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2. 건축 분야, 주택사업 성공 이어 도시개발 개척에 나서다        

# IMF 위기를 기회로 극복하는 지혜

“포스코개발 280억 날렸다.”

1998년 말 주요 언론에 치욕적인 기사가 떴다. IMF 파고에 흔들리는 포스코건설의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 프로젝트 토지 계약을 해지함에 따라 계약금 280억 원을 포기해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국내 토지거래 사상 최대 규모의 위약금이었다. 당시로서는 280억 원을 포기하는 것이 중도금 2500억 원이 묶이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에서 내린 최고경영자의 참담한 심정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그 뒤끝은 씁쓸했다. 엄청난 금전적 손실에 뼈아픈 좌절을 맛보았다.

분당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출범 직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개발사업이었다. 1995년 중순 포스코건설은 신도시 건설이 추진되고 있던 분당에 대규모 레저타운을 조성하고 유통사업에 진출한다는, 이른바 분당 프로젝트 계획을 수립했다.

먼저 한국토지공사(현 LH공사)로부터 경기도 성남시 정자동 분당 신도시 일대의 부지 48만 2535 ㎡를 2808억 원에 매입하기로 하고 계약금 280억 원을 지불했다. 포스코건설은 사업비 4조원을 투입해 실내경기장을 비롯 쇼핑레저단지, 유원지 등을 조성하고, 1997년 중 공사에 들어가 1999년 말까지 완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97년 인근에 대형 유통센터들이 개점하는 바람에 수익성 확보가 어렵게 된데다 부동산 경기마저 침체돼 사업추진이 쉽지 않았다. 결국 IMF 한파라는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나 분당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말았다.

비록 분당 프로젝트의 좌초로 큰 시련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IMF 외환위기 시절 이만한 고통을 겪지 않은 기업은 별로 없었다. 포스코건설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불굴의 의지로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탄탄한 재무구조를 갖추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IMF 관리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보유 부동산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향후 진로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소위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핵심역량을 강화하는 보수적 경영을 할 것인지, 허허벌판 영일만에 제철공장을 짓듯 계속 꿈을 이어나갈 것인지 창사 이래 최대 고민에 빠졌다.

도곡동 포스코트 모델하우스 개관

도곡동 포스코트 모델하우스 개관

결단의 순간 최고경영층은 기술중시 경영과 함께 공격경영을 선언했다. 핵심역량인 제철 플랜트뿐 아니라 건축과 토목사업을 확장해 명실상부한 종합건설업 체제를 갖춰나가기로 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공격경영의 결단을 내릴 때, 위기의 신은 기회의 신으로 변신했다. 치욕을 안겼던 IMF 파고가 위기에서 기회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포스코는 재무구조 개선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에 대규모 증자를 실시했으며, 이로써 포스코건설은 탄탄한 재무구조를 갖추었다. 더욱이 포스코 패밀리라는 프리미엄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던 대형 건설사들 사이에서 포스코건설이 매력적인 파트너로 부상했다.

공격경영을 선언한 포스코건설은 보유 부동산 처분 과정에서 서울 강남구 도곡동과 삼성동 부지를 아파트로 개발했다. 이것이 폭풍 성장의 신호탄이 됐다. 꿈을 포기하지 않은 최고경영자의 단호한 결단과 주택사업 진출은 오늘날 포스코건설이 주택시장에서 강자로 우뚝 서게 된 단초이기도 했다.

“우리 회사 성장은 건축부문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출범 직후에는 철강 플랜트가 회사의 성장을 견인해왔지만, IMF 관리체제 직후에는 수주가 급락하는 위기상황에서 회사를 구해준 것이 건축부문이었다.”(박동진 전 부사장)

포스코건설은 1999년 10월 서울 강남구 도곡동 포스코트의 분양을 무사히 마침으로써 비로소 주택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회사 역사상 최초의 일반분양 아파트인 도곡동 포스코트는 부동산 투자심리가 극도로 위축된 상황에서도 분양 당시 초기 계약률 100%를 달성했다. 이어 2000년 10월 분양한 삼성동 포스코트는 25대 1의 청약 경쟁률을 기록하며 주택사업의 성공을 암시했다. 포스코건설은 도곡동과 삼성동 포스코트의 성공적 분양으로 지난 상처를 치유하고 주택사업에 강한 자신감을 얻었다.

