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1. “기술력으로 IMF 파고를 넘어라!”

# 축배를 들 찰라 불청객이 찾아오다

한보철강의 부도와 기아자동차의 경영위기 등 1997년은 출발부터가 다소 불안정했지만, 그렇다고 IMF 불청객이 찾아오리라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브레이크 없는 페달을 밟으며 대한민국은 경제성장이 영원하리라고 믿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마법에 푹 빠져 안개 자욱한 한치 앞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했다.

건설판에 뛰어든 지 3년차를 맞은 포스코건설 입장에서 1997년은 나름대로 선전한 한 해였다. 수주액이 전년도에 비해 다소 줄긴 했지만, 위축된 건설경기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시공능력 10위권에 진입하면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출범 3년 만에 성장기반을 확보하고 12월 1일 창립 3주년을 맞아 축배를 들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축제는 없었다. 불청객의 방문으로 냉혹한 IMF 외환위기 상황을 맞았다.

창립기념식 열흘 전인 11월 21일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막기 위해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했으며, 마침내 12월 3일 자금지원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이 사태를 맞아 온 국민이 절망했다. IMF의 요구조건 수행에 급급한 정부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한일합병과 같은 치욕을 느꼈다.

IMF 관리체제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금리와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는 바닥을 기었다. 책상을 빼는 것이 최선이라는 씁쓸한 구조조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M&A와 빅딜 등 기업들의 생사에 변화가 많았으며, 금융기관들도 구조조정으로 힘든 시절을 보냈다.

IMF 위기극복을 위한 대한민국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나라의 빚을 갚겠다고 온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이 같은 현상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아나바다 운동’이 펼쳐졌으며, 정부와 기업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IMF 위기극복에 온 역량을 쏟았다.

2001년 8월 23일, 마침내 모든 구제금융 빚을 상환하고 대한민국은 IMF 관리체제에서 졸업했다. IMF 위기극복과 함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금리와 환율은 안정을 찾았으며, 주가도 예전 수준으로 돌아왔다. 오히려 내실은 더욱 탄탄해졌다. IMF 위기 2년 만에 고성장, 저물가, 경상수지 흑자를 달성했으며, 기업들의 경쟁력이 크게 향상되면서 일자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IMF 위기를 극복하기까지 기업들은 부침이 많았다. 극동건설, 우성과 건영 같은 건설사들을 비롯해 많은 기업들이 청산과 매각 절차를 밟았다. 대우그룹은 공중 분해됐으며, 현대그룹은 계열 분리가 가속화됐다. 이 과정에서 건설업계 1·2위 기업이던 현대건설과 대우건설이 법정관리의 운명을 맞기도 했다.공기업들의 민영화도 급물살을 탔다. 그 과정에서 2000년 9월 포스코가 민영화됐다.

 

# 포스코 투자 중단으로 존폐 위기에 몰리다

IMF 위기를 맞아 믿고 의지했던 제철 플랜트 발주가 급감하면서 포스코건설은 크게 흔들렸다. 1997년 1조 8000억 원 규모의 수주액이 IMF 위기를 맞아 1998년에 4000억 원대로 뚝 떨어졌다. 제철 플랜트에 집중된 전략이 결국 족쇄로 작용하고 만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출범 직후부터 줄곧 이 문제를 우려하고 있었다. 포스코와 제철 플랜트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사업 포트폴리오 구성상 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건축과 토목 분야 사업 확대를 지속적으로 검토했지만, 시도가 쉽지 않았다. 경쟁사들의 견제와 포스코의 만류로 대외사업을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국가적 위기 사태를 맞아 포스코는 신규 투자를 연기하고 기존의 투자사업도 중단하기 시작했다.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5767억 원 규모의 광양 2미니밀 중단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포스코란 샘물의 고갈은 포스코건설을 기아로 내몰았다.

실적이 적어 사업추진 자체가 쉽지 않았던 토목과 건축 분야는 IMF 위기에도 기본을 유지했다. 그래 봤자 1000억 원 미만의 초라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건축이었다. 실적 부족으로 경쟁입찰 참여가 쉽지 않았던 포스코건설은 자체 개발사업 추진으로 건축 분야를 키워나갔다. 그러나 IMF 위기를 맞아 포스코처럼 투자를 축소하거나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손실이 발생했다.

