI는 칼파 프로젝트에서 협력사로 참여 중이었는데, 향후 성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포스코건설에게 M&A를 요청해왔다.

이 회사는 2010년 기준 매출 1920억 원을 올린 에콰도르 최대의 플랜트 시공업체로, 1994년 설립 이래 중남미 18개국에서 발전, 화공, 토목 등의 분야에서 130여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수행해왔으며, 미국 GE사의 최우수 협력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포스코건설은 2020 싱크포워드 비전에 따라 산토스CMI 인수를 결정했다. 싱크포워드 비전에서 중남미는 포스코건설이 선택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실제 해외사업에서도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그러나 프로젝트 수가 증가할수록 지리적, 언어적, 환경적 문제 해결이 선결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현지화 전략의 일환으로 산토스CMI 인수를 결정했다.

칠레에서 활약이 입소문을 타고 이웃나라 페루로 날아가더니, 이번에는 페루에서 활약이 입소문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을 가로질러 이스라엘까지 닿았다.

입소문의 진원지는 칼파의 발주처 칼파제너레이션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본사 인키아에너지사에 포스코건설의 활약상을 소개했고, 이에 인키아는 포스코건설을 이스라엘까지 불러들여 프로젝트를 맡겼다.

이스라엘 로템 복합화력발전소

이스라엘 로템 복합화력발전소 전경

R 프로젝트라 명명된 이 사업은 네게브 사막 미소르 로템 산업지역에 427MW급의 복합화력발전소를 짓는 신설사업이었다. 2010년 9월 착공, 2013년 7월 준공됐으며, 이스라엘 최초의 민간발전사업이란 점에서 지역사회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스라엘에 첫 진출한 포스코건설은 발전소 건설 과정에서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우선 철저한 사전조사와 엄정한 평가를 통해 우수 현지업체를 발굴했으며, 또 설비의 운송기간 및 비용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발굴해냈다.

“낯선 언어인 히브리어를 접해야 하는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까다로운 규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지 적응을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제외근거를 마련해서 인허가 관련 관공서, 발주처, 현지 설계사들을 설득, 설계변경 승인을 얻어냈다. 그 결과 이익률을 크게 개선시킬 수 있었으며, 회사가 뽑은 2011년도 최우수현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우희성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이 같은 성과에 이스라엘 사회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대용량의 발전소가 한 점의 오차도 없이 준공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포스코건설의 기술력에 크게 감탄했다. 포스코건설로서는 입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한편 2011년 2월 산토스CMI 인수이후 포스코건설은 자사가 수행 중이던 중남미 프로젝트에 산토스CMI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신규사업 발굴에서도 상호 협력해 효과적인 아이디어를 모았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페루 노도 발전플랜트였다.

당시 페루 정부는 향후 남부지역에서 증가하는 전력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2단계에 걸쳐 총 2000MW의 발전소 건설을 계획했다. 이 계획에 따라 페루 현지 발전회사인 싸마이사가 리마에서 약 1055km 떨어진 남부지방 모옌도에 사업비 3억 달러 규모, 발전용량 720MW급의 노도 가스화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포스코건설은 2013년 10월 프로젝트 정보를 입수하고, 산토스CMI와 공동으로 이 프로젝트 수주에 나섰다. 이 사업에서 포스코건설은 설계와 설비공급을, 산토스CMI는 시공을 수행하기로 했다.

경쟁입찰에서는 독일의 지멘스, 스페인의 아벤고아, 테크니카스 레우니다스 등과 치열한 경합을 펼쳤다. 그 결과 2014년 1월말 포스코건설이 수주에 성공하며 중남미 에너지 플랜트 강자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노도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성과는 수익성과 성장성을 동시에 확보한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최저가 낙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의 입찰경쟁에서 EPC 기술력을 당당히 인정받아 이 사업을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수주했다.

또 산토스CMI와 동반 협력을 통해 수주 창출에 성공한 것 역시 큰 성과였으며, 향후 발주 예정인 2단계 사업 수주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한 점도 나름 의미 있는 성과였다.

 

# 동남아 발전플랜트 진출 모색과 사업영역 다양화

칠레와 페루에서 EPC 기술력을 크게 인정받았지만, 2010년 이후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중남미 블루오션에 이상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환경문제로 산타마리아Ⅱ와 카스틸라 석탄화력발전소 건설공사가 중단됐으며, 칠레 산업의 중심이자 발전소의 최대 수요자였던 광산산업 역시 구리 가격 하락으로 침체기를 맞았다. 칠레 석탄화력을 뒤로 하고 페루 가스화력발전으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만족할 만큼의 프로젝트 물량이 나와 주지 않았다.

성장 정체를 타개할 특단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에 에너지 분야는 자신만의 강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칠레에서 터득한 석탄화력 기술력에 최고 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강점을 살려나갈 메이저 시장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동남아시아를 선택하고 사업발굴에 나서기 시작했다.

에너지 분야 해외사업 강점인 석탄화력 외에도 포스코건설은 중유발전, 수력발전 등에서도 성과를 냈다. 이라크 쿠르드 중유발전은 국내 에너지사업부서가 한국석유공사를 통해 발굴해낸 사업이었다.

2008년 한국석유공사는 쿠르드 자치정부와 지역 내 유전개발 합의 과정에서 발전소 건설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2012년 8월 포스코건설은 전체 7억 달러 규모의 이 사업을 한국석유공사를 통해 수주함으로써 중동 발전시장에 첫 진출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포스코건설의 임무는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 수도 아르빌에 300㎿급 화력발전소와 술라이마니야 지역에 400kV급 변압시설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중유발전에 이어 수력발전 해외진출에도 성공했다. 2013년 4월 포스코건설은 65MW급 규모의 라오스 남릭1 수력발전소 건설사업을 수주했다.

이 사업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포스코건설은 태국 국영에너지기업인 PTTI, 발전설비사인 HEC, 라오스 전력청 등과 NL1PC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사업비 1억 2000만 달러 규모의 이 사업은 BOT방식으로 추진되며, NL1PC법인이 준공 후 27년간 운영한 뒤 라오스 정부에 기부채납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 에너지 분야는 중남미 발전시장 위축에 대한 대안으로 성장 잠재력이 큰 동남아 시장 진출을 모색했으며, 아울러 수력, 풍력 등 사업군을 다양화하면서 사업영역 확대를 도모했다.