도곡동 포스코트 외부 전경

도곡동 포스코트 외부 전경

 

 

 

 

 

 

 

 

# “큰 나무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2002.08.01 암사동 포스파크 입주자 사전점검

2002.08.01 암사동 포스파크 입주자 사전점검

일반분양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포스코건설의 보폭은 더욱 빨라졌다. 다음 타깃은 당시 주택사업의 꽃이라 불리던 재건축사업이었다. 주택사업의 노른자위인 만큼 재건축사업은 대형 건설사들의 전유물이었다. 그 만큼 빈틈이 없고 진입장벽이 높았다.

그러나 IMF 위기는 기회였다. 대형 건설사들의 부실한 재무구조는 국민들에게 심한 걱정을 안겼다. 반면 포스코건설의 풍부한 자금력과 탄탄한 재무구조는 고객들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불러왔다.

최초의 재건축아파트는 2000년 7월 분양한 서울 강동구 암사동 한강 포스파크였다. 암사동 포스파크는 소규모였으나 주택조합에서 직접 찾아와 재건축을 요청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포스코건설 입장에서는 재건축사업에서 기초체력을 다지는 좋은 보양식이기도 했다.

암사동 포스파크로 자신감을 얻은 포스코건설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동아아파트 재건축에서 새로운 신화를 써나갔다. 당시 경쟁 상대는 재건축시장 선두주자인 GS건설이었다. 초보나 다름없던 포스코건설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경쟁자였다. 건설업계 역시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고 치부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사업 수주 전 대치동 동아아파트

사업 수주 전 대치동 동아아파트

그러나 포스코건설에게는 꿈이 있었고, 불굴의 의지가 있었고, 창의적 도전이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진솔한 마음으로 조합원들에게 다가섰고, 현실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10개월 공들인 경쟁사의 전략보다 포스코건설만의 단 일주일의 차별화 전략에 조합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동아아파트는 포스코센터 뒤편에 위치하고 있어 포스코 프리미엄이 어느 정도 작용했으며, 포스코건설의 홍보전략도 파급효과가 컸다.

“홍보 콘셉트를 ‘큰 나무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로 잡고, 고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재산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어디냐?’를 판단하게 하자는 철저한 차별화 전략을 내세웠다. 당시 ‘건설회사의 IMF는 이제부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기가 바닥을 기고 있던 시점이라 이 전략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조용경 전 부사장)

2000년 10월 17일. 10개월 공든 탑이 무너졌고, 거인 골리앗이 소년 다윗의 물맷돌을 맞고 쓰러졌다. 조합원 투표 결과 압도적인 표차로 포스코건설이 대치동 동아아파트 재건축사업을 수주했다. 이 사건은 주택사업의 후발주자였던 신생기업이 대형 건설사의 콧대를 꺾으면서 일부 대기업이 독점해오던 재건축시장을 무한 경쟁체제로 변모시킨 파란으로 받아들여졌다. 완전히 자존심을 회복한 포스코건설은 일약 주택건설의 다크호스로 떠오르며 재건축시장의 강자로 부상했다.

2001.05.02 동아아파트 본계약 체결

2001.05.02 동아아파트 본계약 체결

동아아파트를 재건축해 탄생한 대치동 the# 아파트

동아아파트를 재건축해 탄생한 대치동 the# 아파트

 

 

 

 

 

 

 

 

 

# 달라진 위상 함께 일 합시다

도곡동과 삼성동 포스파크의 일반분양 성공에 이어 대치동 동아아파트 재건축 수주로 포스코건설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더 이상 소년 다윗이 아니라 대형 건설사들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청년 다윗으로 성장했다.

대치동 동아아파트 재건축 수주 이후 포스코건설은 분당 프로젝트의 치욕을 되갚을 기회를 잡게 된다. 그 동안 분당 프로젝트는 그 용도가 변경돼 있었다. 유원지와 레저단지 조성용이었으나, IMF 직후 부동산 침체기를 맞아 주택경기 활성화 차원에서 일부 부지가 택지로 용도가 변경됐다.

