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1. POSCO E&C 탄생 “Global E&C 닻을 올려라!”

# 영일만 허허벌판에 제철소 지은 간 큰 사람들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도대체 1994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연말이면 언론사에서 늘 하는 말처럼 사건사고도 많았고, 다사다난했던 갑술년 개띠 해였다. 유난히 폭염이 기승을 부렸는데, 52년 만의 기록이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남북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았고, 성수대교 붕괴는 한국 건설사에 오점을 남겼다.

젊은 세대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했고, 대학 농구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연세대가 대학팀으로는 처음으로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했고, 서장훈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했다. ‘사랑을 그대 품 안에’라는 드라마로 미혼 여성들이 차인표 신드롬에 빠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국 건설사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12월 1일, 포스코개발(현 포스코건설)이 탄생했다.

포스코개발, 그들은 누구인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영일만 신화의 주역이었다. 한국의 철강신화는 포스코가 국가적 사명을 갖고 이뤄낸 결과이지만, 그 주역은 설계관리를 담당했던 엔지니어링본부와 사업관리를 담당했던 건설본부의 인재들이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이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한다.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조상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제철보국(製鐵報國)! 이제부터 이 말은 우리의 확고한 생활신조요, 인생철학이 되어야 한다.”

포스코 경영다각화 체제

포스코 경영다각화 체제

그들은 박태준 회장이 부르짖는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의 구호에 따라 모래바람만 휑하게 불던 영일만 허허벌판에 제철소를 건설했다.이후 포항제철소 1기부터 출발해 1992년 10월 광양에도 4기의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포스코는 세계 최강의 철강회사로 거듭났다. 산업의 쌀인 철강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포스코건설을 만든 장본인은 포스코 내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 외에도 패밀리사에서는 포스코엔지니어링(PEC)과 거양개발이 있었다.

PEC는 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설계용역을 공정에 맞춰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1970년 7월 설립됐다. 이전까지 국내에 제철엔지니어링 분야 기술자가 전무했는데, PEC의 설립은 엔지니어링 분야 기술축적이란 사명도 있었다. PEC는 1982년에 포스코가 전액 출자하면서 성장에 날개를 달았다. 이후 종합 기술용역이 가능한 수준까지 올라 우리나라 대표적 엔지니어링회사로 성장했으며, 1990년대 들어서는 사업분야를 토목과 건축으로 확대하고 태국과 베트남 등지에서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면서 사세를 키워나갔다.

거양개발의 전신은 제철정비주식회사로, 제철설비의 정비 업무와 설비부품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1984년 4월 설립됐다. 이후 동양철관의 포항공장을 인수하면서 철구 영업을 시작했고, 일반 건설업에도 진출하면서 사세를 확대해나갔다. 1987년 1월 캐나다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기도 했다.

“제철정비는 광양제철소 1기가 준공되면서 운명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1987년 어느 날 박태준 회장이 건설본부를 방문해서는 이런 말을 남겼다. 건설본부는 광양제철소 확장을 끝내고 나면 기술적인 면으로나 윤리적인 면으로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건설회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명섭 전 사장)

이것이 구체화돼 제철정비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먼저 광양의 제철정비 분야가 분리돼 포철기연이 설립됐고, 1991년에 포항의 제철정비마저 떨어져나가면서 포철산기가 설립됐다. 마지막 남은 철구사업부와 토건사업부가 모여 거양개발(1991.5)로 거듭나는데, 이는 포스코개발 탄생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초일류 기업으로 가는 길 “E&C 회사를 만들어라

“포스코가 거양개발을 설립하고, 다시 이를 포스코개발로 확대 개편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포스코의 건설인력이 최고로 많을 때에는 건설본부 800여명, 엔지니어링본부에 300여명 등 1100여명에 이르렀다. 포스코로 보나 국가적으로 보나 이만큼 잘 훈련된 인력이 없었다.” (이명섭 전 사장)

특히 건설본부는 단순한 공사감독 업무에 그치지 않고 전반적인 프로젝트 관리(CM)까지 수행했기 때문에 건설회사는 아니었지만, 국내 여느 건설회사보다 우수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90년경 일본 다이세이(大成)건설의 보고서에서 일본의 건설회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포스코의 건설본부라고 주장했을 정도로 건설본부는 세계적인 CM 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가 종합 준공되면서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의 사후 거취가 최대 쟁점으로 부각됐다. 세계적 CM 능력을 가진 조직을 그대로 놔 두기에는 포스코로서나, 국가적으로나 큰 손실이었다. 이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에서 신설회사 설립이라는 새로운 방안이 도출됐다.