 

# 일관제철소의 꿈, 포스코-인도 하공정부터 시작

세계 최고의 제철 플랜트 기술력을 자랑하는 포스코건설에게는 못 다 이룬 꿈이 하나 있었다. 포스코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강의 제철강국을 이룩했지만, 허전한 그 무엇이 있었다.

포스코건설과 모기업 포스코가 꿈꾸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해외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이었다. 포스코는 포항과 광양의 일관제철소 성공신화를 기반으로 전 세계 곳곳에 포스코왕국 건설에 나섰으며, 포스코건설 역시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해외사업을 통해 실현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 꿈의 실현을 향한 도전 스토리는 먼저 인도에서 시작됐다. 2000년대 중반 포스코는 해외 첫 일관제철소 부지로 인도를 선택했다. 철강원료가 넘쳐나고, 거대시장을 보유한 나라 인도는 성장 잠재력도 높아 그만큼 사업기회 선점의 타당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 특히 포스코가 전략적으로 선택한 오디샤주에는 철광석이풍부하게 매장돼 있었다.

2005년경 포스코는 인도 오디샤주 정부와 연산 1200만 톤 규모의 일관제철소 건설을 위한 MOU를 체결하며 본격적으로 해외 일관제철소 도전에 나섰다. 2020년까지 12조 원의 투자가 예상되는 이 프로젝트는 한국기업의 해외 단일투자로는 최대 규모였으며, 인도에서도 외국인 직접 투자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포스코건설도 오디샤에 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포스코를 따라 인도에 진출하면서 일관제철소 건설의 부푼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이후 오디샤 프로젝트는 2014년까지 9년 동안이나 지지부진한 길을 걸었다. 일부 주민의 반대와 광물자원의 반출문제가 현지 법률과 마찰을 빚으면서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 같은 오디샤 프로젝트의 위축된 분위기는 2014년 1월 박근혜 대통령이 인도 국빈 방문을 통해 중앙정부에 강력한 협조를 요청하면서 반전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지난 9년간의 지지부진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포스코는 인도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디샤주 외에도 카르나타카주, 자르칸드주 등지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을 타진했다. 특히 상공정의 부진 타개를 위해 우선 하공정부터 건설 추진에 나서 마하라슈트라주 빌레바가드 산업단지 내에 부지를 확보했다.

마하라슈트라주는 폭스바겐, GM 등 세계 유수의 자동차사들과 타타자동차, 마힌드라마힌드라, 바자즈 등 인도 최고의 자동차사 및 부품사들이 포진한 인도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다. 포스코는 자동차강판 생산라인 건설과 함께 가공과 판매까지 최적화된 고객서비스 구축을 위해 자동차 및 전기강판 전문 가공센터인 포스코-IPPC를 시작으로 푸네, 델리, 첸나이, 하이데라바드 등지에 5개의 가공센터를 구축해나갔다.

2010.03.15 인도 포스코-마하라슈트라 CGL공장 착공식

2010.03.15 인도 포스코-마하라슈트라 CGL공장 착공식

포스코건설은 포스코-마하라슈트라 하공정에서 CGL과 냉연공장 건설을 수행하면서 아직 꽃 피지 못한 인도 일관제철소 건설의 아쉬움을 달랬다. CGL공장(2009.12~2012.5)은 사업비 1억 9000만 달러, 연산 45만 톤 규모였으며, 냉연공장(2011.5~2013.12)은 사업비 3억 달러, 연산 180만 톤 규모였다.

“CGL 현장은 우리 회사가 인도에서 처음으로 수행한 대형 공사였다. 가장 큰 어려움은 계절적 악조건이었다.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은 40도에서 50도를 육박하는 혹서기였으며,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은 몬순 기후로 우기의 계절이었다. 우리는 몬순 우기 때 지연된 공기를 혹서기 때 야간작업을 통해 만회하는 등 프로젝트의 무사 준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김노정 Director, 당시 인도CGL 현장소장)

 

# 멕시코 2CGL, “살아 돌아온 너에게 갈채를 보낸다

2009.08.24 멕시코 포스코 CGL 공장 준공식

2009.08.24 멕시코 포스코 CGL 공장 준공식

인도에서 포스코 CGL공장 건설이 한창일 때 지구 반대편 멕시코에서는 또 하나의 포스코 CGL공장 건설이 추진되고 있었다.

2009년 6월 멕시코 CGL공장 준공을 계기로 포스코의 멕시코 냉연강판시장 점유율은 단번에 40%대까지 치솟았다.⓺ 포스코-멕시코 CGL이 이처럼 중남미에서 선전하는 가운데 신일본제철과 현지 철강업체 테르니움사가 합작으로 CGL 및 냉연공장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포스코도 2CGL 추진을 서둘렀다.

포스코건설은 1CGL 때의 실패사례에서 교훈을 얻어 2CGL의 전체 EPC를 맡았으며, 설비공급도 품질이 우수한 한국업체 발주로 기준을 정했다.

그러나 경쟁자의 추격에 쫓긴 포스코로부터 무리한 임무가 떨어졌다. ‘신일본제철 프로젝트보다 먼저 준공하라’는 지시에 따라 공사기간을 21개월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체계가 가장 잘 갖춰진 국내에서도 통상 22개월이 기본이었다. 인도 CGL이 27개월이나 걸린 것만 봐도 해외사업에서 21개월은 무리한 일정이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포스코건설 내부에 있었다. 일관제철소의 꿈이 인도네시아와 브라질에서 한꺼번에 터졌다. 그러다 보니 쓸만한 대부분의 인력이 이 초대형 프로젝트로 불려갔다. 멕시코는 한 마디로 찬밥이었다. 파병할 인력이 부족해 신병들로 조직을 급조했는데, 심지어 현장소장도 차장급이었다.

2011년 8월 멕시코 프로젝트 수행 조직이 한국을 떠나던 날, 경영층의 심정은 어두웠다. 실패를 예감한 그들은 아들을 전장에 보내는 부모의 심정으로 무사 귀환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우려했던 대로 많은 실수가 발생했다.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기자재 공급의 지연이었다. 선박 수송과정에서 선적 명령이 잘못 나가 핵심설비가 1개월 보름이나 늦게 들어왔다.