택지로 용도 변경된 부지를 불하받은 시행사는 현대건설에 시공을 의뢰했으나, 당시 유동성 위기를 겪던 현대건설은 사업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결국 사업추진을 포기했다. 그러자 시행사가 이번에는 재무구조가 튼튼한 포스코건설에 시공을 의뢰한 것이었다.

“분당 파크뷰는 우리의 잊지 못할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찬스였다. 당시 부동산시장의 민감한 변화와 국내경제 상황을 철저히 분석해 본 결과 나는 이 사업의 성공을 확신했다. 더 나아가 이 사업을 통해 포스코건설이 일반건설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대외에 공식적으로 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박득표 전 회장)

그러나 지난 악몽을 떨치고 사업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시공 경험이 부족해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거기에다 당시 부동산 경기가 워낙 좋지 않아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낙관할 수 없었다.

거듭되는 고뇌 끝에 마침내 사업 참여를 결정했다. 포스코건설은 원대한 꿈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마인드 컨트롤했으며, 무엇보다 자신들의 불굴의 의지를 믿었다. 대신 만약에 발생할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SK건설을 파트너로 끌어들였다.

분당 파크뷰 전경

분당 파크뷰 전경

분당 파크뷰 단지 내부 전경

분당 파크뷰 단지 내부 전경

포스코건설이 SK건설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대형 주택건설사 중에서 SK건설이 주택시공 물량이 가장 적어 그만큼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스코건설과 SK건설의 만남으로 분당 프로젝트의 공식 명칭은 ‘파크뷰’로 정해졌다. 파크뷰는 포스코건설의 포스파크와 SK건설의 SK뷰를 합성한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의 예상은 적중했다. 2001년 3월 경기도 성남시 분당 파크뷰 분양은 개장 2시간 만에 계약이 완료됐으며, 경쟁 분양된 고층부도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분당 파크뷰의 성공적 분양을 두고 당시 언론에서는 ‘침체된 국내 부동산시장을 되살렸다’고 높이 평가했다.

포스코건설의 탄탄한 재무구조는 대형 건설사들이 공동사업을 제안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 2001년경 현대건설이 제안한 경기도 용인 죽전 포스홈타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포스홈타운은 포스코건설의 포스코트와 현대건설의 주택 브랜드 홈타운을 합성한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현대건설과 공동사업 추진 과정에서 공동이행 방식을 요구했다.

포스코건설은 일반적인 형태인 이름을 빌려주고 은행 대출을 받게 함으로써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으로는 발전이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공동이행 방식으로 시공한 죽전 포스홈타운은 현대건설의 앞선 경험과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포스코건설은 이처럼 주택건설의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하면서 대형 주택건설사로 차츰 도약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용인 죽전 포스홈타운

경기도 용인 죽전 포스홈타운

 

# 부산 센텀파크, 건대 스타시티 더샵 브랜드 시대 열다

분당 파크뷰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포스코건설의 위상은 몰라보게 높아졌다. 위상이 높아진 만큼 그에 어울리는 새 옷이 필요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2002년 3월 포스코건설은 더샵(the#)을 세상에 선보였다. 더샵 브랜드 시대 개막은 도약의 신호탄이었다.

더샵은 부산 해운대 센텀파크와 강북 최대의 주상복합 아파트 스타시티를 탄생시키며 포스코건설을 주택건설 강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2002.03.22 부산 센텀파크 계약 체결

