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5. 소통과 재무건전성으로 폭풍 성장하다

# 시공능력 7, 수주액 4조 원 달성하다

포스코건설 20년 역사에서 2기(1998~2004)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었던 역동적인 시절이었다. 전반에는 시베리아 한파가 매서웠으며, 후반에는 고도성장을 내달렸다.

IMF 관리체제가 시작된 1998년에는 밑도 끝도 없이 추락했다. 수주액이 전년보다 무려 75.1%나 줄어 4564억 원을 기록했다. 이는 건설업계 전반의 공통 현상으로 시공능력 평가액에서 5000억 원 이상이 1997년의 28개사에서 10개사나 줄어 고작 18개사에 불과했다. 포스코건설의 경우 포스코의 투자 중단이 가장 큰 근본 원인이었다. 전년에 1조 2072억 원이었던 포스코 수주분이 고작2755억 원에 그쳤다.

이후 1998년의 구조조정 효력이 나타나고, 적극적인 대외 수주활동을 펼쳐 1999년 8477억 원, 2000년 1조 301억 원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증가세는 2001년 2조 299억 원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2조 원 시대를 열었다. 이어서 2002년 2조 9168억 원, 2003년 3조 3780억 원으로 계속 증가했다. 2004년에는 4조 700억 원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수주 4조원 시대를 열었다. 시공능력 평가에서도 2002년 이후 줄곧 7위를 유지해왔다.

2000년대 들어 이처럼 수주가 급증한 이유는, 포스코 물량에 안주하지 않고 주택사업과 공공발주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결과였다. 주택사업의 경우 1998년 95억 원에 불과했으나 1999년 729억 원으로 늘어났으며, 2000년 1190억 원, 2001년 5688억 원, 2002년 1조 1234억 원, 2003년 1조 6010억 원, 2004년 1조 8648억 원으로 급신장하면서 포스코건설의 고도성장을 견인했다.

사업본부별 실적을 살펴보면, 플랜트와 건축의 위치가 역전됐다. 출범 초기 회사의 성장을 이끌었던 플랜트가 쇠퇴하고 건축부문이 급성장했다. 플랜트의 회사 기여도는 1997년 91.1%로 최고 정점을 찍고 이후 계속 추락해 20%대에 머물렀다. 반면 1997년 고작 3.8%에 불과했던 건축부문은 회사의 폭풍성장을 견인하면서 2003년에 60%대를 넘어섰다. 토목·환경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수주액 1조 원을 목표로 분전했으나, 실적이 따라주지 못했다.

주택사업 성공이 몰고 온 폭풍성장 이면에는 업계 최고의 신용등급과 건실한 재무구조가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국내 기업신용 평가 전문기관인 한국신용정보㈜의 단기 신용평가에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7년간 최우수 등급을 획득했다. 단기 신용도를 나타내는 기업어음 부문과 장기신용도를 나타내는 회사채 부문에서도 7년 연속 각각 A1과 AA- 등급 판정을 받았다. 이는 건설사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순수한 자체 신용만으로도 저리의 자금을 적기에 조달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조달청 입찰 때도 PQ 가점에 반영된다. 무엇보다 국내 건설사 최고의 신용등급으로 대외 신인도가 크게 향상됨에 따라 포스코건설은 강한 자신감으로 가지고 대외사업을 펼칠 수 있었다.

 

# 포스코개발에서 포스코건설로 사명변경
2002.02.28 사명 선포 및 현판식

2002.02.28 사명 선포 및 현판식

시공능력 7위, 수주액 4조 원 시대를 연 이 시기 조직에서는 우선 경영진의 변화가 있었다. 1998년 6월 박득표 회장이 최고사령탑으로 취임했다. 박득표 회장은 IMF 위기극복을 위해 기술중시 경영과 일반건설 진출을 강조했으며, 그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1999년 강구조개발본부를 토건사업본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토목과 건축 분야의 대외사업 추진에 적극 나섰다. 2002년에는 그 의지를 더욱 다져 토건사업본부를 건축사업본부와 토목환경사업본부로 분리했다.

특히 2002년 2월 포스코건설은 사명을 변경했다. 포스코개발에서 포스코건설로, 영문은 POSEC에서 POSCO E&C로 각각 바뀌었다.