거양개발 시절 운영하던 아스트론 공장

거양개발 시절 운영하던 아스트론 공장

포스코건설 역사에서 구조조정은 IMF 위기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1996년 포스코 차원에서 경영진단과 함께 구조조정이 실시됐는데, 이때 회사 출범 이전 거양개발에서 하던 철구공장과 아스트론공장을 매각했다. 인력도 260명이나 내보냈다.

IMF 위기를 맞아서는 희망퇴직의 형식으로 700여명을 감축했다. 사업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건축 분야가 벌여 논 자체 개발사업들을 정리했다. 대규모 복합단지 건립을 위한 분당 프로젝트 부지 매입계약을 해지했고, 하와이 콘도사업도 중단했다. 또 건설 중이던 가락동 IT벤처타운과 유성콘도 프로젝트 공사도 중단했다.

이 풍전등화의 시기에 박득표 회장이 사령탑을 맡았다. 1998년 6월부터 거센 파고에 흔들리는 함선의 키를 잡게 된 그는 기술경쟁력 확보를 강조했다. 감래(甘來)를 위해 어떻게든 견뎌야 하는 이 시기를 기술력 확보의 기회로 활용했다. 기술력 확보와 함께 그는 다음과 같이 과

공사가 중단되었던 가락동 프로젝트

공사가 중단되었던 가락동 프로젝트

감하게 결단했다.

“취임하기 바쁘게 경영현황 전반을 돌아보니, 한마디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절체절명의 아찔한 위기에 내몰려 있었다. 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회사의 존폐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1500여 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생계가 걸린 중대한 갈림길이었다. 포스코에서 나오는 제철플랜트만 할 것이냐, 제철플랜트와 정부발주공사, 주택사업 등을 모두 하는 명실상부한 종합건설업체로 나아갈 것이냐. 양자택일이 놓여 있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박득표 전 회장)

 

 

 

 

 

 

#종합기술계획 확정, 기술력으로 중무장하다

중장기 기술 마스터플랜 성격인 종합기술계획은 포스코건설만의 독특한 R&D활동이다. 이 활동은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출발했다. 포스코건설은 신생기업이지만 신생기업답지 않은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포항제철소 1기 설비의 착공 시점을 따진다면 1990년대에 이미 제철 플랜트 30년의 기술적 연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포스코건설만의 경쟁력이었다.

반면에 회사 출범 당시 국내 엔지니어링 분야는 용어 정의나 업무영역에 대한 개념 정립마저 애매모호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발전이나 석유화학 플랜트에 비해 제철 플랜트 분야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포스코건설은 이를 체계화하고 정리할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제철소 건설과 조업을 통해 축적된 기술들이 아직 다듬어지고 포장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현장에서 엔지니어들의 머릿속에서 빛을 발하면서 숨쉬고 있었다.

종합기술계획은 제철소 건설 경험기술을 바탕으로 기술전략과 달성목표를 설정하는 작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종합기술계획을 통해 주력사업을 선정하고 이를 중점 육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POSRI와 합동으로 ‘E&C 기술력진단’을 실시해 66건의 확보대상 기술을 발굴하고 전사기술 전략과제로 등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7년 10월 처음으로 종합기술계획을 수립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더 가져야 하며,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종합기술계획의 화두는 박득표 회장의 경영시기를 맞아 더욱 구체화됐다. 그는 IMF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경쟁력 강화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이며, 포스코건설의 경쟁력은 기술력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박득표 회장은 취임 직후 전 사업본부별로 본부장과 팀장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일일이 추진계획을 직접 보고 받고 방향을 설정하는 등 종합기술계획에 한층 더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최고경영자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R&D 요원들은 회사의 보유기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며, 또 확보해야 할 기술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찾아 정량화된 기술발전 목표를 설정했다. 그 결과물이 종합기술계획 롤링플랜과 보유기술집 94권, 그리고 보유기술의 수준과 발전계획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기술 레이아웃’이었다.