2002.03.22 부산 센텀파크 계약 체결

더샵 센텀파크 공사 현장

더샵 센텀파크 공사 현장

센텀파크는 부산 해운대구에 있던 수영비행장 자리에 들어서는 ‘센텀시티’ 내의 10만여 ㎡ 주거단지에 100~200㎡대로 구성된 3750세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단독으로 건설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센텀시티는 부산광역시가 디지털 시대에 발맞춰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21세기형 첨단 지식형 산업단지로, 당시 디지털 미디어 단지, 테마파크, 도심형 위락단지, 첨단 산업시설과 유통 및 편의시설 등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특히 이곳은 2001년 5월 국내 최대 규모의 컨벤션센터인 BEXCO가 개관돼 국제 모터쇼가 열렸으며, 12월에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조 추첨식이 거행돼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센텀파크는 분양 전부터 부산지역의 주거문화를 바꾸게 될 랜드마크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예상대로 분양은 대박이었다. 2002년 5월 2752가구의 1차 분양 당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모델하우스를 개관한 5월 17일부터 일요일인 19일까지 단 3일만에 무려 3만 5000여 명이나 방문했다. 이는 부산의 아파트 분양 사상 최고의 기록이었다. 센텀파크를 계기로 이후 부산의 아파트 대표 브랜드는 더샵으로 통했다.

더샵 스타시티 공사 현장

더샵 스타시티 공사 현장

서울 광진구 건국대 개발사업(더샵 스타시티)의 수주는 더샵이 주택 대표 브랜드로 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애초 경쟁순위에서 밀려 입찰 참가자격이 없었으나, 건국대 재단측의 요청으로 갑자기 참가하게 됐다. 건국대 재단은 국내 건설업체 중 재무구조가 가장 양호한 포스코건설을 배제할 수 없다는 논리로 건설사들의 반발을 잠재웠다.

서울에서 더 이상 그만한 입지가 없다는 판단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다. 건국대 개발사업은 포스코건설이 처음 겪어보는 민간사업이었다. 사업구도 자체도 굉장히 복잡하고 난해했다. 9개 대형 건설사 사이에서 포스코건설이 선전하기에는 여건이 여간 녹녹치 않았다. 그래도 포스코건설은 더샵을 기치로 총력전을 펼쳤다.

“우리가 건대 측에 제시한 분양가는 경쟁사들과 비슷했지만, 차이는 바로 임대시설에서 나타났다.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임대료를 보장해주기로 결정해 높은 입찰가를 제시했다.”(조남훈 전 상무)

결국 2002년 8월 포스코건설은 건국대 개발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센텀파크에 이어 스타시티 더샵의 탄생은 포스코건설 주택사업 도약의 기폭제였다.

청약 당시 더샵 스타시티에 몰린 인파

청약 당시 더샵 스타시티에 몰린 인파

건대스타시티 개발 약정식

건대스타시티 개발 약정식

 

 

 

 

 

 

 

 

 

# 민영화 모범사례, 포스코건설 신화 바통을 잡아라

주택사업 본격화 5년 만에 이룩한 포스코건설의 성과에 언론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중앙일보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03년 12월 30일자에 공기업 민영화 모범사례로 ‘포스코건설 신화 바통을 잡아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파크뷰를 통해 성공적으로 데뷔한 포스코건설은 2002년에 아파트 브랜드 더샵을 내놓으면서 부동산시장에 안착했다. 포스코건설의 수주액은 연간 2조 9000여억 원, 매출 1조 4880억 원이며 시공능력 기준으로 당당히 건설업계 7위에 올라있다. 불과 2~3년의 업력(業力)치고는 결코 만만치 않은 성적이다”

‘이코노미스트’는 포스코건설의 성공요인을 ‘믿을 수 있는 브랜드 신뢰도’라고 평가했다. 특히 IMF 이후 건설업체의 줄도산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거둔 것은 ‘경제가 불안해지면서 민영기업보다는 민영화된 공기업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도가 더욱 커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주택 브랜드 더샵의 성장은 포스코의 기업이미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실 포스코는 건설업 특성상 포스코건설이 오랫동안 쌓아온 포스코의 좋은 이미지에 손상을 입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해 고학봉 전 사장은 포스코건설이야말로 포스코그룹의 좋은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첨병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는 회사라고 말한다.