더욱이 이 시기 포스코는 중요한 변화의 시점을 맞고 있었다. 포스코 역사상 최초의 외부 영입 최고경영자였던 김만제 회장이 취임했고, 문민정부는 변화와 개혁을 시도했다. 특히 UR 타결과 WTO 출범으로 세계화 물결이 크게 일면서 우리나라는 선진국으로부터 개방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이 변화의 시기에 포스코는 비전(POSCO VISION 2005)을 수립했다. 1994년 7월 확정 발표된 비전에서 포스코는 2005년까지 세계 100대 그룹 진입을 목표로 삼았다. 성장의 지렛대로는 철강, 엔지니어링과 건설(E&C), 정보통신을 선택하고 집중적으로 육성하기로 했다.

특히 포스코가 선택한 엔지니어링과 건설의 조화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세계화와 개방화가 가속화하면서 선진국과의 경쟁이 불가피해졌고, 엔지니어링 없이 단순 시공능력만으로는 국내시장을 수성할 수도, 해외시장을 개척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포스코의 비전 수립과 함께 E&C 회사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본격화됐다. 포스코의 전략에 따라 초일류기업으로 가는 여정에서 마침내 최고 수뇌부로부터 E&C회사를 만들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부정으로 얼룩진 건설판을 확 바꿔버리자!
1994.8.19 거양개발, PEC 합병계약 체결

1994.08.19 거양개발, PEC 합병계약 체결

1994년의 그 뜨거운 여름, 포스코개발 설립을 위한 E&C 통합작업이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먼저 거양개발과 PEC가 합병하고, 이어서 포스코 내 엔지니어링본부와 건설본부의 인력들이 옮겨갔다. 거양개발은 11월 15일 임시 주총을 열어 사명을 ‘포스코개발주식회사’로 정했고, 이어서 포스코개발은 12월 1일 최종적으로 PEC와의 합병 절차를 밟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E&C 사업에 주력해 포스코개발을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는 포스코에 버금가는 기업으로 키워나가겠다.”

11월 16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동원빌딩에서 포스코개발 현판이 내걸리던 날,김만제 회장의 첫 일성이었다. 최고경영자의 힘찬 포부에 현판식에 참석했던 250여명의 임직원들은 포스코개발을 세계적인 종합엔지니어링 건설업체로 거듭나게 하겠다고 결의했다.

1995년 1월 23일, 포스코개발(이하 포스코건설)은 하얏트호텔에서 창립기념행사를 열고, E&C 분야 진출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행사에는 오명 건설교통부 장관을 비롯해 국내외 귀빈 8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먼저 손근석 초대회장의 개회사가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제철소 건설 초창기부터 축적된 플랜트 엔지니어링과 시공 기술을 하나로 응집한 결정체인 만큼 경쟁력 강화의 기틀은 이미 마련됐다. 앞으로는 첨단기술 습득에 주력해 개방화와 세계화 추세 속에서 선진국가와 당당히 경쟁하는 회사로 발전해나가겠다.”

포스코의 맏형으로 거듭난 포스코건설의 강한 의욕에 김만제 회장은 동반성장과 집중투자 의지를 밝혔다.

