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Story6. 해외사업, “기회와 희망 찾아 베트남·중남미로 달려가다”        

# ‘제철소 건설사’ 꼬리표를 떼라!

시공능력 7위, 수주액 4조 원 돌파. 10년 전과 비교하면 국내에서 포스코건설의 위상은 몰라보게 높아졌다. 그렇다면 해외에서는 어떨까? 한 마디로 초라한 실적이었다.

해외사업은 전체 수주액에서 기여도가 채 10%를 넘지 못했고, 그나마 제철 플랜트만의 전유물이었다. 그 외 실적은 건축 분야의 상하이 포스플라자, 호치민 다이아몬드플라자, 그리고 하와이 콘도사업 정도가 고작이었다.

제철 플랜트의 향후 전망도 어두웠다. 포스코를 등에 업고 성공적으로 중국시장 진출에 성공했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최저가로 공습해오는 중국 현지업체들의 인해전술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제철소 건설사’라는 꼬리표를 떼는 것이었다.

출범 당시 포스코건설은 ‘제철소 일만 하는 건설사’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말은 IMF 위기 이후 쏙 들어갔다. 주택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면서 더샵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고, 모두가 주저할 때 과감하게 송도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제 해외사업에서도 그런 딱지를 뗄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특명에 건축과 토목, 그리고 에너지가 첨병으로 나섰다. 건축과 토목은 기회를 쫓아 베트남으로 달려갔고, 에너지는 희망을 찾아 중남미 개척에 나섰다. 중국에서 설 땅을 잃은 제철 플랜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능성을 타진했다.

먼저 건축과 토목의 베트남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외형상으로는 장밋빛이었다. 국내기업으로는 드물게 신도시 건설에 성공했으며, 천년 고도 하노이시의 미래 설계를 맡길 만큼 베트남 정부로부터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토목 분야마저 3개의 고속도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포스코건설은 한류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스플랜도라 신도시가 착공하기까지, 토목 분야가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에서 성공하기까지 그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출발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떠이호떠이와 북안카잉을 놓고 고민했다. 떠이호떠이는 대우건설이 오래 공들인 신도시 개발사업으로, 많은 건설사들이 컨소시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위치는 하노이 시청에서 5km 떨어진 변두리였고, 규모는 208만 ㎡ 정도였다. 대우건설은 이곳에다 한국형 신도시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북안카잉 신도시 개발사업의 정보는 70여개의 계열사를 이끌고 있던 베트남 최대 건설 공기업인 비나코넥스로부터 제공받았다. 북안카잉은 하노이시 경계 지점이자 APEC회의 장소이기도 했던 하노이 컨벤션센터에서 5km 떨어져 있어 향후 신시가지로서 전망이 밝았고, 규모는 떠이호떠이보다 조금 큰 264만 ㎡ 정도였다. 비나코넥스는 호치민시의 랜드마크인 다이아몬드플라자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이 있었고, 이에 포스코건설에게 북안카잉 신도시 공동개발을 제안했다.

포스코건설은 두 건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북안카잉을 선택했다. 떠이호떠이는 도심 변두리여서 인허가, 이주보상 등 향후 사업추진 과정이 쉽지 않으리라 전망했고, 무엇보다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것보다 현지 국영기업을 끼고 주도적으로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정식 명칭이 스타레이크시티와 스플랜도라로 바뀐 신도시 개발사업에서 포스코건설의 스플랜도라가 대우건설의 스타레이크시티보다 착공이 훨씬 빨랐다. 떠이호떠이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컨소시엄도 다 떨어져나가 대우건설만이 고군분투했다.

 

# 베트남서 두 번의 실패 딛고 다시 일어나

스플랜도라는 광채를 의미하는 영어 ‘스플랜도(splendor)’와 금을 나타내는 ‘오흐(Or)’의 합성어로 부귀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사업은 1, 2단계로 나눠 2020년까지 총 2조 6530억 원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포스코건설은 스플랜도라를 선택하면서 첫 번째 단추를 잘 채웠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2005년부터 시작된 물밑 접촉에 이어, 2006년 들어서는 양사간 기본협약을 체결하고 베트남 정부로부터도 승인을 받아 투자허가서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곧 착공에 들어갈 것 같았던 스플랜도라는 이후 사업추진 과정에 시간이 걸렸다.

랑~호아락 고속도로가 발목을 잡았다. 포스코건설이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 비나코넥스, 베트남 정부와 맺은 주요 계약조건은 이랬다. 하노이의 랑과 하노이 인접 하떠이성의 호아락을 연결하는 27.8km의 고속도로를 건설해 주고, 그 대가로 베트남 정부로부터 부지를 제공받는 조건이었다.

이 조건을 포스코건설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히려 고마운 계약조건이었다. 건축과 토목의 동반 진출도 의미가 있었지만, 토목 분야 최초의 베트남 진출이기도 했다. 또 랑~호아락 고속도로는 베트남 최초의 현대식 고속도로이자, 자동차와 이륜차를 분리한 최초의 고속도로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사업경험 부족의 현실은 냉혹했다. 토목 분야는 해외사업에 미숙했고, 현지 사정에도 어두웠다. 2006년 7월부터 파트너인 비나코넥스를 따라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뛰어들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경제성은 나오지 않고 리스크만 커져갔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리스크를 털어내기 위해 랑~호아락 고속도로에서 탈출했고, 대신 스플랜도라는 직접 투자방식으로 사업구조를 바꾸었다.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건설 전 부지 전경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건설 전 부지 전경

랑~호아락에서 호되게 신고식을 치른 건축과 토목 분야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베트남 시장 안착을 위해 새로운 사업개발에 골몰했다. 그 결과 2008년에 토목과 건축 양 전선에서 각각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토목 분야는 카이멥 국제항만공사 프로젝트를 수주했으며, 건축은 베트남 천년 수도 하노이시 마스터플랜 수주에 성공했다.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2008.3-2011.3)은배후부지 48만 ㎡에 안벽 600m를 건설해야 하는 항만공사로, 연간 컨테이너 115만 TEU를 처리할 수 있는 규모였다. 수주금액은 1억 1200만 달러였다. 현장은 호치민에서 남쪽으로 125km 가량 떨어진 붕따우에 위치하고 있으며, 베트남 정부는 이 붕따우 지역에 전체 공단의 절반 가량이 위치한 남부 집중경제구역(SFEA)의 물동량 증가에 대비해 이 사업을 추진했다. 발주처는 세계 1위 해운선사인 덴마크 몰러 머스크(A.P.Moller-Maersk)의 합작법인 CMIT였으며, 포스코건설은 삼환기업과 조인트벤처 형태로 이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건축 분야는 웃었고, 토목은 또 다시 눈물을 삼켰다. 철저한 사전대비에도 불구하고 토목 분야는 이번에도 미숙함을 들어냈다. 불리한 조건에서 계약을 한 데다 외주공사 발주 과정에서 전기설계 용량을 놓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했다. 결국 사업성 확보에 실패하고 적자운영의 전철을 반복했다.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전경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전경

# 천년 고도 하노이의 2050년을 설계하다

“2050년이면 총면적 3300㎢에 인구 1000만 명이 살게 될 베트남의 천년 수도 하노이! 그 하노이광역시의 미래 설계를 당신들에게 맡긴다.”

2008년 9월 23일 베트남총리실에서 날아온 낭보였다. 수주 최종 통보에 2주간의 합숙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던 프로젝트 실무진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이 사업은 당시 921㎢인 수도 하노이의 면적을 이보다 3배 이상 확대해 3300㎢로 설계하는 도시개발 프로젝트였다. 이는 서울 총 면적의 5배를 초과하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규모였다.

베트남 정부는 2010년 하노이 천도 1000주년을 맞아 수도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의욕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했다. 2008년 5월말 베트남 국회 역시 하노이시를 명실상부한 베트남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하노이시 광역도시계획 수립’을 최종 의결했다. 이로써 전 세계 유명 건설사들의 발길이 하노이시로 속속 몰려들기 시작했다.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 600년 전 삼봉 정도전이 한양천도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 수주는 도시계획 분야의 우수한 기술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뿐 아니라, 향후 하노이시의 폭넓은 도시 인프라 건설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김병호 전 전무)

하노이 마스터플랜은 그만큼 매력적인 프로젝트였다. 확장된 도시조성을 위한 신도시 개발, 도로, 상하수도, 전력, 하천정비, 철도, 정보통신 등 많은 프로젝트를 양산해내야 할 로드맵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그러니 수주액이 불과 640만 달러밖에 안 되는데도 미국과 일본, 독일, 프랑스, 호주, 싱가포르 등 8개국 12개 업체가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특히 일본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고, 포스코건설 역시 당시 이구택 포스코 회장과 한수양 사장 등 최고경영층이 수차례 베트남을 방문해 고위층 인사들을 만나는 등 포스코패밀리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포스코건설의 입찰 참여는 베트남 고위층의 요청에서 시작됐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스플랜도라와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외에도 포스코-베트남 냉연공장 등 3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이전에도 다이아몬드플라자를 비롯해 여러 제철 플랜트를 수행하면서 우호적인 인사를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

2008.12.26 하노이 마스터플랜 계약식

2008.12.26 하노이 마스터플랜 계약식

마스터플랜 수립사업의 국회 통과와 함께 본격화된 수주 경쟁에서는 4차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2008년 7월 말 한국, 일본, 미국 등 3개국의 대표 기업들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포스코건설은 뉴욕에 본사를 둔 미국의 글로벌 도시설계 회사인 퍼킨스 이스트만, 그리고 한국의 도시설계 전문회사인 진아건축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입찰경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최종 제안서 제출 보름을 앞두고 저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 개발에 골몰했다. 포스코건설은 2주간 합숙훈련에 돌입, 실무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고 또 짜냈다. 결국 2008년 8월 3일 최종 설명회 당일 포스코건설은 기발한 옵션 하나를 제시했다. 하노이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대형 모형과 그 모형을 전시할 전시관을 지어 기증하겠다는 옵션이었다.

“우리의 제안에 일본은 우리보다 더 큰 모형과 전시관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발 더 나갔고, 심지어 아예 마스터플랜 자제를 공짜로 해주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만큼 일본의 수주 의지도 우리만큼 강했다.” (김창묵 Director)

그러나 2008년 9월 23일 운명의 여신은 일본의 프로포즈를 외면하고 포스코건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포스코건설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우선 제안서의 내용이 좋았다. 개발과 보존을 고려한 생태학적 자연환경 보존계획, 도시의 난개발 방지를 위한 그린벨트 설정, 환경문제를 고려한 적정밀도 계획 등 우수한 마스터플랜이 발주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 하나 더, 동영상 프리젠테이션이 관심을 증폭시켰다. 제안서 작성에도 버거운 짧은 기간에 포스코건설만이 유일하게 야근과 철야를 반복해서 동영상을 완성했다. 더구나 파트너십도 빛났다. 설명회 당일 동영상 프리젠테이션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퍼킨스 이스트만 회장이 직접 사회자로 나서자 장내는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 스플랜도라 착공과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수주

스플랜도라 개발사업은 랑~호아락 고속도로의 리스크를 덜어내고 2006년 12월 비나코넥스와 함께 합작법인 ‘안카잉JVC’를 설립하면서 순항하기 시작했다.

