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arkduk

1. IMF 위기와 기술경영 강화

지난 30여 년 동안 급속 페달을 밟아온 우리나라 경제가 마침내 브레이크가 걸렸다. 1997년 말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면서 치욕적인 IMF 관리체제를 맞았다. 책상을 빼는 것만이 능사라는 논리가 횡행했고, M&A와 빅딜이 유행하는 등 전 국민이 고통 받았다.

IMF 관리체제는 성장기반을 갖춰가던 포스코건설에게 예상치 못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수주가 격감하면서 구조조정 압박에 시달렸다. 1997년 1조 8340억 원에 달하던 수주액이 불과 1년 만에 4564억 원으로 줄어들었다.

경영효율화 과정에서 매각한 아스트론 공장

경영효율화 과정에서 매각한 아스트론 공장

포스코건설의 구조조정은 이미 1996년에 있었다. 경영진단을 통한 경영효율화 과정에서 종합 E&C 회사로 업종 전문화를 선택했으며, 그 과정에서 철구공장과 아스트론공장을 매각하는 등 260명의 인력을 구조조정했다.

한 발 앞선 구조조정으로 충격파를 덜 받긴 했지만, IMF 위기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시련이었다. 포스코건설은 대외경쟁력 확보를 위해 1998년 4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희망퇴직을 실시해 700여 명을 감축했다.

자산 매각과 사업구조조정도 뒤따랐다. 1998년 7월 분당의 대규모 복합단지 건립용 부지 매입계약을 해지했으며, 하와이 프로젝트도 취소했다. 또 건설 중이던 가락동 오피스빌딩과 유성콘도 프로젝트 공사를 중단하고, 서울 강남구 도곡동과 삼성동 부지 매각을 추진했다.

IMF 시기 포스코건설은 기술경영을 통해 위기 극복을 모색했다. 1998년 6월 취임한 박득표 회장은 ‘기술중시’를 경영이념으로 강조했다. IMF 위기라는 급격한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기술력 강화를 생존전략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1997년부터 종합기술계획 수립을 시작한 포스코건설은, 1998년에 비교우위 선점을 위한 최우선 기술 확보로는 12개의 대표기술을 선정했으며, 그 외 기술 확보로는 핵심기술과 육성기술로 나누어 63건을 선정했다. 이후 선정된 기술의 확보 방향을 실행운영계획에 반영해 본부 중점사업으로 추진하도록 했으며, 기술개발 추진실적은 전사 운영회의를 통해 매달 보고하도록 했다.

제2대 박득표 회장 취임식

제2대 박득표 회장 취임식

1999년 3월에는 보유 기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보유기술집을 발간했다. 이를 통해 고유기술의 특화 및 상품화 기반을 구축했다. 또 전 직원 공유를 통한 활용성 제고를 위해 지식경영과 연계해서 보유기술 요약집을 별도로 발간했다.

2002년 들어 포스코건설은 제철 분야에 치우진 종합기술계획을 토목과 건축 분야로 확대했다. 3개월에 걸친 검토와 조정작업 끝에 철강 분야는 고로 등 5개, 토목·환경 분야는 장대교량 등 3개, 건축 분야는 초고층 등 2개 분야를 핵심사업으로 선정했다.

포스코건설은 이처럼 어려운 시대 환경을 맞아 R&D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IMF 위기를 극복해나갔다.

c4cgl

2. 시련의 제철 플랜트, 해외사업마저 고전

광양 4GCL 공사 전경

광양 4GCL 공사 전경

IMF 위기는 포스코건설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제철 플랜트 분야에 가장 큰 타격을 입혔다. 1조 5165억 원이던 수주액이 1998년에 2572억 원으로 뚝 떨어졌다. 포스코가 신규 설비투자를 미루거나 기존에 추진하던 사업을 중단함에 따라 포스코건설은 창사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1997년 9월 착공한 광양 2미니밀 사업의 중단이 가장 아쉬웠다. 광양 2미니밀은 연산 200만 톤 규모의 프로젝트로, 수주금액이 설비와 공사를 합쳐 5767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공사가 진행되던 1998년 4월 포스코로부터 사업 중단을 통보 받았고, 결국 그 해 말 사업 중단에 대한 정산을 하고 공사를 마무리해야만 했다.

시련은 1999년까지 이어졌다. 수주금액이 5726억 원으로 증가했지만, 1997년과 비교해서 3분의 1 수준이었다. 포스코는 여전히 신규 투자를 자제하고 있었다. 수주금액이 1000억 원 이상인 프로젝트가 2년 동안 광양 4CGL 단 한 건에 불과했다. 광양 4냉연, 광양 5고로 등 설립 초기 3년 만에 10건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었다.