“포스코건설은 2004년부터 매년 1만 세대 가까운 주택을 준공해 고객을 입주시키고 있다. 이는 매년 포스코라는 브랜드를 강력하게 인식하는 4만 명 이상의 고객이 생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포스코건설이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고객만족을 위한 세심한 경영을 펼쳐나간다면 고객과 가까운 친숙한 기업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포스코의 의도는 포스코건설을 통해 그 효과가 크게 발휘될 것이다.”(고학봉 전 사장)

 

# 당당하게 외부사업 경쟁에 나서다

주택부문의 성공으로 포스코건설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더구나 재무구조가 탄탄한 우량기업이라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건축과 토목 분야가 처음으로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포스코의 민영화로 경쟁사들의 견제도 훨씬 줄어들었다. 오히려 재무구조와 능력을 믿고 같이 일해보자고 찾아올 정도로 업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회사 출범 당시에는 건축과 토목이 통합된 토건사업본부로 있었으나, 일감이 늘어남에 따라 2002년에 건축사업본부로 분리됐다. 초창기에는 토건사업본부에 100여명의 인력이 있었으나, 2004년엔 건축사업본부에만 400여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80% 가량은 외부에서 영입한 인력이었다. 그만큼 자체적으로 인력을 양성할 틈도 없이 건축 분야가 급속히 성장했다.” (박동진 전 부사장)

2004.07.19 용인동백 쥬네브 쇼핑몰 착공식

2004.07.19 용인동백 쥬네브 쇼핑몰 착공식

2003.2.12 부산 피에스타 착공식

2003.2.12 부산 피에스타 착공식

주택사업의 영향으로 건축 분야는 인원도 많이 늘고 사업도 크게 활성화됐다. 출범 초기 경쟁사들의 견제를 피해 자체사업과 포스코 물량에 의존하던 때와는 달리 IMF 위기를 맞아 외부사업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 성공 요인이었다.

건축 분야는 주택사업 외에도 민간과 공공부문에서 다양한 실적을 쌓았다. 분당벤처타운(2002.3~2005.8)은 성남시가 발주한 민자제안 사업으로 벤처시설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다. 기존의

2003.08.01 용두동 한방천하 착공식

2003.08.01 용두동 한방천하 착공식

벤처밸리가 자연발생적이고 비체계적인 구조를 지녔다면 분당벤처타운은 업무와 주거, 휴식과 비즈니스, 레저 등의 모든 벤처 관련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복합 벤처타운이었다. 한국토지공사(현 LH공사) 민자사업으로는 용인동백쇼핑몰(2004.7~2006.7)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부산에서는 센텀파크의 명성을 등에 업고 서면 중심부에 아이온시티(2002.9~2005.6), 피에스타(2003.3~2006.3) 등의 대형 상업시설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이 지역에서의 지명도를 더욱 높였다. 용두동 한방천하(2003.8~2006.10)는 도심 재개발공사이며, 상가와 업무시설로 구성된 주상복합 빌딩이었다.

포스코건설은 공공건축에서도 선전했다. 늘 실적이 없어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주택사업 성공에 용기를 얻어 공공건축에 과감히 도전했다.

경북 봉화군 청사(2001.11~2003.12)는 포스코건설이 자력으로 조달청 발주공사 입찰에 참여해서 수주한 최초의 건축 관급공사였다. 최초의 공공 턴키는 경남 김해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2003.11~2005.7)였다. 건축 분야에서의 턴키 수주는 업계 빅3가 아성을 구축하고 있어

경북 봉화군 청사 전경

경북 봉화군 청사 전경

다른 건설사가 뚫고 들어가기는 매우 힘든 여건이었으나, 포스코건설이 2001년 12월 대형 건설사들을 제치고 최종 낙찰자로 선정됐다. 2004년에는 최초의 병원공사인 서울시립 아동병원 증개축 공사를 턴키로 수주하기도 했다.

이 시기 오피스텔 브랜드로는 포스빌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서울 광진구의 건대역 한림 포스빌을 비롯해 당산역 한강 포스빌, 분당 포스빌, 신도림역 포스빌, 천안 신부동 포스빌 등이 있었다.

 

 

 

 

최초의 병원공사인 서울시립 어린이병원 증개축 공사 조감도

최초의 병원공사인 서울시립 어린이병원 증개축 공사 조감도

신도림역 포스빌 전경

신도림역 포스빌 전경

 

 

 

 

 

 

 

 

# 미래형 도시개발에서 향후 10년 먹거리를 캐내다

주택사업 성공 이후 건축 분야는 도시개발 사업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섰다. 2000년대 들어 조직과 전략의 변화를 살펴보면, 조직에서는 2002년 3월 토건사업본부에서 처음으로 순수 건축사업본부로 독립했다.

