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2. 제철 플랜트 시동, 건설업계 판도를 뒤흔들다

# 싹쓸이 괘씸죄, 50%만 먹어라

인류는 석기와 청동에 이어 철기시대를 열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극빈층으로 전락했을 때 그들은 철에서 희망을 찾았다. 산업의 ‘쌀’인 철은 위대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좋은 철이 있었기에 조선 강국도, 자동차 강국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 제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비웃었다. 힘 있는 나라가 기술과 자금을 제공해도 그걸 만들고 지킬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들은다름 아닌 위대한 대한민국이었으며, 위대한 포스코였다. 그리고 제철신화의 숨은 주역으로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가 있었다. 그들은 신화창조의 출발선인 포항제철소 건설의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광양제철소를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994년, 그들이 다시 모여 포스코건설을 만들었다. 그들의 실력은 이미 검증을 받았다. 우향우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다진 실력이었다. 그 기세에 눌려 포스코건설이 영업을 시작하던 날, 건설업계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포스코건설이 출범하면서 포스코의 설비를 시공해왔던 대형 건설사들의 철강사업부가 된서리를 맞았다. 포스코는 외자설비만 직접 발주하고 내자설비와 공사 전부를 포스코건설에게 맡겼다. 그러자 대형 건설사들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공기업이 그렇게 방만하게 경영해서 되겠느냐!”

“국민기업이라면서 문어발식 확장이 왠 말이냐!”

하루아침에 일거리를 잃고 철강사업부를 유지해야 할지, 폐쇄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 그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이 같은 노골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포스코가 한발 물러섰다. 1996년 중반 포스코건설 직접 발주 물량을 50%로 제한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나머지 물량에 대해서는 포스코건설도 대형 건설사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입찰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50% 가이드라인도 무용지물이었다. 게임이 되질 않았다. 포항과 광양에서 8기의 제철소를 건설하면서 쌓은 실력이다 보니 경쟁을 해도 포스코건설의 성적이 월등히 높았다. 입찰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면 경쟁사들은 닭 쫓던 개마냥 먼 산만 바라보았다.

 

#광양 5고로, 우리기술로 세계 최강 제철소 만들다
광양 5고로 착공식

광양 5고로 착공식

출범 시작부터 건설업계를 바짝 긴장시켰던 제철 분야는 포스코건설이 성장기반을 구축해가던 1997년까지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용광로나 고로에 철광석을 녹여 선철을 만드는 제선 분야에서는 대표적으로 광양 5고로 신설, 포항 2고로 2차 개수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고로를 대체할 새로운 제철공정으로 코렉스 프로젝트도 수행했다.

광양제철소 5고로 건설은 포스코가 조강생산 능력 총 2800만 톤 체제를 구축, 세계 1위의 철강기업으로 도약하는데 디딤돌이 된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로서는 설계에서 기자재 조달, 시공, 성능 보장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자체 기술로 완벽히 수행한 사업으로, 제철 플랜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였다.

먼저 광양 5고로는 정부의 요청에 따라 사업이 발굴됐다.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 4기 준공 이후 포항과 광양을 비롯해 총 8기에서 2100만 톤 생산체제를 갖추고, 가동률도 95% 이상을 유지하는 데도 철강 수요가 계속 급증하면서 철강 부족 현상이 해소되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주력 산업인 조선과 자동차 산업의 철강재 공급 차질을 우려하면서 포스코에게 제철 생산량 확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정부의 요청과 수요 예측에 따라 1995년 6월 포스코는 연산 300만 톤 규모의 고로 1기와 연산 200만 톤 규모의 미니밀 1기 신설에 대한 투자를 결정했으며, 포스코건설은 포스코로부터 이 사업을 수주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러나 사업 수행 도중 포스코건설은 IMF 위기를 맞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 마디로 비상 상황이었다. 환율이 치솟으면서 자고 나면 환차손이 커져갔다. 우리는 확보된 기술력과 사업관리 능력을 총동원해 수익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설비의 합리적인 구매 필요성이 강조됐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발주 단위를 세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발주 단위가 무려 160개로 늘어났다. 비슷한 규모의 포항 4고로 1차 개수 때의 발주 단위 16개와 비교하면 그 노력이 참으로 대단했다. 발주의 세분화와 함께 국산 기자재 사용 비율도 대폭 늘렸다. 이 같은 조치를 통해 손실 폭을 줄이고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고영균 전 부사장)