1998년 9월 착공, 2000년 5월 준공된 광양 4CGL은 자동차용 표면처리 강판 중 용융아연도금 강판의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추진된 프로젝트였다. 포스코건설은 외자설비 공급분을 제외한 내자설비 공급과 토목, 건축설계, 시공을 일괄 수행했다.

이 시기 제철 플랜트는 해외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당시 해외에서는 이집트 아르코 특수강 프로젝트, 베네수엘라 포스벤 프로젝트, 인도네시아 미니밀 프로젝트 등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집트 아르코 특수강 프로젝트는 1997년 4월 착공, 2000년 6월 설비 테스트를 완료했다. 그러나 아르코는 공기 지연과 설비 성능을 문제 삼으며 준공 확인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쌍방의 이해관계가 좁혀지지 않아 국제분쟁으로 번졌다. 당시 아르코의 상황을 살펴보면 판매부진과 조업기술 부족으로 인한 생산성 저하, 자금부족으로 인한 경영압박 등의 내부 문제를 포스코건설에게 전가하려는 다분히 의도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후 2년간의 분쟁에서 쌍방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결론이 나지 않자 2002년 10월 양측은 더 이상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재협상에 나섰다. 이후로도 기나긴 줄다리기 끝에 2003년 5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최종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우여곡절로 점철됐던 10년간의 아르코 프로젝트가 종료됐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포스코건설은 엄청난 시간 소모와 체력 낭비에 이어 막대한 자금손실을 보았다.

미니밀의 원료인 HBI를 생산하기 위한 베네수엘라 포스벤 프로젝트도 포스코건설에게 상처를 주었다. 1997년 5월 착공된 이 프로젝트는 의욕적인 출발에도 불구하고 진행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공기가 무려 20개월이나 지연되면서 2001년 1월에서야 시운전이 완료됐다. 이 문제로 발주처인 포스벤과 건설을 책임진 레이시온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아 국제분쟁에 휘말렸다.

더욱이 IMF 여파로 준공 후에 포스코가 미니밀 사업을 중단함에 따라 청산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포스코건설은 지분 참여한 자본금과 대위변제금 등 큰 손실을 보았다.

인도네시아 미니밀  사업 착공식

인도네시아 미니밀 사업 착공식

인도네시아 미니밀 사업은 크라카타우스틸이 포스코에 합작을 제안하면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포스코는 열연코일 연산 100만 톤 규모의 미니밀 사업을 위해 40%의 지분으로 인도네시아 국영제철소 크라카타우스틸과 합작계약을 체결하고 1997년 10월부터 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공장 건설에 앞서 포스코건설은 1996년 2월부터 5월까지 포스코로부터 타당성 조사 용역을 받아 수행했으며, 발주처의 컨설턴트로서 발주와 관련된 모든 업무를 대행한 후 엔지니어링과 부대설비 공급, 시공에 이르기까지 턴키로 수주했다.

그러나 가설공사를 완료하고, 기본설계뿐만 아니라 일부 설비가 제작 발주된 상황에서 이 프로젝트는 된서리를 맞았다. IMF 위기로 경영난을 겪게 된 크라카타우스틸이 향후 수익성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사업 철수를 선언하고 말았다.

bundang

3. 건축과 토목, 고난의 행군

IMF로 공사가 중단됐던 가락동 IT벤처타운 현장

IMF로 공사가 중단됐던 가락동 IT벤처타운 현장

IMF 한파는 제철 플랜트뿐 아니라 건축과 토목 분야도 할퀴고 지나갔다. 그 중에서도 건축 분야의 출혈이 상당히 컸다.

출범 초기 포스코건설은 실적 부족과 경쟁업체들의 견제로 대외사업 진출에 어려움을 겪자 자체 개발사업으로 건축사업을 유지하고 있었다. IMF 위기 때는 서울 송파구 가락동 IT벤처타워, 대전 유성콘도 프로젝트, 경기도 성남시 분당 프로젝트 등을 추진하고 있었다.

1996년 10월 착공에 들어간 가락동 IT벤처타운은 1998년 9월 IMF 직격탄을 맞아 공사가 중단됐다. 이후 최소한의 공사만 추진하면서 사업의 재검토와 변경을 거듭하다가 1개 동을 정보통신부에 매각하고, 나머지 1개 동은 벤처빌딩으로 지정받아 2001년에서야 완공을 볼 수 있었다.

