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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스코건설 출범과 ‘POSEC 비전 2005’ 수립

창립 20주년을 맞아 포스코건설은 2020년까지 세계 10대 건설사 도약을 목표로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글로벌 Top 10의 비전을 세우기까지, 그리고 국내 빅5 건설사로 성장하기까지 그 과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포스코건설은 모기업 포스코의 철저한 사업계획에 입각해 탄생했다. 당시 포스코는 2005년까지 세계 100대 그룹으로 성장한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철강, 정보통신, 건설과 엔지니어링(E&C)을 3대 핵심 동력으로 삼았다.

‘포스코 비전 2005’가 등장했던 1990년대 중반은 세계화와 개방화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UR 타결과 WTO 체제 출범에 따라 포스코는 시대적 조류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그룹의 변신을 시도했다. 향후 10년의 비전을 세우고 철강, 정보통신과 함께 제철소 건설능력을 핵심역량과 유망 사업군으로 선택했다.

건설에 있어 단순 시공이 아닌 엔지니어링이 가능한 종합건설에 목적을 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선진국과 달리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 건설업계는 엔지니어링 분야가 취약하고 시공 분야만 크게 발달해 있었다. 압축성장과 중동건설 활황 등이 이러한 불균형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 시절은 기술개발에 힘을 들이지 않아도 시공 능력만으로도 생존과 성장이 가능했다.

그러나 1990년대를 맞아 세계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세계화와 개방화가 가속화하면서 선진국과의 경쟁이 불가피해졌고, 엔지니어링과 시공 능력의 불균형으로 국내 건설업계는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국내 건설사들은 엔지니어링이 가능한 종합건설회사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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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보고 주주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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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개발 현판식

포스코건설 역시 E&C에 목적을 두었고, 포스코의 전략에 따라 씨앗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순조롭게 착착 진행돼갔다. 포스코의 엔지니어링본부와 건설본부, 건설 패밀리사인 거양개발, 엔지니어링 패밀리사인 포스코엔지니어링(PEC)의 통합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사명은 포스코개발(POSEC, 이하 포스코건설로 통일)로 정했고, 1994년 11월 16일 현판식을 갖고 곧이어 12월 1일 공식 출범했다.

포스코건설의 출범은 포항과 광양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축적한 엔지니어링 능력과 건설 경험, 인력을 십분 활용해서 국내 최초의 종합 E&C회사가 탄생했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제철보국의 주역답게 국내 엔지니어링 건설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했고, 건설문화 쇄신을 위해서는 무담합, 무덤핑, 무부실의 3무 정신을 창업정신으로 내걸었다.

출범과 함께 포스코건설은 ‘POSEC 비전 2005’를 수립했다. 세계적 E&C 회사인 미국의 벡텔을 롤모델로 삼았고, 2005년까지 수주 8조 원, 매출 6조 원을 달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담았다. 경영조직에 있어서는 책임경영체제 확립을 위해 부문별 사장제를 도입했다. 손근석 대표이사 회장, 박준민 엔지니어링부문 사장, 이정부 건설부문 사장, 고학봉 해외담당 사장을 선임하고 협력과 분권을 통한 성장기반을 갖춰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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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술연구소 설립과 종합기술계획 수립

종합 E&C 회사를 지향했던 포스코건설은 출범과 동시에 자체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종합 E&C 회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에 준하는 기술경쟁력 확보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먼저 포스코건설은 철강 플랜트 부문의 핵심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토목, 환경, 에너지 등 전략사업 부문의 요소기술들을 개발하기로 했다. 기술개발 과정에서는 선진 건설사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기술자립에 주력하고, 향후 독자기술을 확보하기로 했다.

기술연구소 야경

기술연구소 야경

조직은 엔지니어링과 건설 부문으로 분리했는데, 이는 플랜트 분야의 엔지니어링 기술력 확보와 토건 분야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신기술 개발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조직 구성에 앞서 우수 연구인력 확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출범과 동시에 대대적인 인력확보에 나서 60여명에 이르는 연구인력을 확보했다.

