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3. 토목과 건축 분야 진출, “출발은 초라해도 꿈은 원대하게!”        

# 남의 떡 넘보지 말고 제철이나 먹고 살아라

1994년이 저물어갈 무렵, 말 많은 건설판에 신생기업이 출몰했다.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영일만 신화의 DNA를 가졌고, 그래서 뭔가 큰일을 낼 그런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시작부터 요란했다. 미국의 벡텔이 되겠다고 호언장담하질 않나, 부패로 찌든 건설판을 확 바꿔버리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이때부터 터줏대감들의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몇 십 년째 안정된 수익을 안겨주던 터줏대감들의 사업체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결국 터줏대감들이 뭉쳤다. 그들은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다졌고, 본때를 보이기 위해 연합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거양개발 시절이나 포스코건설 시절이나 대형 건설회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포스코 발주 물량에 의존하지 말고 일반 건설시장에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쟁업체들의 저항이 거세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수주사업보다 자체 개발사업에 역점을 두고 돌파구를 찾자는 전략을 수립했다. 거양개발 시절 분당 메트로상가, 강남빌딩, 강남역빌딩 등의 실적이 그런 결과물들이었다. 포스코건설 출범 후에도 개발 부지를 확보하는 등 일반 건설업 진출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는데, 그럴수록 경쟁업체들의 견제가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포스코에서 타사와의 과도한 경쟁을 가급적 피하라는 지시까지 내려왔다.” (이정부 전 사장)

이정부 전 사장의 회고에서 나타나듯 토목과 건축 분야 진출은 신생기업 포스코건설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원과제였다. 출범 이후 3년간의 성적표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외형만 따져보면 신생기업치곤 대단한 성적을 올렸다. 수주액 2조 원 시대에 진입했으며, 시공능력으로 평가하는 업계 순위에서도 7위까지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제철 플랜트가 거둬들인 실적이었다는 것이 모두가 우려하던 심각한 문제였다. 포트폴리오 구성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구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를 누구보다도 포스코건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포스코가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 종합준공을 계기로 설비확장을 완료했기 때문에 포스코건설은 출범 전부터 향후 물량 감소를 예측했다. 다행히 철강경기가 좋아서 예측이 살짝 빗나가 포스코가 투자를 확대했고, 포스코건설로서는 운과 때를 잘 만나 빠른 시간에 성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포스코건설은 부단히 토목과 건축 분야 확대를 시도했다. 그러나 부단한 노력에 비해 결과는 좋지 않았다. 실적을 중시하는 업계 분위기 탓에 시장 진입이 쉽지 않았고, 포스코에서 수행한 건축과 토목 실적을 내세워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들이 지역단위의 연고권 위주로 컨소시엄이 구성됐는데, 이를 대형 건설사들이 독식하고 있었다. 여기에 괘심죄에 걸린 포스코건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고, 대형 건설사들이 끼워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출범 직후 제철 플랜트를 싹쓸이 하자 그 불똥이 건축과 토목으로 튀었다. 경쟁사들은 포스코가 문어발식 확장을 한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결국 국민기업의 이미지를 소중히 여기는 포스코가 외부 경쟁 자제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포스코건설이 아니었다. 우선은 토건사업본부를 강구조개발본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포스코의 위신을 세우면서 경쟁사들이 견제를 풀도록 위장전술을 펼쳤다. 건축 분야는 자체 개발사업으로 사업확대를 시도했고, 토목 분야는 민자사업으로 돌파구를 찾아나갔다.

 

#와신상담 건축 분야, 자체 개발사업으로 반전 모색하다
강남빌딩 전경

강남빌딩 전경

실적 부족과 업계의 견제로 사업추진이 여의치 않았던 포스코건설은 자체 개발사업과 포스코 물량으로 건축부문을 근근이 연명해나갔다. 자체 개발사업으로는 거양개발과 PEC가 추진해오던 프로젝트들을 물려받아 수행했다. 거양개발 사업으로는 강남빌딩과 강남역빌딩 프로젝트가 있었고, PEC 사업으로는 충정타워가 있었다. 포스코 관련 사업으로는 직원용 임대아파트인 상록타워가 있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강남빌딩과 강남역빌딩은 포스코건설에게는 최초 오피스빌딩 건설과 최초 민간 수주사업이라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1993년 3월 착공, 1996년 1월 준공한 지하 6층, 지상 21층 규모의 강남빌딩은 동절기 한파 때문에 시공 과정에서 애환이 많았다. 콘크리트 양생(Curing, 養生)을 위해 아래층에 15개의 갈탄 난로를 피우고, 위층에는 3개의 열풍기를 설치하는 촌극을 펼쳤다.

특히 공사지역이 저지대여서 폭우로 인해 전기실이 침수되는 일도 있었고, 준공을 앞두고는 주공정 업체의 부도로 돌관공사(突貫工事)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런 난관을 극복하고 강남빌딩은 강남지역 상권의 중심 건물로 자리잡았다.