유성콘도 프로젝트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다. 사업추진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사업 약정 이후에도 포스코 감사를 비롯해 감사원 감사, 국세청 감사, 국정감사 등 1년에 네 차례의 감사를 받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1998년 4월 IMF 위기를 맞아 분양을 앞두고 24층까지 철골조가 완성된 상황에서 공사를 중단했다. 이후 지주 측과의 지루한 공방 끝에 포스코건설이 사업권 전체를 인수해 단독 매각하는 것으로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가장 큰 출혈은 분당 프로젝트의 좌초였다. 분당 프로젝트 포기는 포스코건설에게 힘든 좌절을 안겨주었고, 금전적으로도 많은 손실을 끼쳤다. 토지 계약을 해지함에 따라 계약금 280억 원을 포기해야 하는 통한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로서는 280억 원을 포기하는 것이 중도금 2500여억 원이 잠기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에서 내린 뼈아픈 결단이었다.

경부선 대천-옥천 간 선로개량 노반공사 참여

경부선 대천-옥천 간 선로개량 노반공사 참여

건축에 비해 토목 분야는 그나마 양호했다. 경쟁업체들의 견제로 실적이 저조했으나, 건축 분야처럼 대규모 자체사업이 없었다. IMF 위기를 맞아 포스코 발주 공사나 도로공사 등에 회원사로 참여하면서 명맥만을 이어나갔다.

1998년 4월 착공, 2004년 12월 완공된 대구-포항 고속도로 건설공사 제8공구에 회원사로 참여했으며, 포항시 관내 문덕-유강 우회도로 건설공사 2-2공구를 수주해 시공하기도 했다. 또 대구광역시가 발주한 가창-청도 간 국가지원 지방도로 30호선 확장공사를 수주해 공사를 담당했다. 포스코 물량으로는 광양제철소 자가용 LNG 터미널 부지조성 사업을 수행했다.

특징적인 점으로는 이 시기에 처음으로 철도공사에 참여했다. 경부선 대전-옥천 간 선로개량 노반공사는 포스코건설의 외부공사 중 첫 철도공사로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1999년 착공, 2003년 12월 준공됐으며, 포스코건설이 30%의 지분으로 참여했다.

cE-F-02-02

4. 주택사업으로 위기 탈출

IMF 관리체제는 포스코건설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주었지만,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는 결코 이 사태가 끝날 것 같지 않았지만, 지나고 보면 IMF는 금방 지나갔다. 이후 우리경제는 성장가도를 달렸고, 부동산시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따라서 이 시기는 위기를 기회로 포착하는 혜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IMF 위기를 맞아 경쟁자들은 포스코건설에 대한 견제력을 상실했다. 연일 부도와 사업 중단이 이어지면서 불안한 소비자들은 건설사들의 재무 상태를 따지기 시작했다. 탄탄한 재무구조라면 포스코건설을 따라올 경쟁자가 없었다.

이 기회의 순간, 포스코건설은 공격경영을 선언했다. IMF 위기를 맞아 매각하기로 방침을 정했던 서울 강남 도곡동과 삼성동 등의 보유 부동산을 처분하지 않고 개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포스코건설로서는 제철 플랜트가 침체된 상황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으며, 경쟁업체들의 견제가 느슨한 이 시점이 주택사업 진출의 최대 호기라고 판단했다.

도곡동 포스코트 모델하우스 개관식

도곡동 포스코트 모델하우스 개관식

포스코건설은 강남의 요지인 도곡동에 244~254㎡대 아파트 64세대 분양의 도곡동 포스코트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최초로 시행하는 일반분양 주택사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쾌적한 조경을 조성하고 고품격 실내 디자인을 도입한 결과 고급주택 수요자들로부터 인기를 끌어 부동산 투자심리가 극도로 위축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1999년 10월 분양 당시 초기 계약률 100%를 달성했다.

도곡동에 이어 삼성동 부지도 개발했다. 2000년 10월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맞은편에 삼성동 포스코트(현, 삼성동 더샵) 90세대를 분양했다. 건설경기 악화에 따라 대부분의 주택업체가 신규 아파트 공급을 2001년 2월 이후로 미루고 있던 상황에서 분양을 감행한 삼성동 포스코트는 25대 1이라는 높은 청약경쟁률을 기록했다. 결국 포스코건설의 판단은 정확했고, 뛰어난 혜안으로 기회를 제대로 잡았다. 도곡동 포스코트와 삼성동 포스코트의 성공적 분양은 포스코건설에게 주택사업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포스코건설은 재건축 시장에 진출했다. IMF 이후 재무구조를 중요시 여기는 풍토가 생기면서 재건축 시장도 포스코건설로서는 도전해볼 만한 분야였다. 1999년 9월에 수주한 첫 재건축 사업인 서울 강동구 암사동 소재 서방연립 프로젝트가 그랬다. 수주 경쟁을 거치지 않고 조합의 요청으로 사업이 추진됐다.