단기간에 대규모 연구인력 확보에 이어 포스코건설은 대단위 기술연구소 건립을 위해 경기도 기흥에 15만 ㎡ 규모의 부지를 확보하는 등 설립 초기부터 기술경쟁력 확보에 각별한 열정을 쏟았다. 1996년부터 건립에 들어간 기술연구소는 1998년에 1단계로 연구동 건물을 완공했으며, 2단계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토목실험동, 품질실험동 등의 부속건물들이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99년 11월에 종합 준공하였다.

설립 초기 포스코건설의 R&D 활동은 선진 건설사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기술도입이 눈에 띠였다. 회사 출범 2년 동안 18건에 달하는 기술협약이 체결되는 등 단시간에 많은 기술도입이 이루어졌다. 일본 니켄 세케이와 가지마건설과는 E&C 전반에 관한 기술협약(1995.7)을 체결했다.

제철 분야에서는 포스코에 주요 설비를 공급해오던 영국의 데이비 인터내셔널과 합작계약을 체결하고 이 회사의 연속주조 부문을 분리해 데이비 디스팅턴사를 설립(1995.1)했다. 미국 ATSI와는 제강전로 내화물 수명 연장을 위한 슬래그 코팅 설비의 엔지니어링과 조업 노하우 기술이전에 관한 기술협약(1995.12)을 체결했다.

CH2M HILL 기술협약 조인식

CH2M HILL 기술협약 조인식

환경 분야에서는 미국 CH2M HILL과 폐수 재활용 및 지하수 개발 등 환경 엔지니어링 전반에 걸쳐 기술협약(1994.12)을 체결했고, 토건 분야에서는 영국의 모트 맥드날드사와 도로, 교량, 지하철 및 터널, 초고층빌딩, 항만, 상하수도 등 SOC 전반에 걸쳐 기술협약(1995.10)을 체결했다.

기술도입과 함께 특허 출원 및 신기술 개발 등 기술개발에도 총력을 기울여 과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거치식 이중벽 강판 셀 공법’은 포스코건설의 산업재산권 출원 활동의 첫 열매로, 1995년 9월 4일 당시 건설교통부로부터 신기술로 지정받았다. 이 기술은 ‘포항 제4호안 조성공사’에 국내 최초로 적용돼 20% 공기 단축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경제성과 함께 친환경적 효과가 크다는 평가도 받았다.

왕성한 기술경쟁력 확보 의지에도 불구하고 포스코건설은 출범 2년 만에 R&D 구조조정이라는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모기업 포스코는 패밀리사 연구기관들의 업무가 다각화하고 중복돼 연구소 간 효율적인 운영이 어렵다고 보았다. 또 계열사 단위의 분산 R&D 체계는 범포스코 차원의 전략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

포스코는 이 같은 판단에 따라 R&D BPR을 실시하고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이하 RIST) 중심의 일관 연구체제를 갖추었다. 그 결과 1996년 7월 18일부로 포스코건설의 연구인력은 기술연구소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인 11명만 남고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RIST로 이관됐다.

그러나 포스코건설의 기술경쟁력 확보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비록 신생기업이었지만 이미 포스코건설의 기술경쟁력은 8기에 이르는 포항과 광양제철소 건설 노하우에 점점이 녹아 있었다. 국내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쟁력이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이러한 기술적 자부심을 더욱 키워나가고, 또 R&D 구조조정으로 정체된 회사의 기술개발 여건에 물꼬를 트고자 1997년부터 매년 중장기 마스터플랜인 종합기술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현장 엔지니어들의 머리에서 정리돼 정제된 종합기술계획은 오늘날 회사가 R&D 경쟁력을 확보하고 성장 도약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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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강의 제철 플랜트, 광양 5고로 신화창조

코렉스 공장 착공식

코렉스 공장 착공식

포스코건설 탄생의 원동력은 제철 플랜트였다.

비록 신생기업이지만 1970년 4월 제철보국의 사명을 안고 영일만 허허벌판에 첫 삽을 뜨면서 포스코건설 제철 플랜트의 역사가 시작됐고,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 4기가 종합 준공되면서 그 경쟁력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단계로 올라섰다.

포항과 광양제철소에 모두 8기의 고로가 들어서기까지 신화창조의 숨은 주역으로는 포스코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가 있었다.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들 조직은 엔지니어링, 설계, 시공 및 기자재 관리 등 제철소 건설과 관련된 업무를 직접 수행했다. 그뿐 아니라 포스코는 어렵게 확보한 제철소 건설과 엔지니어링 역량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거양개발과 PEC를 설립했다.