총 6단계로 나눠 2020년에 완공될 예정인 스플랜도라 신도시에는 빌라와 테라스하우스 외에도 아파트 4481세대, 주상복합형 건물 2605세대 등 모두 8593세대의 주거단지가 들어서고, 아울러 호텔, 사무실 용도의 75층 규모의 랜드마크 빌딩이 계획돼 있었다. 또 입주민들의 편익을 위해 관공서, 공원 등도 예정돼 있었다.

그 가운데 1단계 사업이 2009년부터 본격화됐다. 포스코건설은 16~22층 아파트 496가구, 3층 단독빌라 317가구, 4층 테라스하우스 236가구 등 모두 1049가구를 짓는 1단계 사업의 분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2009년 12월부터 착공에 들어갔다.

“분양 과정에서는 한 채에 한국 돈으로 15억 원이나 하는 고급 빌라인데도 물량이 없어 팔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베트남 정부 한 고위층 인사가 ‘왜 내가 이걸 못 사느냐’고 항의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희도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2009.4.25 베트남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착공식

2009.4.25 베트남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착공식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공사 현장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공사 현장

두 번의 수업료를 치른 토목 분야는 베트남 현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아픈 만큼 좀더 성숙해졌다. 카이멥 항만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수주에 총력을 기울였다.

포스코건설은 두 번의 실패 이후 여기서도 실패하면 해외사업에서 토목사업을 접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스플랜도라 파트너인 비나코넥스까지 참가한 결코 쉽지 않은 국제경쟁이었다.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는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역점사업인 ‘메콩유역 개발사업’(GMS)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사업이었다. 하노이와 중국 운남성 쿤밍을 잇는 연결 고속도로로, 하노이 국제공항에 위치한 노이바이에서 출발, 국경지역인 라오까이까지 총 연장 264km에 8개 공구로 구성됐으며, 전체 사업비는 12억 5000만 달러 규모였다.

특히 이 고속도로는 베트남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었다. 베트남 정부는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가 수도 하노이와 하이퐁, 쿤밍시 사이의 운송 기간을 하루 이내로 단축시킴으로써 중국과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과 같은 인접국과의 무역을 활성화할 것으로 크게 기대했다.

하노이 노이바이 첫 구간인 1공구는 27km 길이의 4차선 고속도로로 약 1억 5000만 달러 규모였다. 2009년 3월 입찰에서는 중국, 베트남 등 총 9개 건설사가 참여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결과는 최후 각오를 다지면서 배수진을 쳤던 포스코건설이 수주에 성공하면서 최대 경쟁자였던 비나코넥스를 놀라게 했다.

1공구 수주의 여세를 몰아 포스코건설은 2009년 10월과 11월 입찰에서도 2공구와 3공구를 연속으로 수주하는데 성공했다. 2공구는 22.12km의 4차선 아스팔트 포장공사와 19개의 교량을 건설하는 도로공사였으며, 포스코건설은 1~3공구 수주를 통해 총 81km의 시공물량을 확보했다. 더욱이 8개 공구 중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우리나라 건설사가 6개 구간을 석권함으로써 베트남 현지에서 한국 토목의 기술력을 과시했다.

 

# 지구 끝 중남미에서 찾은 블루오션, 석탄화력발전

건축과 토목 분야가 베트남에서 성공드라마를 써나가는 사이, 신생조직 에너지 분야는 지구 끝 중남미에서 블루오션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경험의 석탄화력발전이었다.

“동남아나 중동에 뒤늦게 뛰어들어서 같이 피 흘리는 것보다 중남미나 CIS 국가 등 우리나라 기업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지역에서 블루오션을 찾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칠레가 바로 그렇게 해서 찾아낸 블루오션이었다.” (김대호 전 부사장)

2004년 7월, 에너지 조직을 재정비한포스코건설은 에너지사업에 대한 연륜은 짧았지만, 의욕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일찌감치 국내시장을 레드오션으로 파악하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먼저 중남미시장에 대해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운명적으로 AES와 인연을 맺었다. 미국 텍사스주 알링턴에 본사를 두고 있던 AES사는 전 세계 27개국에 15개의 전력회사와 124개의 발전소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2005년 당시 110억 달러의 매출과 297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글로벌 전력회사였다.

AES와 관계가 시작된 건 2005년 9월이었다. 중남미 현지조사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칠레의 석탄화력발전 프로젝트와 민간발전사업자인 AES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칠레는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 국가인데다 전체 산업의 50%를 차지하는 광산산업에서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환경규제가 심해 원자력발전은 엄두도 못 내고, 볼리비아에서 아르헨티나를 거쳐 공급되는 가스발전에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폭설로 가스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결국 칠레 정부는 발전능력 확충을 위해 민간발전사업자(IPP) 모집에 나섰고, 포스코건설은 지난 30년간 칠레에 전력을 공급해오면서 전체 발전량의 20%를 점유하고 있던 AES를 가장 매력적인 민간발전사업자로 보았다. 무엇보다 칠레는 앞으로 계속 대규모 발전 프로젝트가 쏟아질 블루오션이었다.

사업정보 입수 직후 포스코건설은 2006년도 발주 예정인 여러 프로젝트 중에서 AES의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를 선택하고 역량을 집중했다. AES를 수차례 방문해 적극적으로 기술력을 홍보하는 등 총력전을 펼친 결과, 2006년 2월 입찰참가자격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수주 경쟁은 치열했다. 프랑스의 알스톰, 캐나다 SNC-라발린, 일본의 미쓰비시 등 세계적 EPC업체 10개사가 경쟁에 참여했다. 그해 5월 제안서 제출 후에는 최종 경쟁에서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미쓰비시, 알스톰 등 3개 업체가 남았다.

막판 수주전은 더욱 치열했다. 포스코건설의 투지도 더욱 달아올랐다. 발주처인 AES의 요구사항은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철저히 반영했고, 지구 끝 정반대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도 메일이 오면 곧바로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런 성실함에 AES가 차츰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포스코건설은 더욱 자신들의 기술력을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심지어 AES측 책임자를 한국으로 초청해 포항제철소 코크스공장의 석탄 설비, 용광로 미분탄 설비, 자가발전 설비 등을 견학시켜 주기도 했다. 당시 견학에 대한 AES측의 만족도는 폭발적이었다. 결국 2006년 9월 AES는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의 EPC 턴키 사업자로 포스코건설을 선택했다.

“석탄보일러 중 우리가 제안했던 PC보일러(미분탄연소)가 수주 성공에 기여한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나머지 업체들은 CFBC보일러(순환유동층)를 제안했는데, 우리는 그들과 다르게 PC보일러를 채택해 가격경쟁력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김원석 상무)

9.E-D-132-00

2007.10.17 칠레 벤타나스 4호기 계약식

10..E-A-A-109-03

2007.6.11 칠레석탄화력발전소 착공식

 

# 돈 다 날려도 좋으니, 공기·품질향상 지켜라!

포스코건설이 수주한 누에바-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는 수도 산티아고에서 북서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칠레의 유력 산업도시 벤타나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전용량 240MW에 사업규모는 3억 7000억 달러였다.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의 수주는 한국 건설계는 물론, 포스코건설 해외진출 역사에서도 많은 의미를 남겼다. 국내 건설사 중 최초의 중남미 진출이었으며, 해외 석탄화력발전소 EPC 턴키로도 국내 최초라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포스코건설 조직에 큰 변화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초대형 해외사업을 수주함에 따라 인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09년까지 경력직만 매년 100명씩 뽑으면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에너지 전문가들을 포스코건설이 싹쓸이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는 한국 건설계로서도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그 동안 불황으로 구조조정 당했던 에너지 전문인력들이 되살아나면서 묵혀있던 기술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벤타나스 수주는 일개 팀 조직을 사업본부로 격상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벤타나스 수주에 힘입어 2006년 12월 에너지사업본부가 출범했다. 국내에서 본부급의 에너지 조직은 당시 포스코건설이 유일했다. 이는 최고경영층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으로, 당시 한수양 사장은 틈만 나면 지구 끝 칠레로 날아가서 직원들에게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이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업비를 다 날리는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회사가 끝까지 지원할 테니 반드시 공기준수와 품질확보의 과업을 완수해주기 바란다.” (한수양 전 사장)

2008.8.27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착공

2008.8.27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착공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공사현장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공사현장

최고경영층의 예상대로 2006년 12월 착공 이후 추진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현지 협력업체 확보였다. 당시 현지업체들은 자국에 처음 진출한 포스코건설의 능력을 의심했다. 그들은 벤타나스 프로젝트를 외면하고 산타마리아나 앙가모스 등 다른 프로젝트를 찾아 다녔다. 그러다 보니 포스코건설의 하도급 입찰장은 텅 비었고, 현장 책임자들은 현지업체들을 직접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모셔와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무시와 천대를 극복하는 데는 단 6개월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포스코건설이 아무 문제없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반면, 당시 같이 출발했던 다른 프로젝트들은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칠레 사회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포스코건설의 실력을 인정하면서 부르지 않아도 같이 일하고 싶다는 현지업체들이 길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발주처 AES의 신뢰도 고무적이었다. 칠레 지역에서 믿고 맡길만한 회사가 포스코건설밖에 없다고 판단한 AES는 벤타나스 이후 모든 프로젝트를 몰아주면서 계약방식도 수의계약으로 변경했다. 그렇게 해서 포스코건설은 캄피체 석탄화력발전소(2007.10-2011.2)와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2007.10-2011.8)등을 연이어 수주할 수 있었다.

캄피체는 누에바-벤타나스와 같은 벤타나스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전용량 270MW에 사업비는 4억 4000만 달러 규모였다. 앙가모스는 캄피체보다 2배의 규모였다.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약 1300km 떨어진 칠레의 북부 항구도시 안토파가스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전용량 520MW(260MW, 2기)에 사업비도 8억 7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처럼 포스코건설은 벤타나스 효과로 단 1년 만에 에너지 분야에서 무려 13억 1000만 달러를 수주하는 놀라운 실적을 달성했다.