대치동 동아아파트 수주전

대치동 동아아파트 수주전

2000년 10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동아아파트 재건축 수주는 경쟁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포스코건설의 수주를 놓고 건설업계는 후발주자가 대형 건설사를 꺾고 일부 대기업이 독점해오던 재건축 시장을 무한 경쟁체제로 변모시킨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포스코건설은 채 10일도 안 되는 준비기간에도 불구하고 6개월 이상을 준비한 재건축 분야 국내 최고의 건설업체를 물리치고 사업권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모델하우스조차 없이 뒤늦게 수주전에 뛰어들었지만, 철저한 프로 정신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수주전을 펼쳐 마침내 예상을 뒤엎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대부분의 건설사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던 상황에서 재무구조가 가장 우수한 기업이라는 신뢰성이 성공의 견인차였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는 철강 플랜트 수주 격감으로 창사 이래 최대 불황에 시달리던 포스코건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다시 한 번 불어넣었다.

c01

5. 주택브랜드 더샵, 인생의 반올림

분당 파크뷰 전경

분당 파크뷰 전경

도곡동과 삼성동 포스코트 분양 성공으로 주택시장에 진입한 포스코건설은 대치동 동아아파트를 수주함으로써 관련업계에 강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경쟁에 끼워주지도 않던 이들 업체들은 서서히 포스코건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유동성 위기로 견제력을 상실한 기존 대형업체가 러브콜을 보내오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이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 파크뷰 성공신화의 서막이었다. 2000년 말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로 분당 파크뷰 개발을 포기하자 시행사는 재무구조가 탄탄한 포스코건설에게 시공을 의뢰해왔다.

분당 파크뷰 프로젝트는 감회가 새롭고, 한편으론 만감이 교차하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IMF 위기 때 280억 원이라는 위약금을 물게 했던 치욕적인 분당 프로젝트의 후속작이었다. 그 사이 분당 프로젝트는 레저타운 조성사업에서 주택사업으로 바꿔 있었다. 결국 결자해지라는 말처럼 그 최종 운명이 포스코건설에게 맡겨졌다.

경험부족과 대형 프로젝트라는 우려 속에서도 포스코건설은 부동산경기 상승을 전망하고 프로젝트 수행을 결단했다. 대신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SK건설과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1년 3월 분당 파크뷰는 입지여건과 설계, 단지배치, 시공사의 신뢰성 등이 돋보이면서 수요자들의 폭발적인 관심 속에 성공적으로 분양이 완료됐다. 더욱이 분당 파크뷰는 극도로 침체돼 있던 분양시장을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분당 파크뷰 성공은 포스코건설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었다. 경쟁자 반열에 이어 분당 파크뷰 성공은 경쟁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2001년 10월 현대건설은 포스코건설의 탄탄한 재무구조를 믿고 경기도 용인 죽전 지역의 아파트 개발을 제의해왔다. 포스코건설이 이를 수락함에 따라 2002년 4월 용인 죽전 포스홈타운이 공동 이행방식으로 착공에 들어갔다.

더샵 브랜드 탄생

더샵 브랜드 탄생

2002년은 포스코건설 주택사업에서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아파트 브랜드 더샵(the#)이 탄생했으며, 더샵의 열기는 해운대 센텀파크 분양 성공으로 부산까지 확대됐다. 더구나 대형 사업이었던 건국대 스타시티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함으로써 경쟁자들 중에서도 선두주자의 반열에 올랐다.

포스코건설은 2002년 3월 시각적 감각을 중시한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 브랜드 더샵을 도입했다. 더샵은 반음 올림을 뜻하는 음악 기호 ‘#’을 통해 ‘삶의 질이 반올림된다’는 의미와 ‘고객에 앞서 반보 더 먼저 생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객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 그리고 작은 개선을 통해 단순한 상품이 아닌 명품을 제공한다는 장인정신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부산 해운대 센텀파크는 2002년 5월 1차 분양 당시 대단한 관심을 받았다. 모델하우스를 개관한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3만 5000여 명이나 다녀갔다. 이는 부산 아파트 분양 역사상 최고의 기록이었다. ③

2002년 7월 서울 광진구 건대 스타시티 수주전은 서울에서 더 이상 그만한 입지가 없다는 인식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다. 지명경쟁 입찰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의 수주전에서 당초 포스코건설은 주택공급 실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경쟁에서 제외됐다.