국산 기자재 사용 비율을 대폭 늘리면서 포스코건설은 고로 설비의 국산화에 크게 기여했다. 고로 설비에 사용되는 기자재의 경우 국제적으로도 제작업체가 한정돼 있고, 높은 신뢰성이 요구되는 전문 설비들이어서 주요 설비의 국산화에는 신중한 기술검토와 검증 과정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코건설은 설비별로 국내 전문 제작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국내업체들이 고로의 조업과 수명 결정에 필요한 핵심설비 국산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광양 5고로 건설공사는 1996년 10월 착공 이후 포스코건설의 자력 엔지니어링 기술에 의해 1999년 3월말 준공됐다. 6-1특징으로는 소결공장과 코크스공장을 신설하지 않고 기존 설비를 사용했기 때문에 별도의 부대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어 경제적이었고, 특히 인공지능 시스템과 미분탄 취입 기술 등을 최대한 활용한 최신예 고로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 수행을 통해 포스코건설은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우선 기술축적의 성과가 있었다. 고로 개수와 광양 5고로 신설과정에서 습득한 각종 기술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는데, 그 성과물이 무려 총 37건, 4만 2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사업관리에 있어서도 ISO 절차에 의한 프로젝트 관리기법을 적용했다. 더욱이 미국의 엔지니어링사인 레이시온의 프로젝트 관리기법을 전수받아 대형 고로 프로젝트의 종합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공사 안전관리와 시공 품질 면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엄격한 시공 품질관리를 통해 공사 기간을 대폭 단축함으로써 시운전 기간을 6개월 이상 확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광양 5고로 신설 경험을 바탕으로 포스코건설의 기술력이 고로를 상품화해서 판매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는 점이었다. 이후 포스코건설은 최신 고로 기술로 무장하고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 첫 성과가 이란 타바존 프로젝트에서 나타났다.

광양 5고로 준공

광양 5고로 준공

 

#광양 1미니밀, 친환경과 저원가 시대를 열다

철강 생산 공정은 처음 쇳물을 만드는 제선공정에서 출발, 쇳물에서 불순물을 제거해 강철로 만드는 제강공정으로 넘어간다. 이 시기 포스코건설은 포항과 광양제철소에서 용선 예비처리 설비, 용강 승온설비, 탈가스 설비(RH-OB) 등 제강공정 중 쇳물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노외정련 공정에서 설비 설치공사를 여러 차례 수행했다.

제강공정 중 주요 프로젝트로는 광양 1미니밀 설비가 있었다. 미니밀 설비는 전기로에서 고철을 녹여 얇은 슬래브를 만든 뒤 가열로와 조압연설비를 거치지 않고 사상압연설비에서 열연강판을 생산할 수 있는 제철 설비이다.

광양 미니밀 공장 전경

광양 미니밀 공장 전경

광양 5고로 추진배경 때와 마찬가지로 국내 강재 소비가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자 포스코는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설비 증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철강 수요가 2000년을 전후로 고비를 맞아 2010년이 되면 쇠퇴기로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예측됨에 따라 포스코는 생산량을 조절하기 어려운 고로보다는 미니밀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사업에서 일부 설비공급과 시공을 맡았는데, 이 사업은 연산 180만톤 규모에 수주 금액이 외자를 제외한 설비공급과 시공을 합쳐 2880억 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1995년 1월 착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돌입해 굴착 102만㎥, 항타 1만 300본, 콘크리트 22만 4000㎥, 기계설치 4만 2000톤, 케이블 포설 3891㎞ 등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고 많은 설비를 도입했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는 난관도 많았다. 항타와 굴착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 수처리 설비 스케일 피트 굴착(GL-23m) 완료 시점에 시간당 30㎜ 이상의 폭우가 3시간에 걸쳐 100㎜나 쏟아져 토질이 변형되고 매몰되면서 굴삭기 1대가 침수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주야를 가리지 않는 복구작업에도 불구하고 7일 정도의 공정이 지연되고 경비도 많이 소요됐다.

