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4. 글로벌 시동, 플랜트 강점 살려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다        

# 신시장을 찾아 중국, 베트남으로 Go Go!

포스코건설이 출범하던 1990년대는 이데올로기 장벽이 붕괴하면서 소위 공산권이라고 불리던 북방국가에서 순풍이 불어왔다. 1992년 한국과 중국,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음으로써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들 국가들은 경제성장의 모델로 한국을 선택하고 한국기업들의 대대적인 투자를 희망해왔다.

포스코건설은 신생기업이었지만 출범 직후부터 해외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여건과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먼저 글로벌 영토 확장에 나서는 든든한 포스코가 있었고, 포스코건설의 전신인 거양개발과 PEC가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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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9.15 베트남 VPS 준공

포스코건설이 집중적으로 개척하고 들어간 시장은 중국과 베트남이었다. 거양개발과 PEC의 경우 베트남시장부터 개척에 나섰다. 거양개발은 1993년부터 비나파이프 건설공사를 수행하고 있었고, PEC는 VPS 압연공장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비나파이프는 1994년 7월에 준공됐고, VPS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바통을 이어받아 1995년 9월에 준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포스코건설은 베트남사업을 확대했다. 출범 직후 베트남 철강기업과 합작으로 포스리라마를 설립하고 철골공장을 건설했다.

제철 플랜트 외에도 거양개발은 자체 개발사업으로 건축사업을 추진했다. 호치민 중심지에 위치한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주상복합빌

딩인 다이아몬드플라자는 1995년 10월에 착공해 2000년 8월에 준공했다. 베트남에 이어 중국에서도 건축사업을 추진했는데, 상하이 중심지의 랜드마크인 포스플라자는 1996년 4월 착공에 들어가 1999년 1월에 준공됐다.

포스코건설 출범 직후 포스코의 주무대는 베트남보다는 중국이었다. 1992년 광양제철소 준공 이후 포스코는 증강된 생산능력을 소화할 만한 시장으로 세계의 공장 중국을 선택하고 집중 투자에 나섰다.

다롄 CGL, CCL 공장 전경

다롄 CGL, CCL 공장 전경

이집트 아르코 특수강공장 전경

이집트 아르코 특수강공장 전경

포스코건설은 포스코의 중국 진출에 따라 포스코 현지법인의 발주 물량을 기반으로 성공적으로 중국시장 개척에 성공했다. 중국시장 첫 프로젝트는 라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 CGL이었으며, 이어서 장쑤성(江蘇省) 장자강(張家港)에 진출해 CGL과 STS 플랜트를 수행했다.

중국, 베트남에 이어 포스코건설의 해외사업은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비롯해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와 브라질로 확대됐다. 이집트 아르코(ARCO) 프로젝트는 PEC가 개발한 사업이었다. 1993년 PEC는 아르코가 14만 톤 규모의 특수강 플랜트 건설을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1995년 2월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최저입찰자로 선정됐으나, 프로젝트 컨설팅을 맡은 일본의 NKK가 자격미달을 선언하고 포스코건설을 배제시켰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부당함을 호소했고, 우리 정부도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상황은 포스코건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시가 한-이집트 수교 직전이라 이집트정부가 부담을 느꼈고, 결국 무바라크 대통령이 재입찰을 지시했다. 더욱이 아르코는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 NKK를 컨설팅에서 제외시켰다. 재입찰 결과 1996년 1월 포스코건설은 아르코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베네수엘라 포스벤 공장 전경

베네수엘라 포스벤 공장 전경

베네수엘라 포스벤(POSVEN) 프로젝트도 PEC로부터 출발했다. 1994년 미국의 방산업체 레이시온이 미니밀 고철 대체원료인 HBI 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개발해 PEC에 사업추진을 제안해왔다. 당시 포스코가 2기의 미니밀 건설을 준비 중이어서 사업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마침내 1997년 1월 포스코를 최대주주로 하는 다국적기업 포스벤이 탄생했고,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사업관리와 엔지니어링 분야를 수주했다.

브라질 코브라스코(KOBRASCO) 프로젝트는 포스코 사업이었다. 포스코는 광양 5고로의 조업용 펠릿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1996년 3월 브라질 국영 철광석회사와 합작으로 코브라스코를 설립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설계와 설비공급을 맡았으며, 펠릿 공장은 1997년 7월 착공에 들어가 1998년 11월 준공됐다.

