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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1. POSCO E&C 탄생 “Global E&C 닻을 올려라!”

# 영일만 허허벌판에 제철소 지은 간 큰 사람들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도대체 1994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연말이면 언론사에서 늘 하는 말처럼 사건사고도 많았고, 다사다난했던 갑술년 개띠 해였다. 유난히 폭염이 기승을 부렸는데, 52년 만의 기록이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남북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았고, 성수대교 붕괴는 한국 건설사에 오점을 남겼다.

젊은 세대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했고, 대학 농구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연세대가 대학팀으로는 처음으로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했고, 서장훈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했다. ‘사랑을 그대 품 안에’라는 드라마로 미혼 여성들이 차인표 신드롬에 빠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국 건설사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12월 1일, 포스코개발(현 포스코건설)이 탄생했다.

포스코개발, 그들은 누구인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영일만 신화의 주역이었다. 한국의 철강신화는 포스코가 국가적 사명을 갖고 이뤄낸 결과이지만, 그 주역은 설계관리를 담당했던 엔지니어링본부와 사업관리를 담당했던 건설본부의 인재들이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이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한다.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조상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제철보국(製鐵報國)! 이제부터 이 말은 우리의 확고한 생활신조요, 인생철학이 되어야 한다.”

포스코 경영다각화 체제

포스코 경영다각화 체제

그들은 박태준 회장이 부르짖는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의 구호에 따라 모래바람만 휑하게 불던 영일만 허허벌판에 제철소를 건설했다.이후 포항제철소 1기부터 출발해 1992년 10월 광양에도 4기의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포스코는 세계 최강의 철강회사로 거듭났다. 산업의 쌀인 철강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포스코건설을 만든 장본인은 포스코 내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 외에도 패밀리사에서는 포스코엔지니어링(PEC)과 거양개발이 있었다.

PEC는 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설계용역을 공정에 맞춰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1970년 7월 설립됐다. 이전까지 국내에 제철엔지니어링 분야 기술자가 전무했는데, PEC의 설립은 엔지니어링 분야 기술축적이란 사명도 있었다. PEC는 1982년에 포스코가 전액 출자하면서 성장에 날개를 달았다. 이후 종합 기술용역이 가능한 수준까지 올라 우리나라 대표적 엔지니어링회사로 성장했으며, 1990년대 들어서는 사업분야를 토목과 건축으로 확대하고 태국과 베트남 등지에서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면서 사세를 키워나갔다.

거양개발의 전신은 제철정비주식회사로, 제철설비의 정비 업무와 설비부품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1984년 4월 설립됐다. 이후 동양철관의 포항공장을 인수하면서 철구 영업을 시작했고, 일반 건설업에도 진출하면서 사세를 확대해나갔다. 1987년 1월 캐나다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기도 했다.

“제철정비는 광양제철소 1기가 준공되면서 운명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1987년 어느 날 박태준 회장이 건설본부를 방문해서는 이런 말을 남겼다. 건설본부는 광양제철소 확장을 끝내고 나면 기술적인 면으로나 윤리적인 면으로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건설회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명섭 전 사장)

이것이 구체화돼 제철정비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먼저 광양의 제철정비 분야가 분리돼 포철기연이 설립됐고, 1991년에 포항의 제철정비마저 떨어져나가면서 포철산기가 설립됐다. 마지막 남은 철구사업부와 토건사업부가 모여 거양개발(1991.5)로 거듭나는데, 이는 포스코개발 탄생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초일류 기업으로 가는 길 “E&C 회사를 만들어라

“포스코가 거양개발을 설립하고, 다시 이를 포스코개발로 확대 개편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포스코의 건설인력이 최고로 많을 때에는 건설본부 800여명, 엔지니어링본부에 300여명 등 1100여명에 이르렀다. 포스코로 보나 국가적으로 보나 이만큼 잘 훈련된 인력이 없었다.” (이명섭 전 사장)

특히 건설본부는 단순한 공사감독 업무에 그치지 않고 전반적인 프로젝트 관리(CM)까지 수행했기 때문에 건설회사는 아니었지만, 국내 여느 건설회사보다 우수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90년경 일본 다이세이(大成)건설의 보고서에서 일본의 건설회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포스코의 건설본부라고 주장했을 정도로 건설본부는 세계적인 CM 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가 종합 준공되면서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의 사후 거취가 최대 쟁점으로 부각됐다. 세계적 CM 능력을 가진 조직을 그대로 놔 두기에는 포스코로서나, 국가적으로나 큰 손실이었다. 이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에서 신설회사 설립이라는 새로운 방안이 도출됐다.

더욱이 이 시기 포스코는 중요한 변화의 시점을 맞고 있었다. 포스코 역사상 최초의 외부 영입 최고경영자였던 김만제 회장이 취임했고, 문민정부는 변화와 개혁을 시도했다. 특히 UR 타결과 WTO 출범으로 세계화 물결이 크게 일면서 우리나라는 선진국으로부터 개방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이 변화의 시기에 포스코는 비전(POSCO VISION 2005)을 수립했다. 1994년 7월 확정 발표된 비전에서 포스코는 2005년까지 세계 100대 그룹 진입을 목표로 삼았다. 성장의 지렛대로는 철강, 엔지니어링과 건설(E&C), 정보통신을 선택하고 집중적으로 육성하기로 했다.