“1999년 11월에 발간된 ‘기술 레이아웃’은 R&D 요원들의 수 많은 토론과 아이디어의 결정체이며, 국내 최초의 ‘기술 로드맵’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성과물을 보고 받은 박득표 회장은 ‘즉시 포스코 최고경영진과 주요 부서에 성과물과 함께 설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를 보고 받은 포스코는 우리의 기술성과를 크게 격려했다.” (김현배 전 전무)

포스코건설은 이처럼 IMF 위기 때 R&D에 집중 투자하며 종합기술계획을 확정하는 등 기술력으로 중무장하고 내일을 준비했다. 이후 종합기술계획은 매년 롤링플랜을 거쳐 현재까지 포스코건설 보유기술의 기초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현장 엔지니어들의 머리에서 정리돼 정제된 종합기술계획은 지금까지도 제철 플랜트 분야의 바이블이 되고 있다.

 

#파이넥스, 철강 제조설비의 혁신을 불러오다

종합기술계획 수립을 통해 기술력 확보에 나선 포스코건설은 제철 플랜트 분야에서 고로, 노외정련, 연주, 표면처리, 파이넥스 분야를 5대 핵심사업으로 선정하고 기술개발에 나섰다. 그 중에서 파이넥스, 시험연주기 설비, 스트립 캐스팅 상용화 기술을 비롯해 표면처리 분야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했다.

파이넥스 공정개발은 제철소 내 환경오염 제거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1980년대 이후 환경운동이 본격화되고 전 세계에서 환경규제가 엄격해지면서 이 문제는 포스코를 비롯해 모든 선진 철강회사들의 고민거리였다. 특히 제선 공정에서는 철광석을 찌고(소결), 석탄을 굽는(코크스) 과정에서 환경오염이 발생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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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1.01 코렉스 공장 착공

코렉스 공장 전경

코렉스 공장 전경

파이넥스가 개발되기 전포스코는 기존 고로를 대체할 방안으로 용융환원 제철법을 선택하고 신제선 프로세스인 코렉스 도입을 추진했다. 코렉스는 소결과 코크스 공정을 생략할 수 있어 친환경적이었으며, 아울러 2개의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어 경제적이었다.

포스코는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알피네와 설비도입 계약을 체결하고 1993년 11월부터 설비 건설에 들어갔다. 코렉스 공장 건설은 포스코건설이 맡아 1995년 11월 차세대 혁신 제철기술로 불리던 용융환원 제철법을 적용한 60만톤급 신제선 공장을 성공적으로 준공했다.

그러나 코렉스 기법은 어딘가 아쉬움이 있었다. 고로공법의 소

코렉스 공장 공사 현장

코렉스 공장 공사 현장

결과 코크스 공정은 생략할 수 있었지만, 고로와 마찬가지로 값비싼 원료인 덩어리 상태의 철광석과 석탄을 사용했다. 또 공정 중에 발생하는 가루형태의 석탄을 처리해야 하는 단점도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스코와 푀스트알피네가 손을 잡았다. 코렉스와 마찬가지로 소결과 코크스를 생략하면서도 비교적 가격이 싼 가루형태의 철광석과 석탄을 사용할 수 있는 파이넥스 공정은 가루형태의 원료를 가공 없이 직접 사용해 쇳물을 생산함으로써 설비투자와 오염물질 배출을 대폭 줄일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친환경적 용융환원 제철법이었다.

우선 RIST 주도로 하루 15톤 생산 능력의 실험로 개발에 들어갔다. 실험로 개발을 통해 기술적 타당성과 경제성을 검증한 포스코는 이어서 하루 150톤 생산 규모의 파일럿 플랜트 개발에 착수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푀스트알피네가 기본설계를 담당하고, 포스코건설은 상세설계와 설비조달, 그리고 설치공사를 수행했다.