이처럼 포스코건설은 신생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제철 플랜트 강점을 십분 활용해 중국과 아시아를 넘어 저 멀리 북아프리카, 지구 끝 남아메리카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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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코브라스코 공장 전경

1998.11 브라질 코브라스코 준공식

1998.11 브라질 코브라스코 준공식

 

 

 

 

 

 

 

# 영일만 철강신화, 베트남에서도 통한다

“우리는 포스코와 박태준의 신도!”

1992년 도무오이 당시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말이다. 국가 쇄신을 위해 ‘도이모이’(베트남 개혁개방 정책)를 외쳤던 베트남이 경제성장 모델로 선택한 것은 한국식 경제개발과 포스코의 철강신화였다. 그들은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먼저 한국과 수교를 맺었고, 포스코를 첫 해외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들에게는 철강산업 육성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도무오이 서기장이 박태준 회장에게 철강산업 투자와 기술지원을 요청해옴에 따라 포스코도 베트남 진출을 준비했다. 1992년 3월 포스코는 베트남 정부와 철강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는 포스코의 베트남 투자가 임박했음을 시사하는 움직임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한 PEC는 조직을 갖추고 프로젝트 수주를 위한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프로젝트의 윤곽은 1993년 들어 더욱 구체화됐다. 1993년 1월 황경로 당시 포스코 회장이 철강산업 협력을 위해 베트남을 방문했다. 베트남 정부는 포스코의 투자결정에 강한 신뢰와 함께 다이아몬드플라자의 공동 추진을 제의해왔다. 다이아몬드플라자는 베트남 정부가 호치민시 중심부에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랜드마크 건축사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말레이시아의 젠팅그룹이 강한 의욕을 가지고 사업 참여를 희망했는데, 베트남 정부는 젠팅을 제치고 철강 프로젝트와 건축 프로젝트를 모두 포스코에 넘겼다. 그 결과 베트남 프로젝트는 원플러스원(1+1) 효과를 가져와 PEC가 철강 프로젝트를, 거양개발이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됐다.

포스코는 베트남과 철강협력 과정에서 베트남철강공사(VSC)와 함께 현지법인으로 VPS(VSC POSCO Steel Corporation)를 설립했다. 따라서 베트남 철강 프로젝트는 일명 VPS 프로젝트로, 7만 톤 규모의 철근과 6만 톤 규모의 선재를 비롯해 총 20만 톤 규모의 압연공장을 건설하는 제철 플랜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수주전에는 PEC 외에도 이탈리아의 다니엘리, 우리나라의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이 참여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PEC는 정확한 정보력과 오랜 준비, 그리고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1993년 11월 지명경쟁 입찰에서 국내외 경쟁사를 물리치고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PEC가 VPS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거양개발이 PEC로부터 시공 부문을 수주함으로써 엔지니어링과 건설을 대표하는 양대 패밀리사가 팀워크를 이뤄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됐다. 더욱이 두 회사의 합병으로 EPC 전문기업이 탄생하고, 이 기업이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함에 따라 VPS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처음으로 수행하는 해외사업이란 기록을 남겼다.

1994 베트남 VPS 착공식

1994 베트남 VPS 착공식

VPS 압연 플랜트는 가열로, 압연기, 정정설비의 주설비와 수전설비, 운송설비, 롤숍기기, 수처리 및 계장설비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였다. 1994년 4월 착공에 들어가 1995년 9월 완공됐다. 자국 내 최대 규모인 철강공장인 VPS 압연공장이 본격 가동에 들어감에 따라 베트남의 철강생산량은 연간 50만 톤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의 철강 수요는 연간 90만 톤에 육박했고, 개혁개방과 경제개발 정책에 따라 1996년 이후에는 그 수요가 150만 톤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이를 기회로 보고 베트남에 투자했다. 1994년 12월 베트남 건설성 산하 리라마와 철골 합작사업 계약을 체결하고, 1995년 6월 포스리라마 법인을 설립했다. 이어서 1995년 10월부터 철골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1996년 10월 준공된 포스리라마 철골공장은 총 부지면적 8만여 ㎡, 공장면적 1만여 ㎡에 용접기, 절단기, 프레스 등의 2차 가공제작 설비와 각종 운반장치, 중기, 시험장비 및 다양한 공구를 설치해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를 갖추었다.

공장 준공 이후 포스리라마는 도무오이 서기장이 현장을 방문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할 정도로 베트남 정부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았으며, 베트남 후알론 방직공장 건립공사의 1차 철골제작 설치공사 수주를 비롯해 철골, 배관, 탱크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해나갔다.