특히 포스코가 선택한 엔지니어링과 건설의 조화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세계화와 개방화가 가속화하면서 선진국과의 경쟁이 불가피해졌고, 엔지니어링 없이 단순 시공능력만으로는 국내시장을 수성할 수도, 해외시장을 개척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포스코의 비전 수립과 함께 E&C 회사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본격화됐다. 포스코의 전략에 따라 초일류기업으로 가는 여정에서 마침내 최고 수뇌부로부터 E&C회사를 만들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부정으로 얼룩진 건설판을 확 바꿔버리자!
1994.8.19 거양개발, PEC 합병계약 체결

1994.08.19 거양개발, PEC 합병계약 체결

1994년의 그 뜨거운 여름, 포스코개발 설립을 위한 E&C 통합작업이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먼저 거양개발과 PEC가 합병하고, 이어서 포스코 내 엔지니어링본부와 건설본부의 인력들이 옮겨갔다. 거양개발은 11월 15일 임시 주총을 열어 사명을 ‘포스코개발주식회사’로 정했고, 이어서 포스코개발은 12월 1일 최종적으로 PEC와의 합병 절차를 밟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E&C 사업에 주력해 포스코개발을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는 포스코에 버금가는 기업으로 키워나가겠다.”

11월 16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동원빌딩에서 포스코개발 현판이 내걸리던 날,김만제 회장의 첫 일성이었다. 최고경영자의 힘찬 포부에 현판식에 참석했던 250여명의 임직원들은 포스코개발을 세계적인 종합엔지니어링 건설업체로 거듭나게 하겠다고 결의했다.

1995년 1월 23일, 포스코개발(이하 포스코건설)은 하얏트호텔에서 창립기념행사를 열고, E&C 분야 진출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행사에는 오명 건설교통부 장관을 비롯해 국내외 귀빈 8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먼저 손근석 초대회장의 개회사가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제철소 건설 초창기부터 축적된 플랜트 엔지니어링과 시공 기술을 하나로 응집한 결정체인 만큼 경쟁력 강화의 기틀은 이미 마련됐다. 앞으로는 첨단기술 습득에 주력해 개방화와 세계화 추세 속에서 선진국가와 당당히 경쟁하는 회사로 발전해나가겠다.”

포스코의 맏형으로 거듭난 포스코건설의 강한 의욕에 김만제 회장은 동반성장과 집중투자 의지를 밝혔다.

“E&C는 25년간 철강 건설 경험과 기술이 축적된 핵심역량 부문으로서 21세기 포스코 그룹 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E&C 산업을 선진기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그 역할이 기대된다. 포스코건설은 그룹에서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3대 기축사업 가운데 하나로서 투자를 포함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포스코건설의 출현은 한국 건설업계에 신선한 자극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담합과 뒷거래, 부실시공 같은 고질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특히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건설업의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출범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부정적 이미지의 건설문화를 확 바꿔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주요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사업 초기부터 수주 과정까지 담합하지 않겠다! 건설업 질서를 흩트리는 덤핑을 하지 않겠다! 시공과정에서 절대 부실공사를 하지 않겠다! 무담합, 무덤핑, 무부실. 이 세 가지를 창업정신으로 내걸고 신생기업이 힘찬 첫걸음을 내딛자 그 동안 관행에 젖어있던 한국 건설업계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며 포스코건설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1994.12.01 포스코개발 창립 기념식(초대 임원진)

 

 #세계적 E&C 회사 미국의 벡텔이 되겠다!
1995.01 POSEC VISION 2005

1995.01 POSEC VISION 2005

포스코건설은 포스코의 비전이라는 사업계획에 따라 새 생명을 얻었다. 포스코가 설계하는 2005년의 비전은 세계 100대 클럽에 합류하는 것이었고, 성장의 지렛대로 포스코는 포스코건설을 선택했다. 그러니 포스코건설도 그에 걸맞은 비전이 필요했다.

1995년 1월 포스코건설은 비전(POSEC VISION 2005)을 수립했다. 처음부터 목표를 거창하게 잡았다. 세계적 E&C 회사인 미국의 벡텔을 타깃으로 설정했다. 벡텔의 목표로 삼아 21세기 세계 으뜸 E&C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포부였다.

불과 10년 만에 신생기업이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허무한 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포스코 철강신화의 주역답게 포스코건설의 꿈은 그렇게 원대하고 높았다. 결국 세계 1등 E&C기업이란, 10년으로 안 되면 20년, 20년이 안되면 30년 걸려서라도 철강신화에 이어 마침내 E&C신화를 이룩하겠다는 포스코건설만의 강한 신념의 표현이었다.

실현 가능한 비전의 목표로는 수주 8조 원과 매출 6조 원을 설정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제철 플랜트를 주축으로 환경, 에너지, SOC 분야를 주력사업으로 삼았고, 민자발전, LNG터미널 사업 등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또 선진 수준의 엔지니어링 기술을 조기에 확보해 사업 기획에서 건설관리까지 일괄적으로 수행하는 고수익 사업을 전략적으로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비전에서처럼 선진 엔지니어링 기술의 조기 확보를 위해 포스코건설은 출범과 동시에 자체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R&D 과정에서는 비전의 성공적 실천을 위해 주력 분야인 제철 플랜트, 환경, 에너지, SOC 분야의 기술확보에 역량을 모았다. 초창기 기술확보 과정에서는 선진 건설사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기술도입에 주력했다. 연구인력의 역량 강화와 기술경쟁력 조기 확보를 위해 대단위 기술연구소 건립도 추진했다.

미국의 벡텔 같은 세계적인 E&C회사를 지향한 포스코건설은 포스코그룹의 수직적 경영관계에서 벗어나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부문별 사장제를 도입했다. 이에 대표이사에 손근석 회장, 엔지니어링 부문에 박준민 사장, 건설 부문에 이정부 사장을 각각 선임하고, 고학봉 사장은 해외사업을 담당했다. 이로써 포스코건설은 한동안 1회장 3사장 체제를 유지하면서 초창기 조직의 화합과 성장을 위한 협력과 분권의 절묘한 조화를 이뤄나갔다.