이에 공기준수를 위해 돌관공사를 추진했는데, 그 비용을 고스란히 포스코건설이 물었다. 1CGL 때도 돌관공사를 했지만, 귀책사유가 포스코 측에 있어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귀책사유가 자신들에게 있었으니 손실은 손수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경험이 부족했던 젊은 요원들은 실패가 거듭될수록 단단해지고 더욱 성숙해져갔다. 그 결과 가장 어려움이 많았던 시운전 과정에서 ‘젊은 피’의 저력을 과시했다.

“갑작스런 집중 폭우로 지하구조물이 침수됐으며, 핵심설비마저 침수가 우려되자 우리는 인근의 양수기를 총동원했다. 겨우 위기를 넘긴 이후에는 폭우에 대비해 24시간 교대근무를 섰으며, 자다가도 천둥소리만 나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결과 끝까지 침수를 막고 시운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박재현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그러나 이 같은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2013년 6월 프로젝트 요원들은 준공을 코앞에 두고 현장에서 철수했다. 포스코가 경쟁자인 신일본제철의 파트너이자 현지 철강업체인 테르니움사로부터 제소를 당했고, 그 결과 현지 법원으로부터 반덤핑 예비판정이란 결정타를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60%의 관세 페널티로 냉연강판을 생산하면 오히려 적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포스코가 준공을 미룬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프로젝트 요원들은 준공 실패란 결과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모든 포스코건설 임직원들은 그들의 무사 귀환에 갈채를 보냈다. 모두들 결과보다는 과정을 높이 평가했고, 더욱 성숙해진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편 포스코-멕시코 2CGL은 법정공방을 슬기롭게 마무리하고 2014년 1월 말 마침내 준공됐다.2CGL 준공으로 포스코는 2009년 연산 40만톤의 1CGL에 이어 총 90만톤 규모를 갖춤으로써 현지기업 테르니움에 이어 멕시코 내에서 제2의 자동차강판 철강사로 부상했다.

 

# 중국보다 높은 가격으로 포머사 베트남 제철소 따내다

1954년에 설립된 포머사 그룹은 석유화학, 정유, 에너지, 섬유, 전자, 중공업, 자동차, 운송사업, IT, 철강 등 40여개 계열사를 보유한 대만의 대표 기업이었다. 포스코가 인도네시아에서 일관제철소의 꿈을 실현할 때 포머사는 베트남에서 그 꿈을 키우고 있었다.

포머사와 포스코건설의 인연은 2009년 포스코-베트남 냉연공장의 성공적 준공으로 시작됐다. 당시 베트남 중부 하띤성에서 연산 700만 톤 규모의 일관제철소 건설을 준비 중이던 포머사의 가장 큰 고민은 공기준수였다. 베트남에서는 유럽이나 일본기업도 기후와 지역 특성상 1년 정도의 공기지연은 관례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베트남 사회에서 포스코 냉연공장의 공기 내 준공은 신선한 화제로 회자됐으며, 포머사도 그 소문을 듣고 포스코건설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포머사의 요청에 2009년경 포스코건설은 하띤 일관제철소 설비공급 입찰에 참여했으나, 쓸쓸한 패배를 맛보았다. 성심을 다해 포머사를 지원했으나, 결과는 저가로 무장한 중국업체들의 독식이었다. 괜히 소중한 기술자료만 뺏기고 들러리를 선 꼴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2012년 시공관련 입찰이 시작되자 이때도 포머사는 포스코건설에게 참여를 권유해왔다. 입찰 참여를 놓고 내부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또 다시 중국업체들의 들러리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이번만큼은 철저히 준비해 제대로 한 번 해보자는 의욕도 흘러나왔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도전정신에 큰 의미를 두고 다시 한 번 입찰 참여를 결정했다.

중국업체들의 저가 공세에 맞서 포스코건설은 사전에 막강한 사업수행 체계를 구축했다. 본사, 베트남법인, 중국법인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연합작전을 펼쳤다. 본사는 총괄관리와 핵심부품 공급을, 베트남법인은 시공을, 중국법인은 자재공급을 맡기로 했다. 베트남법인의 철구공장 역시 철구 공급에 참여하기로 했다.

막강한 사업수행 체계로 입찰에 임한 결과, 포스코건설은 2012년 말부터 2013년 중반까지 원료처리설비, 열연공장, 화성공장 시공 계약권을 잇따라 따냈다.원료처리설비 공사는 사업비 4억 달러, 연산 700만 톤 규모였으며, 열연공장 시공은 사업비 2억 9200만 달러, 연산 530만 톤 규모였다. 화성공장은 사업비 7400만 달러로, 시간당 150만 N㎥의 가스를 처리할 수 있다.

베트남 하틴제철소 원료처리설비 공사현장

베트남 하틴제철소 원료처리설비 공사현장

베트남 하틴제철소 열연공장 공사현장

베트남 하틴제철소 열연공장 공사현장

당시 입찰에서는 포스코건설 내부 컨소시엄의 효과적인 역할 분담이 가장 큰 승리 요인이었다. 마지막까지 포머사 CEO를 설득한 것도 주효했다. 포스코건설은 포머사 CEO 설득 과정에서 자신들의 기술력과 사업관리 능력을 강하게 어필했다.

“중국업체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점도 효과가 있었다. 덤핑으로 계약을 처리하면 중도에 공사를 포기하는 사태가 올 것이라는 위협에 포머사가 크게 흔들렸다. 결국 중국업체보다 높은 가격을 써내고도 기술력과 사업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이호성 Director, 해외영업기획그룹리더)

포머사 프로젝트 외 포스코사업이 아닌 대외사업으로는 동티모르 시멘트 플랜트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동티모르 TL시멘트사가 발주한 3억 5000만 달러 규모의 사업으로, 2013년 12월초 수주에 성공했다. 특히 북동부 바우카우 지역에 연산 150만 톤 규모의 시멘트공장 건설이 주목적인 이 프로젝트는 신생국가 동티모르 내 최대 규모의 민간투자사업이란 점에서 현지 사회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 프로젝트의 수주 성공에는 서호주 대표 건설사인 BGC사와의 협력이 크게 기여했다. 발주처인 TL시멘트사는 BGC사가 100% 지분을 소유한 특수목적법인이었고, BGC사는 포스코건설의 호주 건축시장 진출의 파트너였다. 결국 포스코건설이 BGC사와 그 동안 서호주 페사 프로젝트 등 여러 사업을 통해 쌓아온 신뢰관계가 동티모르 프로젝트 수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었다.