 

# 다이아몬드플라자, 도이모이의 상징이 되다

VPS 프로젝트가 포스코건설의 1호 해외사업이었다면 다이아몬드플라자는 해외 건축사업 1호에 해당되는 프로젝트였다.

1995년 4월 포스코건설은 베트남 철강공사 VSC와 합작으로 다이아몬드플라자의 건설과 운영을 위해 IBC(International Business Center)법인을 설립했다. 포스코건설이 투자자금을 출자하고, VSC가 토지를 현물 출자하는 조건이었다. 포스코건설이 40년간 임대 운영한 뒤 VSC에 지분을 무상으로 양도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1995년 10월 착공된 다이아몬드플라자는 지하 2층, 지상 20층 규모에 상가시설과 업무시설, 그리고 주거시설인 아파트로 구성된 복합건물이었다.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주상복합 건물이며, 건물 전체를 철골조로 제작함으로써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었다.

건축 분야 해외 첫 프로젝트였던 만큼 경험 미숙으로 인한 어려움이 많았다. 전반적으로 업무처리가 매끄럽지 못했고, 주요 설비자재를 한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데다 시공방법이 베트남과 상황이 달라 투자비가 상승하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선진기업들을 벤치마킹 하면서 차츰 시행착오를 줄여나갔다.

자금조달도 쉽지 않았다. 1996년 2월 차입을 통해 초기 건설자금은 확보했지만, 이후 베트남 리스크와 저팬 프리미엄에 따라 IBC의 자금 조달여건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이 지원에 나서 전액 지급보증을 함으로써 추가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분양과 준공 마무리였다.

“1998년 8월 1일, IBC 법인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다이아몬드플라자의 상가와 사무실, 그리고 아파트는 준공을 한 후 모두 임대 분양하기로 돼 있었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 게 가장 큰 임무였다. IMF 시절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본사에 있을 때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암 3기이니, 악성 종양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다 보니 호치민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문표 전 전무)

당시 다이아몬드플라자는 공정이 80% 정도 마무리되고 마지막 마감공사가 한창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분양이었다. 마케팅 에이전트인 BHP는 추진력이 부족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영국의 체스터톤으로 교체하고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적극적인 마케팅 결과, 아파트는 오픈 초기부터 인기를 끌어 금새 분양이 완료됐으며, 업무시설도 개관 초기 계약기준으로 입주율이 80%를 넘어섰다. 한국기업들의 의리가 대단했다. KOTRA, SK, 대한석유공사 등은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먼지가 풀풀 날리는 상황도 개의치 않고 즉시 입주해주었다.

그러나 상업시설 분양은 쉽지 않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포스코건설은 현지 자료조사를 통해 상가의 개념부터 재정립했다. 레이아웃과 운영방식을 현지에 맞게 수정했으며, 품질을 위해 인테리어 공사를 추가했다. 무엇보다 기존 개별분양 방식의 상가계획을 전면 수정해 백화점 방식으로 변경했다. 인테리어 공사는포스코건설이 직접 시공했다. 그 결과 베트남 첫 현대식 백화점이 탄생했으며, 준공 시점에서100% 임대 분양에 성공했다.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전경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전경

다이아몬드플라자는 호치민시 최고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옛 대통령궁과 노트르담 성당이 마주보고 있으며, 건물의 3면이 도로와 접한 사통팔달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2000년 8월 25일 준공된 이 복합건물은 미국·베트남 무역협정(2000.7.14), 베트남 증권거래소 개장(2000. 7.20) 등과 함께 베트남 경제개방 3대 상징으로 통한다.

다이아몬드플라자가 종합 준공되던 날, 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이 일대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는 주변 도로와 공원까지 점령했다. 도이모이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급기야 백화점 출입문을 통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사람들은 백화점 입구에 줄을 서 있다가 구경을 마치

2000.08 베트남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준공식

2000.08 베트남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준공식

고 나오는 사람 수만큼만 들어가야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다이아몬드플라자의 성공적 준공으로 포스코건설은 한류 전도사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국 건설의 수준 높은 기술을 베트남에 전파하는 민간외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베트남의 기준을 넘어 국제적 공사품질 관리기준을 준수하는 등 엄격한 시공관리를 통해 현지인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 결과 베트남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골든퀄리티메달(Golden Quality Medal)을 수상하기도 했다.

 

 

# 중국 철강시장에 표면처리 기술 우수성을 알리다

베트남이 도이모이를 외치며 외국 자본을 유혹하기 이전에 이미 중국은 흑묘백묘론(白猫黑猫論)을 앞세워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거대 중국의 이 같은 개혁개방 소식에 전 세계 자본이 앞다퉈 차이나 드림을 좇아 불나방처럼 모여들었다.