더샵 스타시티 공사 전경

더샵 스타시티 공사 전경

그러나 재무구조가 가장 양호한 포스코건설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집요한 영업전략과 건대재단의 호응으로 여러 차례의 논란 끝에 참여가 결정됐다. 포스코건설은 9개 대형 건설사가 참여한 경쟁에서 더샵을 우리나라 주택 대표 브랜드로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 적극 도전에 나서 최종 시공사로 선정됐다.

1999년 도곡동 포스코트를 분양하면서 시작된 포스코건설의 주택사업은 실적 면에서 놀라운 성장을 일궈냈다. 1999년 64세대에 불과했던 분양세대수가 2000년 500세대로 늘어났고, 2001년에는 4807세대, 2002년에는 8049세대, 2003년에는 7798세대에 달했으며, 2004년에는 1만 세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설립 초기 제철 플랜트가 회사의 성장을 이끌었다면 IMF 이후는 주택사업이 위기 탈출의 선봉에 서서 포스코건설의 성장을 견인했다.

cnsic

6. 송도국제업무단지와 동탄메타폴리스 개발 추진

경북 봉화군 청사

경북 봉화군 청사

IMF 위기 극복 이후 주택사업의 선전에 힘입어 건축 분야가 크게 성장했다. 포스코건설은 공공건축 시장에도 과감히 도전, 2001년 경북 봉화군 청사 건설공사를 PQ로 수주했다. 같은 시기 경남 김해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 건설공사를 건축사업 최초의 턴키공사로 수주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포스코건설 최초의 병원 공사인 서울시립아동병원 증개축 공사를 역시 턴키로 수주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해외 프로젝트로는 하와이콘도 사업이 있었다. 하와이콘도 부지는 거양개발 시절 자체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매입해 둔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그 동안 이 부지의 활용 방안을 놓고 많은 검토를 해왔으나, IMF 관리체제로 인해 개발을 중단했다. 그러다 강남 도곡동과 삼성동 부지 개발 성공에 힘입어 하와이 부지 역시 콘도미니엄 개발로 방향을 선회했다.

포스코건설은 2004년 4월 하와이 콘도미니엄 ‘909 카피올라니(909 Kapiolani)’의 분양에 나섰다. 총 225세대 중 113세대를 대상으로 1차 분양을 실시해 계약 첫날인 4월 25일, 100% 계약을 완료하는 등 미국 현지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어 5월 16일에는 2차로 나머지 112세대를 성공적으로 분양했다. 909 카피올라니는 2005년 3월 착공에 들어가 2007년 3월에 준공했다.

이 시기 건축 분야의 가장 큰 성과는 인천시 송도국제업무단지 및 경기도 화성시 동탄메타폴리스 개발사업 추진이었다. 이 사업은 향후 10년의 먹거리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NSIC) 설립

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NSIC) 설립

포스코건설은 송도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2001년 7월 인천광역시와 미국의 세계적 부동산개발회사인 게일사 3자간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2002년 4월에는 게일사와 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NSIC)를 설립했다.

NSIC가 총 127억 달러를 유치해 개발하는 국제업무단지는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달하는 577만 ㎡ 규모로, 송도국제도시의 핵심이었다. 특히 송도국제업무단지는 2005년 3월부터 1단계로 10만여 ㎡의 부지 위에 컨벤션센터 건설에 나서게 돼 있어 포스코건설로서는 앞으로 10년간 매년 1조 원 가량의 건설수주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

동탄 복합단지 PF 사업협약 조인식

동탄 복합단지 PF 사업협약 조인식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에 이어 포스코건설은 2003년 12월에 사업비가 1조 5000억 원에 달하는 동탄메타폴리스 개발사업을 수주했다. 포스코건설은 주간사로서 신동아건설, 팬퍼시픽, 우리은행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 8개 대형 컨소시엄과 치열한 경쟁을 펼쳐 최종 민간사업자로 선정됐다. 이 프로젝트는 연면적 약 80만 ㎡에 최고 지상 66층, 최고 높이 275m의 미디어센터를 비롯해 대규모 복합단지를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송도국제업무단지에 이어 동탄메타폴리스 개발사업을 추진함에 따라 주거환경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미래형 복합도시 건설의 선두주자로 부상했다.