출범 직후 포스코건설은 포스코의 의지에 따라 혁신활동으로 경영진단을 실시했다. 경영진단은 경영효율화를 위한 조직진단으로, 1996년 6월 추진위원회와 추진반을 구성하면서 그 막이 올랐다. 이후 1단계로 업무 진행과정 개선과 조직관리를 1995년 11월말까지 완료하고, 2단계로 기술 및 원가관리에 대한 경영진단을 1996년 11월 완료했다.

 

#한 지붕 세 가족, BEST POSEC으로 하나되다
1996.03.23 BEST POSEC 출범식

1996.03.23 BEST POSEC 출범식

“초대 회장으로 선임됐다는 연락을 받고는 내심 걱정이 앞섰다. 개인적으로는 포스코경영연구소의 초대 사장으로 조직을 운영해 보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데서 회사를 만드는 과정은 경험했지만, 포스코건설처럼 기존에 있었던 조직을 합쳐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있는 조직을 합쳐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회사를 새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손근석 전 회장)

포스코건설 출범 직후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조직의 화합이었다. 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거양개발과 PEC, 포스코의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 이들 조직의 통합을 두고 처음에 포스코는 사뭇 기대가 컸다. 각각 나름대로 기술과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절묘한 조합이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 선진화를 앞당기리라 믿었다.

그러나 막상 뭉쳐놓고 보니 상황이 심각했다. 조직 구성이 너무 복잡했다. 회사로 보면 3개 회사가 모였고, 조직으로 보면 4개 조직의 인력이었다. 그래서 한 지붕 세 가족이니, 네 가족이란 말이 나돌았다.

상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술연구소 조직으로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과 포철산기 인력이 들어왔고, 신생기업이다 보니 신규사업을 위해 경력사원을 대대적으로 뽑았다. 결국 보기에 따라서는 한 지붕 다섯 가족, 여섯 가족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무엇보다 서로 간 조직문화가 달랐다.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는 포스코의 특성상 제조업의 문화가 있었고, 거양개발은 건설업, PEC는 엔지니어링이라는 특성이 있었다. 게다가 통합 이전 이들의 관계는 발주자와 시행사로, 소위 갑을 관계였다.

더욱이 거양개발이 PEC를 흡수 합병하는 형식이라 PEC로서는 거양개발이 ‘점령군’으로 비춰졌고, 포스코에서 건너온 인력들의 경우 발주자에서 시행사로 지위가 떨어져 불안한 심정도 어느 정도 있었다.

내부 갈등 외에 당시의 문제점으로 손근석 회장은 구성원들의 영업력 부족을 꼽았다. 아직까지 공기업 문화가 남아 있어 민간기업처럼 치열한 생존본능이 부족했다. 이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기 위해 포스코건설은 서로간 이질적 문화를 버리고, 자신만의 고유문화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1996년부터 BEST POSEC 운동을 추진했다.

BEST에서 B는 Build로서 건설, 창조를 의미하고, E는 Economic minds로 경쟁력 제고를 뜻한다. S는 Skills로 기술향상을, T는 Trust로서 신뢰 구축을 의미한다. ‘21세기 세계 으뜸 E&C 기업’이라는 슬로건 아래 ‘미래도전, 가치창조, 참여경영’을 회사의 경영이념으로 삼았고,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며, 바르게 행동한다’를 사원정신으로 선정했다. 결과적으로 BEST POSEC 운동은 신설회사로서의 기본을 만드는 과정이었고, 구성원들에게 회사의 정체성과 비전, 그리고 사원정신을 상기시키는 사상교육이었다.

출범 직후 포스코건설은 국내 건설업계의 후발주자로서 신생아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각종 건설부문에 실적이 없었으며, 전문인력 부족으로 신규 수주 개척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구성원들의 창의성과 자율적 일 처리능력 부족도 문제였다. 그래서 포스코건설은 기업문화 혁신활동을 추진하면서 자율과 창의를 통한 경영을 강조했고, 상향식 의사결정을 원칙으로 자율책임과 결과에 대한 평가 시스템을 강화했다.

1997.08.19 BEST POSEC 한마음 실천교육

1997.08.19 BEST POSEC 한마음 실천교육

특히 간담회, 워크숍, 세미나 등을 계층별, 부문별로 실시했다. 처음에는 임원들부터 합숙훈련에 참여해 토론문화를 이끌어나갔다. ‘과연 회사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목표대로 발전할 수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등의 토론과제를 집중 논의해 회사의 목표와 업무처리방향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갖도록 노력했다.

이 같은 집중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포스코건설은 짧은 기간 내에 통합에 따른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고, 빠른 시간 내에 성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출범 3년 만에 시공능력 7위로 올라섰고, 수주액도 2조 원대에 진입했다.