포스코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 패밀리사인 거양개발과 PEC 같은 조직들에 의해 회사가 탄생했으니 비록 신생기업이지만 포스코건설을 제철 플랜트 분야 최고 강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출범 초기 제철 플랜트 분야에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고, 회사의 성장도 이 분야가 견인했다. 설립 초기 포스코건설은 코렉스(COREX)공장, 포항 2STS 제강연주, 광양 1미니밀, 광양 4냉연 신설, 광양 5고로 신설 등의 주요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제철 플랜트를 중심으로 힘차게 출발했다.

1995년 11월 28일 준공된 코렉스 공장은 차세대 혁신 제철기술로 불리는 용융환원 제철법을 적용한 연산 60만톤 규모였다. 코렉스 공장으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 제철소의 30만톤 설비에 이어 세계 두 번째 기록이었다. 특히 포스코의 코렉스 공장은 경제성을 갖춘 대형 상업화 설비로는 세계 최초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포항 No.2 STS 공사 전경

포항 No.2 STS 공사 전경

코렉스 공장이 거양개발 시절인 1993년에 착공된 반면 포항 2STS 제강연주공사는 포스코건설이 출범하고 최초로 수행한 대형 플랜트 공사였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22개월이라는 짧은 공기, STS 공장 건설 경험의 부족, 설비의 오제작으로 인한 공정 차질 등 숱한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돌관작업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1996년 8월 연산 42만톤 규모의 STS 증강공사를 완료했다.

이에 힘입어 포스코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연산 84만톤급 스테인리스 일관생산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1995년 9월 착공, 1997년 8월 준공한 광양 4냉연공장은 연산 180만톤 규모였다. 단일공장으로서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수주 금액도 당시 철강 플랜트로서는 최대 규모인 6280억 원에 달했다.

무엇보다 설립 초기 포스코건설의 최대 성과는 광양 5고로 건설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설계에서 기자재 조달, 시공, 성능보장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자체 기술로 완벽히 수행해 착공 29개월만인 1999년 3월 말 성공적으로 준공했다.

광양 5고로 신설공사 외에도 신설과 다름없는 기술을 필요로 하는 포항 2고로 2차 개수 같은 사업도 수행함으로써 포스코건설은 제철 플랜트 해외진출 기반을 더욱 다질 수 있었다.

광양 5고로 전경

광양 5고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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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광안대교 건설로 토목사업 진출

광안대로 건설 기공식

광안대로 건설 기공식

제철 플랜트의 경쟁력이 최고였던 반면 토목 분야는 취약했다. 포항과 광양제철소를 건설하면서 이에 수반되는 부지조성과 항만공사, 도로와 철도공사를 수행해 본 경험이 있었지만, 이만한 실적을 가지고 대외사업을 펼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포스코건설 출범 이후 최초의 토목사업은 부산광역시 광안대교 건설공사였다. 5개 구간으로 나누어 발주된 이 프로젝트에서 포스코건설은 1994년 12월, 3개 업체와 공동으로 입찰에 참가해 제3공구의 시공사로 선정됐다.

포스코건설은 국내에서 해상교량 건설로는 처음으로 트러스교 설치에 잭업다운(Jack-up Down) 공법을 도입했고, 성공적인 공사를 위해 포스코의 도쿄기술연구소로부터 기술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처녀작에 기울인 노력에 비해 그 성과는 미미했다. 회원사로 참여해 실적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첫 작품이라는 의미에만 너무 집착해 사업성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고, 결국 적자운영이라는 아쉬움을 남겼다.

토목공사는 대부분이 실적을 중시하는 관급공사에다 대형 건설업체들이 독식하다 보니 포스코건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경쟁업체들의 견제는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들 업체들은 포스코를 등에 업은 포스코건설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광안대교와 같은 프로젝트에서 자충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실적이 없다 보니 회원사로밖에 참여할 수가 없었고, 실적을 얻기 위해서는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공사를 시공해야만 했다.

경쟁업체들의 극심한 견제 속에서 포스코건설이 찾을 수 있는 돌파구는 견제가 상대적으로 약한 민자사업이었다. 1994년 민자유치촉진법이 제정되고 정부는 2001년 개통될 인천국제공항 교통대책의 일환으로 서울과 공항을 잇는 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더구나 이를 민자사업으로 추진한다는 소식은 포스코건설로서는 희소식이었다.

