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3. 토목 분야, 경전철과 SOC사업에 역량을 집중하다

# 출혈을 무릅쓰고 턴키시장을 공략하다

건축 분야가 비약적 성장을 이룩한 반면 토목 분야는 쉽게 기지개를 펴지 못했다. 도로와 교량부문에서는 광안대교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빼고는 1999년까지 이렇다 할 실적이 없었다. 포스코 발주공사이거나 지역 연고의 포항시 공사, 그리고 회원사로 2~3건의 고속도로 공사에 참여한 것이 고작이었다.

“우리 회사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철강 분야의 기술을 고도화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회사의 균형 발전을 위해서는 토목 분야가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의 성장을 해야만 한다. 어쩌면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이 토목환경 분야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이장오 전 부사장)

2004년에 이장오 전 부사장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처럼 토목 분야는 어떻게든 회사의 균형 발전에 기여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이 같은 균형 발전의 각오를 새롭게 다진 해가 바로 1999년이었다. 기회가 좋았다. 1999년 관급 토목공사의 발주제도가 PQ 방식이나 턴키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재무상태가 우량한 포스코건설의 입지가 넓어졌다.

2006.12.13 경부고속도로 확장 개통식(김천-영동

2006.12.13 경부고속도로 확장 개통식(김천-영동

최초로 단독 수주한 관급공사인 서천~공주간 고속도로 공사전경

최초로 단독 수주한 관급공사인 서천~공주간 고속도로

좋은 기회가 오자 회사가 토목사업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경쟁사들의 견제가 사라진 만큼 더 이상 강구조개발본부로 위장할 필요가 없어 1999년 1월 토건사업본부로 환원시켰다. 무엇보다 수익성 위주의 안정적인 운영방식에서 벗어나 양적 확대를 위해 과감하게 공격적으로 턴키시장에 도전했다. 토목 요원들은 PQ 방식에 의한 최저가 입찰에도 몸을 사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회사는 일정 수준의 실적이 쌓일 때까지 최저가 출혈을 감내해내기로 하고 위험분담금 확보를 위해 전략수주펀드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수주한 것이 서천~공주간 고속도로 4공구와 김천~영동간 확장 2공구였다. 서천~공주간 4공구(2001.12~2009.9)는 포스코건설이 관급 공사를 단독으로 수주한 최초의 공사라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공사 과정에서는 집단민원으로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민원의 원인은 부여백제휴게소 부지 내에 포함된 마을 보호수 때문이었다. 이 보호수를 살리기 위해 4년에 걸쳐 설계가 변경됐다. 이로 인해 공정추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결국 보호수를 보존할 수 있게 돼 지역주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었으며, 그 결과 이후 공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품질에 역점을 둬 준공 후 서천~공주간 고속도로 중 노면 평탄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문중옥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경부고속도로 김천~영동간 확장 2공구(2001.12~2006.12)는 포스코건설이 50%의 지분을 가진 주간사로서 코오롱건설, 지역 건설업체인 일양건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수주한 것이었다. 이 공사는 포스코건설이 처음으로 고속도로 확장공사에 참여했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신설 도로와는 달리 기존의 교통량을 처리하면서 시공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공사였다. 2002년엔 태풍 루사로, 2004년에 폭설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런 자연재해 때마다 현장 요원들이 대민봉사에 나서 주민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얻었다.

“도로 확장 과정에서 이 구간에 포함된 8개의 교량들도 똑같은 확장 넓이로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특히 철도가 통과하는 교량은 열차가 다니지 않는 새벽에 공사가 진행됐다. 교량에 설치될 빔을 운반하는 작업은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운행되고 있는 도로를 전면 차단할 수 없어 시나리오를 시간대별로 짜 도로 이용자들이 아무것도 모를 정도로 감쪽같이 해치웠다.”(윤인섭 전 이사보, 당시 현장소장)

 

# 국내 최초 민자사업 인천국제공항철도 건설 참여
인천국제공항철도 기공식

인천국제공항철도 기공식

턴키공사와 함께 민자사업에서도 성과를 얻었다. 철도 부문 국내 최초의 민자사업인 인천국제공항철도 건설에 참여했다.이 프로젝트는 우연하게 기회가 찾아왔다. 2001년 4월부터 시작되는 1단계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던 일본 스미토모은행이 정부와의 협상과정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돌연 불참을 선언했다. 이에 정부가 포스코건설에게 컨소시엄 참여를 요청해와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공사현장 배정 과정에서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민자사업 경험이 빛을 발했다. 포스코건설은 수익성과 시공성, 그리고 민원 등을 고려해 지원도시에서 인천국제공항 방향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선택해 1-4공구를 배정받았다. 아울러 공동 지분사였던 ㈜대호의 포기 지분을 인수해 1-3b공구를 획득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2004년에 발주된 2단계 사업의 2-2b공구의 수주에 성공, 이 사업에서 총 3개의 현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철도