 

1-2

Story2. 제철 플랜트 시동, 건설업계 판도를 뒤흔들다

# 싹쓸이 괘씸죄, 50%만 먹어라

인류는 석기와 청동에 이어 철기시대를 열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극빈층으로 전락했을 때 그들은 철에서 희망을 찾았다. 산업의 ‘쌀’인 철은 위대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좋은 철이 있었기에 조선 강국도, 자동차 강국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 제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비웃었다. 힘 있는 나라가 기술과 자금을 제공해도 그걸 만들고 지킬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들은다름 아닌 위대한 대한민국이었으며, 위대한 포스코였다. 그리고 제철신화의 숨은 주역으로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가 있었다. 그들은 신화창조의 출발선인 포항제철소 건설의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광양제철소를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994년, 그들이 다시 모여 포스코건설을 만들었다. 그들의 실력은 이미 검증을 받았다. 우향우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다진 실력이었다. 그 기세에 눌려 포스코건설이 영업을 시작하던 날, 건설업계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포스코건설이 출범하면서 포스코의 설비를 시공해왔던 대형 건설사들의 철강사업부가 된서리를 맞았다. 포스코는 외자설비만 직접 발주하고 내자설비와 공사 전부를 포스코건설에게 맡겼다. 그러자 대형 건설사들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공기업이 그렇게 방만하게 경영해서 되겠느냐!”

“국민기업이라면서 문어발식 확장이 왠 말이냐!”

하루아침에 일거리를 잃고 철강사업부를 유지해야 할지, 폐쇄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 그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이 같은 노골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포스코가 한발 물러섰다. 1996년 중반 포스코건설 직접 발주 물량을 50%로 제한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나머지 물량에 대해서는 포스코건설도 대형 건설사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입찰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50% 가이드라인도 무용지물이었다. 게임이 되질 않았다. 포항과 광양에서 8기의 제철소를 건설하면서 쌓은 실력이다 보니 경쟁을 해도 포스코건설의 성적이 월등히 높았다. 입찰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면 경쟁사들은 닭 쫓던 개마냥 먼 산만 바라보았다.

 

#광양 5고로, 우리기술로 세계 최강 제철소 만들다
광양 5고로 착공식

광양 5고로 착공식

출범 시작부터 건설업계를 바짝 긴장시켰던 제철 분야는 포스코건설이 성장기반을 구축해가던 1997년까지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용광로나 고로에 철광석을 녹여 선철을 만드는 제선 분야에서는 대표적으로 광양 5고로 신설, 포항 2고로 2차 개수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고로를 대체할 새로운 제철공정으로 코렉스 프로젝트도 수행했다.

광양제철소 5고로 건설은 포스코가 조강생산 능력 총 2800만 톤 체제를 구축, 세계 1위의 철강기업으로 도약하는데 디딤돌이 된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로서는 설계에서 기자재 조달, 시공, 성능 보장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자체 기술로 완벽히 수행한 사업으로, 제철 플랜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였다.

먼저 광양 5고로는 정부의 요청에 따라 사업이 발굴됐다.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 4기 준공 이후 포항과 광양을 비롯해 총 8기에서 2100만 톤 생산체제를 갖추고, 가동률도 95% 이상을 유지하는 데도 철강 수요가 계속 급증하면서 철강 부족 현상이 해소되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주력 산업인 조선과 자동차 산업의 철강재 공급 차질을 우려하면서 포스코에게 제철 생산량 확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정부의 요청과 수요 예측에 따라 1995년 6월 포스코는 연산 300만 톤 규모의 고로 1기와 연산 200만 톤 규모의 미니밀 1기 신설에 대한 투자를 결정했으며, 포스코건설은 포스코로부터 이 사업을 수주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러나 사업 수행 도중 포스코건설은 IMF 위기를 맞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 마디로 비상 상황이었다. 환율이 치솟으면서 자고 나면 환차손이 커져갔다. 우리는 확보된 기술력과 사업관리 능력을 총동원해 수익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설비의 합리적인 구매 필요성이 강조됐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발주 단위를 세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발주 단위가 무려 160개로 늘어났다. 비슷한 규모의 포항 4고로 1차 개수 때의 발주 단위 16개와 비교하면 그 노력이 참으로 대단했다. 발주의 세분화와 함께 국산 기자재 사용 비율도 대폭 늘렸다. 이 같은 조치를 통해 손실 폭을 줄이고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고영균 전 부사장)

국산 기자재 사용 비율을 대폭 늘리면서 포스코건설은 고로 설비의 국산화에 크게 기여했다. 고로 설비에 사용되는 기자재의 경우 국제적으로도 제작업체가 한정돼 있고, 높은 신뢰성이 요구되는 전문 설비들이어서 주요 설비의 국산화에는 신중한 기술검토와 검증 과정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코건설은 설비별로 국내 전문 제작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국내업체들이 고로의 조업과 수명 결정에 필요한 핵심설비 국산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광양 5고로 건설공사는 1996년 10월 착공 이후 포스코건설의 자력 엔지니어링 기술에 의해 1999년 3월말 준공됐다. 6-1특징으로는 소결공장과 코크스공장을 신설하지 않고 기존 설비를 사용했기 때문에 별도의 부대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어 경제적이었고, 특히 인공지능 시스템과 미분탄 취입 기술 등을 최대한 활용한 최신예 고로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 수행을 통해 포스코건설은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우선 기술축적의 성과가 있었다. 고로 개수와 광양 5고로 신설과정에서 습득한 각종 기술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는데, 그 성과물이 무려 총 37건, 4만 2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사업관리에 있어서도 ISO 절차에 의한 프로젝트 관리기법을 적용했다. 더욱이 미국의 엔지니어링사인 레이시온의 프로젝트 관리기법을 전수받아 대형 고로 프로젝트의 종합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공사 안전관리와 시공 품질 면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엄격한 시공 품질관리를 통해 공사 기간을 대폭 단축함으로써 시운전 기간을 6개월 이상 확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광양 5고로 신설 경험을 바탕으로 포스코건설의 기술력이 고로를 상품화해서 판매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는 점이었다. 이후 포스코건설은 최신 고로 기술로 무장하고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 첫 성과가 이란 타바존 프로젝트에서 나타났다.