1998년 2월 착공에 들어간 이 프로젝트는 마지막 순간까지 설계변경이 잦았다. 따라서 공기 지연을 방지하고 효율적인 공정관리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포스코건설은 패스트 트랙 기법과 P3(공정관리시스템)를 이용한 CPM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건설 공기를 10일이나 단축했다. 또 기본설계 검토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내화물의 재질 변경 등을 통한 원가절감과 함께 타워 구조물 등 설계 오류를 사전에 제거함으로써 포스코와 푀스트알피네로부터 기술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파이넥스 파일럿 플랜트

파이넥스 파일럿 플랜트

1999년 8월 준공된 파이넥스 파일럿 플랜트는 이후 1년간의 시험조업을 통해 상업화 개발 가능성 검증에 성공했다. 포스코는 파일럿 플랜트의 성공에 힘입어 후속사업으로 준상업화 규모인 연산 60만톤의 데모 플랜트 개발에 들어갔다. 이 프로젝트 역시 포스코와 푀스트알피네가 손을 잡았으며, 더욱이 파일럿 플랜트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은 포스코건설도 일정부분 투자금을 분담하고 개발에 참여했다.

개발 과정에서는 포스코건설의 역할이 파일럿 플랜트 때보다 좀더 넓어졌다. 푀스트알피네가 기본설계를 담당하고, 포스코건설이 상세설계와 설비조달, 그리고 설치공사를 수행하는 등 기본 패턴은 같았다. 그러나 데모 플랜트를 구성하는 설비 중의 하나인 성형탄 제조설비에 대해서는 포스코건설이 기본설계를 포함해 개발과 건설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2001년 1월 착공에 들어간 데모 플랜트 공사는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수행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으며, 코렉스 노체 보수공사의 셧다운 작업을 75일간이나 수행하느라 이중고를 겪기도 했다. 더구나 2002년 12월부터 약 4개월간 포항지역에 30년 만의 혹한이 찾아온 데다 계속되는 야간작업으로 프로젝트 수행자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이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스코건설은 작업별 특별 안전관리 항목을 선정·운영함으로써 2002년 11월 무재해 100만 시간을 달성했다. 그리고 2003년 6월 마침내 성공적으로 파이넥스 데모 플랜트를 준공했다.

 

# DSR 슬래브 캐스터, 차세대 연주시장 주도하다

“주조 속도 4.1, 4.2, 4.3, 4.4, 4.5m/min!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각 공정 담당자들의 긴장된 얼굴은 서서히 환하게 변했고, 끝내는 환호하며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들의 눈가엔 지난 5년이라는 각고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2002년 12월 3일, 한국 철강사의 새 장을 연 역사적인 이 날은 우리나라가 순수 독자기술로 고속 연주기 개발에 성공한 날이었다.” (정인화 전 이사보, 당시 시험연주기PJT PM)

연속주조 설비는 제철 공정의 핵심설비 가운데 하나이며, 제강 공정에서 불순물을 제거한 용강을 일정한 형태로 굳혀 슬래브로 만들어내는 설비이다.

이 설비기술은 세계적으로 강재 생산량과 원료이용 효율 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술이지만, 우리나라는 설계 기술력이 취약해 선진 엔지니어링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기업들은 연주공정의 경쟁력 우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욕심에 기술이전을 꺼렸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조강 생산량 세계 6위, 조강 생산량 중 연속주조 설비로 제조되는 비율이 98.7%에 달하는 등 조업기술이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지만, 연속주조 설비기술의 취약은 아킬레스건이었다.

결국 1998년 정부는 연속주조 설비의 설계기술 확보를 국책과제로 삼고 포스코, 포스콘, 로템 등 총 11개 기업과 연구소, 대학 등으로 대단위 산학연 협력체제를 구성했다. 포스코건설도 이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포스코건설은 한국 고유 모델로 개발된 시험연주기 설비인 DSR 슬래브 캐스터의 꾸준한 시험조업을 통해 연주기의 내구성과 정비성(整備性)을 파악하고, 주조시험을 통해 설비 성능 및 주편 시험평가를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설비의 생산성이나 품질 면에서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우리나라는 슬래브 연속주조 설비의 엔지니어링 기술을 확보했으며, 이는 해외 기술종속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국내 제철소 연속주조 설비의 턴키 베이스 자력 엔지니어링 및 건설도 가능해졌으며,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수주해 국내업체의 고용창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반도 마련했다.