1996.01 강남빌딩 준공

1996.01 강남빌딩 준공

강남역빌딩 전경

강남역빌딩 전경

1993년 6월 착공, 1997년 6월 준공한 지하 7층, 지상 20층 규모의 강남역빌딩은 분양사업에 자신감을 심어준 프로젝트였다. 일반 분양을 진행할 경우 적자가 예상되자 포스코건설은 일괄 분양을 추진했다. 매수 희망업체로는 한솔그룹이 나타났는데, 건축주를 비롯해 3자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협상과정에서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2개월에 걸친 협상과정에서 치밀한 계획과 정보수집으로 상대를 이해시키고, 상세한 자료제공으로 신뢰를 얻어 마침내 계약에 성공했다. 그 결과 당초 적자가 예상되던 사업을 흑자로 전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충정타워 전경

충정타워 전경

서울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 입구에 위치한 지하 6층, 지상 15층 규모의 충정타워는 포스코건설 최초의 도심 재개발사업이었다. 사업 구조는 조합원에게 3개층을 대물 보상하고 나머지 12층을 일반 분양하는 것이었다. 시공은 동부건설이 맡았고, 1993년 12월에 착공해 1996년 8월에 준공했다.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서는 세입자와 반대 조합원으로 인해 1년 6개월이나 공사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분양에 성공해 흑자를 기록하고 재개발사업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한 것은 큰 성과였다.

“포스코건설은 철강재를 활용한 프로젝트 발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부산의 광안대교 공사를 수행하면서 콘크리트로 설계된 것을 강교량으로 바꾸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철골조 아파트인 상록타워도 건설했다.” (이정부 전 사장)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지하 2층, 지상 25층 규모의 상록타워는 포스코건설 최초의 아파트 건설이었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철골조를 이용한 주거 전용 아파트라는 점에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포스코 무주택 서울 근무자들을 위한 임대아파트로서 1994년 8월에 착공해 1996년 6월에 준공했다. 포스코건설은 건물 뼈대를 완전히 철골로 구성하는 국내 최초의 철골조 아파트를 준공함으로써 철강재를 이용한 선진기술을 선보였으며, 철골조 아파트 건설 활성화에 의한 새로운 철강재 수요를 창출하고, 건식공법과 관련된 경량 마감자재 산업발전에도 기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최초의 공공사업 광안대교 적자 운영의 눈물 젖은 빵
건설 당시 광안대교

건설 당시 광안대교

“광안대교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강교량을 제작했는데, 이만한 크기의 강교량은 대형 안벽을 갖춘 조선소가 아니면 제작할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1000억 원 정도의 적자가 예상되는 사업이었다. 적자 폭을 줄이려고 중국, 태국, 러시아 등 해외에서 제작해 반입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결국 국내업체인 현대중공업에 제작을 맡겼다.” (박주운 상무, 당시 현장소장)

포스코건설은 적자를 예상하고도 실적을 쫓아 광안대교 건설공사에 참여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해 눈물 젖은 빵을 삼켰고, 그런 노고에 힘입어 적자 폭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다.

부산의 명물인 광안대교는 총 길이가 7.42㎞로 당시로서는 국내 최장의 해상교량이었다. 대규모 사업이었던 만큼 부산시는 5개 구간으로 나누어 공사를 발주했다. 1994년 12월 포스코건설은 울트라건설, 협성종합건설 등과 공동으로 입찰에 참가해 3공구의 시공사로 선정됐다. 경쟁사들의 견제가 심한 당시 상황에서 그나마 포스코 이미지가 좋은 부산지역이어서 참여가 가능할 수 있었다.

3공구는 중앙의 현수교와 조화를 맞추기 위해 360m의 트러스교와 40m의 강상형교를 현수교 좌우측으로 설치하는 공사 구간으로, 전체 시공물량은 트러스교 720m, 강상형교는 80m였다. 시공 과정에서 최대 난제는 초중량 구조물의 설치 작업이었다. 해상 크레인으로는 도저히 설치할 수가 없어 결국 포스코건설은 국내 최초로 잭업다운(Jack-up Down) 가설공법을 선택했다.

특히 성공적인 공사 수행을 위해 포스코 도쿄기술연구소로부터 기술지원도 받았다. 강교량 가조립 테스트에 대한 기술자문을 받았고, 일본 5개소의 사례조사와 강교량 건설 관련 기술도 제공받았다. 무엇보다 이 공법을 교량에 적용한 예가 없어 예행연습이 필요했다. 박주운 상무는 광안대교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이때의 경험을 잊지 못할 한 장면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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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2.09 광안대로 건설 기공식

1998년 1월, 모든 상황을 실제 조건과 동일하게 준비한 다음 예행연습에 들어갔다.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구조물을 탑재하지 않은 3만톤 규모의 바지선이 6시간 만에 광안리 앞바다에 나타났다. 현장에 국내 유일의 초대형 바지선이 도착하자 마치 섬 하나가 떠있는 것 같았다. 이 거대한 배를 구경하기 위해 해변가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기상 악화로 거대한 산 모양의 파도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손 쓸 겨를도 없이 해상작업용 장비들이 파도에 묻혔고, 설상가상으로 섬과 같은 바지선이 교각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2003.01.06 부산 광안대교 개통식