광양 5고로 준공

광양 5고로 준공

 

#광양 1미니밀, 친환경과 저원가 시대를 열다

철강 생산 공정은 처음 쇳물을 만드는 제선공정에서 출발, 쇳물에서 불순물을 제거해 강철로 만드는 제강공정으로 넘어간다. 이 시기 포스코건설은 포항과 광양제철소에서 용선 예비처리 설비, 용강 승온설비, 탈가스 설비(RH-OB) 등 제강공정 중 쇳물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노외정련 공정에서 설비 설치공사를 여러 차례 수행했다.

제강공정 중 주요 프로젝트로는 광양 1미니밀 설비가 있었다. 미니밀 설비는 전기로에서 고철을 녹여 얇은 슬래브를 만든 뒤 가열로와 조압연설비를 거치지 않고 사상압연설비에서 열연강판을 생산할 수 있는 제철 설비이다.

광양 미니밀 공장 전경

광양 미니밀 공장 전경

광양 5고로 추진배경 때와 마찬가지로 국내 강재 소비가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자 포스코는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설비 증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철강 수요가 2000년을 전후로 고비를 맞아 2010년이 되면 쇠퇴기로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예측됨에 따라 포스코는 생산량을 조절하기 어려운 고로보다는 미니밀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사업에서 일부 설비공급과 시공을 맡았는데, 이 사업은 연산 180만톤 규모에 수주 금액이 외자를 제외한 설비공급과 시공을 합쳐 2880억 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1995년 1월 착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돌입해 굴착 102만㎥, 항타 1만 300본, 콘크리트 22만 4000㎥, 기계설치 4만 2000톤, 케이블 포설 3891㎞ 등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고 많은 설비를 도입했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는 난관도 많았다. 항타와 굴착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 수처리 설비 스케일 피트 굴착(GL-23m) 완료 시점에 시간당 30㎜ 이상의 폭우가 3시간에 걸쳐 100㎜나 쏟아져 토질이 변형되고 매몰되면서 굴삭기 1대가 침수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주야를 가리지 않는 복구작업에도 불구하고 7일 정도의 공정이 지연되고 경비도 많이 소요됐다.

기계 기자재 중 연주의 신설비인 코일 핸들링 시스템은 제작과정에서 문제점이 발견돼 납품이 지연됐으며, 고압가스 설비 중에서는 인허가를 받지 않은 제품이 반입돼 이를 교체하는 작업에도 많은 시간과 인력이 낭비됐다.

그뿐 아니라 일부 협력업체의 임금 체불로 인해 근로자들의 농성이 발생했으며, 일부 협력업체는 부도를 맞아 후속업무가 지연되기도 했다. 환경단체의 고발을 해결하는 데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렸다.

비록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도 많았으나 모두가 합심해 불철주야 노력을 경주한 끝에 당초 준공일 대비 15일을 단축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1996년 10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이 성대하게 거행됐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미니밀 전 설비에 대한 시운전은 아니었지만, 제강설비와 수처리 설비에 대해 포스코건설이 자력으로 주어진 일정에 무사히 시운전을 마침으로써 포스코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특히 내부적으로도 많은 경험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연 인원 86만 명이 동원돼 포항 지역 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는 당시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지 않아 도급계약 21개 차수에 45개 협력업체와의 202건에 달하는 계약을 관리하느라 고초가 많았다. 특히 협력업체 월 기성 지급 때는 현장소장이 350~400회 이상 결재를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포스코도 성과가 많았다. 광양 1미니밀은 제철소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용광로에 의한 일관제철 방식을 완전히 탈피해 고철을 주원료로 해서 전기로로 쇳물을 생산하기 때문에 용광로, 코크스, 소결설비가 지니는 환경오염 배출 요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아울러 두께 90㎜ 이하의 박슬래브를 고속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고속 연주기가 연결돼 있어 고생산성과 저원가 조업이 가능해졌다.

결과적으로 포스코는 이 설비를 통해 기존의 고로설비 대비 최고 50%의 설비비를 절감할 수 있었으며, 제조 기일도 8일이나 단축할 수 있었다. 특히 에너지를 40% 절감시키고, 노동생산성을 30%나 증가시키는 등 포스코건설은 발주자 포스코가 저원가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 광양 4냉연, 엄청난 규모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철강 생산 공정은 제선과 제강공정을 지나 연주공정으로 넘어간다. 연주공정은 액체 상태의 철이 고체가 되는 과정인데, 이를 반제품이라고 한다. 반제품은 다시 압연공정으로 넘어가 열연코일, 후판, 선재 등 철강 제품이 된다.

압연공정은 열간압연과 냉간압연으로 나뉘는데, 특히 냉연강판은 미려한 표면과 정확한 치수, 가공성 등의 장점을 지녀 자동차, 가전, 가구, 사무용품, 건자재 등 이용범위가 넓고 일상생활에 가장 가까운 철강 제품이다.

출범 이후 3년간 포스코건설은 연주공정으로는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열연에서는 포항 1열연 신예화와 포항 3후판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냉연에서는 광양 4냉연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 중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광양 4냉연을 꼽을 수 있었다.

포스코는 가전용, 건자재용, 자동차용 등 냉연강판의 수요가 급증하자 1977년 2월포항 1냉연공장을 준공한 이후 포항 2냉연공장과 광양에 1~3냉연공장을 건설하는 등 냉연강판 생산능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왔다.