기계 기자재 중 연주의 신설비인 코일 핸들링 시스템은 제작과정에서 문제점이 발견돼 납품이 지연됐으며, 고압가스 설비 중에서는 인허가를 받지 않은 제품이 반입돼 이를 교체하는 작업에도 많은 시간과 인력이 낭비됐다.

그뿐 아니라 일부 협력업체의 임금 체불로 인해 근로자들의 농성이 발생했으며, 일부 협력업체는 부도를 맞아 후속업무가 지연되기도 했다. 환경단체의 고발을 해결하는 데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렸다.

비록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도 많았으나 모두가 합심해 불철주야 노력을 경주한 끝에 당초 준공일 대비 15일을 단축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1996년 10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이 성대하게 거행됐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미니밀 전 설비에 대한 시운전은 아니었지만, 제강설비와 수처리 설비에 대해 포스코건설이 자력으로 주어진 일정에 무사히 시운전을 마침으로써 포스코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특히 내부적으로도 많은 경험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연 인원 86만 명이 동원돼 포항 지역 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는 당시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지 않아 도급계약 21개 차수에 45개 협력업체와의 202건에 달하는 계약을 관리하느라 고초가 많았다. 특히 협력업체 월 기성 지급 때는 현장소장이 350~400회 이상 결재를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포스코도 성과가 많았다. 광양 1미니밀은 제철소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용광로에 의한 일관제철 방식을 완전히 탈피해 고철을 주원료로 해서 전기로로 쇳물을 생산하기 때문에 용광로, 코크스, 소결설비가 지니는 환경오염 배출 요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아울러 두께 90㎜ 이하의 박슬래브를 고속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고속 연주기가 연결돼 있어 고생산성과 저원가 조업이 가능해졌다.

결과적으로 포스코는 이 설비를 통해 기존의 고로설비 대비 최고 50%의 설비비를 절감할 수 있었으며, 제조 기일도 8일이나 단축할 수 있었다. 특히 에너지를 40% 절감시키고, 노동생산성을 30%나 증가시키는 등 포스코건설은 발주자 포스코가 저원가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 광양 4냉연, 엄청난 규모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철강 생산 공정은 제선과 제강공정을 지나 연주공정으로 넘어간다. 연주공정은 액체 상태의 철이 고체가 되는 과정인데, 이를 반제품이라고 한다. 반제품은 다시 압연공정으로 넘어가 열연코일, 후판, 선재 등 철강 제품이 된다.

압연공정은 열간압연과 냉간압연으로 나뉘는데, 특히 냉연강판은 미려한 표면과 정확한 치수, 가공성 등의 장점을 지녀 자동차, 가전, 가구, 사무용품, 건자재 등 이용범위가 넓고 일상생활에 가장 가까운 철강 제품이다.

출범 이후 3년간 포스코건설은 연주공정으로는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열연에서는 포항 1열연 신예화와 포항 3후판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냉연에서는 광양 4냉연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 중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광양 4냉연을 꼽을 수 있었다.

포스코는 가전용, 건자재용, 자동차용 등 냉연강판의 수요가 급증하자 1977년 2월포항 1냉연공장을 준공한 이후 포항 2냉연공장과 광양에 1~3냉연공장을 건설하는 등 냉연강판 생산능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왔다.