잭업다운 공법으로 시공중인 광안대로

잭업다운 공법으로 시공중인 광안대로

이 사업에 참여하기까지 포스코건설의 노력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실적 쌓기가 절실했는지를 알 수 있다. 출범 1년이 채 되지 않아 PQ 실적 및 대형 토목공사 시공 경험이 전무했던 포스코건설은 1995년 7월, 14개 대형 건설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사업의향서를 건설교통부에 제출할 때 회원사로 겨우 이름을 올렸다.

포스코건설은 공구를 선정할 때도 7개 구간 중 민원이 많고 3개 행정구역이 인접해 인허가 등 행정이 복잡할 뿐 아니라, 다른 공구에 비해 교량, 터널 등 구조물 공사가 많아 실행 측면에서도 불리한 제3공구를 선택했다. 회사의 취약한 PQ 실적을 쌓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었다.

비록 자충수와 고육책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실적들이 하나, 둘씩 쌓이면서 포스코건설의 토목사업 역량도 한 단계씩 발전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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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체 개발사업 수행으로 건축사업 진출

강남빌딩 준공식

강남빌딩 준공식

토목사업과 마찬가지로 건축사업도 실적에 목말라했으며, 경쟁업체들의 견제에 시달려야 했다. 이 때문에 포스코건설은 출범 이전부터 거양개발과 PEC가 추진해오던 자체 개발사업을 수행하거나 포스코 관련 사업을 수행하면서 건축사업 역량을 쌓아나갈 수밖에 없었다.

1993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 메트로상가를 시작으로 개발사업에 나선 거양개발은 포스코건설 출범 직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강남빌딩과 강남역빌딩을 시공하고 있었다. 1996년과 1997년에 각각 완공한 두 건물은 지주가 토지를 제공하고 거양개발이 건물을 지어 분양한 뒤 공사비를 회수하는 분양조건형 개발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당시 부동산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한솔그룹에 일괄 매각하는 등 차별화 전략으로 대형건물의 분양에 성공함으로써 부동산업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비슷한 방법으로 추진한 부산 사상 공구월드는 경험 부족과 사업계획 미비로 실패의 쓴 잔을 들었다. 예정공기를 9개월이나 넘기는 바람에 분양이 늦어지면서 투자비를 조기에 회수하지 못해 적자를 보았다.

충정빌딩

충정빌딩

PEC는 재개발사업으로 서울 서대문구에서 충정타워 건설공사를 수행하고 있었다. 1993년 12월 착공, 1996년 7월 준공한 충정타워는 포스코건설이 시행사로서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시공은 동부건설이 맡았다. 분양 과정에서는 일부를 조합원들에게 지분별로 분양하고, 잔여 부분은 포스코건설이 일반 분양해 공사비와 기타 경비를 충당했다.

포스코건설 출범 이후에는 거양개발 매입 부지를 기반으로 서울 송파구 가락동 IT벤처타워, 유성 프로젝트 등의 자체 개발사업을 수행했다. IT벤처타워의 부지는 1994년 11월에 매입했고, 1995년 10월까지 지하 7층, 지상 21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을 건설하기로 했다.

국내 최초의 도심형 콘도미니엄으로 추진됐던 대전 유성 프로젝트는 충청권 레저 수요 확대를 기대하고, 또 포스코그룹 임직원들의 복리후생 시설을 염두에 두고 수익기반 다변화라는 측면에서 사업을 계획했다. 세 차례의 투자검토위원회와 두 차례의 경영위원회를 거쳐 1995년 5월 지주 측과 사업 약정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추진에 들어갔다.

포스코 관련 건축사업으로는 포스데이타(현 포스코ICT) 사옥을 비롯해 직원임대주택인 상록타워 등이 있었다. 1995년 5월 착공해 1997년 8월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준공한 포스데이타 사옥은 사옥을 겸한 데이터센터로 기능상 보안과 안전성에 역점을 두었고, 비상재해발생 때 응급 복구를 할 수 있도록 특수 설비를 갖추었다.