2004.06.04 포스트립 데모 플랜트 착공식

2004.06.04 포스트립 데모 플랜트 착공식

파이넥스, 시험연주기 설비와 마찬가지로 스트립 캐스팅 상용화 기술 확보를 위한 노력도 이 시기 중요한 성과 중 하나였다. 스트립 캐스팅 상용화 기술은 연주설비와 열연설비를 한 공정에 통합할 수 있는 차세대 기술로 각광받았다. 주조기에서 생산된 슬래브를 연속적으로 열간 압연기에서 압연해 열연 코일을 바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로, 꿈의 주조법이라고 불릴 만큼 혁신적인 공정이었다.

포스코는 스트립 캐스팅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소규모 파일럿을 이용해 40만 톤급 상업화 규모의 데모 플랜트 설비 건설을 결정하고, 그 설비명을 ‘포스트립(poStrip)’으로 정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투자예산이 부족해 사업 참여를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철 플랜트 E&C기업으로서 스트립 캐스팅 설비의 신기술 축적이 필요하다고 판단, 적자 여부를 떠나 프로젝트 수행에 참여했다.

포스트립 데모 플랜트는 2004년 6월 착공해 2006년 6월 준공했다. 이후 포스코와 포스코건설은 상업화를 위한 조업 테스트를 시행하면서 생산제품의 상용화를 실현해나갔다

 

# 마이다스아이티, 벤처신화 이룩하다

제철 플랜트 외에도 포스코건설은 환경사업, 에너지사업, SOC사업 등의 요소기술 개발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IMF 위기를 극복해나가던 새천년 초기에는 사회적으로 벤처 열풍이 일었는데, 이를 계기로 각 기업들은 사내 벤처제도를 두고 기술개발을 독려했다. 인터넷 통합검색 대표주자 네이버도 그렇게 탄생했다.

포스코건설도 이 시기 사내 벤처제도를 운영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토목건축 분야에서는 구조설계 및 해석 프로그램인 마이다스의 상용화에 성공했고, 환경 분야에서는 슬러지 고화제를 개발하던 ‘3R’이라는 사내 벤처가 있었다. 이 중 마이다스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벤처신화를 일궈냈다.

“마이다스 신화는 1992년 4월 대한건축학회 발표회장에서 마이다스를 이용한 철골조 초고층 아파트 건축설계에 관한 연구가 소개되면서 성공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저명한 구조 엔지니어가 당시 정명식 포스코 회장에게 ‘마이다스 프로그램이 좋으니 일반인들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이형우 마이다스아이티 사장)

마이다스 개발은 핵심기술에 대한 갈망에서 출발했다. PEC 시절 외국 의존에서 벗어나 핵심기술의 자체 개발을 갈망했던 이형우 사장 같은 구조 분야 엔지니어들이 뭉쳐 프로그램 개발에 나선 것이 발단이었다.

프로그램 개발은 PEC를 지나 포스코건설로 이어져 마침내 1996년 11월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 기술은 건설 분야의 국가 기술수준을 대변하는 척도로 평가될 정도로 중요한 기술인 만큼, 선진 몇몇 국가만이 상용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이다스는 건설 분야 설계기술 자립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핵심기술이었다.

마이다스는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유명한 포스코센터의 실무 프로젝트에 적용된 결과 신뢰성과 기능의 우수성이 확인됐으며, 특히 강구조 분야에 적용성이 뛰어나다는 전문가 평가를 받았다. 포스코건설은 1996년 11월 상용화를 기점으로 우수 건설기술 인력양성에 기여하고자 교육부와 공동으로 국내 150여개 대학 토목건축학과에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기증했으며, 마이다스가 다수의 대학에서 전산구조공학의 교과목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마이다스 조직은 마이다스센터라는 사내 벤처로 활동하다가 2000년 9월 포스마이다스로 독립했으며, 2001년 2월 지금의 상호인 마이다스아이티로 거듭났다. 이후 마이다스아이티는 미국, 일본, 중국, 인도, 영국 등지의 현지법인과 35개국의 전 세계 네트워크를 통해 110여개 국가에 공학 기술용 소프트웨어를 수출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건축, 토목, 지반 등의 분야에서 시장 점유율 세계 1위라는 선도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2000.9.1 포스마이다스 창립식

2000.9.1 포스마이다스 창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