포스코와 포스코건설도 전략적 요충지로 중국을 선택하고 만리장성을 넘었다. 포스코의 경우 광양제철소 준공 이후 늘어난 생산물량을 소화해낼 만한 큰 시장이 필요했는데, 거대 시장 중국의 개방과 한중 수교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가 건축 분야까지 노렸다.

베트남 건축 프로젝트 추진으로 자신감을 얻은 포스코건설이 중국 내 건축시장 진출의 타깃으로 삼은 곳은 상하이였다. 당시 상하이는 개혁개방의 선두주자로, 가장 먼저 변신에 나섰다. 영국의 홍콩 반환을 앞두고 중국 정부는 상하이를 제2의 홍콩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으며,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푸동(浦東) 루자주이(陸家嘴) 지구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상하이는 외국인 투자유치가 봇물을 이뤄 점차 세계적 금융과 무역,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로 변모해갔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중국시장의 변화를 발 빠르게 읽어내고 한국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단독 투자에 나서 초고층빌딩인 포스플라자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94년 7월부터 사업추진 검토에 들어가 1994년 11월 상하이시와 토지매입 계약을 체결하고 50년간 토지사용권을 취득함에 따라 프로젝트 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건축 프로젝트에 순풍이 부는 가운데 포스코도 계획대로 중국 진출에 성공했다. 먼저 화북, 화동, 화남지역에 3대 거점을 삼각편대로 확보하고 점차 내륙으로 진출한다는 전략을 세웠으며, 그 첫 시작은 화동으로 정했다.

1995년 11월 중국 동북지역 CGL 수급 불균형을 기회로 삼아 랴오닝성 다롄에 컬러강판(CGL)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어서 1996년과 1997년에 장쑤성 장자강에 포항강판(CGL)과 포항불수강(STS) 현지법인을 각각 설립함으로써 화동지역에 코일센터로 구성된 복합 철강 생산단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상의 세 포스코 현지법인이 발주한 공사는 모두 포스코건설이 수주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다롄 CGL은 1995년 11월 착공, 1997년 9월 준공했다. 회사 내부에서는 사업 초기 경험이 부족하니 기본 엔지니어링을 선진기업에 맡기고 프로젝트를 추진하자는 일부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자신들만의 작품을 만들자는 의견이 더 많았으며, 결국 정예 인력을 구성하고 자력 엔지니어링을 실행에 옮겼다.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포스코건설은 경제적 설비 조달에 이어 35일의 공기단축 성과를 달성했다.

1996년 11월 착공, 1998년 5월 준공한 장자강 CGL은 일반 건자재는 물론 가전 용도의 고품질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로서, 중국 내에서 설비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철강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빈번하게 방문하는 CGL의 모범 사례로 인기를 끌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순수 자력 설계로 설비를 공급하고 성능 인증까지 수행함으로써 표면처리 분야 설계기술에 대한 경쟁력을 국제 철강시장에서 드높일 수 있었다.

1999.01.22 장자강 STS 준공식 석상에서 휘호

1999.01.22 장자강 STS 준공식 석상에서 휘호

1997년 2월 착공, 1999년 1월 준공한 장자강 STS는 사업 초기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 문화’라는 암초에 걸려 곤혹을 치렀다. 포스코건설은 만만디로 인한 업무 지연을 막기 위해 강한 의지로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했으며, 그 결과 오히려 착공에서 상용생산에 이르기까지 21개월의 짧은 공기로 중국 내 최대 STS 냉연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자체 기술력 향상은 물론, 국내외에서 다시 한 번 그 기술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중국 진출 이후 3개 제철 플랜트의 성공적 수행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장자강 항만 투자사업에 나섰다. 이 사업은 포스코건설이 수행하고 있던 바로 그 3개의 프로젝트들이 이용할 항만건설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1997년 8월 항만 건설을 위한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곧바로 건설공사에 들어가 1998년 7월에 준공했다.

이후 장자강 항만을 1년간 운영하다가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포스코 현지법인인 장자강 포항불수강에 매각했다. 비록 운영 1년에 그쳤지만 이 항만은 포스코건설이 해외에서 첫 SOC사업에 투자했다는 데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 상하이 포스플라자, 입주하려면 자격심사부터 받아라!