인천국제공항철도

1-3b공구(2001.4-2007.3)와 1-4공구(2001.4-2007.3)는 인천시 중구 운서동 구간이었다. 이 중 1-3b공구는 접속교 외 9개소 및 기타 부대공사로, 변전소 1개동에 8.907km 궤도를 부설했다. 1-4공구는 지하 개착박스 1.6km와 신공항 내에 정거장 1개소를 건설했다.

2-2b공구(2004.1-2009.12)는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 구간으로, 연장 2.185km, 본선터널 1.852km, 본선 개착박스 1.675km, 정거장 2개소, 환기구 5개소 등을 건설했다. 2단계 사업의 완료로 인천공항철도는 2010년 12월 개통됐다.

인천국제공항철도 민자사업 수주를 통해 토목 분야는 좀더 명확한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다. 1999년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 도전에 나선 결과 초라하지만 처음으로 수주액이 1000억 원대를 넘어섰으며, 2001년 들어 턴키와 민자사업에서 잇달아 승전보를 올리면서 6000억 원선을 넘어섰다.

그 여세를 몰아 2002년 3월 토목 분야는 토건사업본부에서 독립해 토목환경사업본부로 거듭났다. ‘토목환경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구호 아래 중단기적으로 1조원 수행체제를 목표로 삼았으며, SOC 민자사업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2003년에는 ‘토목환경의 힘찬 도약’으로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으며, 2004년에는 ‘가자! 정상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1조원 목표 달성을 향해 힘껏 달려갔다.

 

# 광양제철소 경험으로 인천국제공항 2단계 3활주로 수행하다
인천국제공항 2단계 활주로 부지조성 공사

인천국제공항 2단계 활주로 부지조성 공사

토목사업이 회사의 균형 발전에 다소 뒤쳐지기는 했으나, 나름대로 선전한 분야도 있었다. 철도 분야에서는 노반공사를 많이 수행했다. 광양제철소를 건설하면서 100㎞가 넘는 철도공사를 수행해본 경험이 소중한 자산이었다.

제철소 건설의 저력은 부지조성과 항만, 환경 분야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부지조성 사업으로는 대표적으로 인천국제공항 2단계 3활주로 공사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부지가 모두 갯벌이어서 연약지반 개량공사의 경험과 실적이 평가의 핵심사항이었다.

이 문제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1982년에 착공한 광양제철소 부지조성 작업은 바다를 메웠던 대표적인 연약지반 개량공사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런 공사를 맡길 업체가 없어 포스코건설이 직접 일본 기술을 도입해 자력으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그 결과 연약지반 개량공사에 대한 소중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 저력을 바탕으로 당당히 입찰에 참여해 2단계 3활주로 중 4공구(2003.12~2008.8)는 주간사로, 5공구(2003.12~2007.1)는 회원사로서의 자격을 획득했다.

“이 프로젝트는 준설토로 매립된 지반 위에 70cm 두께로 모래를 부설한 후 PBD(Plastic Board Drain)를 타설하는 지반개량공사를 먼저 시행하고, 그 상단에 토석으로 성토 다짐시공하는 공사였다. 토석으로는 인근 오성산을 절취해 사용했다. 토석의 운송은 일반적으로 덤프트럭를 이용하나, 우리는 제철소 건설 경험을 바탕으로 플랜트사업본부가 제작한 벨트 컨베이어를 도입했다. 이를 국내 최초로 현장에 적용해 친환경적이고 선진화된 기술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2004년에는 모래 파동이 발생해 가격이 껑충 뛰었다. 우리는 이로 인한 공정차질을 막기 위해 현장의 요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 발굴에 골몰했으며, 마침 인근 골프장 건설현장에서 다량의 골재가 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이에 모래 대신 골재로도 시공이 가능한지 검토했고, 다행히 25mm 골재를 부설해도 PBD타설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결과치를 가지고 발주처를 설득했으며, 결국 모래(Sand Mat) 대신 골재(Stone Mat)로 공법을 변경해 공기 준수는 물론, 상당한 금액의 원가절감 효과도 얻었다.”(유기춘 전 이사보, 당시 현장소장)