5개의 냉연공장을 가동하면서 포스코는 ‘냉연 제품이 회사의 사활과 직결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냉연 품질 혁신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러나 광양 3냉연공장 가동 이후에도 자동차, 가전제품 등 냉연제품 수요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포스코는 조만간 국내 냉연시장의 공급부족을 전망하고 광양 4냉연 건설에 착수했다.

연간 180만 톤의 생산 능력을 갖춘 광양 4냉연공장은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공장 길이가 1㎞가 넘고, 공장 폭이 300m에 이르렀다. 토건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는 하루 수행 인원만 4500여 명에 달했고, 평균 3800여 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포스코의 투자 금액이 무려 9812억 원에 달했고, 포스코건설의 수주 금액도 6280억 원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로서는 포스코건설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플랜트라 할 수 있었다.

광양 4냉연 EGL(전기도금설비)

광양 4냉연 EGL(전기도금설비)

1995년 9월 착공해 1997년 8월 준공한 이 공장은 냉간압연설비(PL/TCM), 연속소둔설비(CAL), 전기도금설비(EGL), 정정설비(RCL) 등으로 구성됐다. 포스코건설은 공기 준수를 위해 공사관리에 총력을 기울였다. 규모에 비해 1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콘크리트 49만 7000㎥, 철골 4만 4200톤, 기계 및 배관 설치 5만 2000톤, 케이블 포설 6800㎞ 등의 엄청난 물량을 처리하느라 심신이 고달팠다. 그래도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공기를 맞춰나갔다.

특히 토건공사의 공기 준수가 전체 공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여러 설비 중에서 기초 구조물이 복잡하고 협소한 지역에 대규모 물량이 집중돼 있는 TCM(냉간압연기)의 경우 압연지역 공장건설 사상 최초로 타워크레인을 설치해 사용했다. 더구나 포항 지역에서는 구조물 설치업체를 찾을 수 없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마땅한 업체를 찾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또 복잡하고 많은 구조물을 단기간에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밀도에 오류가 발생해 기계설치 작업 전에 많은 수정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나중에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냉연설비의 구조물 시공 기준을 정립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난관을 하나씩 극복해나가면서 1996년 2월 철골 입주식을 무사히 마쳤고, 이어서 8월에 압연기(Mill Housing) 입주식도 순탄하게 마무리 지었다. 압연기와 함께 연속소둔설비, 전기도금설비, 정정설비 등도 성공적으로 설치 완료했다.

포스코건설은 기전공사에 이어 기자재의 적기 수급을 위해설계, 제작, 시공 TFT를 각각 구성하고 제작사 상주관리, 1일 입고현황 관리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설치 중 발생하는 설계 및 제작 오류를 즉시 해결하는 운영체제도 가동했다. 그 결과 1997년 8월, 광양 4냉연공장이 성공적으로 준공됐다.

광양 4냉연 신설에서 가장 큰 성과로는 포스코가 독자 개발한 두께 및 형상 자동제어시스템 등의 첨단 기술을 채택함으로써 세계 최대치인 두께 0.4~2.3㎜, 폭 700~1860㎜의 후물광폭재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를 통해 제품의 두께 편차를 종전보다 32% 향상시켰으며, 후물광폭재의 평탄도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1994년 12월 출범 이후 3년간 포스코건설은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한 제철 플랜트에서 눈부신 성과를 달성했다. 포스코의 투자가 활발한 가운데 광양 5고로 신설, 광양 1미니밀 신설, 광양 4냉연 신설 등 사업규모가 1000억 원이 넘는 대형 프로젝트를 10여건이나 수행하면서 회사가 성장기반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97년의 경우 회사 전체 수주액이 1조 8000억 수준이었는데, 여기서 제철 플랜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1조 6000억 원 규모로 무려 91%를 차지했다. 이를 기반으로 제철 플랜트는 출범 직후 37위에 불과하던 회사의 시공능력을 7위로 끌어올렸다.

광양제철소 4냉연공장 전경

광양 4냉연공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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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3. 토목과 건축 분야 진출, “출발은 초라해도 꿈은 원대하게!”        

# 남의 떡 넘보지 말고 제철이나 먹고 살아라

1994년이 저물어갈 무렵, 말 많은 건설판에 신생기업이 출몰했다.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영일만 신화의 DNA를 가졌고, 그래서 뭔가 큰일을 낼 그런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시작부터 요란했다. 미국의 벡텔이 되겠다고 호언장담하질 않나, 부패로 찌든 건설판을 확 바꿔버리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이때부터 터줏대감들의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몇 십 년째 안정된 수익을 안겨주던 터줏대감들의 사업체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결국 터줏대감들이 뭉쳤다. 그들은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다졌고, 본때를 보이기 위해 연합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거양개발 시절이나 포스코건설 시절이나 대형 건설회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포스코 발주 물량에 의존하지 말고 일반 건설시장에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쟁업체들의 저항이 거세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수주사업보다 자체 개발사업에 역점을 두고 돌파구를 찾자는 전략을 수립했다. 거양개발 시절 분당 메트로상가, 강남빌딩, 강남역빌딩 등의 실적이 그런 결과물들이었다. 포스코건설 출범 후에도 개발 부지를 확보하는 등 일반 건설업 진출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는데, 그럴수록 경쟁업체들의 견제가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포스코에서 타사와의 과도한 경쟁을 가급적 피하라는 지시까지 내려왔다.” (이정부 전 사장)