 

# 은 이루어진다! 인도네시아 일관제철소

“이번 일관제철소는 한국의 기술과 인도네시아의 우수한 인적자원이 합쳐져 이뤄낸 성과이다. 포스코가 제철보국 이념으로 한국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듯 크라카타우포스코도 같은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

2013년 12월 23일,마침내 포스코건설과 포스코는 해외 첫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실현했다. 특히 포스코는 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인도를 연결하는 철강벨트를 완성함으로써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철강사로 한 단계 도약했다.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포스코 일관제철소는 포스코 70%, 인도네시아 국영 철강사 크라카타우스틸 30% 지분으로 설립한 합작법인이며, 제철소 부지는 자카르타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반텐주 찔레곤에 위치해 있었다.

건설계획은 1단계에서 조강 300만 톤급의 일관제철소를 건설하고 이어서 2단계에서 누계 600만 톤 규모로 완성한다는 내용이었다. 1단계의 규모는 고로, 소결, 코크스, 제강, 연주, 후판 등 6개의 주설비로 이루어졌으며, 그 외 15개의 부대설비로 구성돼 있었다.

총 사업비 30억 달러 규모의 1단계 일관제철소 건설에서 포스코건설은 EPC 일괄 턴키를 맡아 16억 8000만 달러를 수주했다. 포스코 패밀리도 동반 진출해 포스코에너지가 200MW급의 발전소 건설을 맡았으며, 포스코ICT는 IT통합운영시스템 구축을 담당했다. 포스코엠텍은 알루미늄 탈산제 생산시스템 구축을 맡았다. 그 외 284개나 되는 중소기업이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동반성장의 모델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초대형 프로젝트였던 만큼 인력의 투입도 대규모였다. 포스코건설에서는 건축을 뺀 모든 사업본부가 참여했다. 프로젝트 수행의 중심인 플랜트사업본부에서는 152명으로 가장 많은 인력이 투입됐으며, 에너지사업본부에서는 발전설비 공급을 위해 5명이, 토목환경사업본부에서는 배수종말과 급배수를 위해 3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현장 일평균 투입 인력만도 3100명에 이르렀다. 일관제철소 건설은 2010년 10월말 전체 규모 370헥타르에 대한 부지조성 착수에 이어 2011년 7월초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갔다.

“현장사무소 입구에 포항제철소 착공 때의 사진을 걸어놓고 실패하면 자바 해협에 빠져 죽자는 각오로 임했다. 우리와는 달리 사계절의 변화가 없는 기후와 이질적인 이슬람 문화에 초창기 직원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또 초창기 지역사회 현지화도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 사회공헌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김덕률 전무, 당시 사업단장)

현지 적응은 물론, 지역사회와의 유대강화는 프로젝트의 성공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현지의 많은 지역업체를 프로젝트에 참여시켰으며, 지역주민도 최대한 고용했다.

사회공헌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2개월 단위로 현장 인근 정화활동을 실시했으며, 긴급 구호키트를 지원하기도 했다. 대학생봉사단이 방문해 봉사활동과 함께 한류 전파에 앞장섰으며, 지역사회 5개 학교를 개보수하고 교육기자재도 지원했다.

건설 과정에서는 현지 적응 외에도 포스코 문화의 특징인 공기준수를 달성하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현지 파트너인 크라카타우엔지니어링의 사업경험 부족으로 공정에 차질이 발생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포스코건설은 설비별로 세부 공정을 검토하고 공기지연 만회 대책을 수립하는 등 현지 협력업체 중점 관리를 실시했다.

기자재공급의 지연과 품질 문제도 발생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3개월 단위로 선적과 반입 계획을 세웠고, 6개월 단위로 제작공정을 중점 관리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포스코건설은 1개월 공기단축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재무건전성 향상도 또 하나의 성과였다.

일관제철소 현장이 원가절감에 나선 배경은 계약금액 감소와 기전계약률 하락으로 매출이익률이 감소한 것이 주요 요인이었다. 이에 물량 최소화로 고로를 설계하고, 현장관리비 절감, 자재 통합구매 등을 통해 82억 원의 원가절감을 달성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에게 일관제철소의 꿈을 실현한 현장으로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아울러 후속 일관제철소 프로젝트인 브라질 CSP의 소중한 산 교육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실제로 브라질 CSP의 최고경영층 등 많은 인사들이 프로젝트 현장을 둘러보고는 일관제철소 건설에 대한 성공 확신을 얻기도 했다.

 

# 역대 최대 규모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에 화룡점정하다

2011년 12월 21일 수요일. 이틀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외환시장이 열렸다. 당초 북한 리스크로 환율이 급등할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환율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언론이 긴급 시황 속보를 타전했다.

“환율 하락, 포스코건설 수주 물량 유입!”

포스코건설이 수주한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프로젝트가 시작도 되기 전에 1조 원에 육박하는 선수금 20%가 외환시장으로 들어왔는데, 이것이 환율을 끌어내린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대한민국 해외 수주사상 단일 제철 플랜트로는 최대 규모 프로젝트의 위력이었다.

CSP는 브라질 최대 철광석 공급사인 발레가 50%. 동국제강이 30%, 포스코가 20% 지분을 투자해 설립한 합작법인이었다. 사업비 43억 4000만 달러 규모의 CSP 일관제철소는 브라질 북동부 세아라주 뻬셍 산업단지 내 위치하고 있었다.

사업 규모는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포스코 일관제철소와 비슷했다. 1단계에서 연산 300만 톤의 슬래브를 생산하는 일관제철소를 건설하고, 이어서 2단계에서 누계 600만 톤 규모로 완공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 공사현장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 공사현장

포스코건설이 수주한 1단계의 규모는 원료 및 소결, 코크스 설비, 고로, 제강, 연주, 발전 및 부대설비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설계, 기자재 공급, 시공, 시운전에 이르기까지 사업 전 단계를 일괄 수행하는 EPC 턴키 방식으로 이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후판이 빠지고도 인도네시아보다 비싼 이유는 현지 고물가 때문이었다.

포스코건설과 CSP와의 인연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철 플랜트 분야는 포스코 베트남 냉연공장을 성공적으로 준공하고 싱크포워드 비전에 따라 미래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포스코건설이 예측한 미래 전망은 어두웠다. 포스코의 설비투자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2015년쯤 제철 플랜트 시장규모의 축소가 예상됐다.