cair

7. 절치부심 토목사업 기지개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 기공식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 기공식

토목 분야는 포스코건설 출범 이후 5년간 죽 고난의 행군이었다. 부산 광안대교,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 외 그 실적이 너무나 초라했다. 그러나 건축 분야와 마찬가지로 IMF 위기 이후 봄날을 맞았다. 경영난의 가중으로 경쟁업체들의 견제력이 무뎌졌으며, 무엇보다 관급 토목공사의 발주제도가 PQ 방식이나 턴키 방식으로 전환되고 재무상태가 평가의 주요 잣대로 사용되면서 포스코건설의 입지가 넓어졌다.

포스코건설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99년 1월 토건사업본부를 설치하는 등 조직을 강화했다. PQ 방식에 의한 최저가 입찰에도 몸을 사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그 결과 2001년 12월 서천-공주 고속도로 4공구를 수주했다. 이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처음으로 단독 수행한 관급공사였다

비슷한 시기에 처음으로 고속도로 확장공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1년 11월 경부고속도로 김천-영동 확장 2공구를 주간사로서 수주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 외에도 부산-울산 고속도로 4공구, 무안-광주 고속도로 4공구 등에 회원사로 참여하는 등 도로공사를 활발하게 추진했다.

서천-공주 간 고속도로 공사 전경

서천-공주 간 고속도로 공사 전경

도로공사 외에도 토목 분야는 공종이 다양화되면서 항만과 부지조성 사업에서도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항만 분야는 포항과 광양제철소에서 나오는 부두공사를 통해 경험을 쌓았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많은 포스코 물량을 소화해냈다.

포스코건설은 이러한 항만공사 경험을 바탕으로 2002년 12월 경남 마산시가 발주한 원전항 건설공사를 대안입찰로 수주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입찰에서 국내 최초로 철강재를 활용한 250m의 ‘부유식 강재 방파제’를 제안했다. 또 철강재의 새로운 수요 창출은 물론, 부유식 강재 방파제의 시공기술을 확보해 항만 분야의 경쟁력을 높였다.

원전항에 이어 2003년 10월, 부산 국제여객 및 해경부두 건설공사도 대안입찰로 수주했다. 이 공사는 급증하는 국제 해양관광 수요에 대처하기 위한 여객 전용 부두와 해양경찰청 이전에 따른 해경 전용 부두 건설 프로젝트였다.

부산항 국제 여객 및 해경부두 공사 현장

부산항 국제 여객 및 해경부두 공사 현장

항만과 마찬가지로 부지조성 분야도 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경험을 쌓았다. 부지조성 분야의 대표적 프로젝트로는 인천국제공항이 여객 및 화물 처리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추진했던 2단계 확장공사 중 제3활주로 부지조성 공사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 수주의 경쟁력은 연약지반 개량공사였으며, 이미 포스코건설은 광양제철소 부지조성공사를 통해 이 분야에 대한 기술력을 축적하고 있었다.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포스코건설은 2001년 말 이 프로젝트 수주전에 뛰어들어 5공구를 80% 지분의 주간사로서, 한진중공업이 주간사를 맡은 4공구는 30%의 지분의 회원사로서 수주하는데 성공했다. 그 외에도 포스코건설은 부산신항과 화성 신도시 부지조성공사를 주간사로서 수행했다.

c1. d

8. 인천국제공항철도에 이어 김해경전철 수주

인천국제공항철도 기공식

인천국제공항철도 기공식

토목 분야는 도로, 항만, 부지조성 등 공종이 다양해지면서 철도에서도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수행했다. 철도 분야 국내 최초 민자사업이었던 인천국제공항철도 건설사업과 김해경전철 등의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인천국제공항철도 프로젝트는 1단계로 2001년 4월부터 2007년 3월까지 인천국제공항에서 김포공항까지, 2단계로 2004년 1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김포공항에서 서울역까지 모두 61.5㎞의 철도와 역사를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1단계의 2개 공구, 2단계의 1개 공구의 시공을 맡았다.

인천국제공항철도에 이어 포스코건설은 초대형 프로젝트인 김해경전철에 도전했다. 후발주자로서 토목사업 진출이 쉽지 않았던 포스코건설은 경전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선점해보겠다는 강한 의욕을 가지고 도전에 나섰다.

경전철 사업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이 사업의 경쟁력은 코어(Core) 부분의 기술력 확보였다. 차량, 신호, 통신, 전기 등의 코어 부분에 대한 기술력 역시 포스코건설은 이미 최신예 제철소를 건설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확보하고 있었다.