사명의 변경은 내부 여론에서부터 출발했다. 개발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소규모 기업이라는 여론이 있었으며, 개발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사업 영역을 모호하게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따라서 ‘개발’ 대신 ‘건설’이라는 큰 그릇에 담아 고객에게 친숙한 기업이미지를 정립하기 위해 사명을 변경한 것이었다. 사명 변경 선포식 식사에서도 박득표 회장은 그런 의미를 충분히 강조했다.

“건설회사의 위상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사명을 바꾼 만큼 고객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자. 사명 변경을 계기로 회사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전 임직원이 힘을 합쳐 나가자.”

한편 2004년엔 또 한 번의 경영진의 변화가 있었다. 박득표 회장 후임으로 한수양 사장이 취임했다. 이어서 송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송도사업본부가 신설됐다.

2004.03.18 한수양 사장 취임식

2004.03.18 한수양 사장 취임식

 

 

 

 

 

 

 

 

 

# 지식경영을 위한 지식경영 하지 말라!

주택사업의 성공신화와 함께 이 시기 또 하나의 성과로는 지식경영이 있었다. 포스코건설뿐 아니라 이 시기는 사회 전반적으로 지식경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IMF 위기 이후 구성원 개인이나 조직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과 경험을 하나로 결집시켜 모든 회사 구성원이 공유하는 것이 최선의 경쟁력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다.

특히 IMF 위기 때의 인력구조조정은 인건비 절감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이들이 갖고 있던 기술과 경험이 유출되는 단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구조조정의 여파로 개인의 역량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함에 따라 조직의 정보공유 체계가 많이 훼손되고 있었다. 이런 부작용을 해소하자는 차원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지식경영 도입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출범 초기 BEST POSEC 운동으로 조직 융합의 경영성과를 달성했던 포스코건설 역시 IMF 위기의 상처를 추스르고 다시 한 번 조직의 일체감을 조성해 경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경영혁신의 도구로서 지식경영을 선택했다.

그러나 붐 조성이 쉽지 않았다. 지식경영에 대한 이해부족이 근본 원인이었다. 처음 포스코건설은 시스템적 측면에서 지식경영에 접근했다. 홈페이지나 지식경영시스템(KMS)을 구축하고 IT 시스템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지식경영이라는 잘못된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기술정보팀이 지식경영 추진을 주관했으며, 자연히 직원들의 호응도도 떨어졌다.

“지식경영을 위한 지식경영은 하지 말라. 목표 달성을 성급하게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겠다.”

사내 포털인 POKINS 화면

사내 포털인 POKINS 화면

박득표 회장의 표현은 KMS 구축이 지식경영 전체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1999년 말 그는 지식경영 추진방향의 재설정을 주문했다. 이후 포스코건설은 인사관리 측면에서 지식경영에 다시 접근했다. 주관 부서도 인력개발실로 변경하고, 문화적이고 인간적이며 신뢰라는 측면에서 지식경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모아광장’을 도입하고 임직원 모두가 회사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회사 내에서 건전한 토론문화가 정착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모아광장’은 지식경영 활동의 중요한 축으로 떠올랐다.

지식경영 촉진을 위해 ‘지식 마일리지제도’도 도입됐다. 이 제도는 지식활동 공헌도에 따라 일정 마일리지가 부여되고, 파격적인 보상이 이뤄지도록 설계됐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지식경영에 대한 직원들의 호응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시스템적 측면에서는 2001년 8월 KMS와 문서관리시스템인 EDMS를 구축하고 사내 포털인 POKINS에 지식경영 기능을 추가했다. EDMS에서는 모든 문서를 데이터베이스화했으며, EDMS 중 전사적으로 공유할 활용가치가 높은 지식은 KMS에 따로 등록했다.

 

# 소통의 메카 모아광장, 태도와 마음을 변화시키다

“주제에 관계없이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해진 다음에는 승진이나 제도 등의 민감한 문제까지도 거론되기 시작됐다. 특히 ‘펄프픽션’이란 필명으로 회사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풍자적으로 쓴 글이 전 직원들의 뜨거운 관심과 흥미를 유발했는데, 이것이 모아광장 활성화에 커다란 분수령이 됐다. 이런 글을 올려도 되는지 직원들 모두가 놀라움을 갖기도 했지만, 회사에서 의연하게 대처함으로써 직원들이 회사를 신뢰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었다.”(이상필 전 상무)

온라인 커뮤니티 모아광장은 2000년 2월 전 직원의 의견을 모아 더 큰(more) 경쟁력을 보유하자는 의미에서 출발했다. 계급장을 떼고 하는 자유토론 방식이 특징이었는데, 토론의 주제는 운영팀에서 선정했다. 경영층 지시사항이나 직원들의 요구사항 중에서 주요 이슈를 뽑았다.