불투명한 미래 전망에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때마침 CSP를 준비하던 발레와 동국제강으로부터 타당성 조사 의뢰가 들어왔다. 용역비용이 170만 달러밖에 안 돼 일각에서는 ‘일은 많고 돈은 얼마 안 되는 용역을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부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그런데 사업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기회라 판단하고 타당성조사 의뢰를 받아들였다. 용역 수행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발레와 동국제강의 심중을 읽어냈다. 그들은 향후 CSP의 정상적인 조업을 위해 세계적 조업능력을 갖춘 포스코의 프로젝트 참여를 은근히 원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포스코건설은 포스코 설득에 나섰다. 분명한 사업 기회라고 강하게 어필했지만, 설득은 쉽지 않았다. 포스코는 남미의 강성노조에 대한 걱정과 함께 인도네시아 일관제철소 건설로 이중 투자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포스코건설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스코건설의 지칠 줄 모르는 공세에 결국 포스코는 투자결정을 위한 경영위원회를 개최했다.

“정준양 회장이 참석한 경영위원회에서 나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계속 설득했다. 나중에는 전체 사업비에서 5억 달러 정도의 20%만 투자하면 매년 15%씩의 이익을 보장하겠다고 큰소리까지 쳤다. 그러자 정준양 회장이 씨익 웃었다.” (김성관 사장)

포스코건설의 패기에 2011년 5월 포스코는 마침내 CSP 투자를 결정했다. 이후 CSP 일관제철소 수주를 위한 활동이 본격화됐는데, 계약이 성사되기까지 두 번의 고비가 있었다. 첫 번째 고비는 설계기준이었다.

국제 표준코드와 브라질 표준코드의 견적서 적용 차이가 30~40%나 나왔다. 포스코건설은 계약 막판에 브라질 코드로 변경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CSP측에서 반발하면서 협상 결렬의 일촉즉발 상황까지 갔다. 그래도 다행히 파국을 막고 가능한 부분은 국제 코드로 하고, 국가 인허가 사항에 관련된 부분에 한해서 브라질 코드를 사용하기로 합의를 보면서 포스코건설이 실속을 챙길 수 있었다.

두 번째 고비는 세금문제였다. CSP 일관제철소가 위치한 지역은 수출진흥특별지역으로 세금혜택이 있었다. 이에 CSP측이 세금절감을 위해 하도급 기성비 지급을 직접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자면 포스코건설이 매출을 잡을 수 없어 고스란히 세금을 물어야 할 상황이었다. 한 달에 걸친 양측의 실랑이 끝에 결국 서로의 요구를 반씩 들어주는 조건으로 무사히 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마침내 모든 협상을 끝내고 2012년 12월 중순 계약이 체결됐다.당시 계약은 포스코건설에게 남다른 의미가 많았다. 1998년 코브라스코 프로젝트 수행 이후 14년만의 브라질 재진출이었으며, 수주 금액은 포스코건설 20년 역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무엇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일관제철소 건설 경험을 가진 유일한 건설사로, 브라질 CSP 수주는 그 기술력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주변의 부러운 시선과 함께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철강 경기 하락에다 브라질 고물가 때문에 예상보다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할 것이란 예측이 나돌면서 경쟁력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사실 출발부터가 고난의 행군이었다. 인도네시아 일관제철소와 마찬가지로 163명이란 대규모 인력이 투입됐는데, 장장 35시간을 비행해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다. 4개월마다 한국을 오가면서 현장 인력 13% 정도가 늘 자리가 비어, 이를 대체하느라 토요일과 휴일도 잊은 채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본사는 고통분담과 배려 차원에서 12시간 차이의 낮과 밤이 바뀌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지 시차에 맞춰 영상회의를 실시했다.

착공도 쉽지 않았다. 수주에만 급급해 사전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발주처는 현지업체에게 하도급을 줄 것을 요구했고, 그들의 요구대로 현지업체들에게 견적을 받아보니 현지 물가를 고려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상치보다 200%~300% 이상의 견적이 나왔다. 출발할 때 주변의 우려가 현실화되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전혀 터무니없는 가격도 아니었다. 브라질은 국제 규격보다 더 엄격한 ‘브라질 규격’을 적용하는데, 발주처 발레는 브라질 규격보다 더 엄격한 ‘발레 규격’을 적용했다. 그러다 보니 그만한 견적을 뽑아야만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인식이 현지에 팽배해 있었다. 결국 한국업체 하도급으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그 과정에서 발주처를 설득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2012년 7월 착공 이후 어려움으로는 엄격한 규정과 환경규제가 있었다. 엄격한 안전 규정으로 작업중지 명령을 받기도 했으며, 현장사무소 건설 과정에서는 주변에 잡목을 제거했다가 형사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작업하다 벌집이 나오면 안전한 곳으로 무사히 옮겨놓아야 환경단체로부터 고소를 피할 수 있었다.

강성노조도 큰 어려움이었다. 2013년에만 두 차례 파업이 있었다. 달래다 지쳐 마침내 법에 호소하기에 이르렀고, 법원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불법파업을 선언했다.

통관문제도 하나의 큰 이슈였다. 아무 이유 없이 40일이나 선박을 부두에 묶어놓고 통관을 시키지 않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발주처에게 공기연장을 신청하고 연장비용을 청구하며 맞섰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소통의 부재에서 출발했다. 쌍방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 서로 평행선을 달렸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뢰 회복이 시급한 시점이었다.

2013년 말을 고비로 그런 노력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먼저 포스코건설은 과정을 중시하는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엄격한 규정에 익숙해져갔다.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해외구매 통합 등 경비절감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하도급 90%를 차지하는 한국 협력업체들의 프로젝트 수행 선전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했다.

발주처도 포스코건설의 노력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CSP의 경영진 교체를 통해 쇄신에 나섰으며, 프로젝트의 성공적 완수를 위해 포스코건설의 요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양측의 이 같은 노력으로 CSP 일관제철소 프로젝트가 순항하는 가운데 2013년 11월말 브라질에서 또 하나의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브라질 CSS사로부터 사업비 6억 달러 규모의 하공정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열연 20만 톤, 냉연 60만 톤 등 총 80만 톤 규모의 판재류를 생산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주요 공급설비는 열간 압연기, 냉간 압연기, 부대설비 및 설치공사 등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수주 배경은 연산 350만 톤 규모의 광양 4열연 신설공사의 경험과 기술력 확보가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무엇보다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는 포스코건설 일관제철소 건설의 화룡점정이었고, 해외사업 20년 역사상 최고의 걸작이었다. 이로써 포스코건설은 세계 유일의 일관제철소 건설사로서 제철 플랜트 분야 글로벌 정상에 올라섰다.