전략에서는 주택사업 성공을 기반으로 좀더 원대한 포부를 그려나갔다. 포스코건설은 대형 건설사처럼 똑같이 해서는 그들을 앞서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국민기업 포스코의 이미지를 더욱더 살려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사업을 발굴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차원에서 난개발과 나홀로 개발을 지양하고, 포항과 광양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듯이 새로운 개발사업을 발굴하는데 역량을 집중해나갔다. 포스코건설의 대표적 국가적 사명의 개발사업 중 하나가 바로 송도국제도시 개발이었다.

“송도국제도시 개발은 IMF 여파로 큰 타격을 입었다. 2001년경 최기선 전 인천시장과 포스코건설 경영층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날 최 전 시장은 포스코건설이 송도 개발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이 만남이 결과적으로 오늘의 송도국제도시를 태동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이문표 전 전무)

인천시의 요청에 포스코건설은 제철보국의 사명감으로 송도 개발 참여를 결단했으며, 2001년 7월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인천광역시, 게일사 3자간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을 위한 MOU가 체결됐다. 이어서 포스코건설과 게일사는 2002년 4월 합작법인인 ‘송도국제도시개발 유한회사(NSIC)’를 설립하고 약 127억 달러를 유치해 개발하는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송도신도시 국제비즈니스타운 조감도

송도신도시 국제비즈니스타운 조감도

127억 달러라면 한화로는 16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포스코건설은 송도 개발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향후 10년의 먹거리를 확보한 셈이었다.

그러나 송도 개발의 결단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IMF 위기로 모든 대형 건설사들이 인천시의 러브콜을 외면할 때 포스코건설은 제철보국의 정신으로 모두가 우려하던 위험부담을 떠안았다. 포스코건설은 포항과 광양에 이어 인천 송도에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송도 개발에 뛰어들었다.

포스코건설이 송도 개발의 결심을 굳힐 때 국내에서는 공모형 복합개발 PF사업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정부는 공공기간 주도의 개발사업에서 벗어나 공공-민간 복합개발을 확대했다. 공공기관 주도의 수도권 신도시개발 과정에서 인프라가 제때 갖춰지지 못했던 점을 보완한 것이었다. 공공과 민간이 노하우와 아이디어를 공유한 결과 주택 단지조성과 편의시설 인프라가 제때 갖춰짐으로써 지역주민의 삶의 질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2004.3.3 화성 동탄 복합단지 PF사업 계약식

2004.3.3 화성 동탄 복합단지 PF사업 계약식

공모형 PF사업 추진에 앞장섰던 대표적 공공기관은 한국토지공사(현 LH공사)였으며, 대표적 프로젝트로는 동탄 복합단지 PF사업이 있었다. 이 사업에 포스코건설이 참여해 2003년 12월 경기도 화성시 동탄메타폴리스 개발사업을 수주했다.

이 사업은 당시로는 단일 프로젝트 국내 최대 규모의 개발사업이란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총 사업비가 1조 5000억 원 규모였으며, 연면적 약 80만 m², 최고 지상 66층, 최고 높이 275m의 규모에 미디어센터를 비롯해 대형 복합단지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였다. 8개 대형 컨소시엄이 참여했으며, 치열한 경쟁을 뚫고 포스코건설이 컨소시엄의 주간사로서 이 사업의 민간사업자로 선정됐다.

동탄 신도시 개발사업은 포스코건설의 능력을 과시하는 시험대라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2003년 6월부터 포스코건설은 총 4만여 호가 들어설 동탄 신도시의 부지조성공사를 수행했다. 또 2004년 7월 분양한 시범단지를 시작으로 2008년까지 총 2000세대에 이르는 아파트 건설물량을 확보했으며, 무엇보다 신도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탄메타폴리스 건설사업을 추진하면서 동탄 신도시 개발사업을 주도했다.

 

경기도 화성 동탄 메타폴리스

경기도 화성 동탄 메타폴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