 

# 마산 원전항, 국내 최초 부유식 강재 방파제 선보여

항만에서의 경쟁력은 기술력이었다. 먼저 포스코건설은 제철소 건설 경험을 통해 만만찮은 실력을 쌓았다. 포항과 광양 제철소가 바다를 끼고 있어 많은 항만공사가 있었고, 회사 출범 이후에도 포스코의 해상 수송로를 따라 마산항, 아산항, 평택항, 중국 장자강 등에서 굵직한 항만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포스코 울타리에서 벗어나 대외사업 도전에서도 항만 분야는 저력을 과시했다. 몇몇 대형 건설사들이 토목사업을 싹쓸이 하는 통에 실적에 목말라 기아에 허덕이던 포스코건설에게 항만 분야의 대안입찰은 그야말로 위기탈출의 새로운 대안이었다. 그렇다고 대안입찰이 쉬운 경쟁방식은 아니다. 원안설계보다 월등한 그 무엇을 입증해야 한다. 항만 대안입찰에서 포스코건설이 보여준 경쟁력은 기술력이었다.

마산 원전항 대안입찰에서는 국내 최초로 부유식 강재 방파제를 선보였다.이는 250m의 철강재를 방파제로 만들어 물에 띄우는 공법으로, 바닷물이 자유롭게 흐를 수 있어 친환경적이고, 수심이 깊을수록 경제적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원전항 건설공사는 바닷물이 빠져있는 정조시간(停潮時間)에 맞춰 작업 하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만조와 간조의 차이가 2m 정도인데, 그 차이가 일정치 않아 작업 일수가 충분치 않았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 때는 현장사무소가 바다로 쓸려간 아찔한 경험도 있었다. 그럼에도 5년간 경미한 재해 없이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 (엄도흠 Sr.Manager, 당시 현장소장)

원전항(2002.12~2007.11)에 이어 부산항 국제여객 및 해경부두 건설(2003.12~2006.6)도 맡았다. 부산 프로젝트 대안입찰에서 적용한 신기술 중 가장 큰 특징은 소파판이었다. 소파판은 강관파일식 잔교 구조물에 적절히 물을 통과시키면서도 항내를 정온하게 유지시키고자 고안됐으며,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구조물이었다.

원전항 부유식 강재 방파제

원전항 부유식 강재 방파제

부산항 국제 여객 및 해경부두 공사 현장

부산항 국제 여객 및 해경부두 공사 현장

 

 

 

 

 

 

 

 

 

# 기술력으로 환경 분야 정상에 오르다

환경 분야에서도 기술경쟁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부지조성, 항만과 마찬가지로 제철소 건설 경험을 통해 그 실력을 닦았고, 그 자신감을 밑천으로 대외사업에서는 하수처리와 쓰레기 소각 분야에 집중했다. 하수처리에서는 고도처리 기술로 무장했으며, 쓰레기 소각에서는 용융식 소각로 기술을 확보했다.

환경 사업은 포스코건설이 출범하면서부터 역점을 두었던 사업 중의 하나였다. 그동안 포항제철소나 광양제철소에서 발생하는 폐수, 배기가스와 폐기물을 처리하는 사업들을 많이 수행해 이 분야에서는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었다.

포스코건설의 환경사업은 1994년 포스코건설 출범 이전에 PEC에서 소규모로 수행하였으며, 거양개발에서는 건설 중심으로 제철소 내 환경사업을 수행했다. 하지만 포스코는 PEC나 거양개발이 계열사이지만 실적과 기술력이 부족해 대부분의 공사를 다른 건설사에 발주했다.

이후 포스코건설이 설립되면서 포스코에서 발주하는 환경 관련 공사를 일괄 턴키 방식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포스코에서 발주되는 공사의 물량이 만만치 않았다. 제철사업에 수반되는 폐수처리 공사, 각종 폐기물 처리 공사, 폐가스 등으로 인한 대기 오염 방지를 위한 집진설비와 탈황설비 공사 등을 도맡아 하게 되면서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 분야 국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1997년을 기점으로 포스코의 조강증산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환경관련 공사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결국 환경 분야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바깥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1998년 하수 고도처리 기술도입을 완료하고 대외사업에 진출한 포스코건설은 1999년 하반기에 울진 하수종말처리장 수주에 성공하며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이후 승승장구, 2003년에는 공공 턴키 총 9건 중 7건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해냈으며, 2004년 들어서는 중랑하수처리장(2004.2~2007.10), 파주 LCD단지 폐수처리시설(1단계 : 2004.7~2006.11, 2단계 : 2005.12~2007.9) 등 대형 프로젝트를 잇달아 수주하며 업계 정상에 올랐다.