2003.01.06 부산 광안대교 개통식

만약 교각과 부딪친다면 지난 4년간의 피와 땀이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급히 예인선 3척을 동원해 바지선을 먼 바다로 끌어당겼으나 오히려 계속 밀리기만 했다.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던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아무리 당겨도 꿈쩍도 않던 바지선이 서서히 당겨지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현장 직원들과 감리단, 그리고 발주처인 부산시 공무원들까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예행연습과 함께 포스코건설은 1998년 2월 27일 국내 최초로 잭업다운 가설공법을 적용해 트러스교 설치에 성공했다. 1998년 11월과 2000년 10월에도 같은 공법을 적용해 트러스교 설치에 재차 성공함으로써 이 분야에서 다시 한 번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1995년 2월에 착공에 들어간 광안대교는 8년간의 긴 공사끝에 2003년 1월 6일, 마침내 개통됐다.7-1개통식에서 박주운 상무(당시 현장소장)가 대통령 표창인 산업포장을, 김남일 Director(당시 과장)가 발주처인 부산광역시로부터 시장상을 수상했다.

 

 #고육지책 인천공항고속도로, 민원도 두렵지 않다

실적도 없는데다 회사가 대형 건설사들에게 미운 털까지 박혀 토목 분야는 공공사업에서 그야말로 개점휴업 상태나 다름없었다. 건축처럼 자체 개발사업을 추진할 건수도 없었다. 건축이야 부지 확보해서 분양하고 그 자금으로 건물을 지으면 되지만, 토목은 사정이 달랐다. 도로, 철도, 항만 등의 토목사업은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SOC의 영역이었다.

기댈 수 있는 언덕은 오로지 포스코뿐이었다. 제철소가 바다를 끼고 있어 항만공사가 있었고, 제철소를 지을 때마다 부지조성 공사가 있었다. 가장 실속 있는 사업으로는 환경사업이 있었다. 포스코가 친환경을 강조하면서 프로젝트 물량이 많았고, 그 물량만 소화해내도 업계 1위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목을 한다고 말할 때 SOC사업을 빼놓고는 더 이상 논할 수 없다. 하지만 SOC는 공공사업이 대부분이었고, 실적을 요구했으며, 대형 건설사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더구나 견제까지 받다 보니 포스코건설에게 SOC는 진입장벽이 마천루처럼 높았다.

다행히 포스코건설이 출범할 때 민자SOC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정부는 민간 자금을 끌어들여 부족한 재정을 보완하고, 운영면에서는 민간의 창의와 효율을 활용하기 위해 1994년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자유치촉진법’을 제정했다. 이로써 공공사업의 전유물이었던 SOC사업에서 민자사업의 가능성이 열렸다. 포스코건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민자유치촉진법 첫 모델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민자사업으로 나왔다. 민자사업에서 돌파구를 찾은 포스코건설은 1995년 7월 대형 건설업체들이 구성한 컨소시엄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건설 전경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건설 전경

이 프로젝트는 인천국제공항~김포공항~올림픽대로를 연결하는 총 연장 40.2㎞의 6~8차선 자동차전용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사업이었으며, 총 사업비만 2조 62억 원이 투입된 매머드급 프로젝트였다. 포스코건설을 비롯해서 11개 국내 대형 건설회사가 참여해 도로 4개, 교량 3개 등 7개 구간으로 나누어 공사를 시행했다.

“우리가 맡은 3공구는 노선은 길지 않지만 서울시, 경기도, 인천시 등 3개의 행정구역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각종 인허가 및 민원이 다른 공구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어 공사 추진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특히 서울시 강서구 개화마을과 인천시 계양구 하야동의 주택가를 관통하는 바람에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면서 공사를 하느라 곤혹을 치렀다.” (박상곤 전 상무, 당시 현장소장)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고육지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구를 선정할 때 민원이 많고 3개 행정구역이 인접해 인허가 등 행정이 복잡한 곳을 선택했다. 특히 3공구는 다른 공구에 비해 교량, 터널 등 구조물 공사도 많아 대부분의 건설사가 꺼리던 구간이었다. 따라서 3공구의 선택은 실적 쌓기에 급급했던 그 시절의 애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었다.

3공구는 길이가 본선 5.473km와 지선 1.493km로 총 6.966km였으며, 450m의 개화육교 외 8개 교량과 988m의 개화터널이 주요 공사 대상이었다. 1995년 12월 착공에 들어간 포스코건설은 2000년 9월 30일, 착공 5년 만에 4개의 도로 구간 중 가장 먼저 공사를 종료함으로써 대형 SOC사업에서 우수한 프로젝트 관리능력을 입증했다.

2000년 11월 20일,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국내 1호 민자유치 SOC사업인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개통식이 열렸다. 포스코건설은 이 자리에서 철저한 공사 품질관리 등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단체표창을 수상했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