서울 광진구 광장동의 상록타워는 포스코건설의 이름으로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였다. 포스코 직원용 임대 아파트로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철골조를 이용한 주거 전용 아파트라는 점에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실적 부족과 경쟁업체들의 견제로 건축사업에서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설립 초기 포스코건설은 자체 개발사업과 포스코 관련 사업으로 명맥을 유지해나가면서 후일을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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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국과 베트남으로 제철플랜트 진출

베트남 비나파이프 공장 전경

베트남 비나파이프 공장 전경

설립 초기 토목과 건축 분야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지만, 제철 플랜트의 수준 높은 경쟁력은 해외시장에서도 통했다. 그 시작은 베트남과 중국이었다.

포스코건설이 출범하던 시절 국내 건설업계는 해외건설의 침체 속에 베트남과 중국 개방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포스코건설의 전신인 거양개발과 PEC 역시 중국과 베트남 진출을 적극 모색했다.

거양개발의 첫 해외 프로젝트는 베트남의 비나파이프 건설공사였다. 하이퐁시 안하이 지구에 위치한 비나파이프 공장은 상수도용 아연도금처리 강관인 백관과 하수도용 흑관을 연 3만톤 생산하는 베트남 최초의 강관 제조공장이었다. 1993년 7월 착공, 1994년 7월 준공했다.

PEC는 1994년 2월 베트남에서 VPS 압연공장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이 공사는 PEC가 1년 여의 자료 준비와 축적된 철강 플랜트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와 우리나라의 유명 설비제작 업체와의 치열한 경합 끝에 수주한 것이어서 의미가 깊었다.

베트남 VPS 설비 전경

베트남 VPS 설비 전경

PEC는 이 공사 수주 후 설비 공급사로서 설비공급과 설계, 시운전, 감리를 맡았으며, 시공은 거양개발에 발주했다. 1994년 4월 착공에 들어가 PEC, 거양개발 통합 후에는 포스코건설이 직접 프로젝트를 수행해서 1995년 9월 성공적으로 준공했다. 포스코건설로서는 최초의 해외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출범 직후 베트남 건설성 산하 리라마사와 철강 합작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경제성장으로 철골 소비량이 급격히 늘어날 것을 예측하고 직접 베트남 철강시장에 뛰어든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1995년 10월 포스리라마(POSLILAMA)를 설립하고 곧바로 착공에 들어가 1996년 10월 철골공장을 준공했다.

베트남에 이어 중국시장 진출도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당시 포스코는 광양제철소 준공 이후 증강된 생산능력을 소화할 만한 시장으로서 중국 시장을 선택했다. 포스코건설도 포스코를 쫓아 중국 철강시장에 진출했다. 포스코의 중국 현지법인이 발주하는 철강 플랜트를 수주해 공사를 수행했다.

다롄 CGL 공장 전경

다롄 CGL 공장 전경

그 첫 프로젝트가 중국 다롄(大連) CGL 설비공급이었다. 1995년 11월 착공, 1997년 9월 준공한 다롄 CGL은 포스코건설이 철강 플랜트 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처음으로 CGL 플랜트를 외국에 공급했다는 점과 표면처리 부분에서는 처음으로 자력 엔지니어링을 문제 없이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첫 프로젝트 성공 이후 포스코건설은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에 이어 장쑤성(江蘇省) 장자강(張家港)에 진출했다. 장자강에서 CGL과 STS 플랜트를 수행했다.

1996년 8월 착공한 장자강 CGL은 연산 10만톤 규모로, 포스코건설이 설비공급을 맡아 기본설계와 기계·전기 분야의 상세설계에서부터 관련설비의 공급과 시운전, 감리에 이르기까지 사업 전반을 담당했다. 1998년 5월 준공한 이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최초로 국제 경쟁입찰에 의해 수주한 것이어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1996년 11월 수주한 장자강 STS 프로젝트는 연간 11만톤의 STS 냉연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였다. 치열한 국제경쟁을 뚫고 포스코건설은 설비 공급을 위한 엔지니어링, 설치 슈퍼바이징(Supervising)과 시운전은 물론 토건설계 및 시공감독을 포함해서 일괄 수주했다. 1997년 4월 착공, 1999년 1월 준공한 이 프로젝트는 21개월의 짧은 공기에 중국 최대의 STS 냉연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자체 기술력 향상은 물론 국내외에 다시 한 번 기술경쟁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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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중국과 베트남에 건축사업 추진

호치민 다이아몬드플라자 전경

호치민 다이아몬드플라자 전경

제철 플랜트의 베트남, 중국 진출에 이어 건축 분야도 베트남과 중국에서 활발하게 개발사업을 추진했다. 베트남 호치민에는 다이아몬드플라자를, 중국 상하이에는 포스플라자를 건설하고 자체사업을 수행했다.