5개의 냉연공장을 가동하면서 포스코는 ‘냉연 제품이 회사의 사활과 직결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냉연 품질 혁신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러나 광양 3냉연공장 가동 이후에도 자동차, 가전제품 등 냉연제품 수요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포스코는 조만간 국내 냉연시장의 공급부족을 전망하고 광양 4냉연 건설에 착수했다.

연간 180만 톤의 생산 능력을 갖춘 광양 4냉연공장은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공장 길이가 1㎞가 넘고, 공장 폭이 300m에 이르렀다. 토건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는 하루 수행 인원만 4500여 명에 달했고, 평균 3800여 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포스코의 투자 금액이 무려 9812억 원에 달했고, 포스코건설의 수주 금액도 6280억 원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로서는 포스코건설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플랜트라 할 수 있었다.

광양 4냉연 EGL(전기도금설비)

광양 4냉연 EGL(전기도금설비)

1995년 9월 착공해 1997년 8월 준공한 이 공장은 냉간압연설비(PL/TCM), 연속소둔설비(CAL), 전기도금설비(EGL), 정정설비(RCL) 등으로 구성됐다. 포스코건설은 공기 준수를 위해 공사관리에 총력을 기울였다. 규모에 비해 1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콘크리트 49만 7000㎥, 철골 4만 4200톤, 기계 및 배관 설치 5만 2000톤, 케이블 포설 6800㎞ 등의 엄청난 물량을 처리하느라 심신이 고달팠다. 그래도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공기를 맞춰나갔다.

특히 토건공사의 공기 준수가 전체 공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여러 설비 중에서 기초 구조물이 복잡하고 협소한 지역에 대규모 물량이 집중돼 있는 TCM(냉간압연기)의 경우 압연지역 공장건설 사상 최초로 타워크레인을 설치해 사용했다. 더구나 포항 지역에서는 구조물 설치업체를 찾을 수 없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마땅한 업체를 찾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또 복잡하고 많은 구조물을 단기간에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밀도에 오류가 발생해 기계설치 작업 전에 많은 수정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나중에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냉연설비의 구조물 시공 기준을 정립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난관을 하나씩 극복해나가면서 1996년 2월 철골 입주식을 무사히 마쳤고, 이어서 8월에 압연기(Mill Housing) 입주식도 순탄하게 마무리 지었다. 압연기와 함께 연속소둔설비, 전기도금설비, 정정설비 등도 성공적으로 설치 완료했다.

포스코건설은 기전공사에 이어 기자재의 적기 수급을 위해설계, 제작, 시공 TFT를 각각 구성하고 제작사 상주관리, 1일 입고현황 관리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설치 중 발생하는 설계 및 제작 오류를 즉시 해결하는 운영체제도 가동했다. 그 결과 1997년 8월, 광양 4냉연공장이 성공적으로 준공됐다.

광양 4냉연 신설에서 가장 큰 성과로는 포스코가 독자 개발한 두께 및 형상 자동제어시스템 등의 첨단 기술을 채택함으로써 세계 최대치인 두께 0.4~2.3㎜, 폭 700~1860㎜의 후물광폭재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를 통해 제품의 두께 편차를 종전보다 32% 향상시켰으며, 후물광폭재의 평탄도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1994년 12월 출범 이후 3년간 포스코건설은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한 제철 플랜트에서 눈부신 성과를 달성했다. 포스코의 투자가 활발한 가운데 광양 5고로 신설, 광양 1미니밀 신설, 광양 4냉연 신설 등 사업규모가 1000억 원이 넘는 대형 프로젝트를 10여건이나 수행하면서 회사가 성장기반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97년의 경우 회사 전체 수주액이 1조 8000억 수준이었는데, 여기서 제철 플랜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1조 6000억 원 규모로 무려 91%를 차지했다. 이를 기반으로 제철 플랜트는 출범 직후 37위에 불과하던 회사의 시공능력을 7위로 끌어올렸다.

광양제철소 4냉연공장 전경

광양 4냉연공장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