 

# 벤타나스, 공기단축·성능향상·동반성장 세 마리 토끼를 잡다
칠레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 Boiler Package

칠레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 Boiler Package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의 성공적 준공은 칠레 국가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성적인 전력난에 허덕이던 칠레 산업에 숨통을 틔워준 데다, 같이 출발했던 다른 프로젝트들보다 먼저 준공해서 칠레 사회에서 포스코건설에 대한 신뢰가 더욱 높아졌다. 앙가모스는 아예 시작도 못했으며, 나머지 두 곳은 기술적인 문제로 준공을 2년이나 연기하면서 우리 회사에 대한 인지도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를 앞질렀다.” (김호섭 전 부사장)

2009년 12월 마침내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가 발전을 시작했다. 벤타나스의 성공적 준공을 통해 포스코건설은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가장 큰 성과는 공기단축이었다. 프로젝트 수행 전부터 공기준수는 회사의 특명이었다. 해외 EPC가 처음인 만큼 적기 공기준수는 향후 해외사업의 지속성이 걸린 중대한 임무였다.

공기준수 특명을 받은 책임요원들은 철저한 사전준비를 통해 모든 자재를 완성품으로 제작해 대형장비로 설치함으로써 작업시간을 최소화했다. 시급한 작업에는 숙달된 국내 전문가를 투입했으며, 현지 근로자에게도 작업표준서를 만들어 지도하는 등 현장 오류를 최대한 막았다. 특히 지반공사부터 24시간 철야 교대근무를 실시했다. 그 결과 공기준수라는 지상과제를 달성할 수 있었고, 덤으로 공기단축의 영광도 얻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지상과제는 품질확보, 즉 성능향상이었다. 먼저 포스코건설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진에 대비해 규모 7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는 내진설계를 적용했으며, 유럽만큼 까다로운 칠레 정부의 인허가 기준을 만족시킴으로써 설계·시공 능력은 물론 친환경 기술력을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성능향상 과정에서는 최저의 비용으로 각 부문의 품질, 공사기간, 안정성 등의 요구조건을 달성하기 위한 VE(Value Engineering) 혁신활동이 큰 힘이 됐다. VE 활동 결과 최종 성능시험에서 계약보증 조건보다 4% 이상 향상된 252.2MW의 발전출력을 달성했으며, 열소비율도 당초 계약보다 크게 향상시켰다.

국내 기자재 적용도 의미 있는 성과였다. 벤타나스 프로젝트에는 90% 이상 국내 기자재와 설비를 적용했고, 인력관리에서도 대부분 국내 협력업체를 활용했다. 그 결과 국산 기자재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국내 협력업체 동반 해외진출 등 포스코건설이 추구하는 동반성장경영을 실현할 수 있었다.

 

# 제철 플랜트, 전 세계에서 가능성을 타진하다

건축과 토목, 에너지 분야가 베트남, 칠레에서 선전하면서 ‘해외사업도 제철소 건설사’라는 딱지를 떼어낸 반면, 전통적으로 해외사업 강자였던 제철 플랜트 분야는 거대 중국시장에서 쫓겨난 이후 향후 전략 마련에 부심했다.

그러나 명예회복을 위한 이들의 의지는 이 시기 어느 때보다 강했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지구촌 곳곳을 누비면서 그들의 신발 밑창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시기 제철 플랜트는 어느 때보다 가장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업가능성을 타진했다.

극동·동남아 지역에서는 일본과 베트남을 넘나들었고, 인도와 함께 중동 지역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포스코를 따라 저 멀리 중남미 멕시코까지 날아가기도 했다.

이 시기 2005년에서 2009년까지대표적으로 7건의 프로젝트 수행 결과 3건에서 수익을 창출하며 43% 정도의 승률을 올렸다. 고무적인 사실은 포스코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인상적이었다. 포스코 물량 2건을 빼고 나머지 5건이 대외사업이었고, 가장 큰 성과는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프로젝트의 성공적 수행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냉연과 멕시코 CGL 등 포스코 물량 2건 모두가 100% 수익 창출에 성공한 반면, 대외 물량 중 아시아특수강을 빼고 나머지 4건의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운 대목이었다.

아쉬움을 남긴 프로젝트는 인도와 중동 지역에 집중됐다. 먼저 중동 지역 사우디아라비아부터 출발했다. 200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 최대 철강사인 하디드사로부터 연산 12만톤 규모의 칼라강판(CCL) 수주에 성공했다. 제철 플랜트의 사우디아라비아 CCL 수주는 창립 10주년 이후 새롭게 각오를 다질 때라, 첫 출발치고는 산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우디 하디드 CCL공장 전경

사우디 하디드 CCL공장 전경

특히 하디드 CCL(2005.4~2007.8)은 비록 수주금액이 350억 원 수준이었지만, 유럽의 철강설비 공급사들이 독점해오던 사우디아라비아에 첫 진출했다는 의미가 있었다. 국제입찰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알피네, 이탈리아의 다니엘리 등 세계적 기업을 제쳐 그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

그러나 너무 산뜻한 출발에 함정이 숨어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사전준비가 부족했다. 먼저 중동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특히 유럽적인 사고로 절차와 규격을 중시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계약서의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승리에 도취돼 유럽의 쟁쟁한 경쟁자들이 갑자기 왜 발을 뺐는지 의심하지 않았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절차와 규격을 중시하는 그들의 문화와 계약 구조상의 문제로 인해 적잖은 손실을 보았다.

승인절차가 까다롭다는 사실만 사전에 파악했더라면 유럽 방식대로 상세설계를 만들어 사전에 잡음을 차단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해 프로젝트 내내 발주처의 수많은 요구사항에 시달려야만 했다. 규격 역시 독일 규격인 DIM이 표준이란 사실을 모르고 KS나 JIS를 내밀었다가 된통 곤혹을 치렀다. 계약에서는 시공에 대한 책임보증이 문제였다. 현지 시공업체의 잘못을 다 떠안고 말았다.

2007.10.16 인도 이스코 고로프로젝트 계약 서명식

2007.10.16 인도 이스코 고로프로젝트 계약 서명식

사우디 첫 진출에 이어 2007년 9월 포스코건설은 인도에 첫 진출했다. 제철 플랜트 중 인도에서 활약한 분야는 제선공정의 핵심 고로였다. 이미 광양 5고로 신설의 기술력을 확보한 포스코건설은 해외사업에서 이 기술의 적용을 의욕적으로 시도했지만, 이란 타바존 이후 별다른 실적이 없었다. 당시 인도와 대만 등에서 고로 물량이 간간이 나왔지만, 강력한 경쟁자인 룩셈부르크 폴워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07년과 2008년에 연속적으로 이변이 발생하는데, 포스코건설이 폴워스를 누르고 인도 이스코 고로와 세일사 고로를 수주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세일사 고로는 중간에 중단됐으며, 이스코사 고로(2007.10~2010.3)는 추진과정이 길어지면서 적잖은 손실이 발생했다.

가격이 문제였다. 세일사는 사업자를 선정하고도 가격을 더 깎으려고 현지업체와 양다리를 걸쳤으며, 이스코의 계약 내용은 불량했다. 계약조건에 선수금이 빠져 있었다. 그러니 폴워스 같은 유럽의 경쟁자들이 입찰경쟁에서 등을 돌린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최초 인도 진출과 실적에 급급해 덥석 고기를 물었지만, 적잖은 손실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 기술이전 받던 나라에 플랜트 역수출, 일본 아시아특수강
2007.12.27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사업 계약식

2007.12.27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사업 계약식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실패사례에 이어 수익을 올렸던 일본과 베트남, 멕시코에서도 아쉬움은 있었다. 그나마 일본은 성공 프로젝트라 할 수 있었다.

2007년 12월 포스코건설은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신설사업 수주에 성공했다. 이 프로젝트는 총 사업비가 약 180억 엔, 한화로는 2347억 원으로, 60톤 규모의 전기로 제강공장, 연간 생산용량 12만 톤의 조괴공장 시공 및 설비공급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신설사업의 위치는 키타규슈 히비키나다 지역이며, 아시아특수제강이란 회사는 포스코P&S와 일본 특수강용 블룸 전문제조회사인 고토부키공업이 설립한 합작회사였다. 엄밀히 따지면 이 역시 포스코패밀리 물량인 셈이었다.

어쨌든 이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먼저 일본 첫 진출이자 전기로시장 개척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 1968년 포항 영일만에 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들어간 기술 대부분이 일본 작품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근 40년 만에 포스코건설이 플랜트 역수출의 가슴 벅찬 성과를 이룩한 것이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없었다. 유럽의 선진 엔지니어링사들도 쉽게 진출하기 힘든 곳이 일본이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짧은 공기와 일본관청의 까다로운 인허가 과정이었다. 모든 문서와 의사소통이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진행해야 하는 것도 해외사업에서는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기술적인 장벽도 높았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의 볼트도 망치로 두드려 풀림을 확인할 정도로 발주처는 완벽한 기술력을 요구했다.

“우리는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열정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발주처와의 약속과 신뢰를 지키기 위해 꼼꼼하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적극적인 기술지원과 설득을 통해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끌어나갔다.” (심재향 Director, 당시 PM)

수주 이후 8개월만인 2008년 8월경 늦게 착공에 들어간 아시아특수제강 프로젝트는 짧은 공기에도 불구하고 까다로운 시운전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2009년 10월 준공을 맞았다. 그간의 노력과 공로에 대해 발주처로부터 감사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멕시코 알타미라 포스코 CGL공장 전경

멕시코 알타미라 포스코 CGL공장 전경

포스코-멕시코 CGL 프로젝트(2007.10~2009.6) 추진 과정에도 시련이 많았다. 포스코와 포스코건설 모두 실수를 범해 어려움을 자처하기도 했으나, 포스코 특유의 정신을 발휘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프로젝트의 시작은 2007년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자동차강판 공급사였던 포스코는 꾸준히 그 영역을 전 세계로 확대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2000년대 중반 멕시코가 북미지역 신흥 자동차생산기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GM과 닛산, 현대, 벤츠 등 글로벌 자동차사들이 대규모 생산라인을 갖추면서 멕시코는 220여만 대의 자동차 생산능력을 확보했다. 특히 멕시코는 미국 남동부 지역과 가까워 최적의 자동차강판 공급기지란 매력이 있었다. 포스코로서는 저렴한 노동력도 구미를 당겼다.

포스코-멕시코 CGL은 멕시코 알타미라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업비 2억 6000만 달러, 연산 40만톤 규모의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였다. 포스코는 비용절감 차원에서 분할 발주를 추진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토목과 건축을 제외하고 설계와 설비공급, 기계·전기공사를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포스코가 사업경험이 없다 보니 토목과 건축이 늦어져 공기가 지연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포스코건설이 토목과 건축을 다시 수행했으며, 돌관공사로 무사히 공기를 준수했다.