포스코건설 건축 분야 첫 해외사업인 다이아몬드플라자는 포스코의 후광을 크게 입은 프로젝트였다. 한-베트남 수교 직후 베트남 정부는 자국 철강산업 육성을 위해 포스코에 기술지원을 요청했고, 포스코도 이에 즉각 화답해 최고 경영진이 베트남을 방문하는 등 협력관계를 돈독하게 쌓아왔다.

베트남 정부의 포스코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포스코건설이 다이아몬드플라자 프로젝트를 추진하는데 큰 힘이 됐다. 1994년 5월 경합사인 말레이시아의 젠팅(Genting)그룹을 제치고 포스코가 베트남 철강공사(VSC)의 외국 파트너로 지정 받았다.

곧이어 11월 말 베트남 철강공사와 합작계약을 체결하고, 1995년 3월 양국 정부로부터 사업승인을 취득한 후 다이아몬드플라자 건설을 위해 현지에 IBC(International Business Center Corporation)법인을 설립했다.

1995년 10월 착공, 2000년 8월 준공한 다이아몬드플라자는 지하 2층, 지상 20층 규모에 상가, 사무실, 아파트로 구성된 복합건물이었다.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주상복합 건물로, 건물 전체를 철골조로 제작함으로써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했으며, 베트남 최초의 백화점이 입주했다. 준공 이후 다이아몬드플라자는 호치민 시민은 물론 관광객과 외국인들의 쇼핑 명소로 자리잡았으며, 우리나라의 뛰어난 시공기술을 베트남에 전파하는 민간외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베트남 다이아몬드플라자에 이어 중국에서는 포스플라자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상하이 푸동(浦東) 루자주이(陸家嘴) 지구 개발계획을 발표했는데, 이에 외국기업들의 투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포스코건설도 이 지역 거점 확보를 위해 한국기업으로는 최초로 1억 8600만 달러를 단독으로 투자해 포스플라자를 건설했다.

포스플라자 전경

포스플라자 전경

포스플라자 건설은 1994년 11월 상하이시와 토지매입 계약을 체결하고 50년간 토지사용권을 취득함으로써 막이 올랐다. 이어서 한국은행으로부터 투자승인을 획득하고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포스플라자 건설을 위해 1995년 10월에는 상하이시로부터 건설면허를 취득했다. 외국 건설업체에 건설시장을 개방하지 않던 중국에서 건설면허를 취득한 것은 우리나라 업체로는 최초였다. 이로써 포스코건설은 본격적으로 중국 건설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포스플라자는 1996년 4월 착공 후 본격 공사에 들어가 1999년 9월 준공했다. 지하 4층, 지상 34층 규모의 외국인 전용 고급 사무실 및 상가용 임대건물로서 최신예 설비와 최신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빌딩의 고급화를 위해 포스코에서 자체 개발한 고급 스테인리스 냉연재를 외장재로 사용했다.

시공 과정에서는 많은 성과를 남겼다.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파일로 대체해 시공하는 신공법을 현지업체와 공동으로 개발·시공함으로써 신기술로 지정 받았으며, 이 신기술로 상당한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의 성과를 얻었다. 외국기업 최초로 우수현장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상하이시로부터 건축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cposven

8. 플랜트 해외사업, 이집트와 남미로 확대

제철 플랜트 해외사업은 베트남, 중국 진출에 이어 중동 인근의 북아프리카 이집트,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브라질로 확대됐다.

이집트 프로젝트는 1995년 4월 한-이집트 국교 수교 이후 국내업체로는 처음으로 대형 플랜트 수주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프로젝트의 발단은 1993년 4월 아르코스틸(ARCO Steel)의 설립이었다. 이집트 국내기업과 해외 다국적기업 등 11개 합작으로 탄생한 아르코스틸은 출범과 함께 특수강공장 건설을 서둘렀다.