 

 

<생각하는 페이지>

호주 로이힐 프로젝트 수주 실패의 반성과 교훈

호주 로이힐 프로젝트 수주 실패는 포스코건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인도네시아와 브라질 일관제철소 계보를 잇는 메가 프로젝트로서, 포스코건설이 강한 의욕을 가지고 열정을 쏟은 프로젝트였다.

너무나 기대가 커 아쉬움이 많았던 포스코건설은 또 다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지기 위해 389쪽에 이르는 완료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특히 로이힐 수주 실패는 포스코건설 20년사 서술에 영향을 미쳤다. 실패의 역사도 가감 없이 기록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호주 건설시장은 높은 물가, 폐쇄적인 인력시장, 길고 까다로운 인허가, 강력한 노조 등 외국 건설사들의 시장진입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대부분 대규모 투자사업이어서 추진 과정에 많은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시장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포스코건설은 로이힐 프로젝트 준비 과정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다.

로이힐의 시작은 포스코가 열었다. 2010년 3월 포스코는 철광석 원료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호주 로이힐 광산개발에 1차 투자를 결정하고 투자협약서를 체결했다. 이 투자협약서 내용 중 투자자의 자회사에게 프로젝트에 기여할 기회를 우선적으로 부여한다는 조건에 따라 포스코건설이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포스코건설이 강한 의욕을 갖고 참여했지만, ECI(Early Contractor Involvement) 과정이 쉽지 않았다. ECI는 호주만의 독특한 입찰방식으로, 본 공사 계약 전 입찰업체가 공사 수행방안과 공정계획 수립, 시공비 확정, 사전 설계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이었다. ECI 과정에서는 10조 원에 이르는 사업비 중 70%에 이르는 대규모 자금에 대한 금융조달 계획수립이 가장 힘들었다. 이로 인해 투자자 지분 변경, EPC 사업구도 변경, 계약조건 변경, 파이낸싱 시장상황 변동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발생해 EPC 계약이 계속 지연됐다.

더구나 가격 경쟁을 노리고 발주처가 삼성건설을 끌어들이면서 포스코건설의 위상이 크게 위축되더니, 결국 2013년 4월 입찰경쟁에서 가격에 밀려 포스코건설이 삼성건설에게 무릎을 꿇었다.

수주 실패의 근본적인 요인은 신규 진출시장에 대한 전략 부재였다. 그 결과 EPC 수행 구도에 맞는 파트너사 선정이 지연됐으며, 무엇보다 현지업체와 최저 가격 도출에 실패한 것이 뼈에 사무치는 아쉬움이었다. 발주처 기대에 호응하는 가격을 제시하고 신뢰를 얻었다면 ECI가 그렇게 길어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삼성건설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주 실패 이후 완료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EPC 수행 업무시스템 구축과 현지화 전략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호주지역 사업추진 특징에서 발주처가 요구하는 사업자의 능력은 사업기획에서 자금조달, 운영관리까지 매우 포괄적이었다. 어찌 보면 이 같은 호주시장의 특징은 포스코건설이 추구하는 펩콤(PEPCOM)으로서, 로이힐 프로젝트가 팹콤의 첫 시험무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포스코건설은 펩콤은커녕 EPC 통합관리 능력마저 아직까지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창립 20주년을 맞아 포스코건설은 펩콤보다는 본원경쟁력과 EPC 역량확보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기본으로 되돌아가 EPC부터 갖춘 다음 펩콤에 도전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현지화에도 문제가 많았다. 현지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발주처와 갈등을 빚고, 능력 있는 현지업체 발굴에 실패하는 등 치밀한 사업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포스코건설은 EPC 종합관리 능력 확충과 함께 현지화된 프로젝트 수행계획 수립을 선결 과제로 꼽았던 것이다.

4-4

Story4. 제철 플랜트, 세계 유일의 일관제철소 기술력을 다져나가다

# 광양 5소결 신설, 공기단축과 원가절감 두 마리 토끼 쫓다

해외에서 일관제철소의 꿈을 이룩한 이 시기 제철 플랜트 사업실적은 변동이 심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반짝 위축된 경기는 2010년부터 곧바로 회복됐다. 2011년의 경우는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 효과로 사업실적이 역대 최고를 기록하며 회사를 업계 4위까지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후 철강 경기가 하락하며 그 실적이 급격히 떨어졌다.

비록 변동이 심한 널뛰기 장세였으나, 이 시기 국내 제철 플랜트는 세계 유일의 일관제철소 건설 기술력을 더욱 다져나갔다. 광양 5소결 신설, 포항 4선재 신설, 광양 4열연 신설 프로젝트 등을 통해 제선과 열연 분야의 기술력을 더욱 다졌다. 제2공장 준공으로 상업화에 성공한 파이넥스는 제3공장 준공으로 경제성을 확보했다.

광양 5소결 신설사업(2009.8~2011.2)은 5고로 신설 이후 공정별 일대일 체계를 추구하는 포스코의 과제였으며, 포스코건설로서는 소결 EPC 기술력을 확보할 좋은 기회였다. 사업비 3102억 원 규모의 이 프로젝트는 화상면적 600㎡의 세계 최대급 소결기를 신설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신설 외에도 포스코건설은 포스코로부터 임무 하나를 더 부여받았다. 당시 포스코는 소결 부족으로 급하게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최대한의 공기단축을 요구했다.

회사로부터도 과제가 떨어졌다. 계약 당시 가격 분석 과정에서 이 프로젝트는 적자가 예상했다. 그러나 신설사업 EPC 기술력 확보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결국 회사로부터는 원가절감이라는 지상과제를 부여받게 된 셈이었다.