포스코건설 측에서도 실수가 있었다. 수주금액이 적어 사업비 규모를 맞추는 과정에서 중국으로 많은 설비를 발주했다. 그 결과 품질문제가 발생해 시운전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자초했다.

 

# 베트남 냉연, 해외 최초 단독 EPC 수행
포스코 베트남 냉연공장 전경

포스코 베트남 냉연공장 전경

포스코-베트남냉연공장은 일본 아시아특수제강이나 멕시코 CGL과 비슷한 시기에 착공·준공된 프로젝트로,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앞서 두 프로젝트보다 베트남 냉연공장이 좀 더 드라마틱하고 의미도 남달랐다.

베트남 냉연공장은 포스코가 동남아 고급 철강 수요를 겨냥해 동남아 최대 규모로 계획한 프로젝트였다. 연산 120만 톤 규모의 PL/TCM 1기, 연산 70만 톤 규모의 CAL 1기, RCL/CPL 각 2기와 유틸리티 설비를 신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호치민에서 남쪽으로 125km 떨어진 붕따우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사업비는 약 2억 2465만 달러 규모였다.

2007년 8월 착공, 2009년 9월 준공된 이 프로젝트는 착공부터 난관이 많았다. 우기를 맞아 빗물과 사투를 벌였으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부지가 초 연약지반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포항과 광양에서 겪어보지 못한 난관으로, 냉연공장이 위치한 강변 맹그로브 숲 늪지의 부지는 갯벌보다도 더 안 좋다는 강벌이었다.

이대로는 결코 공기를 맞출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정밀조사에 착수했다. 정밀조사 결과 포항, 광양과 같은 지하구조물 시공으로는 공기, 비용, 안전성 측면에서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추가 경비를 감수하고 지하구조물 설계를 변경했다. 구조물 레벨을 4~5m 상향으로 설계 변경하고, 가설토류벽 없이 오픈 굴착공법을 적용했다. 최초로 시도된 지하구조물의 상향으로 압연기(TCM), 산세(PL), 소둔(CAL) 설비 등의 구조물이 지상에 떠 있는 형태가 됐다.

구조물 레벨의 상향으로 핵심 리스크는 해결책이 나왔으나, 막상 굴착에 착수하고 보니 파일 변이로 인한 전도사고가 발생함에 따라 연속 시공이 불가능했다. 이 역시 원인은 연약지반에 있었다. 설계 검토 끝에 부지 레벨을 1m 상향해 굴착 레벨 깊이를 1m 줄임으로써 파일 변이를 막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설계 변경으로 연약지반 문제를 해결했지만, 1개월의 공기연장이 발생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24시간 철야작업에 들어갔으며, 주요 공사에는 국내 기술진을 투입했다. 이 같은 노력 덕에 잃어버린 1개월의 시간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사전준비가 미흡했다. 현지조사를 통해 연약지반을 미리 확인했더라면 설계 변경이라는 이중고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에 글로벌 프로젝트 조직을 갖추지 못한 점도 아쉬움이었다. 이런 문제들로 발주처와 갈등을 빚으면서 결국 현장소장이 교체돼 내가 후임으로 왔다.” (임재신 상무)

토건공사에서 리스크가 우기와 연약지반이었다면 기전공사에서는 정밀시공과 품질관리가 리스크였다. 베트남 현지의 건설 인프라 취약으로 품질확보의 어려움이 예상됐다. 현지 시공업체의 제철설비 경험이 전무했으며, 플랜트 시공에 경험 있는 기능인력도 부족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스코건설은 주요 설비를 국내업체에게 맡기고, 현지 인력에 대한 기능교육을 강화함으로써 기전공사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기전공사에서 위기를 넘기나 싶었으나, 수전공사에서 1개월의 공기연장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정도면 베트남에서는 매우 선방한 것이었다. 통상 베트남에서는 유럽이나 일본 기업이라도 기후와 지역 특성상 1년 정도의 공기지연이 기본이었다. 베트남 전력청도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수전을 요청해오면 6개월 늦게 넣어주는 것이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이 같은 관행을 막고자 포스코건설은 수전공사를 앞두고 전력청 간부들을 현장으로 초청해 설명회를 개최했다. 현장 실무진들은 전력청 간부들에게 포스코건설의 전통이 철저한 공기준수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현장을 둘러본 전력청 인사들은 빠른 진행 속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를 계기로 포스코건설은 그 동안의 관례를 깨고 빨리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특히 공기준수 전통이 알려지면서 베트남 사회에서 포스코건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1개월 정도의 공기연장은 이후 철야작업으로 거뜬히 만회했다. 2009년 9월 마침내 초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최초의 공기 준수에 성공하고 경제적 운영으로 수익성을 확보하는 등 포스코-베트남 냉연공장 신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베트남 냉연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성과는 당시로서는 해외 최초 단독 EPC 수행이었다. 더구나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CAL 핵심설비의 자력설계와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냉연공장 EPC 기술력을 세계적으로 과시했다.

2009.7.23 이란 타바존 화입식 초도 출선

2009.7.23 이란 타바존 화입식 초도 출선

한편 1999년 국내 최초 제철 플랜트 수출로 관심을 모았던 이란 타바존 프로젝트가 이후 10년만인 29.2009년 7월 고로에서 첫 쇳물을 생산하면서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공기지연의 원인은 발주처의 자금 부족이었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EP를 맡아 시공이 끝날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계속 기다렸다. 반면 시공을 맡은 현지업체는 공사대금이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며 공기를 지연시켰다.

타바존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성과는 신뢰구축이었다. EP 중에서도 포스코건설은 고로와 소결을 맡았고, 코크스는 우크라이나가 맡았다. 그리고 중국이 발전을 담당했다. 이 세 외국기업 중 중국과 우크라이나는 자금조달이 늦어지자 미련 없이 이란에서 철수했다. 오직 포스코건설만이 고로에서 쇳물이 솟아질 때까지 남아 책임을 완수했다.

그 결과 이란 사회가 크게 감동하며 포스코건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었다. 아쉬운 점은 이런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2006년경 3억 3000만 달러 규모의 이란 철강플랜트 수주에 성공했으나,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제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향후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들의 신뢰가 변치 않는 한 미국과의 긴장이 사라지고 새롭게 봄이 오면 이란의 제철 플랜트시장은 가장 먼저 포스코건설을 초대할 것이다.

 

 

<생각하는 페이지>
건축 분야 부산 불패신화에 대한 오판과 교훈

주택사업 성공에 힘입어 2000년대 들어서며 건축 분야가 포스코건설의 성장을 주도했다. 건축 분야는 어떤 사업 분야보다도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괄목할 만한 성과들도 많이 도출해냈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성과 이면에는 수행 프로젝트 가지 수가 많았던 만큼 실패나 실수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 지역이었다. 포스코건설은 부산 주택시장에서 센텀파크를 시작으로 아델리스, 센텀스타 등으로 불패신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서면 피에스타와 아이온시티에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다.

두 프로젝트 모두 시행사 운이 없었다. 미분양에 이은 시행사 부도로 포스코건설이 건물을 떠안아야 했으며, 미분양 해소와 건물 매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이 두 사건의 교훈은 치밀한 사업성 분석의 중요성이었다. 사전에 시행사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해볼 필요가 있었고, 부산지역 상업시설에 대한 시장조사도 선행돼야 했다. 당시 부산지역 상권은 불황이 심해 분양의 무덤으로 불릴 만큼 상업시설 투자 여건이 좋지 않았다.

경기도 오포아파트 역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실패사례였다. 2003년 토지를 매입하고 사업추진에 나섰으나, 첫 시작부터 인허가 과정이 쉽지 않았다. 2005년경 인허가 로비 의혹으로 곤혹을 치르기도 했으며, 2009년에는 성급하게 사업승인을 예측하고 분양에 나섰다가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토지매입 7년 만에 사업계획 승인이 났으나, 개발사업의 장기간 정체로 사업추진 여건이 악화됐다. 그 동안의 금융비용을 감안한다면 고분양가 책정이 불가피했으나, 부동산 침체로 미분양이 우려됐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사업구조를 변경하는 등 사업정리 수순을 밟았으나, 2012년 함께 사업을 추진했던 정우건설의 법정관리와 자금보충 약정에 덜미가 잡혀 또 한 번 손실을 보았다. 이 사건에서는 복잡한 사업추진 과정에서 진작 결단을 내리고 신속히 부실을 털어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었다.

플랜트 분야는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사우디아라비아 하디드사 CCL, 인도 세일사 및 이스코사 고로 프로젝트 등이 주요 실패사례로 꼽혔다. 이들 프로젝트에서는 현지 국가 문화 분석의 중요성이 소중한 교훈이었으며, 해외 실적에 대한 성급한 판단이 뼈를 깎는 반성 요인이었다.

토목환경 분야는 본문에서 언급했던 베트남 랑~호아락 고속도로, 카이맵 국제항만공사 외에 나이지리아 철도, 고양시 환경플랜트 등도 속을 많이 썩였던 프로젝트였다.

2006년경 포스코건설은 나이지리아 철도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철저한 사전준비와 함께 신속히 현지법인을 설립하는 등 많은 공을 들였다. 정부에서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이지리아를 방문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수주계약 직전까지 갔던 이 프로젝트는 중간에 중국기업이 끼어들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차관 30억 달러에 눈이 먼 나이지리아 정부가 포스코건설과의 계약을 뒤집어버렸다. 포스코건설은 2단계 사업이라도 건지고 싶어 재차 협상을 시도했지만, 한번 공짜 맛을 본 나이지리아 정부는 중국의 차관 제공을 예로 들며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눈물을 머금고 나이지리아에서 철수했다.

고양시 환경플랜트는 설비품질이 문제였다. 준공 후 성능 미달로 개보수를 실시했으나, 그래도 당초 약속했던 성능이 나오지 않았다. 이를 두고 시공을 맡았던 포스코건설과 운영을 담당했던 한국환경공단 간 공방이 벌어졌다.

한국환경공단은 설비의 성능 미달을 주장했으며, 포스코건설은 운영미숙과 쓰레기 질의 불량이 성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준공 2년이 지나도록 고양시는 공사비 지급을 거부했고, 이는 법정 소송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 사건의 교훈은 신공법 도입 때의 사전 철저한 검증 작업의 중요성이었다. 마땅히 그랬어야 할 이 같은 과정을 소홀히 해 포스코건설은 엄청난 사후 관리비용을 물어야 했다.

4-3

Story3. 에너지와 플랜트의 도전, 동남아 진출과 일관제철소 꿈 이루다

# 칠레에서는 포스코건설이 한국기업 넘버 원으로 통한다

2010.3.30 칠레 산타마리아 발전소 계약식

건축과 토목 분야가 베트남에서 건설한류 전파를 주도했다면 에너지 분야는 중남미에서 한류 전파에 앞장섰다. 포스코건설은 칠레 벤타나스 성공신화를 바탕으로 캄피체, 앙가모스, 엘살바도르에 이어 산타마리아Ⅱ, 코크런, 카스틸라 석탄화력발전소 건설공사를 연속으로 수주했다.