중랑천 하수종말처리장 착공식

중랑천 하수종말처리장 착공식

2004년 1월 중랑하수처리장(현 중랑물재생센터) 수주전은 당시 환경 분야 빅 이벤트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하수종말처리장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으며,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이곳에는 3가지 공법이 적용되고 있었는데, 이처럼 다양한 공법의 적용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때문에 환경사업을 수행하는 대부분의 건설사들이 사활을 걸고 이 프로젝트 수주에 뛰어들었다.

포스코건설로서도 사활을 건 도전이었다. 하수처리 용량이 46만톤이나 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이전까지 이만한 용량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고작 8만톤 수행 경험이 최대 실적이었다. 따라서 이 사업만 수주한다면 업계 정상 등극은 기정사실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환경 턴키 심의제도가 이 프로젝트부터 기술위원 평가방식에서 기술위원과 평가위원의 2원화 체계로 바뀌었다.

서울시가 입찰에 앞서 내건 과제도 까다로웠다. 전체 1~4처리장의 171만 톤 중 1, 2처리장의 46만 톤을 먼저 고도처리로 개조하고, 이어서 2처리장을 헐고 그 자리에 1, 2처리장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라는 내용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 온 역량을 투입했다. 쟁쟁한 경쟁자들이 모두 참여한 상황에서 웬만한 기술 제안으로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저한 분석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준공된 지 30여년이 지나 1, 2처리장의 경우 시설 노후화가 심각한 상황이어서, 이 같은 노화시설의 성능만 잘 개선하면 좋은 제안이 나올 것 같았다.

실제로 포스코건설은 2처리장의 반응조와 침전지를 철거한 후 신설하는 등 제3처리장 개조와 연계한 마스터플랜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평가위원들을 감동시킨 것은 친환경적인 선진국형 환경시설 모델이었다. 설계안에는 1, 3처리장 부지를 복개해 지상을 체육시설 및 공원으로 조성,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으로 되돌려준다는 신선한 발상이 있었다. 그 결과 포스코건설이 중랑물재생센터 건설사업 사업자로 선정됐다.

양산 자원회수시설 전경

양산 자원회수시설 전경

쓰레기 소각 분야 대표 프로젝트로는 양산 자원회수시설(2004.10-2008.1) 공사가 있었다. 양산 자원회수시설 이전까지 쓰레기 소각은 스토커 연소방식이 일반화돼 있었다. 이 방식은 2000년 말 쓰레기 소각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이옥신이 사회적으로 문제화되면서 여론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이즈음 포스코건설은 쇳물을 만드는 포스코의 용광로 운영 노하우를 토대로 열분해 용융방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때마침 신일본제철이 고로를 파일럿 규모로 축소한 용융식 소각로 기술을 확보하기 있었으며, 특히 이 기술은 일본 내에서도 30기 이상 적용에 성공한 기술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기술을 2002년 포스코건설이 전수받았다.

다이옥신 이슈 이후 국내에서도 용융식 소각로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포스코건설이 확보한 기술은 1700도에 이르는 고열의 열분해 용융방식으로 폐기물을 소각해도 냄새와 분진이 발생하지 않고, 소각하고 남은 부산물을 자원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처럼 청정기술에 대한 요구가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마침내 2003년 양산시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쓰레기 소각장이라는 표현 대신 자원회수시설이라는 명칭을 붙여 용융소각로 공사 입찰공고를 발표했다.

국내 최초의 용융식 소각로 입찰에 건설사들의 관심이 집중됐으며, 치열한 경쟁 끝에 앞선 기술력과 발 빠른 준비 작업으로 포스코건설이 수혜자가 됐다. 양산 자원회수시설 건설사업에서 포스코건설은 1일 200톤 용량의 열분해 용융시설과 1일 80톤 용량의 재활용센터를 건립했다.

“양산과 중랑 프로젝트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수주전이 펼쳐졌다. 초반에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과한 욕심을 부렸다. 그러다 보니 역량이 분산됐고, 양산 프로젝트 수주전을 코앞에 두고는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에 우리는 역량을 한데 모아 양산에 집중해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고, 그 여세를 몰아 한달 뒤 진행된 중랑 프로젝트마저 수주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결국 집중력의 결과가 두 마리 토끼를 다 낚는 원동력이었던 셈이다.”(김익희 전 부사장)

 

# 김해경전철,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다

이 시기 토목 분야 대표적 프로젝트는 단언컨대 김해경전철이었다. 경전철은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분야로 모든 경쟁자들이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했으며, 따라서 그 첫 사업인 김해경전철을 수주한다는 것은 시장 선점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토목 분야에서 쉽게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포스코건설에게 김해경전철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등대의 불빛과도 같았다.