공기단축을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는 포스코건설, 포스코, 협력업체 등 프로젝트 관계자들의 협업체계 구축이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버추얼팀을 구성하고 포스코의 참여를 요청했다. 요청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우선 소통의 중요성을 알렸으며, EPC 시행사 중심으로 팀이 하나로 움직여야 의사결정이 빨라지고, 공기지연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발주처로서 쉽지 않은 결단이었지만 포스코는, 공기단축을 위해 과감하게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처음으로 우리가 주도하는 버추얼팀이 만들어졌으며, 이 같은 협업체계의 효율적 운영은 공기단축의 대표적 성공요인이었다.” (김종래 상무, 당시 현장소장)

기자재 국산화 비율을 높인 것도 공기단축에 크게 기여했으며, 포스코건설 대표적 혁신활동인 VP 활동도 크게 한몫 했다. VP 활동에 협력업체도 참여했는데, 이런 활동을 통해 리스크를 사전에 제거함으로써 공사 진행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회사의 지상과제인 원가절감을 통해서도 공기단축을 실현했다. 우선 재하시험에 기초한 경제적 파일 설계로 원가절감과 공기단축의 성과를 얻었다.

포스코건설은 재하시험을 통해 토건 기초공사에 사용되는 파일이 그 동안 너무 많은 양이 적용됐음을 입증했다. 따라서 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파일 수를 대폭 줄였으며, 지하배수로(Culvert)에는 아예 파일을 없앴다. 아울러 기존 파일을 재사용했다.

그 결과 공기단축은 물론, 123억 원의 원가절감 효과를 얻었다. 그밖에 지하배수로 축소를 통해서도 공기단축과 원가절감 성과를 달성했다.

특히 세계 최단기간 공기단축이 가장 큰 성과였다. 이에 광양 5소결 신설 프로젝트가 포스코가 시행하는 성과공유제(Benefit-Sharing)의 최초 수혜 대상이 됐다. 포스코건설로서는 소결 EPC 기술력 확보가 가장 큰 성과였다.

 

# 3세대 슬림 파이넥스 3공장 준공, 해외 수출길 열다

파이넥스의 역사는 연구소 실험실에서 출발했다. 1992년경 포스코의 연구원들은 15톤의 소규모 실험로를 가지고 파이넥스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99년 8월 150톤 규모의 파일럿 플랜트가 완성되자 포스코 내부에서는 상업화에 대한 꿈이 부풀어 올랐다.

이후 2003년 6월 60만톤 데모 플랜트 준공으로 포스코는 준상업화에 성공했으며, 그들은 이를 1세대 파이넥스 1공장이라 불렀다. 2007년 5월 150만 톤의 2세대 파이넥스 2공장 준공으로 포스코는 비로소 상업화에 성공했으며, 이어서 3세대 파이넥스에 도전했다. 1세대에서 3세대까지 포스코의 새로운 도전에 포스코건설이 늘 함께했다.

2011.6.28 포스코 포항 3세대 파이넥스 3공장 착공식

2011.6.28 포스코 포항 3세대 파이넥스 3공장 착공식

포스코건설이 EPC 일괄 턴키를 맡은 사업비 6120억 원, 200만 톤 규모의 3세대 파이넥스 3공장(2011.6~2013.7)의 목적은 슬림 파이넥스, 즉 경제성 확보였다. 슬림 파이넥스를 위해 포스코건설은 파이넥스 2공장 설비의 연구개발과 가동경험을 바탕으로 설비를 보다 단순화하고, 차별화된 요소기술들을 대거 채용했다.

실제 설계에서는 가루 철광석을 순수한 철 성분으로 전환해주는 설비인 유동환원로를 기존 4단에서 3단으로 간소화했으며, 벨트컨베이어를 이용해 이송하던 분철광석을 자체 발생하는 가스로 운송 투입하는 등 차별화된 기술을 적용했다.

그러나 파이넥스 3공장 건설 과정에서는 난관도 많았다. 2012년 철강경기 하락으로 포스코가 일시적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잠시 프로젝트가 중단되기도 했다.

“공사현장이 포항제철소 맨 끝이라 7km나 걸어서 이동해야 해서 직원들이 무척 힘들어 했다. 아예 도시락을 싸 들고 다녔다. 포스코 위기로 전체 프로젝트들이 6개월 연기됐지만, 우리 현장은 인도네시아 일관제철소 준공 세러모니와 맞추기 위해 5개월만 연기했다. 무엇보다 늦춰진 공기를 만회하느라 야간작업을 반복했던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강환철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만큼 성과도 많았다. 우선 기술력을 과시했다. 고로가 50만 톤에서 200만 톤으로 생산 규모를 확대하는데 통상 2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파이넥스는 채 10년이 안 되는 기간에 60만 톤에서 200만 톤까지 확대함으로써 우수한 기술력을 입증할 수 있었다.

당초 목표였던 슬림 파이넥스와 경제성도 확보했다. 파이넥스 2공장과 동일한 투자비를 유지하면서도 생산량은 33%나 높아졌다. 더욱이 포항제철소 전체 철강 생산량의 25%인 410만 톤을 파이넥스 공법으로 생산함으로써 저가원료 사용에 따른 연간 원가 절감액이 1772억 원에 이르렀다.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당시 포항 4선재 신설, 스테인리스 신제강 신설과 함께 프로젝트가 추진돼 총 2조 2000억 원이 투입됐으며, 이에 연인원 125만 명이 동원됨으로써 고용창출 효과를 올렸다. 동반성장의 성과도 있었다. 핵심부품과 유지보수 부품을 생산하는데 200개가 넘는 중소기업이 참여했다.

가장 큰 성과는 해외 첫 수출이었다. 상업화와 경제성 확보 이후 세계 철광석 매장량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저급 분철광석과 일반탄의 사용이 가능한 파이넥스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기존 고로공법에 비해 환경오염 물질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이 같은 전 세계적 관심 속에 2013년 9월 포스코는 중국 국영기업 충칭강철과 연산 300만 톤 규모의 파이넥스 일관제철소 건설 합작협약을 체결했다. 향후 중국 정부의 비준과 한국 정부의 기술수출 승인이 이뤄지면 본계약이 체결될 예정이며, 이에 따라 포스코건설의 역할도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 포항 4선재 신설, 숱한 역경을 딛고 공기단축에 성공

포항 4선재 프로젝트(2012.1~2013.5)는 연산 70만 톤급의 선재공장 신설사업이었다. 포스코는 국내외 수요 증가에 대응하고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2008년 기준 시장 점유율이 52%였으나 이대로 가면 2012년경 42%대의 점유율 하락이 예상됐다. 따라서 70만 톤을 신설해 점유율을 63%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추진 목적이었다.