사전에 입찰 정보를 입수한 포스코건설의 전신인 PEC는 일괄수주 방식인 이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컨소시엄 파트너를 물색했다. PEC가 설계에서 설비공급, 시운전, 현장교육 등을 담당하고, 삼미특수강은 조업 노하우를, ㈜대우는 수출 및 금융 부문을 담당하기로 하고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이집트 특수강공장 계약 서명식

이집트 특수강공장 계약 서명식

수주전에는 이탈리아의 다니엘리, 독일의 티센 데마그, SMS, 오스트리아의 VAI 등 세계 유수의 제철설비 전문 엔지니어링 및 설비 제작업체들이 참여했다. 포스코건설 출범 직후 낙찰을 위한 숨가쁜 일정이 전개됐는데, 1995년 2월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최저입찰자로 확인되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컨설턴트인 일본 NKK가 해외실적 전무, 기술력 부족 등의 이유를 들어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을 최종 협상에서 제외시키고 제강 부문에는 VAI를, 압연 부문에는 다니엘리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추천하면서 사태는 반전됐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포스코건설은 사전 입찰 자격심사에서 이미 기술 능력을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술적인 사유로 탈락시키는 것은 국제 관례와 입찰안내서에 비추어 부당함을 주장했으며, 우리정부도 외교 채널을 동원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무바라크 대통령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사건이 원점으로 돌아왔고, 포스코건설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았다. 프로젝트 컨설턴트가 인도의 다스트루(Dastur)로 바뀐 것도 다행이었다.

재입찰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최저입찰자로 결정됐으며, 다스트루도 우선협상대상자로 추천했다. 1995년 11월 마침내 아르코 이사회가 포스코건설을 우선협상대상자로 공표했다. 이처럼 포스코건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도전정신으로 1년에 걸친 노력 끝에 전기로를 포함한 일관제철 공정으로 구성된 중동 최대의 특수강공장을 턴키로 수주하는 놀라운 능력을 선보였다.

베네수엘라 포스벤 합작투자 계약 서명식

베네수엘라 포스벤 합작투자 계약 서명식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이어 포스코건설은 지구 반대편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에서도 해외사업을 펼쳤다. 베네수엘라 포스벤(POSVEN) 프로젝트는 미국 방산업체 레이시온의 러브콜에서 시작됐다. 레이시온은 베네수엘라에 연산 150만톤 규모의 HBI 공장 건설 프로젝트 개발 과정에서 PEC에 공동추진을 제안해왔다.

마침 포스코는 미니밀 원료인 HBI의 안정적인 조달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에 PEC가 포스코에 베네수엘라 HBI 사업제안서를 제출했고, 포스코의 긍정적인 반응에 따라 포스코건설 출범 후 레이시온과 합작투자를 위한 MOU가 체결됐다.

사업성 검토 과정에서는 과도한 투자에 대한 우려로 포스코가 주저하면서 사업추진이 잠시 지지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HBI 원료 확보의 필요성에 따라 1997년 1월 결국 포스코를 최대주주로 하는 다국적 합작법인 베네수엘라 포스벤이 탄생했다. 포스벤 탄생에 산파 역할을 담당했던 포스코건설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포스벤 설립과 동시에 레이시온과 공동으로 HBI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었다.

브라질 코브라스코 설립

브라질 코브라스코 설립

브라질 코브라스코(KOBRASCO) 프로젝트는 광양 5고로 조업용 펠릿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펠릿공장 건설공사였다. 포스코는 브라질 현지 국영 철광석 공급사인 CVRD와 합작계약을 체결하고 1996년 3월 코브라스코를 설립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1995년 6월 사업계획을 수립해 포스코와 CVRD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수주활동을 펼쳤으며, 1996년 7월 발주처와 상세설계 계약을 체결하고 이어 11월에는 설비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 펠릿공장은 착공 27개월만인 1998년 11월 16일 준공됐다. 포스코건설은 펠릿공장 설계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외국 엔지니어링사의 설계감리 없이 상세설계를 독자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펠릿공장 자력설계 기술확보에 성공했다.