2010.3.30 칠레 산타마리아 발전소 계약식

2010년 3월 수주한 산타마리아Ⅱ는 사업비 7억 달러 규모의 발전용량 400MW급 석탄화력발전소였다. 발주처는 칠레 2위의 전력생산업체인 콜번사이며, 발전소의 위치는 산티아고에서 남서쪽으로 약 450km 떨어진 항구도시 코로넬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수주 배경은 벤타나스 후광이었다. 산타마리아Ⅰ 발전소는 벤타나스와 함께 착공에 들어갔으나, 벤타나스만 준공에 성공하고 산타마리아Ⅰ은 시공을 맡았던 유럽업체가 중도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콜번의 경영층이 도움을 요청해왔고, 포스코건설의 기술력으로 마침내 산타마리아Ⅰ 발전소가 준공에 성공했다. 따라서 산타마리아Ⅱ는 산타마리아Ⅰ에 대한 감사의 선물이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다른 입찰 참가자보다 가격이 높았으나, 콜번측은 이를 프리미엄으로 인정하고 포스코건설을 선택했다.

2011년 11월 칠레 발전사업자 코크런으로부터 수주한 코크런 발전소는 앙가모스 옆 부지에 266MW급 석탄화력 발전설비 2기를 신설하는 EPC 턴키 프로젝트였다.총 사업비는 9억 달러 규모였다.

산타마리아Ⅱ와 코크런에 이어 2012년 6월 포스코건설은 브라질계 다국적 전력회사인 MPX사로부터 카스틸라 발전소를 수주했다. 사업비는 15억 달러 규모이며, 350MW 석탄화력 발전설비 2기를 신설하는 EPC 턴키 프로젝트였다.

카스틸라 역시 산타마리아Ⅱ처럼 벤타나스 후광이 수주 배경이었다. 벤타나스의 성공을 지켜본 MPX는 포스코건설이 자신들의 프로젝트 입찰에 참여하길 원했다.

그러나 벤타나스의 발주처였던 AES가 자사 발전사업에만 집중해줄 것을 요구했고, 포스코건설 역시 벤타나스에 이어 캄피체와 앙가모스를 수행하느라 MPX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앙가모스의 성공적 준공 이후 포스코건설은 마이웨이를 선언하고 MPX의 카스틸라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입찰 결과 가격이 경쟁자였던 SK건설보다 3000만 달러가 더 높았는데도 MPX는 포스코건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산타마리아Ⅱ와 마찬가지로 최고 EPC 기술력에 프리미엄을 인정한 것이었다.

한편 벤타나스 성공신화에 이어 앙가모스 발전소가 또 하나의 성공신화를 만들어냈다. 2011년 11월 성공적인 준공으로 칠레 사회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어려움이 많았던 프로젝트였다. 그 중에서도 칠레 대지진과 근로자 파업이 가장 힘들었다. 그럼에도 조기 준공의 성과를 달성해 발주처로부터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종규 상무)

2010년 2월 발생한 칠레 대지진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이 대지진으로 칠레 연안에는 쓰나미가 덮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524명이 사망하고 31명이 실종됐으며, 300억 달러의 재산 피해가 났다.

해안에 인접한 벤타나스 현장에도 초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공사현장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최고의 내진 설계를 한 포스코건설의 품질 시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칠레 대지진은 공사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위기이면서 포스코건설의 기술력을 알리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대지진으로 인한 아름다운 일화도 있었다. 지진이 발생하자마자 포스코건설은 앙가모스 현장의 현지 근로자들에게 격려금을 나눠주고 대지진이 발생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뿐만 아니라 포스코건설 직원들도 피해 현장으로 달려가 위문품을 전달하는 등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에 칠레 사회가 큰 감동을 받았고, 피해복구 이후 고향에서 돌아온 현지 근로자들 역시 감사의 표시로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45일의 공기 지연은 막을 수가 없었다. 공기 지연을 만회하기 위해 포스코건설은 밤낮을 잊은 채 돌관공사에 들어갔다.

지진의 위기를 넘기자 2010년 8월 노조파업이란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어려운 상황을 맞아 포스코건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최고의 법률팀으로 현지 법원으로부터 불법파업 판결을 얻어내 합법적 해고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결과 3일 만에 노조와의 협상이 타결돼 빠른 시일 내 공사를 정상화시킬 수 있었다.

앙가모스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성과는 조기 준공이었다. 지진과 노조파업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포스코건설은 조기 준공은 물론, 500만 시간 무재해 기록을 세워 발주처로부터 약 70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았다.

그리고 환경과 안전 등을 포함한 각종 규제가 유럽 선진국만큼이나 까다로운 칠레 정부의 인허가 기준을 만족시켜 칠레 사회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얻었다.

특히 벤타나스에 이어 앙가모스에서도 성공신화를 창출해내면서 칠레 사회에서 한국기업에 대한 인지도가 바뀌었다. 한국기업이라면 삼성과 LG만을 떠올리던 칠레인들이 앙가모스 이후 포스코건설을 한국 최고기업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발전플랜트 나비효과, 중남미 날개짓에 이스라엘이 들썩이다

칠레에서 포스코건설의 활동은 금방 입소문을 타고 중남미로 퍼져나갔다. 입소문의 진원지는 KOTRA로, 포스코건설의 칠레 활약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이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나라가 페루였다. 당시 페루 정부는 경제성장으로 2017년까지 매년 10%씩 전력수요 증가가 예상됨에 따라 민간발전사업자를 통한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들 발전사업자 중 이스라엘 인키아에너지사의 페루 현지법인 칼파제너레이션이 칠레에서의 활약상을 듣고 포스코건설에게 입찰참가를 요청한 것이었다.

“2008년 11월경 사업정보를 입수하고 페루로 날아가 보니 이미 지멘스와 한국기업으로는 H사가 한창 물밑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H사가 우리 실적을 자기네 실적으로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 가장 먼저 경쟁에서 탈락했다. 지멘스의 경우 그 동안 페루에서 폭리를 많이 취해 기업이미지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경쟁에 뛰어들었다.” (김원석 상무)

페루 칼파 발전소

페루 칼파 발전소

칠카우노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

칠카우노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

2009년 9월 경쟁입찰에서 포스코건설은 세계 유수의 경쟁사인 아벤고아, 지멘스 등을 제치고 사업비 3억 5000만 달러 규모, 발전용량 830MW급의 칼파 LNG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이 프로젝트는 페루 리마에서 약 62km 떨어진 칠카에 위치한 기존의 발전시설을 복합발전시설로 개조하는 것이 주요 사업내용이었다.

특히 칼파 발전소 수주는 국내 건설사 가운데 첫 페루 에너지시장 진출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칼파에 이어 포스코건설은 칠카우노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에도 도전했다. 프랑스 GDF 수에즈사의 페루 현지법인 에네루수르사가 발주한 이 프로젝트는 사업비 2억 9000만 달러 규모, 발전용량 810MW급의 LNG 복합화력 건설사업이었다.

칼파와 칠카우노 발전소는 각각 2012년 8월과 11월에 성공적으로 준공됐으며, 특히 칠카우노 발전소는 조기 준공의 성과도 달성했다.

칼파 발전소 수행 과정에서는 중남미 EPC 중견기업 산토스CMI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산토스CMI는 칼파 프로젝트에서 협력사로 참여 중이었는데, 향후 성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포스코건설에게 M&A를 요청해왔다.

이 회사는 2010년 기준 매출 1920억 원을 올린 에콰도르 최대의 플랜트 시공업체로, 1994년 설립 이래 중남미 18개국에서 발전, 화공, 토목 등의 분야에서 130여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수행해왔으며, 미국 GE사의 최우수 협력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포스코건설은 2020 싱크포워드 비전에 따라 산토스CMI 인수를 결정했다. 싱크포워드 비전에서 중남미는 포스코건설이 선택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실제 해외사업에서도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그러나 프로젝트 수가 증가할수록 지리적, 언어적, 환경적 문제 해결이 선결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현지화 전략의 일환으로 산토스CMI 인수를 결정했다.

칠레에서 활약이 입소문을 타고 이웃나라 페루로 날아가더니, 이번에는 페루에서 활약이 입소문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을 가로질러 이스라엘까지 닿았다.

입소문의 진원지는 칼파의 발주처 칼파제너레이션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본사 인키아에너지사에 포스코건설의 활약상을 소개했고, 이에 인키아는 포스코건설을 이스라엘까지 불러들여 프로젝트를 맡겼다.

이스라엘 로템 복합화력발전소

이스라엘 로템 복합화력발전소 전경

R 프로젝트라 명명된 이 사업은 네게브 사막 미소르 로템 산업지역에 427MW급의 복합화력발전소를 짓는 신설사업이었다. 2010년 9월 착공, 2013년 7월 준공됐으며, 이스라엘 최초의 민간발전사업이란 점에서 지역사회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스라엘에 첫 진출한 포스코건설은 발전소 건설 과정에서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우선 철저한 사전조사와 엄정한 평가를 통해 우수 현지업체를 발굴했으며, 또 설비의 운송기간 및 비용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발굴해냈다.

“낯선 언어인 히브리어를 접해야 하는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까다로운 규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지 적응을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제외근거를 마련해서 인허가 관련 관공서, 발주처, 현지 설계사들을 설득, 설계변경 승인을 얻어냈다. 그 결과 이익률을 크게 개선시킬 수 있었으며, 회사가 뽑은 2011년도 최우수현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우희성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이 같은 성과에 이스라엘 사회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대용량의 발전소가 한 점의 오차도 없이 준공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포스코건설의 기술력에 크게 감탄했다. 포스코건설로서는 입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한편 2011년 2월 산토스CMI 인수이후 포스코건설은 자사가 수행 중이던 중남미 프로젝트에 산토스CMI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신규사업 발굴에서도 상호 협력해 효과적인 아이디어를 모았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페루 노도 발전플랜트였다.

당시 페루 정부는 향후 남부지역에서 증가하는 전력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2단계에 걸쳐 총 2000MW의 발전소 건설을 계획했다. 이 계획에 따라 페루 현지 발전회사인 싸마이사가 리마에서 약 1055km 떨어진 남부지방 모옌도에 사업비 3억 달러 규모, 발전용량 720MW급의 노도 가스화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포스코건설은 2013년 10월 프로젝트 정보를 입수하고, 산토스CMI와 공동으로 이 프로젝트 수주에 나섰다. 이 사업에서 포스코건설은 설계와 설비공급을, 산토스CMI는 시공을 수행하기로 했다.