1조 1025억 원의 사업비가 책정된 김해경전철 사업은 초대형 프로젝트를 떠나서 매우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 시행하는 사업이다 보니 먼저 사업권을 획득한 건설사가 향후 예정돼 있는 경전철 사업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회사 설립 초기부터 경전철 사업을 특화사업으로 선정하고 전담반을 두는 등 착실히 준비를 해왔다. 2000년 5월에는 컨소시엄 간 공동추진 협약을 체결하고, 그해 6월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사업비 수준이나 재정지원 요구 등 제반 조건에서 우세한 것으로 알려져 평가 전에 이미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의 승리가 예상됐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금호산업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부산-김해 간 경전철 민간투자사업 실시협약체결

부산-김해 간 경전철 민간투자사업 실시협약체결

그러나 이변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부 협상 과정에서 금호산업의 무리수들이 속속 드러났다. 재정지원 요구가 정부 고시안과 달랐으며, 표준화 시책과 시스템 국산화에도 벗어나 있었다. 차량 재원 역시 기본설계와 달랐다. 결국 정부와 금호산업 컨소시엄과의 협상은 쌍방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됐으며,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차순위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포스코건설은 협상대상자로서 2002년 5월 정부와 실시협약(안) 협상을 타결했으며, 2002년 12월 정부와 민간사업투자 실시협약을 체결했다. 실시협약 체결에 이어 2003년 1월에는 부산-김해경전철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경전철 첫 프로젝트였던 김해경전철을 수주함에 따라 포스코건설은 이 분야 선두주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아울러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던 우이-신설경전철 사업에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cheung

9. 환경사업 분야 정상에 올라

흥해 하수종말처리장

흥해 하수종말처리장

항만, 부지조성과 마찬가지로 환경사업 분야도 포스코 환경관련 공사 경험을 바탕으로 대외사업에 진출했다. 특히 이 분야는 지속적인 기술축적으로 업계 최정상에 올라 그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

사실 설립 초기 환경 분야는 포스코 물량에만 집중했다. 광양 3배수 종말처리장 등 굵직한 프로젝트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1997년을 기점으로 포스코의 조강증산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환경관련 공사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결국 환경 분야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바깥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포스코건설은 대외사업 진출에 앞서 먼저 제철산업에 국한돼 있던 환경사업을 범용성 있는 공공부문 사업으로 확대하기 위해 1997년 말부터 기술축적에 나섰다. R&D의 방향은 하수 고도처리 기술의 도입이었다. 그 이유는 환경사업의 70%를 차지하는 하수종말처리장 건설이 고도처리 방식으로 패턴이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98년 7월 포스코건설은 BIO SAC-BNR이라는 하수 고도처리 기술도입을 완료했다.

그러나 경쟁업체들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다. 그 동안 포스코 사업 독식에 대한 질투가 있었으며, 자기 밥그릇을 챙기려는 보호본능도 강했다. 포스코건설은 1998년 하반기부터 공공영업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나, 한산지방산업단지 폐수종말처리장에 이어 3곳의 하수종말처리장 턴키공사 수주에 연이어 실패했다.

그럴수록 포스코건설은 더욱 고삐를 죄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1999년 하반기에 울진 하수종말처리장 수주에 성공했다. 이 사업은 포스코건설이 환경 분야에서 최초로 수주한 턴키 프로젝트였다. 곧이어 포항 흥해하수종말처리장도 수주하는 등 2000년대 접어들면서 포스코건설은 환경 분야 빅3 업체(삼성물산 건설부문, 태영, 포스코건설)로 성장했다.

더욱이 2003년부터는 적극적인 수주전을 펼쳐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1000억 원 가까운 수주 체계를 구축해나갔다. 2003년 한 해 동안 입찰에 참여한 하수처리시설 9건 중 회원사로 참여한 2건을 포함해 7건을 수주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2004년에 들어와 포스코건설은 더욱 독보적인 행보를 보였다. 중랑천 하수종말처리장 고도처리 시설공사를 비롯해 음성 대소 하수종말처리장, 파주 LCD단지 하수종말처리장 공사를 잇달아 수주하면서 마침내 업계 정상에 올라섰다.