“E&C는 25년간 철강 건설 경험과 기술이 축적된 핵심역량 부문으로서 21세기 포스코 그룹 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E&C 산업을 선진기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그 역할이 기대된다. 포스코건설은 그룹에서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3대 기축사업 가운데 하나로서 투자를 포함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포스코건설의 출현은 한국 건설업계에 신선한 자극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담합과 뒷거래, 부실시공 같은 고질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특히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건설업의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출범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부정적 이미지의 건설문화를 확 바꿔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주요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사업 초기부터 수주 과정까지 담합하지 않겠다! 건설업 질서를 흩트리는 덤핑을 하지 않겠다! 시공과정에서 절대 부실공사를 하지 않겠다! 무담합, 무덤핑, 무부실. 이 세 가지를 창업정신으로 내걸고 신생기업이 힘찬 첫걸음을 내딛자 그 동안 관행에 젖어있던 한국 건설업계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며 포스코건설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1994.12.01 포스코개발 창립 기념식(초대 임원진)

 

 #세계적 E&C 회사 미국의 벡텔이 되겠다!
1995.01 POSEC VISION 2005

1995.01 POSEC VISION 2005

포스코건설은 포스코의 비전이라는 사업계획에 따라 새 생명을 얻었다. 포스코가 설계하는 2005년의 비전은 세계 100대 클럽에 합류하는 것이었고, 성장의 지렛대로 포스코는 포스코건설을 선택했다. 그러니 포스코건설도 그에 걸맞은 비전이 필요했다.

1995년 1월 포스코건설은 비전(POSEC VISION 2005)을 수립했다. 처음부터 목표를 거창하게 잡았다. 세계적 E&C 회사인 미국의 벡텔을 타깃으로 설정했다. 벡텔의 목표로 삼아 21세기 세계 으뜸 E&C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포부였다.

불과 10년 만에 신생기업이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허무한 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포스코 철강신화의 주역답게 포스코건설의 꿈은 그렇게 원대하고 높았다. 결국 세계 1등 E&C기업이란, 10년으로 안 되면 20년, 20년이 안되면 30년 걸려서라도 철강신화에 이어 마침내 E&C신화를 이룩하겠다는 포스코건설만의 강한 신념의 표현이었다.

실현 가능한 비전의 목표로는 수주 8조 원과 매출 6조 원을 설정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제철 플랜트를 주축으로 환경, 에너지, SOC 분야를 주력사업으로 삼았고, 민자발전, LNG터미널 사업 등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또 선진 수준의 엔지니어링 기술을 조기에 확보해 사업 기획에서 건설관리까지 일괄적으로 수행하는 고수익 사업을 전략적으로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비전에서처럼 선진 엔지니어링 기술의 조기 확보를 위해 포스코건설은 출범과 동시에 자체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R&D 과정에서는 비전의 성공적 실천을 위해 주력 분야인 제철 플랜트, 환경, 에너지, SOC 분야의 기술확보에 역량을 모았다. 초창기 기술확보 과정에서는 선진 건설사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기술도입에 주력했다. 연구인력의 역량 강화와 기술경쟁력 조기 확보를 위해 대단위 기술연구소 건립도 추진했다.

미국의 벡텔 같은 세계적인 E&C회사를 지향한 포스코건설은 포스코그룹의 수직적 경영관계에서 벗어나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부문별 사장제를 도입했다. 이에 대표이사에 손근석 회장, 엔지니어링 부문에 박준민 사장, 건설 부문에 이정부 사장을 각각 선임하고, 고학봉 사장은 해외사업을 담당했다. 이로써 포스코건설은 한동안 1회장 3사장 체제를 유지하면서 초창기 조직의 화합과 성장을 위한 협력과 분권의 절묘한 조화를 이뤄나갔다.

출범 직후 포스코건설은 포스코의 의지에 따라 혁신활동으로 경영진단을 실시했다. 경영진단은 경영효율화를 위한 조직진단으로, 1996년 6월 추진위원회와 추진반을 구성하면서 그 막이 올랐다. 이후 1단계로 업무 진행과정 개선과 조직관리를 1995년 11월말까지 완료하고, 2단계로 기술 및 원가관리에 대한 경영진단을 1996년 11월 완료했다.