경쟁입찰에서는 독일의 지멘스, 스페인의 아벤고아, 테크니카스 레우니다스 등과 치열한 경합을 펼쳤다. 그 결과 2014년 1월말 포스코건설이 수주에 성공하며 중남미 에너지 플랜트 강자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노도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성과는 수익성과 성장성을 동시에 확보한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최저가 낙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의 입찰경쟁에서 EPC 기술력을 당당히 인정받아 이 사업을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수주했다.

또 산토스CMI와 동반 협력을 통해 수주 창출에 성공한 것 역시 큰 성과였으며, 향후 발주 예정인 2단계 사업 수주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한 점도 나름 의미 있는 성과였다.

 

# 동남아 발전플랜트 진출 모색과 사업영역 다양화

칠레와 페루에서 EPC 기술력을 크게 인정받았지만, 2010년 이후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중남미 블루오션에 이상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환경문제로 산타마리아Ⅱ와 카스틸라 석탄화력발전소 건설공사가 중단됐으며, 칠레 산업의 중심이자 발전소의 최대 수요자였던 광산산업 역시 구리 가격 하락으로 침체기를 맞았다. 칠레 석탄화력을 뒤로 하고 페루 가스화력발전으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만족할 만큼의 프로젝트 물량이 나와 주지 않았다.

성장 정체를 타개할 특단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에 에너지 분야는 자신만의 강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칠레에서 터득한 석탄화력 기술력에 최고 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강점을 살려나갈 메이저 시장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동남아시아를 선택하고 사업발굴에 나서기 시작했다.

에너지 분야 해외사업 강점인 석탄화력 외에도 포스코건설은 중유발전, 수력발전 등에서도 성과를 냈다. 이라크 쿠르드 중유발전은 국내 에너지사업부서가 한국석유공사를 통해 발굴해낸 사업이었다.

2008년 한국석유공사는 쿠르드 자치정부와 지역 내 유전개발 합의 과정에서 발전소 건설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2012년 8월 포스코건설은 전체 7억 달러 규모의 이 사업을 한국석유공사를 통해 수주함으로써 중동 발전시장에 첫 진출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포스코건설의 임무는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 수도 아르빌에 300㎿급 화력발전소와 술라이마니야 지역에 400kV급 변압시설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중유발전에 이어 수력발전 해외진출에도 성공했다. 2013년 4월 포스코건설은 65MW급 규모의 라오스 남릭1 수력발전소 건설사업을 수주했다.

이 사업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포스코건설은 태국 국영에너지기업인 PTTI, 발전설비사인 HEC, 라오스 전력청 등과 NL1PC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사업비 1억 2000만 달러 규모의 이 사업은 BOT방식으로 추진되며, NL1PC법인이 준공 후 27년간 운영한 뒤 라오스 정부에 기부채납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 에너지 분야는 중남미 발전시장 위축에 대한 대안으로 성장 잠재력이 큰 동남아 시장 진출을 모색했으며, 아울러 수력, 풍력 등 사업군을 다양화하면서 사업영역 확대를 도모했다.

 

# 일관제철소의 꿈, 포스코-인도 하공정부터 시작

세계 최고의 제철 플랜트 기술력을 자랑하는 포스코건설에게는 못 다 이룬 꿈이 하나 있었다. 포스코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강의 제철강국을 이룩했지만, 허전한 그 무엇이 있었다.

포스코건설과 모기업 포스코가 꿈꾸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해외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이었다. 포스코는 포항과 광양의 일관제철소 성공신화를 기반으로 전 세계 곳곳에 포스코왕국 건설에 나섰으며, 포스코건설 역시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해외사업을 통해 실현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 꿈의 실현을 향한 도전 스토리는 먼저 인도에서 시작됐다. 2000년대 중반 포스코는 해외 첫 일관제철소 부지로 인도를 선택했다. 철강원료가 넘쳐나고, 거대시장을 보유한 나라 인도는 성장 잠재력도 높아 그만큼 사업기회 선점의 타당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 특히 포스코가 전략적으로 선택한 오디샤주에는 철광석이풍부하게 매장돼 있었다.

2005년경 포스코는 인도 오디샤주 정부와 연산 1200만 톤 규모의 일관제철소 건설을 위한 MOU를 체결하며 본격적으로 해외 일관제철소 도전에 나섰다. 2020년까지 12조 원의 투자가 예상되는 이 프로젝트는 한국기업의 해외 단일투자로는 최대 규모였으며, 인도에서도 외국인 직접 투자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포스코건설도 오디샤에 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포스코를 따라 인도에 진출하면서 일관제철소 건설의 부푼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이후 오디샤 프로젝트는 2014년까지 9년 동안이나 지지부진한 길을 걸었다. 일부 주민의 반대와 광물자원의 반출문제가 현지 법률과 마찰을 빚으면서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 같은 오디샤 프로젝트의 위축된 분위기는 2014년 1월 박근혜 대통령이 인도 국빈 방문을 통해 중앙정부에 강력한 협조를 요청하면서 반전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지난 9년간의 지지부진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포스코는 인도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디샤주 외에도 카르나타카주, 자르칸드주 등지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을 타진했다. 특히 상공정의 부진 타개를 위해 우선 하공정부터 건설 추진에 나서 마하라슈트라주 빌레바가드 산업단지 내에 부지를 확보했다.

마하라슈트라주는 폭스바겐, GM 등 세계 유수의 자동차사들과 타타자동차, 마힌드라마힌드라, 바자즈 등 인도 최고의 자동차사 및 부품사들이 포진한 인도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다. 포스코는 자동차강판 생산라인 건설과 함께 가공과 판매까지 최적화된 고객서비스 구축을 위해 자동차 및 전기강판 전문 가공센터인 포스코-IPPC를 시작으로 푸네, 델리, 첸나이, 하이데라바드 등지에 5개의 가공센터를 구축해나갔다.

2010.03.15 인도 포스코-마하라슈트라 CGL공장 착공식

2010.03.15 인도 포스코-마하라슈트라 CGL공장 착공식

포스코건설은 포스코-마하라슈트라 하공정에서 CGL과 냉연공장 건설을 수행하면서 아직 꽃 피지 못한 인도 일관제철소 건설의 아쉬움을 달랬다. CGL공장(2009.12~2012.5)은 사업비 1억 9000만 달러, 연산 45만 톤 규모였으며, 냉연공장(2011.5~2013.12)은 사업비 3억 달러, 연산 180만 톤 규모였다.

“CGL 현장은 우리 회사가 인도에서 처음으로 수행한 대형 공사였다. 가장 큰 어려움은 계절적 악조건이었다.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은 40도에서 50도를 육박하는 혹서기였으며,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은 몬순 기후로 우기의 계절이었다. 우리는 몬순 우기 때 지연된 공기를 혹서기 때 야간작업을 통해 만회하는 등 프로젝트의 무사 준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김노정 Director, 당시 인도CGL 현장소장)

 

# 멕시코 2CGL, “살아 돌아온 너에게 갈채를 보낸다

2009.08.24 멕시코 포스코 CGL 공장 준공식

2009.08.24 멕시코 포스코 CGL 공장 준공식

인도에서 포스코 CGL공장 건설이 한창일 때 지구 반대편 멕시코에서는 또 하나의 포스코 CGL공장 건설이 추진되고 있었다.

2009년 6월 멕시코 CGL공장 준공을 계기로 포스코의 멕시코 냉연강판시장 점유율은 단번에 40%대까지 치솟았다.⓺ 포스코-멕시코 CGL이 이처럼 중남미에서 선전하는 가운데 신일본제철과 현지 철강업체 테르니움사가 합작으로 CGL 및 냉연공장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포스코도 2CGL 추진을 서둘렀다.

포스코건설은 1CGL 때의 실패사례에서 교훈을 얻어 2CGL의 전체 EPC를 맡았으며, 설비공급도 품질이 우수한 한국업체 발주로 기준을 정했다.

그러나 경쟁자의 추격에 쫓긴 포스코로부터 무리한 임무가 떨어졌다. ‘신일본제철 프로젝트보다 먼저 준공하라’는 지시에 따라 공사기간을 21개월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체계가 가장 잘 갖춰진 국내에서도 통상 22개월이 기본이었다. 인도 CGL이 27개월이나 걸린 것만 봐도 해외사업에서 21개월은 무리한 일정이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포스코건설 내부에 있었다. 일관제철소의 꿈이 인도네시아와 브라질에서 한꺼번에 터졌다. 그러다 보니 쓸만한 대부분의 인력이 이 초대형 프로젝트로 불려갔다. 멕시코는 한 마디로 찬밥이었다. 파병할 인력이 부족해 신병들로 조직을 급조했는데, 심지어 현장소장도 차장급이었다.

2011년 8월 멕시코 프로젝트 수행 조직이 한국을 떠나던 날, 경영층의 심정은 어두웠다. 실패를 예감한 그들은 아들을 전장에 보내는 부모의 심정으로 무사 귀환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우려했던 대로 많은 실수가 발생했다.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기자재 공급의 지연이었다. 선박 수송과정에서 선적 명령이 잘못 나가 핵심설비가 1개월 보름이나 늦게 들어왔다.

이에 공기준수를 위해 돌관공사를 추진했는데, 그 비용을 고스란히 포스코건설이 물었다. 1CGL 때도 돌관공사를 했지만, 귀책사유가 포스코 측에 있어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귀책사유가 자신들에게 있었으니 손실은 손수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경험이 부족했던 젊은 요원들은 실패가 거듭될수록 단단해지고 더욱 성숙해져갔다. 그 결과 가장 어려움이 많았던 시운전 과정에서 ‘젊은 피’의 저력을 과시했다.

“갑작스런 집중 폭우로 지하구조물이 침수됐으며, 핵심설비마저 침수가 우려되자 우리는 인근의 양수기를 총동원했다. 겨우 위기를 넘긴 이후에는 폭우에 대비해 24시간 교대근무를 섰으며, 자다가도 천둥소리만 나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결과 끝까지 침수를 막고 시운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박재현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그러나 이 같은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2013년 6월 프로젝트 요원들은 준공을 코앞에 두고 현장에서 철수했다. 포스코가 경쟁자인 신일본제철의 파트너이자 현지 철강업체인 테르니움사로부터 제소를 당했고, 그 결과 현지 법원으로부터 반덤핑 예비판정이란 결정타를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60%의 관세 페널티로 냉연강판을 생산하면 오히려 적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포스코가 준공을 미룬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프로젝트 요원들은 준공 실패란 결과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모든 포스코건설 임직원들은 그들의 무사 귀환에 갈채를 보냈다. 모두들 결과보다는 과정을 높이 평가했고, 더욱 성숙해진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편 포스코-멕시코 2CGL은 법정공방을 슬기롭게 마무리하고 2014년 1월 말 마침내 준공됐다.2CGL 준공으로 포스코는 2009년 연산 40만톤의 1CGL에 이어 총 90만톤 규모를 갖춤으로써 현지기업 테르니움에 이어 멕시코 내에서 제2의 자동차강판 철강사로 부상했다.