사업비 4735억 원 규모의 이 프로젝트를 포스코건설은 선재 기술력 확보의 찬스로 받아들였다. 이에 적자를 무릅쓰고라도 전체 EP를 다 하겠다고 욕심을 부렸으나, 포스코는 일부 설비인 가열로와 유압설비만 맡기고 대부분의 핵심설비는 지멘스에 발주했다. 1989년 3선재 신설 이후 이 분야 국내 설계 기술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EP 전부를 포스코건설에게 맡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믿었던 지멘스도 기자재공급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들을 드러냈다. 가장 큰 문제는 저가 분할 발주였다. 중국, 대만, 이탈리아, 미국 등으로 발주된 설비들은 설치 과정에서 현장과 안 맞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수정하는 데만 2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설비 문제로 포스코와 분쟁도 발생했다. 대만 포머사로 발주된 주요 설비인 압연기와 감속기에서 품질 문제가 발생했다. 오일배관에서 이물질이 나와 포스코가 전면 교체를 요구하자 지멘스는 부분 수리로만 일관했다. 양사의 분쟁은 공기에 쫓긴 포스코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결국 한 걸음 물러나면서 일단락됐다.

포스코건설이 맡은 일부 설비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EP에 대한 경험자가 없어 조업 정비 인력을 투입하다 보니 실패를 자초하고 말았다. 관리능력 부족으로 제작이 계속 늦어졌으며, 이를 시공에서 만회하느라 갖은 고초를 겪었다.

“시공 과정에서는 공기 만회를 위해 토목공사에서 단축공사를 요구했는데, 토목공사를 맡은 협력업체가 과다한 자금 출혈을 이유로 작업을 중단하는 사태가 발생, 오히려 여기서 공기가 2개월 더 지연됐다.” (김용백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이후 공기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기전에서는 돌관공사를 추진했으며, 토목에서는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시행하는 패스트 트랙 공법을 적용했다. 또 공기단축을 위해 일부 설계를 변경하기도 했다. 전기실과 수처리 설비의 경우 일반 콘크리트로 설계됐는데, 공기단축을 위해 전기실은 철근 콘크리트로, 수처리 설비는 콘크리트 파일에서 스틸로 변경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 공기 준수는 물론, 15일 공기단축이라는 성과를 달성했다.

 

# 광양 4열연 신설, 최초 자력 엔지니어링 수행 성공

광양 4열연 신설사업은 정준양 전 회장의 탄식에서 출발했다. 2010년경 정 회장은 인도네시아 일관제철소 압연공정을 둘러보고 와서는 ‘광양 후판을 포스코건설이 수행했는데, 왜 아직도 자력 엔지니어링이 안 되느냐’고 경영진들을 질타했다. 인도네사아 프로젝트에서 후판이 외주사에 발주된 데 대한 불만이었다.” (박일호 Director)

최고경영자의 불호령에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패밀리사들이 모여 자력 엔지니어링에 대한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때마침 포스코는 투자계획에 따라 광양 4열연 신설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자력 엔지니어링이 가능하다는 보고와 함께 압연공정의 핵심인 열연공정 자력 엔지니어링에 도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포스코건설의 의욕적인 도전에 포스코는 기술력 확보의 대승적 차원에서 연산 330만 톤 규모의 광양 4열연 신설사업(2011.1~2014.10)을 맡겼다.이 사업은 열연공정이 75%를 차지하고, 열연과 연결되는 제강과 연주공정도 25%가 포함됨에 따라 사업비 규모가 1조 4000억 원에 이르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막상 큰소리는 쳤지만, 이 분야에 대한 자력 엔지니어링 경험이 전무한 포스코건설로서는 위험부담이 큰 프로젝트였다. 3열연 신설이 1981년이라 30년이란 사업수행 공백이 있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안전장치로 해외 선진사 퇴직 인사 중 이 분야 최고 전문가를 긴급 채용하고 검증프로세스를 구축했다.

또 패밀리사 공동 수행 프로젝트인 만큼 협업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협업체계 구축을 위해 포스코건설은 광양 5소결 신설공사에서 효과를 본 버추얼팀을 벤치마킹했다.

버추얼팀에서 포스코건설은 주간을 맡았고, 매월 월례회의를 개최했다. 월례회의는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패밀리사들이 모여 공정을 체크 점검하는 문제 해결의 자리였다.

버추얼팀 효과는 탁월했다. 최적의 설계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고, EPC 통합이 가능해졌다. 특히 버추얼팀은 원가절감 아이디어의 산실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자력 엔지니어링 기술력 확보 외에도 원가절감이라는 지상과제가 있었다. 사업비 규모가 시대적 물가와 비교했을 때 1981년 3열연 신설 때보다 절반이나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버추얼팀 회의는 원가절감이 최대 이슈였다.

수차례에 걸친 원가절감 아이디어 회의 결과의 요점은 중국산 설비에 대한 저가 분할 발주와 함께 품질 확보를 위해 중국 설비업체에 직원을 파견함으로써 철저한 사업관리로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하자는 내용이었다.

직원 파견을 통한 사업관리는 압연기 대형 설비 중 하나인 하우징의 제작과 설치에서 빛을 발했다. 이 설비는 무려 총 중량이 3800톤이나 됐는데, 이를 원가절감 차원에서 18개로 저가 분할 발주해 포스코건설의 리스크에 대한 부담이 상당했다.

이 같은 리스크 부담이 직원 파견을 통한 철저한 공정관리의 배경이 됐으며, 이마저도 안심이 안 돼 포스코건설은 18개로 나눠진 하우징에 대해 조립 테스트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스크 차단을 위한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수는 있었다. 설계와 토목에 자신이 없었던 포스코건설은 동시 작업을 시도했지만, 설치 과정에서 계속 엇박자가 낫다. 그만큼 열연공정 신설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비록 일부 실수가 있었지만, 포스코건설은 공기를 준수하고 당초 목표였던 자력 엔지니어링 수행에도 성공했다.

자력 엔지니어링 수행 과정에서의 성과로는 가열로와 코일 이송 설비에 대한 신기술 적용이 있었다. 가열로를 식혀주는 방법은 이전까지 뜨거운 물이었으나, 포스코건설은 스팀으로 대체해 효과를 보았다. 코일 이송도 기존 체인 방식에서 발레트로 교체함으로써 청결 효과와 운전 편의성 등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열연 분야 기술력 확보는 포스코건설 20년 역사에서 최대 실적인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 수주는 물론, 브라질 CSS사의 압연공정 수주에도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