 

#한 지붕 세 가족, BEST POSEC으로 하나되다
1996.03.23 BEST POSEC 출범식

1996.03.23 BEST POSEC 출범식

“초대 회장으로 선임됐다는 연락을 받고는 내심 걱정이 앞섰다. 개인적으로는 포스코경영연구소의 초대 사장으로 조직을 운영해 보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데서 회사를 만드는 과정은 경험했지만, 포스코건설처럼 기존에 있었던 조직을 합쳐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있는 조직을 합쳐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회사를 새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손근석 전 회장)

포스코건설 출범 직후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조직의 화합이었다. 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거양개발과 PEC, 포스코의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 이들 조직의 통합을 두고 처음에 포스코는 사뭇 기대가 컸다. 각각 나름대로 기술과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절묘한 조합이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 선진화를 앞당기리라 믿었다.

그러나 막상 뭉쳐놓고 보니 상황이 심각했다. 조직 구성이 너무 복잡했다. 회사로 보면 3개 회사가 모였고, 조직으로 보면 4개 조직의 인력이었다. 그래서 한 지붕 세 가족이니, 네 가족이란 말이 나돌았다.

상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술연구소 조직으로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과 포철산기 인력이 들어왔고, 신생기업이다 보니 신규사업을 위해 경력사원을 대대적으로 뽑았다. 결국 보기에 따라서는 한 지붕 다섯 가족, 여섯 가족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무엇보다 서로 간 조직문화가 달랐다.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는 포스코의 특성상 제조업의 문화가 있었고, 거양개발은 건설업, PEC는 엔지니어링이라는 특성이 있었다. 게다가 통합 이전 이들의 관계는 발주자와 시행사로, 소위 갑을 관계였다.

더욱이 거양개발이 PEC를 흡수 합병하는 형식이라 PEC로서는 거양개발이 ‘점령군’으로 비춰졌고, 포스코에서 건너온 인력들의 경우 발주자에서 시행사로 지위가 떨어져 불안한 심정도 어느 정도 있었다.

내부 갈등 외에 당시의 문제점으로 손근석 회장은 구성원들의 영업력 부족을 꼽았다. 아직까지 공기업 문화가 남아 있어 민간기업처럼 치열한 생존본능이 부족했다. 이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기 위해 포스코건설은 서로간 이질적 문화를 버리고, 자신만의 고유문화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1996년부터 BEST POSEC 운동을 추진했다.

BEST에서 B는 Build로서 건설, 창조를 의미하고, E는 Economic minds로 경쟁력 제고를 뜻한다. S는 Skills로 기술향상을, T는 Trust로서 신뢰 구축을 의미한다. ‘21세기 세계 으뜸 E&C 기업’이라는 슬로건 아래 ‘미래도전, 가치창조, 참여경영’을 회사의 경영이념으로 삼았고,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며, 바르게 행동한다’를 사원정신으로 선정했다. 결과적으로 BEST POSEC 운동은 신설회사로서의 기본을 만드는 과정이었고, 구성원들에게 회사의 정체성과 비전, 그리고 사원정신을 상기시키는 사상교육이었다.

출범 직후 포스코건설은 국내 건설업계의 후발주자로서 신생아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각종 건설부문에 실적이 없었으며, 전문인력 부족으로 신규 수주 개척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구성원들의 창의성과 자율적 일 처리능력 부족도 문제였다. 그래서 포스코건설은 기업문화 혁신활동을 추진하면서 자율과 창의를 통한 경영을 강조했고, 상향식 의사결정을 원칙으로 자율책임과 결과에 대한 평가 시스템을 강화했다.

1997.08.19 BEST POSEC 한마음 실천교육

1997.08.19 BEST POSEC 한마음 실천교육

특히 간담회, 워크숍, 세미나 등을 계층별, 부문별로 실시했다. 처음에는 임원들부터 합숙훈련에 참여해 토론문화를 이끌어나갔다. ‘과연 회사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목표대로 발전할 수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등의 토론과제를 집중 논의해 회사의 목표와 업무처리방향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갖도록 노력했다.

이 같은 집중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포스코건설은 짧은 기간 내에 통합에 따른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고, 빠른 시간 내에 성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출범 3년 만에 시공능력 7위로 올라섰고, 수주액도 2조 원대에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