 

# 중국보다 높은 가격으로 포머사 베트남 제철소 따내다

1954년에 설립된 포머사 그룹은 석유화학, 정유, 에너지, 섬유, 전자, 중공업, 자동차, 운송사업, IT, 철강 등 40여개 계열사를 보유한 대만의 대표 기업이었다. 포스코가 인도네시아에서 일관제철소의 꿈을 실현할 때 포머사는 베트남에서 그 꿈을 키우고 있었다.

포머사와 포스코건설의 인연은 2009년 포스코-베트남 냉연공장의 성공적 준공으로 시작됐다. 당시 베트남 중부 하띤성에서 연산 700만 톤 규모의 일관제철소 건설을 준비 중이던 포머사의 가장 큰 고민은 공기준수였다. 베트남에서는 유럽이나 일본기업도 기후와 지역 특성상 1년 정도의 공기지연은 관례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베트남 사회에서 포스코 냉연공장의 공기 내 준공은 신선한 화제로 회자됐으며, 포머사도 그 소문을 듣고 포스코건설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포머사의 요청에 2009년경 포스코건설은 하띤 일관제철소 설비공급 입찰에 참여했으나, 쓸쓸한 패배를 맛보았다. 성심을 다해 포머사를 지원했으나, 결과는 저가로 무장한 중국업체들의 독식이었다. 괜히 소중한 기술자료만 뺏기고 들러리를 선 꼴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2012년 시공관련 입찰이 시작되자 이때도 포머사는 포스코건설에게 참여를 권유해왔다. 입찰 참여를 놓고 내부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또 다시 중국업체들의 들러리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이번만큼은 철저히 준비해 제대로 한 번 해보자는 의욕도 흘러나왔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도전정신에 큰 의미를 두고 다시 한 번 입찰 참여를 결정했다.

중국업체들의 저가 공세에 맞서 포스코건설은 사전에 막강한 사업수행 체계를 구축했다. 본사, 베트남법인, 중국법인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연합작전을 펼쳤다. 본사는 총괄관리와 핵심부품 공급을, 베트남법인은 시공을, 중국법인은 자재공급을 맡기로 했다. 베트남법인의 철구공장 역시 철구 공급에 참여하기로 했다.

막강한 사업수행 체계로 입찰에 임한 결과, 포스코건설은 2012년 말부터 2013년 중반까지 원료처리설비, 열연공장, 화성공장 시공 계약권을 잇따라 따냈다.원료처리설비 공사는 사업비 4억 달러, 연산 700만 톤 규모였으며, 열연공장 시공은 사업비 2억 9200만 달러, 연산 530만 톤 규모였다. 화성공장은 사업비 7400만 달러로, 시간당 150만 N㎥의 가스를 처리할 수 있다.

베트남 하틴제철소 원료처리설비 공사현장

베트남 하틴제철소 원료처리설비 공사현장

베트남 하틴제철소 열연공장 공사현장

베트남 하틴제철소 열연공장 공사현장

당시 입찰에서는 포스코건설 내부 컨소시엄의 효과적인 역할 분담이 가장 큰 승리 요인이었다. 마지막까지 포머사 CEO를 설득한 것도 주효했다. 포스코건설은 포머사 CEO 설득 과정에서 자신들의 기술력과 사업관리 능력을 강하게 어필했다.

“중국업체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점도 효과가 있었다. 덤핑으로 계약을 처리하면 중도에 공사를 포기하는 사태가 올 것이라는 위협에 포머사가 크게 흔들렸다. 결국 중국업체보다 높은 가격을 써내고도 기술력과 사업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이호성 Director, 해외영업기획그룹리더)

포머사 프로젝트 외 포스코사업이 아닌 대외사업으로는 동티모르 시멘트 플랜트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동티모르 TL시멘트사가 발주한 3억 5000만 달러 규모의 사업으로, 2013년 12월초 수주에 성공했다. 특히 북동부 바우카우 지역에 연산 150만 톤 규모의 시멘트공장 건설이 주목적인 이 프로젝트는 신생국가 동티모르 내 최대 규모의 민간투자사업이란 점에서 현지 사회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 프로젝트의 수주 성공에는 서호주 대표 건설사인 BGC사와의 협력이 크게 기여했다. 발주처인 TL시멘트사는 BGC사가 100% 지분을 소유한 특수목적법인이었고, BGC사는 포스코건설의 호주 건축시장 진출의 파트너였다. 결국 포스코건설이 BGC사와 그 동안 서호주 페사 프로젝트 등 여러 사업을 통해 쌓아온 신뢰관계가 동티모르 프로젝트 수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었다.

 

# 은 이루어진다! 인도네시아 일관제철소

“이번 일관제철소는 한국의 기술과 인도네시아의 우수한 인적자원이 합쳐져 이뤄낸 성과이다. 포스코가 제철보국 이념으로 한국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듯 크라카타우포스코도 같은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

2013년 12월 23일,마침내 포스코건설과 포스코는 해외 첫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실현했다. 특히 포스코는 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인도를 연결하는 철강벨트를 완성함으로써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철강사로 한 단계 도약했다.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포스코 일관제철소는 포스코 70%, 인도네시아 국영 철강사 크라카타우스틸 30% 지분으로 설립한 합작법인이며, 제철소 부지는 자카르타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반텐주 찔레곤에 위치해 있었다.

건설계획은 1단계에서 조강 300만 톤급의 일관제철소를 건설하고 이어서 2단계에서 누계 600만 톤 규모로 완성한다는 내용이었다. 1단계의 규모는 고로, 소결, 코크스, 제강, 연주, 후판 등 6개의 주설비로 이루어졌으며, 그 외 15개의 부대설비로 구성돼 있었다.

총 사업비 30억 달러 규모의 1단계 일관제철소 건설에서 포스코건설은 EPC 일괄 턴키를 맡아 16억 8000만 달러를 수주했다. 포스코 패밀리도 동반 진출해 포스코에너지가 200MW급의 발전소 건설을 맡았으며, 포스코ICT는 IT통합운영시스템 구축을 담당했다. 포스코엠텍은 알루미늄 탈산제 생산시스템 구축을 맡았다. 그 외 284개나 되는 중소기업이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동반성장의 모델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초대형 프로젝트였던 만큼 인력의 투입도 대규모였다. 포스코건설에서는 건축을 뺀 모든 사업본부가 참여했다. 프로젝트 수행의 중심인 플랜트사업본부에서는 152명으로 가장 많은 인력이 투입됐으며, 에너지사업본부에서는 발전설비 공급을 위해 5명이, 토목환경사업본부에서는 배수종말과 급배수를 위해 3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현장 일평균 투입 인력만도 3100명에 이르렀다. 일관제철소 건설은 2010년 10월말 전체 규모 370헥타르에 대한 부지조성 착수에 이어 2011년 7월초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갔다.

“현장사무소 입구에 포항제철소 착공 때의 사진을 걸어놓고 실패하면 자바 해협에 빠져 죽자는 각오로 임했다. 우리와는 달리 사계절의 변화가 없는 기후와 이질적인 이슬람 문화에 초창기 직원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또 초창기 지역사회 현지화도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 사회공헌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김덕률 전무, 당시 사업단장)

현지 적응은 물론, 지역사회와의 유대강화는 프로젝트의 성공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현지의 많은 지역업체를 프로젝트에 참여시켰으며, 지역주민도 최대한 고용했다.

사회공헌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2개월 단위로 현장 인근 정화활동을 실시했으며, 긴급 구호키트를 지원하기도 했다. 대학생봉사단이 방문해 봉사활동과 함께 한류 전파에 앞장섰으며, 지역사회 5개 학교를 개보수하고 교육기자재도 지원했다.

건설 과정에서는 현지 적응 외에도 포스코 문화의 특징인 공기준수를 달성하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현지 파트너인 크라카타우엔지니어링의 사업경험 부족으로 공정에 차질이 발생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포스코건설은 설비별로 세부 공정을 검토하고 공기지연 만회 대책을 수립하는 등 현지 협력업체 중점 관리를 실시했다.

기자재공급의 지연과 품질 문제도 발생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3개월 단위로 선적과 반입 계획을 세웠고, 6개월 단위로 제작공정을 중점 관리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포스코건설은 1개월 공기단축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재무건전성 향상도 또 하나의 성과였다.

일관제철소 현장이 원가절감에 나선 배경은 계약금액 감소와 기전계약률 하락으로 매출이익률이 감소한 것이 주요 요인이었다. 이에 물량 최소화로 고로를 설계하고, 현장관리비 절감, 자재 통합구매 등을 통해 82억 원의 원가절감을 달성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에게 일관제철소의 꿈을 실현한 현장으로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아울러 후속 일관제철소 프로젝트인 브라질 CSP의 소중한 산 교육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실제로 브라질 CSP의 최고경영층 등 많은 인사들이 프로젝트 현장을 둘러보고는 일관제철소 건설에 대한 성공 확신을 얻기도 했다.

 

# 역대 최대 규모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에 화룡점정하다

2011년 12월 21일 수요일. 이틀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외환시장이 열렸다. 당초 북한 리스크로 환율이 급등할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환율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언론이 긴급 시황 속보를 타전했다.

“환율 하락, 포스코건설 수주 물량 유입!”

포스코건설이 수주한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프로젝트가 시작도 되기 전에 1조 원에 육박하는 선수금 20%가 외환시장으로 들어왔는데, 이것이 환율을 끌어내린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대한민국 해외 수주사상 단일 제철 플랜트로는 최대 규모 프로젝트의 위력이었다.

CSP는 브라질 최대 철광석 공급사인 발레가 50%. 동국제강이 30%, 포스코가 20% 지분을 투자해 설립한 합작법인이었다. 사업비 43억 4000만 달러 규모의 CSP 일관제철소는 브라질 북동부 세아라주 뻬셍 산업단지 내 위치하고 있었다.

사업 규모는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포스코 일관제철소와 비슷했다. 1단계에서 연산 300만 톤의 슬래브를 생산하는 일관제철소를 건설하고, 이어서 2단계에서 누계 600만 톤 규모로 완공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 공사현장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 공사현장

포스코건설이 수주한 1단계의 규모는 원료 및 소결, 코크스 설비, 고로, 제강, 연주, 발전 및 부대설비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설계, 기자재 공급, 시공, 시운전에 이르기까지 사업 전 단계를 일괄 수행하는 EPC 턴키 방식으로 이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후판이 빠지고도 인도네시아보다 비싼 이유는 현지 고물가 때문이었다.