하수종말처리장에 이어 포스코건설은 사회적 이슈인 생활쓰레기 처리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기술개발에 들어갔다. 쓰레기 소각 기술로는 신일본제철의 용융식 소각로 기술에 주목했다. 이 기술은 일본 내에서 30기 이상 쓰레기 소각로 적용에 성공한 기술이었다. 특히 용융기술 분야는 제철소 건설 경험을 통해 이미 포스코건설도 어느 정도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양산 자원회수처리시설 조감도

양산 자원회수처리시설 조감도

결국 포스코건설은 용융식 소각로 방식이 향후 청정기술로 사업전망이 밝다고 예견하고 2002년에 신일본제철로부터 이 기술을 도입했다. 포스코건설의 예상대로 2003년 말 양산시는 새로운 방식의 자원회수시설 건설사업에 대한 입찰공고를 발표했다.

턴키 방식으로 진행된 이 입찰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생활 쓰레기의 처리 방식을 연소 방식 대신 용융소각 방식을 채택해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포스코건설은 이 입찰에서 경쟁자들과 치열한 경합을 펼친 결과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수주에 성공했다. 국내 최초의 용융소각로인 양산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함에 따라 포스코건설은 쓰레기 소각 분야에서도 선두주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c5cgl

10. 제철 플랜트 이어 발전 플랜트 추진

건축과 토목 분야가 선전하는 가운데 제철 플랜트는 지속적으로 기술이 축적됨에 따라 더 이상 경쟁자가 없는 시대를 맞았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는 포스코가 발주 물량의 50%만 포스코건설에 맡긴다는 가이드라인이 있었지만, IMF 위기를 맞아서는 이마저도 무너졌다.

포스코 내부에서 믿고 맡길 회사가 포스코건설밖에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출범 초기에는 신생기업을 키우기 위해 물량을 맡겼지만, 이제는 기술력을 믿고 맡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경쟁자들이 사라졌다. 포스코건설 독주시대를 맞아 경쟁관계에 있던 건설사들이 속속 플랜트사업부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IMF 위기극복 후 제철 플랜트는 특히 표면처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렸다. 2002년 9월 포스코강판 2CGL 신설공사를 수주했으며, 2004년 2월에는 광양 5CGL, 9월에는 광양 6CGL을 착공했다.

광양 5CGL 신설 착공식

광양 5CGL 신설 착공식

포스코는 세계 각국 자동차 회사들의 강판 사용 패턴이 그 동안의 냉연 강판과 전기아연도금 강판 위주에서 용융아연도금 강판으로 급속하게 변하고, 또 강판의 고가공성과 고장력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고객들이 늘어남에 따라 광양 5CGL 신설사업을 추진했다.

2004년 2월 착공에 들어간 광양 5CGL은 광양제철소 1냉연공장과 2냉연공장 사이 부지에 연산 45만톤 규모의 CGL 설비와 연산 23만톤 규모의 MCL 설비를 신설하는 사업이었다. MCL은 다기능성 도장 강판 제조가 가능한 멀티코팅 설비였다.

제철 플랜트에 이어 포스코건설은 발전 플랜트를 특화사업으로 추진했다. 포스코는 그 동안 제철소 건설과 병행해 제철소 내에 상당량의 자가발전소를 건설했다. 따라서 포스코건설의 전신인 포스코의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는 발전 플랜트에 대한 수행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광양 LNG복합화력 주기기계약

광양 LNG복합화력 주기기계약

이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포스코건설은 1995년 2월 에너지사업본부를 신설하고 전문 인력을 대거 영입했다. 이후 광양 및 포항 LNG복합화력, 남제주화력 5,6호기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광양 LNG복합화력의 수주와 사업수행은 발전 분야에서 EPC를 비롯해 시운전과 성능 보증에 이르기까지 턴키 베이스 수주의 영업 기반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1997년 3월 착공해 2000년 1월 준공한 이 프로젝트에서 포스코건설은 16만 kW 가스터빈 2기와 18만 kW 증기터빈 1기를 건설했다.

1999년 2월 착공, 2001년 1월 준공한 포항 LNG복합화력은 중유를 사용하던 10만 kW급 발전설비 2기의 효율이 떨어지고 공해 발생이 많아지자 이를 철거하고 청정에너지인 LNG를 연료로 하는 LNG복합발전소를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두 프로젝트 수행을 통해 포스코건설은 발전설비 분야에서 독자적인 EPC 통합관리 능력을 확보하고 발전 플랜트 시장 진출 기반을 다졌다. 이 같은 기술력을 기반으로 2004년 4월 포스코건설은 현대중공업과 공동으로 한국남부발전으로부터 남제주화력 3,4호기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이 프로젝트는 발전소 건설 실적이 많은 시공능력 상위 건설사들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경쟁입찰을 통해 수주한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