중국 내 제철 플랜트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상하이 건축 프로젝트 추진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토지사용권 취득에 이어 1995년 4월 한국은행으로부터 투자 승인을 획득했으며, 6월에는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후 포스플라자 건립을 위해 한국 건설사로는 처음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건설면허를 취득함으로써 향후에 중국 건축시장에 본격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1996년 2월 포스코건설은 중국 정부로부터 프로젝트의 초보설계비준서를 취득했다. 초보설계비준서는 중국의 건축 관련 법규상 착공 허가와 각종 인허가를 얻기 위해 필수적으로 취득해야 하는 사전심사로서 우리나라의 건축허가에 해당되며, 상세설계는 이 초보설계 비준내용을 기초로 해서 진행된다.

초보설계비준서 취득과 함께 건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건설공사에서 토목이나 골조공사는 현지업체가 수행했으나, 당시 중국의 설비기자재나 고급 마감재 기술수준이 부족해 불가피하게 많은 한국업체들이 설비기자재 공급과 시공에 참여했다. 강관파일 원자재와 철골소재는 포스코 제품을, 철근은 인천제철에서 수입했다. 외장 커튼월은 현대알미늄에서 공급과 함께 시공을 맡았다.

시공 과정에서는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파일 신공법을 현지업체와 공동으로 개발해 시공에 적용함으로써 상당한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이 공법은 신기술로 지정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건축 설계에 심혈을 기울였다.

“상하이는 참 역동적이다. 그러나 건물만 이야기하자면, 시골 처녀가 봄바람이 나서 도시로 나들이를 가고 있는 것 같다.”

포스플라자를 설계한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페이(I.M. Pei)의 말이다. 상하이의 건물이 겉으로 봤을 때는 아름다운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세련되지도 못하고 기능성도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페이의 설계에 따라 포스코건설은 미적인 요소와 함께 기능성을 강조했다. 이중바닥을 설치하고, 기둥 없는 사무공간을 구현했다. 또 중국에서는 최초로 스테인리스 마감재를 활용해 미려한 건물 외관을 완성했다.

포스플라자는 건설 과정에서 품질과 안전관련 수상실적도 12건이나 올렸다. 1997년 상반기 우수현장으로 선정됐으며, 1998년 상하이 건설위원회로부터도 우수현장으로 선정됐는데, 이는 외국기업으로서는 최초의 영광이었다.

중국 상해 포스플라자 전경

중국 상해 포스플라자 전경

1999년 9월 준공과 함께 마침내 지하 4층, 지상 34층 규모의 포스플라자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2000년 5월 포스플라자는 푸동개발 10주년을 맞아 21세기 사무환경에 걸맞는 공간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아 상하이시로부터 건축 금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초기 운영 과정에서는 임대가 잘 안 돼 고민도 많았다.

“포스플라자 완공 직전인 1999년 8월에 상하이로 발령받았다. 포스플라자는 ‘코리아 센터’라는 개념에서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기업을 상대로 임대사업을 하겠다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준공 때까지 입주율이 저조했다. 준공 2개월이 지나도 계약율이 8%에 불과했다.” (박래권 전 상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스플라자 법인은 독특한 전략을 펼쳤다. 기상천외한 입주조건을 내걸었다. 글로벌 500대 기업일 것, IT나 BT 업종일 것, 서양 회사일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면 특별 우대를 하고, 조건 충족에 따라 조금씩 차등을 둔다는 단서도 달았다.

그러자 상하이 부동산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부동산업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포스플라자는 품질에 자신이 있었다. 10년, 15년 앞을 내다보고 설계했으며, 주차장도 법정 규모가 345대인데 790대가 들어가도록 지었다. 사무실 공간도 매우 실용적이어서 같은 분양 평수라도 다른 건물보다 실 평수가 훨씬 더 나왔다. 이런 내용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등 포스플라자는 최고급 전략을 펼쳐나갔다.

효과는 마케팅 5개월만에 나타났다. 미국 컴퓨터의 대명사 컴팩이 들어왔다. 컴팩을 시작으로 GM과 독일상공회의소 등이 속속 입주했다. 뒤이어 코닥과 인텔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텔은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입주하지는 않았지만,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인텔이 OK할 정도로 IT환경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입주가 러시를 이뤘고, 2001년 말 마침내 완전 입주를 달성할 수 있었다.

1994년 말 출범 이후 3년간의 성적을 놓고 볼 때 신생기업 포스코건설은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 중국과 베트남을 시작으로 해외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으며, 그 영역은 아시아를 넘어 북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이르렀다. 국내사업에서도 최고 경쟁력을 확보한 제철 플랜트를 기반으로 건설업계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업계 순위 10위 이내에 진입하며 향후 폭풍 성장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