그러나 혁신적인 자유토론 방식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응도가 예상보다 높지 않았다. 접속 수는 많았으나, 선뜻 토론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다. 기명 방식이 문제였다. 계급장을 떼고 하는 자유토론이라 해놓고 기명을 요구하는 건 뭔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 문제를 놓고 경영층은 고뇌를 거듭했다. 일각에서 무기명으로 갈 경우 비방 수위를 조절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영층에서는 최종적으로 무기명 방식을 과감하게 결단했다. 시행 초기 잠시 혼란이 있을 수는 있으나, 무기명 방식의 자유토론이 결국에는 열린 의사소통과 신뢰구축의 기반이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자유토론의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우려와는 달리 직원들은 차분하게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 결과 1년 동안 인사, 노무, 총무, 영업, 기술 등 회사경영 전반을 대상으로 다양한 주제토론을 벌여 150건의 크고 작은 문제 개선의 효과를 얻었다.

그 1년 사이 직원들의 목소리가 크게 높아졌다. 자유토론에 이어 운영방식의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성역 없는 주제와 자유 운영방식에 대한 여론이 빗발쳤다. 경영층에서는 이 모든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야말로 활화산 같은 열기가 치솟았다. 성역 없는 주제와 자유 운영방식은 직원 참여율에 불을 더욱 지피는 효과를 가져왔다.

초반에는 승진, 노사관계 등 상사들이 읽으면 껄끄러운 내용도 많아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후 함량미달의 의견에 대해서는 자체적으로 반박하는 자정작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결국 모아광장은 성역 없는 비판 속에서도 대안을 제시하는 성숙한 토론문화를 만들어냈으며, 회사의 정책이나 제도에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실례로 ‘승진’이라는 주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지자 그 동안 승진에서 누락된 직원들의 경우 자신들이 승진하지 못한 이유의 부당성을 집중 성토했다. 그 결과 인사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 작업이 이뤄졌으며, 승진에서 누락됐던 직원들의 상당수가 구제되기도 했다.

일반 기업에서는 금기시하는 조직개편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핵심사업 분야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한 조직 확충에 대해서도 뜨거운 논쟁이 일어 회사에서 TF팀을 만들어 토론 내용의 상당부분을 반영해 조직개편을 단행한 사례도 있었다.

모아광장이 활활 타오르면서 직원들의 태도와 마음가짐도 훨씬 밝아졌다. 2002년 초 사내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 경영층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회사의 미래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많이 발전할 것이다’(55%)와 ‘발전할 것이다’(34%) 등 긍정적 답변이 89%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전년도 5월 똑같은 주제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어려워질 것’이라고 응답한 직원들이 55%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모아광장을 통한 지식경영이 KMS 구축만으로 끝나지 않고 바야흐로 진정한 경영혁신으로 진화하는 순간이었다.

모아광장과 함께 포스코건설은 지식경영을 추진하면서 공정하고 철저한 보상시스템으로 지식 마일리지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제안제도, Q&A, 연구논문, 지식교류회 등의 활동을 통해 직원들의 일상생활에 녹아들었으며, 또 경영자와 관리자의 리더십을 이끌어내면서 지식의 품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도 유용하게 활용됐다.

지식경영으로의 대동참을 이끌어냈던 모아광장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모아광장에 올라온 글을 회사가 임의로 삭제하거나 추적하지 않겠다던 초심을 버리지 않았다.

토론 내용에 대해 관련부서는 사소한 것이라도 신속하게 답변했다. 최고경영자의 지대한 관심도 큰 힘이었고, 특히 토론에서 드러난 문제점에 대해 신속하게 제도개선이 이루어진 것이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는 곧 상하간 불신해소와 조직 일체감 조성으로 이어졌으며, 포스코건설이 성장하는데 든든한 밑바탕이 됐다.

 

# Top 30 비전 수립, SMART Global E&C Company를 향해

숨 가쁘게 10년을 달려왔다. 되돌아보니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4년 거양개발과 PEC가 통합할 당시 두 회사의 수주실적을 합친 금액이 6604억 원 수준이었다. 그리고 10년 후 포스코건설은 4조원 시대를 열었다. 무려 6배나 성장했다.