이정부 전 사장의 회고에서 나타나듯 토목과 건축 분야 진출은 신생기업 포스코건설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원과제였다. 출범 이후 3년간의 성적표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외형만 따져보면 신생기업치곤 대단한 성적을 올렸다. 수주액 2조 원 시대에 진입했으며, 시공능력으로 평가하는 업계 순위에서도 7위까지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제철 플랜트가 거둬들인 실적이었다는 것이 모두가 우려하던 심각한 문제였다. 포트폴리오 구성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구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를 누구보다도 포스코건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포스코가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 종합준공을 계기로 설비확장을 완료했기 때문에 포스코건설은 출범 전부터 향후 물량 감소를 예측했다. 다행히 철강경기가 좋아서 예측이 살짝 빗나가 포스코가 투자를 확대했고, 포스코건설로서는 운과 때를 잘 만나 빠른 시간에 성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포스코건설은 부단히 토목과 건축 분야 확대를 시도했다. 그러나 부단한 노력에 비해 결과는 좋지 않았다. 실적을 중시하는 업계 분위기 탓에 시장 진입이 쉽지 않았고, 포스코에서 수행한 건축과 토목 실적을 내세워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들이 지역단위의 연고권 위주로 컨소시엄이 구성됐는데, 이를 대형 건설사들이 독식하고 있었다. 여기에 괘심죄에 걸린 포스코건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고, 대형 건설사들이 끼워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출범 직후 제철 플랜트를 싹쓸이 하자 그 불똥이 건축과 토목으로 튀었다. 경쟁사들은 포스코가 문어발식 확장을 한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결국 국민기업의 이미지를 소중히 여기는 포스코가 외부 경쟁 자제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포스코건설이 아니었다. 우선은 토건사업본부를 강구조개발본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포스코의 위신을 세우면서 경쟁사들이 견제를 풀도록 위장전술을 펼쳤다. 건축 분야는 자체 개발사업으로 사업확대를 시도했고, 토목 분야는 민자사업으로 돌파구를 찾아나갔다.

 

#와신상담 건축 분야, 자체 개발사업으로 반전 모색하다
강남빌딩 전경

강남빌딩 전경

실적 부족과 업계의 견제로 사업추진이 여의치 않았던 포스코건설은 자체 개발사업과 포스코 물량으로 건축부문을 근근이 연명해나갔다. 자체 개발사업으로는 거양개발과 PEC가 추진해오던 프로젝트들을 물려받아 수행했다. 거양개발 사업으로는 강남빌딩과 강남역빌딩 프로젝트가 있었고, PEC 사업으로는 충정타워가 있었다. 포스코 관련 사업으로는 직원용 임대아파트인 상록타워가 있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강남빌딩과 강남역빌딩은 포스코건설에게는 최초 오피스빌딩 건설과 최초 민간 수주사업이라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1993년 3월 착공, 1996년 1월 준공한 지하 6층, 지상 21층 규모의 강남빌딩은 동절기 한파 때문에 시공 과정에서 애환이 많았다. 콘크리트 양생(Curing, 養生)을 위해 아래층에 15개의 갈탄 난로를 피우고, 위층에는 3개의 열풍기를 설치하는 촌극을 펼쳤다.

특히 공사지역이 저지대여서 폭우로 인해 전기실이 침수되는 일도 있었고, 준공을 앞두고는 주공정 업체의 부도로 돌관공사(突貫工事)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런 난관을 극복하고 강남빌딩은 강남지역 상권의 중심 건물로 자리잡았다.

1996.01 강남빌딩 준공

1996.01 강남빌딩 준공

강남역빌딩 전경

강남역빌딩 전경

1993년 6월 착공, 1997년 6월 준공한 지하 7층, 지상 20층 규모의 강남역빌딩은 분양사업에 자신감을 심어준 프로젝트였다. 일반 분양을 진행할 경우 적자가 예상되자 포스코건설은 일괄 분양을 추진했다. 매수 희망업체로는 한솔그룹이 나타났는데, 건축주를 비롯해 3자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협상과정에서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2개월에 걸친 협상과정에서 치밀한 계획과 정보수집으로 상대를 이해시키고, 상세한 자료제공으로 신뢰를 얻어 마침내 계약에 성공했다. 그 결과 당초 적자가 예상되던 사업을 흑자로 전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충정타워 전경

충정타워 전경

서울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 입구에 위치한 지하 6층, 지상 15층 규모의 충정타워는 포스코건설 최초의 도심 재개발사업이었다. 사업 구조는 조합원에게 3개층을 대물 보상하고 나머지 12층을 일반 분양하는 것이었다. 시공은 동부건설이 맡았고, 1993년 12월에 착공해 1996년 8월에 준공했다.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서는 세입자와 반대 조합원으로 인해 1년 6개월이나 공사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분양에 성공해 흑자를 기록하고 재개발사업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한 것은 큰 성과였다.

“포스코건설은 철강재를 활용한 프로젝트 발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부산의 광안대교 공사를 수행하면서 콘크리트로 설계된 것을 강교량으로 바꾸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철골조 아파트인 상록타워도 건설했다.” (이정부 전 사장)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지하 2층, 지상 25층 규모의 상록타워는 포스코건설 최초의 아파트 건설이었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철골조를 이용한 주거 전용 아파트라는 점에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포스코 무주택 서울 근무자들을 위한 임대아파트로서 1994년 8월에 착공해 1996년 6월에 준공했다. 포스코건설은 건물 뼈대를 완전히 철골로 구성하는 국내 최초의 철골조 아파트를 준공함으로써 철강재를 이용한 선진기술을 선보였으며, 철골조 아파트 건설 활성화에 의한 새로운 철강재 수요를 창출하고, 건식공법과 관련된 경량 마감자재 산업발전에도 기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최초의 공공사업 광안대교 적자 운영의 눈물 젖은 빵
건설 당시 광안대교

건설 당시 광안대교

“광안대교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강교량을 제작했는데, 이만한 크기의 강교량은 대형 안벽을 갖춘 조선소가 아니면 제작할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1000억 원 정도의 적자가 예상되는 사업이었다. 적자 폭을 줄이려고 중국, 태국, 러시아 등 해외에서 제작해 반입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결국 국내업체인 현대중공업에 제작을 맡겼다.” (박주운 상무, 당시 현장소장)

포스코건설은 적자를 예상하고도 실적을 쫓아 광안대교 건설공사에 참여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해 눈물 젖은 빵을 삼켰고, 그런 노고에 힘입어 적자 폭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다.