포스코건설과 CSP와의 인연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철 플랜트 분야는 포스코 베트남 냉연공장을 성공적으로 준공하고 싱크포워드 비전에 따라 미래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포스코건설이 예측한 미래 전망은 어두웠다. 포스코의 설비투자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2015년쯤 제철 플랜트 시장규모의 축소가 예상됐다.

불투명한 미래 전망에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때마침 CSP를 준비하던 발레와 동국제강으로부터 타당성 조사 의뢰가 들어왔다. 용역비용이 170만 달러밖에 안 돼 일각에서는 ‘일은 많고 돈은 얼마 안 되는 용역을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부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그런데 사업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기회라 판단하고 타당성조사 의뢰를 받아들였다. 용역 수행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발레와 동국제강의 심중을 읽어냈다. 그들은 향후 CSP의 정상적인 조업을 위해 세계적 조업능력을 갖춘 포스코의 프로젝트 참여를 은근히 원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포스코건설은 포스코 설득에 나섰다. 분명한 사업 기회라고 강하게 어필했지만, 설득은 쉽지 않았다. 포스코는 남미의 강성노조에 대한 걱정과 함께 인도네시아 일관제철소 건설로 이중 투자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포스코건설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스코건설의 지칠 줄 모르는 공세에 결국 포스코는 투자결정을 위한 경영위원회를 개최했다.

“정준양 회장이 참석한 경영위원회에서 나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계속 설득했다. 나중에는 전체 사업비에서 5억 달러 정도의 20%만 투자하면 매년 15%씩의 이익을 보장하겠다고 큰소리까지 쳤다. 그러자 정준양 회장이 씨익 웃었다.” (김성관 사장)

포스코건설의 패기에 2011년 5월 포스코는 마침내 CSP 투자를 결정했다. 이후 CSP 일관제철소 수주를 위한 활동이 본격화됐는데, 계약이 성사되기까지 두 번의 고비가 있었다. 첫 번째 고비는 설계기준이었다.

국제 표준코드와 브라질 표준코드의 견적서 적용 차이가 30~40%나 나왔다. 포스코건설은 계약 막판에 브라질 코드로 변경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CSP측에서 반발하면서 협상 결렬의 일촉즉발 상황까지 갔다. 그래도 다행히 파국을 막고 가능한 부분은 국제 코드로 하고, 국가 인허가 사항에 관련된 부분에 한해서 브라질 코드를 사용하기로 합의를 보면서 포스코건설이 실속을 챙길 수 있었다.

두 번째 고비는 세금문제였다. CSP 일관제철소가 위치한 지역은 수출진흥특별지역으로 세금혜택이 있었다. 이에 CSP측이 세금절감을 위해 하도급 기성비 지급을 직접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자면 포스코건설이 매출을 잡을 수 없어 고스란히 세금을 물어야 할 상황이었다. 한 달에 걸친 양측의 실랑이 끝에 결국 서로의 요구를 반씩 들어주는 조건으로 무사히 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마침내 모든 협상을 끝내고 2012년 12월 중순 계약이 체결됐다.당시 계약은 포스코건설에게 남다른 의미가 많았다. 1998년 코브라스코 프로젝트 수행 이후 14년만의 브라질 재진출이었으며, 수주 금액은 포스코건설 20년 역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무엇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일관제철소 건설 경험을 가진 유일한 건설사로, 브라질 CSP 수주는 그 기술력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주변의 부러운 시선과 함께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철강 경기 하락에다 브라질 고물가 때문에 예상보다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할 것이란 예측이 나돌면서 경쟁력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사실 출발부터가 고난의 행군이었다. 인도네시아 일관제철소와 마찬가지로 163명이란 대규모 인력이 투입됐는데, 장장 35시간을 비행해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다. 4개월마다 한국을 오가면서 현장 인력 13% 정도가 늘 자리가 비어, 이를 대체하느라 토요일과 휴일도 잊은 채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본사는 고통분담과 배려 차원에서 12시간 차이의 낮과 밤이 바뀌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지 시차에 맞춰 영상회의를 실시했다.

착공도 쉽지 않았다. 수주에만 급급해 사전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발주처는 현지업체에게 하도급을 줄 것을 요구했고, 그들의 요구대로 현지업체들에게 견적을 받아보니 현지 물가를 고려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상치보다 200%~300% 이상의 견적이 나왔다. 출발할 때 주변의 우려가 현실화되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전혀 터무니없는 가격도 아니었다. 브라질은 국제 규격보다 더 엄격한 ‘브라질 규격’을 적용하는데, 발주처 발레는 브라질 규격보다 더 엄격한 ‘발레 규격’을 적용했다. 그러다 보니 그만한 견적을 뽑아야만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인식이 현지에 팽배해 있었다. 결국 한국업체 하도급으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그 과정에서 발주처를 설득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2012년 7월 착공 이후 어려움으로는 엄격한 규정과 환경규제가 있었다. 엄격한 안전 규정으로 작업중지 명령을 받기도 했으며, 현장사무소 건설 과정에서는 주변에 잡목을 제거했다가 형사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작업하다 벌집이 나오면 안전한 곳으로 무사히 옮겨놓아야 환경단체로부터 고소를 피할 수 있었다.

강성노조도 큰 어려움이었다. 2013년에만 두 차례 파업이 있었다. 달래다 지쳐 마침내 법에 호소하기에 이르렀고, 법원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불법파업을 선언했다.

통관문제도 하나의 큰 이슈였다. 아무 이유 없이 40일이나 선박을 부두에 묶어놓고 통관을 시키지 않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발주처에게 공기연장을 신청하고 연장비용을 청구하며 맞섰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소통의 부재에서 출발했다. 쌍방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 서로 평행선을 달렸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뢰 회복이 시급한 시점이었다.

2013년 말을 고비로 그런 노력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먼저 포스코건설은 과정을 중시하는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엄격한 규정에 익숙해져갔다.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해외구매 통합 등 경비절감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하도급 90%를 차지하는 한국 협력업체들의 프로젝트 수행 선전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했다.

발주처도 포스코건설의 노력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CSP의 경영진 교체를 통해 쇄신에 나섰으며, 프로젝트의 성공적 완수를 위해 포스코건설의 요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양측의 이 같은 노력으로 CSP 일관제철소 프로젝트가 순항하는 가운데 2013년 11월말 브라질에서 또 하나의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브라질 CSS사로부터 사업비 6억 달러 규모의 하공정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열연 20만 톤, 냉연 60만 톤 등 총 80만 톤 규모의 판재류를 생산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주요 공급설비는 열간 압연기, 냉간 압연기, 부대설비 및 설치공사 등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수주 배경은 연산 350만 톤 규모의 광양 4열연 신설공사의 경험과 기술력 확보가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무엇보다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는 포스코건설 일관제철소 건설의 화룡점정이었고, 해외사업 20년 역사상 최고의 걸작이었다. 이로써 포스코건설은 세계 유일의 일관제철소 건설사로서 제철 플랜트 분야 글로벌 정상에 올라섰다.

 

 

<생각하는 페이지>

호주 로이힐 프로젝트 수주 실패의 반성과 교훈

호주 로이힐 프로젝트 수주 실패는 포스코건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인도네시아와 브라질 일관제철소 계보를 잇는 메가 프로젝트로서, 포스코건설이 강한 의욕을 가지고 열정을 쏟은 프로젝트였다.

너무나 기대가 커 아쉬움이 많았던 포스코건설은 또 다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지기 위해 389쪽에 이르는 완료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특히 로이힐 수주 실패는 포스코건설 20년사 서술에 영향을 미쳤다. 실패의 역사도 가감 없이 기록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호주 건설시장은 높은 물가, 폐쇄적인 인력시장, 길고 까다로운 인허가, 강력한 노조 등 외국 건설사들의 시장진입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대부분 대규모 투자사업이어서 추진 과정에 많은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시장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포스코건설은 로이힐 프로젝트 준비 과정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다.

로이힐의 시작은 포스코가 열었다. 2010년 3월 포스코는 철광석 원료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호주 로이힐 광산개발에 1차 투자를 결정하고 투자협약서를 체결했다. 이 투자협약서 내용 중 투자자의 자회사에게 프로젝트에 기여할 기회를 우선적으로 부여한다는 조건에 따라 포스코건설이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포스코건설이 강한 의욕을 갖고 참여했지만, ECI(Early Contractor Involvement) 과정이 쉽지 않았다. ECI는 호주만의 독특한 입찰방식으로, 본 공사 계약 전 입찰업체가 공사 수행방안과 공정계획 수립, 시공비 확정, 사전 설계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이었다. ECI 과정에서는 10조 원에 이르는 사업비 중 70%에 이르는 대규모 자금에 대한 금융조달 계획수립이 가장 힘들었다. 이로 인해 투자자 지분 변경, EPC 사업구도 변경, 계약조건 변경, 파이낸싱 시장상황 변동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발생해 EPC 계약이 계속 지연됐다.

더구나 가격 경쟁을 노리고 발주처가 삼성건설을 끌어들이면서 포스코건설의 위상이 크게 위축되더니, 결국 2013년 4월 입찰경쟁에서 가격에 밀려 포스코건설이 삼성건설에게 무릎을 꿇었다.

수주 실패의 근본적인 요인은 신규 진출시장에 대한 전략 부재였다. 그 결과 EPC 수행 구도에 맞는 파트너사 선정이 지연됐으며, 무엇보다 현지업체와 최저 가격 도출에 실패한 것이 뼈에 사무치는 아쉬움이었다. 발주처 기대에 호응하는 가격을 제시하고 신뢰를 얻었다면 ECI가 그렇게 길어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삼성건설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주 실패 이후 완료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EPC 수행 업무시스템 구축과 현지화 전략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호주지역 사업추진 특징에서 발주처가 요구하는 사업자의 능력은 사업기획에서 자금조달, 운영관리까지 매우 포괄적이었다. 어찌 보면 이 같은 호주시장의 특징은 포스코건설이 추구하는 펩콤(PEPCOM)으로서, 로이힐 프로젝트가 팹콤의 첫 시험무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포스코건설은 펩콤은커녕 EPC 통합관리 능력마저 아직까지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창립 20주년을 맞아 포스코건설은 펩콤보다는 본원경쟁력과 EPC 역량확보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기본으로 되돌아가 EPC부터 갖춘 다음 펩콤에 도전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현지화에도 문제가 많았다. 현지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발주처와 갈등을 빚고, 능력 있는 현지업체 발굴에 실패하는 등 치밀한 사업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포스코건설은 EPC 종합관리 능력 확충과 함께 현지화된 프로젝트 수행계획 수립을 선결 과제로 꼽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