경전철은 1990년대에 도심과 연결되는 외곽 중소도시의 교통난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본격적인 사업화가 추진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구간이 짧고 경량인 만큼 공사기간도 짧고 건설비용이 저렴하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민간사업자 입장에서 사업비 조달이 발목을 잡았다. 지하철보다 저렴하다고는 하나 1조원에 이르는 사업비는 양측 모두에게 부담을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김해간 경전철만이 사업승인을 획득하고 민간사업자 모집에 나섰다. 그러나 1995년 2월 첫 모집부터 신청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1997년 2월 기본설계까지 나왔지만 신청자는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건설사들이 경전철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업성을 두고 계속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지만,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결국 정부가 한발 물러나 사업비의 40%를 재정 지원할 수 있다는 조항을 끼워 넣으면서 김해경전철 사업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랜 관망 끝에 2000년 1월 건설교통부가 새롭게 사업자 모집에 나서자 즉각 컨소시엄 구성에 들어갔다. 우선 현대산업개발과 손을 잡고, 수송부문 시공실적 세계 1위인 프랑스의 브이그, 경전철 설계실적 세계 1위인 프랑스의 시스트라와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경쟁자로는 금호산업 컨소시엄이 등장했다. 금호산업은 시장점유율 세계 1위의 캐나다 경전철 생산업체인 봄바르디아, 싱가포르의 이콘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이후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지만, 포스코건설은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제시한 경제적 사업비와 한국형 경전철 모델이 경쟁자보다 월등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2000년 8월 금호산업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예상 밖의 결과에 오랫동안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김해경전철은 한국형 모델을 공급해야 한다. 외국기업이 차량공급자로 선정될 경우 기본설계와 정부의 표준화 사양과 전혀 다른 차량이 공급될 뿐만 아니라, 이미 양산 준비단계에 있는 국산 기술이 사장될 우려가 있다. 특히 외국기업이 선정될 경우 차량과 시스템 전체를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또 수입차량 전체의 가격은 국산차량보다 3백억 원이나 비싸다!”(포스코건설측 주장)

“차량의 수송능력이나 효율성 및 안정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차량가격만 비교하는 것은 사업취지에 맞지 않는다. 외국기술이 들어올 경우 기술이전 효과가 커 한국의 관련 산업계에 상당한 이익과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이다.”(금호산업측 주장)

양측의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금호산업은 협상 과정에서 정부와도 갈등을 빚었다. 금호산업은 비싼 수입 차량의 가격을 낮추지 않았으며, 정부의 재정 지원도 50%나 요구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측 주장처럼 정부의 경전철 표준화 시책과 시스템 국산화에 어긋나 있었으며, 건설교통부의 기본설계와 달라 설계를 변경해야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결국 평행선을 달리던 양측의 협상이 결렬되자, 2002년 1월 정부는 우선협상대상자를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으로 변경했다. 협상 과정에서는 정부측 요구사항이 이미 제출한 사업계획서에 반영돼 있어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다만 컨소시엄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프랑스 브이그가 빠지고 포스코건설과 현대산업개발이 각각 49%로 지분을 확대했다. 시스트라의 지분은 2%로 대폭 줄어들었다.

마침내 2002년 12월 13일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다. 전체 사업비가 7742억 원으로 책정됐으며,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4819억 원을 부담하고, 정부와 부산광역시, 김해시가 모두 2923억 원을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준공 후에는 소유권이 부산광역시와 김해시로 넘어가지만, 운영권은 30년간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갖도록 돼 있었다.

컨소시엄은 원활한 사업추진을 위해 2003년 1월 부산~김해경전철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포스코건설은 전체 4개 공구 중 3공구와 4공구를 수주해 2006년 4월부터 시공에 들어갔다. 이후 포스코건설은 김해경전철을 계기로 토목 분야에서 새로운 희망을 쏘아 올리며 후속사업 개발을 위해 힘껏 달려 나갔다.

2006.2.15 부산~김해 경량전철 기공식

2006.02.15 부산~김해 경량전철 기공식

2002.12.13 김해경전철 협약식

2002.12.13 김해경전철 협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