시공능력도 실적을 뒷받침하고 있다. 출범 진전 37위였는데, 무려 30계단을 뛰어올라 7위로 올라섰다. 이만하면 충분히 성장했다고 자축할 수도 있다. 하지만 10년 전 세웠던 비전을 되짚어보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장기 비전(POSEC VISION 2005)에서 포스코건설은 수주액 목표치를 8조 원으로 잡았다. 실제 실적과 비교한다면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사업포트폴리오 측면에서는 제철 플랜트를 주축으로 환경, 에너지, SOC 분야를 주력사업으로 삼겠다고 피력했다. 이 부분에서는 일단 건축, 토목, 환경 등 포트폴리오 다양화의 경우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사업 분야별 균형 성장이 과제로 남았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10년의 평가와 반성 속에 창립 10주년을 맞아 새로이 비전을 수립하고 각오를 다졌다. 먼저 SMART Global E&C Company를 지향했다. 상징적인 목표로는 Global Top 30위 진입으로 정했으며, 현실적으로는 수주액 7조 원, 매출액 6조 원을 목표로 삼았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기술력을 기반으로 사업포트폴리오를 균형 발전시켜나가기로 했으며, 2000억 원 이상 경쟁력 있는 상품을 10개 이상 확보하기로 했다. 지향점이 글로벌 기업인만큼 해외시장 비중도 더욱 확대하기로 했다.

사업별 전략을 살펴보면 플랜트 부문은 우선 파이넥스와 표면처리를 주력사업으로 삼아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대체 에너지와 발전에 대한 투자를 늘려 플랜트 영역을 확대해나가기로 했다.

토목·환경 부문은 중장기적으로 도로, 철도, 항만을 주력사업으로 하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 경전철과 장대교량에 투자를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턴키 베이스 자력 수주능력을 확보하는 한편, 해외 SOC 진출을 모색하는 등의 노력으로 1조 원 수행체제 구축을 목표로 삼았다. 환경 분야는 기술력을 배가해 국내 1위의 선도기업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가기로 했다.

건축·주택 부문은 중장기적으로 아파트와 주상복합 등을 주력사업으로 하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 실버 및 미래 주택과 리모델링사업 육성을 통해 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위험성이 높은 오피스텔 사업은 축소하기로 했다. 장기적으로는 브랜드 인지도를 높여 국내 3위권에 진입하는 한편, 제안형 프로젝트의 특화 개발 분야를 주도해나가기로 했다.

2004.11.30 창립 10주년 기념 및 비전선포

2004.11.30 창립 10주년 기념 및 비전선포

2004.11.25 창립 10주년기념 기술전시회

2004.11.25 창립 10주년기념 기술전시회

포스코건설 창립 10년, IMF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IMF 위기 직후 4000억 원대까지 떨어졌던 실적을 단 6년 만에 4조 원대까지 끌어올리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박득표 전 회장은 창립 2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IMF 사태가 위기이자 곧 기회였다고 말했다. 건전한 재무구조가 돋보이는 시대가 찾아왔고, 포스코의 민영화도 좋은 기회였다고 평가했다. 외부의 간섭과 견제가 사라지면서 공격경영의 여건이 갖춰졌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조용경 전 부사장은 모기업 포스코의 높은 신뢰도와 포스코건설의 탄탄한 재무구조를 꼽았다. 여기에 덧붙여 “사업다각화와 수주 확대, 그리고 송도 신도시 개발 참여 결정 등 고비마다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려야 했던 경영진의 노력과 ‘세계 최고의 기술과 인재’를 바탕으로 ‘고객이 만족하는 기업, 직원이 사랑하는 기업, 사회가 신뢰하는 기업’을 만들고자 한마음이 됐던 임직원들의 의지와 노력의 결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성장비결은 사람으로부터 나왔다. 포스코건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패기와 열정으로 뭉쳐 창립 10주년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 이제 포스코건설이 다음 신화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 10년의 저력을 바탕으로 스마트한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며 다음 10년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역대 CEO 인터뷰_박득표 전 회장>
 주인의식을 가지고 세계적 경쟁력을 다져 해외로 뻗어나가길

박득표 전 회장은 1968년 포스코에 입사, 포스코 사장을 거쳐 1998년 6월 포스코건설 CEO에 취임했다. IMF 위기란 어려운 시기에 CEO를 맡아 포스코건설의 성장기를 이끌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과감하게 주택사업에 진출해 성공신화를 열었으며, 기술중시 경영으로 EPC 기술력을 더욱 강화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CEO를 맡아 부담이 컸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위기에서도 과감하게 일반건설 진출을 결단하셨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포스코의 플랜트 건설 중심이 아닌 일반건설 위주의 사업결단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과연 우리 회사가 기존 현대건설과 같은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한 건설업체를 이길 수 있는 기술경쟁력과 수주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IMF 발생 이후 기존건설 업체에서 물러난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면 단 기간 내 기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봤다. 현대건설 등 기존 건설 업체는 재무구조가 취약하여 수주능력이 없었으며 우리 회사는 재무구조가 좋아 최고의 수주경쟁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때가 아니면 절대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도곡동 부지 내 포스코트를 건설하게 되었다. 부산 센텀파크와 건대 스타시티 성공담 등도 잊지 못할 기억들이다.”