c2. BEST POSEC

9. BEST POSEC 운동 추진과 성장기반 구축

출범 당시 포스코건설은 시공능력 37위로 그 위상이 지금과 비교하면 많이 왜소했지만, 그 떡잎은 달랐다. 제철보국 신화의 후손으로 그 의지가 대단했고, 포스코의 후광으로 새내기 때 이미 중견기업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새내기의 이 같은 똘똘함은 시기를 불러왔고, 거듭되는 경쟁자들의 질투와 견제로 토목과 건축 분야에서는 오랜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출범 직후 포스코건설의 과제는 경영효율화와 조직의 화합이었다. 경영효율화는 모기업 포스코에서 그 물결이 일었다. 포스코 역사상 최초의 외부 영입 최고경영자였던 김만제 회장은 핵심역량 강화나 선택과 집중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경영효율화를 강조했다.

1995년 6월 포스코건설은 경영효율화를 위해 추진위원회와 추진반을 구성하고 경영진단을 실시했다. 경영진단을 통해 포스코건설은 회사의 비전을 재확인했으며, E&C 사업 수행에 적합한 업무의 표준화와 시스템의 체계화를 통해 기술, 품질, 원가관리의 효율화를 도모하기로 했다. 또 경영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활용을 통해 종합 E&C 회사에 걸맞은 경영관리 체제를 조기에 정착시켜 나가기로 했다. 1단계 경영진단은 업무 진행과정 개선과 조직관리로 1995년 11월 말 완료했으며, 2단계는 기술 및 원가관리에 대한 경영진단으로 1996년 11월 완료했다.

경영효율화 못지않게 출범 초기 포스코건설이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조직의 화합이었다. 거양개발, PEC, 그리고 포스코의 엔지니어링본부와 건설본부는 포스코라는 큰 울타리 속에서 성장해 왔지만,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조직일 수밖에 없었다. 회사 출범 자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공감했지만, 보이지 않는 갈등도 잠재돼 있었다.

BEST POSEC 출범식

BEST POSEC 출범식

포스코건설은 조직의 화합을 위해 기업문화활동으로 1996년부터 ‘BEST POSEC’ 운동을 추진했다. BEST는 경영혁신 활동, 경쟁력 제고, 기술향상, 신뢰구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의 머리글자를 조합한 것이었다. 크게 의식혁신, 행동혁신, 전략혁신 등 세 가지로 나누었다. 의식 및 행동혁신은 기업문화 혁신을 통해 이루어졌고, 전략혁신은 현장밀착형 과제 및 중장기 발전전략 수립을 통해 실천했다.

BEST POSEC 기업문화 선포식

BEST POSEC 기업문화 선포식

포스코건설은 BEST POSEC 운동의 정착을 위해 직원대토론회, 기업문화 선포식, BEST POSEC 경진대회 등 다양한 행사들을 추진했다. 특히 1996년 10월 포스코건설은 세계 으뜸 E&C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기업문화 선포식을 개최했다. 이날 선포식에서는 ‘21세기 세계 으뜸 E&C 기업’이라는 슬로건 아래 ‘미래도전, 가치창조, 참여경영’을 회사의 경영이념으로 정하고,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며, 바르게 행동한다’를 사원정신으로 삼아서 세계적인 E&C 기업으로 성장해나갈 것을 다짐했다.

출범 직후부터 BEST POSEC 운동을 전개하는 등 강력한 경영혁신을 추진해온 포스코건설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만에 성장기반을 구축하는 경영성과를 달성했다. 도급순위에서는 37위로 출발해서 1995년에 14단계가 뛰어올라 23위를 기록했으며, 1996년에는 전년보다 11단계 뛰어올라 12위를 차지했다. 1997년에는 도급제가 폐지되고 시공능력 평가제가 도입됐는데, 포스코건설은 첫 시공능력 평가에서 당당히 7위에 링크되는 비약적인 성장드라마를 연출해냈다.

성장의 원동력은 플랜트였다. 수주 실적에서 플랜트는 전체 수주액에서 1995년 71.7%를 차지했고, 1996년엔 56.3%, 1997년에는 무려 91.1%나 상승했다. 1997년 기준 플랜트가 1조 6717억 원을 기록한 반면 토목과 건축은 각각 1000억 원도 넘지 못했다. 제철 플랜트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과시했다면, 이 시기 토목과 건축은 경쟁업체들의 견제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