 

재임 중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분당 프로젝트 포기로 인한 손실이 매우 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국내 토지거래 사상 최대 규모의 위약금으로,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로서는 계약금을 포기하는 것이 대규모 위약금과 잔금을 지불하는 것 보다 낫다고 판단하고 내린 결단이었지만,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분당 파크뷰 분양 성공으로 손실을 만회해서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주택사업 성공과 함께 기술중시 경영도 재임 중 큰 업적이었습니다. 기술력 강화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성과들이 있었는지요?

“부임을 해서 제철 분야 경쟁력을 점검해 보니 문제가 많았다. 포스코 시절부터 다져온 사업관리 능력은 뛰어났으나, 가장 중요한 엔지니어링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R&D 분야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우선 고로, 표면처리 기술 등 강점 분야부터 다지면서 부족한 면을 채워나갔다. 그 결과 이란 타바존과 중국 곤명강철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어 큰 보람을 느꼈다. 더욱이 오늘날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관제철소 건설 능력을 갖춘 것을 보니 전임자로서 대단히 자랑스럽다.”

 

재임 시 남기신 업적을 바탕으로 그 동안 포스코건설은 지속적으로 성장해왔습니다. 창립 20주년을 맞아 후배들이 더욱 분발하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수주액이 10조 원을 넘어서고, 해외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니 우선 임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앞으로도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세계적인 기술경쟁력이 필요한데, 그 기본 바탕은 주인의식이다. 포스코가 세계적 기업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전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했기 때문이다.”

 

<역대 CEO 인터뷰_고학봉 전 사장>

내실을 다지고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하길

고학봉 전 사장은 1969년 포스코에 입사, 포스코의 미국 현지법인인 UPI 수석부사장으로 재임 중 1995년 2월 해외담당 사장으로 선임되면서 포스코건설에 합류했다. 포스코건설 창립의 일원으로서 10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회사의 영광과 고난을 함께했다. 그 기간 동안 포스코건설은 국내 건설사 순위 37위에서 일약 7위까지 성장했다.

 

포스코건설이 출범할 당시 건설업계는 성수대교 붕괴사고 등 사회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았습니다. 이 같은 시기에 건설업을 시작하면서 무엇인가 남다른 각오가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담합과 뒷거래, 부실시공 같은 고질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따라서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건설문화를 확 바꿔보자는 의도를 가지고 출발했으며, 무담합, 무덤핑, 무부실을 창업정신으로 내걸었다.”

 

회사가 사업기반을 갖춰가던 과정과 IMF 이후 고도 성장하기까지 근 10년의 시간을 함께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지요?

“좋은 순간들이 많았지만 건대 스타시티, 부산 센텀파크 등 주택사업 추진과정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주택사업 성공비결은 포스코에서 물려받은 시공 품질 정신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제철소를 건설하면서 하자가 있는 건물은 다이너마이트로 폭발시켜서 다시 지으라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시공 품질을 강조했다.”

 

회사가 성장하기까지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일반건설에 진출하기까지 경쟁업체들의 견제가 심했으며, IMF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기억은 무엇인지요?

“구조조정 과정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직원들을 내보낼 때가 가장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회사가 곧바로 위기를 극복하고 많은 인력을 다시 확충해 다소나마 미안함을 덜 수 있었다. 그들의 살신성인과도 같은 구조조정 덕에 회사가 재무적 안정을 되찾아 고도성장할 수 있었다.”

 

포스코건설 창립 20주년을 맞아 감회가 남다르리라 생각됩니다. 회사 창립의 일원이자 선배로서 앞으로 후배들이 더욱 분발하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업계 3위와 수주액이 14조 원을 넘어서는 등 그 동안의 성과를 지켜보며 포스코건설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아직까지 건설경기가 많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럴 때 일수록 내실을 다져야 하며, 아울러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