부산의 명물인 광안대교는 총 길이가 7.42㎞로 당시로서는 국내 최장의 해상교량이었다. 대규모 사업이었던 만큼 부산시는 5개 구간으로 나누어 공사를 발주했다. 1994년 12월 포스코건설은 울트라건설, 협성종합건설 등과 공동으로 입찰에 참가해 3공구의 시공사로 선정됐다. 경쟁사들의 견제가 심한 당시 상황에서 그나마 포스코 이미지가 좋은 부산지역이어서 참여가 가능할 수 있었다.

3공구는 중앙의 현수교와 조화를 맞추기 위해 360m의 트러스교와 40m의 강상형교를 현수교 좌우측으로 설치하는 공사 구간으로, 전체 시공물량은 트러스교 720m, 강상형교는 80m였다. 시공 과정에서 최대 난제는 초중량 구조물의 설치 작업이었다. 해상 크레인으로는 도저히 설치할 수가 없어 결국 포스코건설은 국내 최초로 잭업다운(Jack-up Down) 가설공법을 선택했다.

특히 성공적인 공사 수행을 위해 포스코 도쿄기술연구소로부터 기술지원도 받았다. 강교량 가조립 테스트에 대한 기술자문을 받았고, 일본 5개소의 사례조사와 강교량 건설 관련 기술도 제공받았다. 무엇보다 이 공법을 교량에 적용한 예가 없어 예행연습이 필요했다. 박주운 상무는 광안대교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이때의 경험을 잊지 못할 한 장면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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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2.09 광안대로 건설 기공식

1998년 1월, 모든 상황을 실제 조건과 동일하게 준비한 다음 예행연습에 들어갔다.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구조물을 탑재하지 않은 3만톤 규모의 바지선이 6시간 만에 광안리 앞바다에 나타났다. 현장에 국내 유일의 초대형 바지선이 도착하자 마치 섬 하나가 떠있는 것 같았다. 이 거대한 배를 구경하기 위해 해변가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기상 악화로 거대한 산 모양의 파도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손 쓸 겨를도 없이 해상작업용 장비들이 파도에 묻혔고, 설상가상으로 섬과 같은 바지선이 교각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2003.01.06 부산 광안대교 개통식

2003.01.06 부산 광안대교 개통식

만약 교각과 부딪친다면 지난 4년간의 피와 땀이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급히 예인선 3척을 동원해 바지선을 먼 바다로 끌어당겼으나 오히려 계속 밀리기만 했다.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던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아무리 당겨도 꿈쩍도 않던 바지선이 서서히 당겨지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현장 직원들과 감리단, 그리고 발주처인 부산시 공무원들까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예행연습과 함께 포스코건설은 1998년 2월 27일 국내 최초로 잭업다운 가설공법을 적용해 트러스교 설치에 성공했다. 1998년 11월과 2000년 10월에도 같은 공법을 적용해 트러스교 설치에 재차 성공함으로써 이 분야에서 다시 한 번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1995년 2월에 착공에 들어간 광안대교는 8년간의 긴 공사끝에 2003년 1월 6일, 마침내 개통됐다.7-1개통식에서 박주운 상무(당시 현장소장)가 대통령 표창인 산업포장을, 김남일 Director(당시 과장)가 발주처인 부산광역시로부터 시장상을 수상했다.

 

 #고육지책 인천공항고속도로, 민원도 두렵지 않다

실적도 없는데다 회사가 대형 건설사들에게 미운 털까지 박혀 토목 분야는 공공사업에서 그야말로 개점휴업 상태나 다름없었다. 건축처럼 자체 개발사업을 추진할 건수도 없었다. 건축이야 부지 확보해서 분양하고 그 자금으로 건물을 지으면 되지만, 토목은 사정이 달랐다. 도로, 철도, 항만 등의 토목사업은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SOC의 영역이었다.

기댈 수 있는 언덕은 오로지 포스코뿐이었다. 제철소가 바다를 끼고 있어 항만공사가 있었고, 제철소를 지을 때마다 부지조성 공사가 있었다. 가장 실속 있는 사업으로는 환경사업이 있었다. 포스코가 친환경을 강조하면서 프로젝트 물량이 많았고, 그 물량만 소화해내도 업계 1위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목을 한다고 말할 때 SOC사업을 빼놓고는 더 이상 논할 수 없다. 하지만 SOC는 공공사업이 대부분이었고, 실적을 요구했으며, 대형 건설사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더구나 견제까지 받다 보니 포스코건설에게 SOC는 진입장벽이 마천루처럼 높았다.

다행히 포스코건설이 출범할 때 민자SOC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정부는 민간 자금을 끌어들여 부족한 재정을 보완하고, 운영면에서는 민간의 창의와 효율을 활용하기 위해 1994년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자유치촉진법’을 제정했다. 이로써 공공사업의 전유물이었던 SOC사업에서 민자사업의 가능성이 열렸다. 포스코건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민자유치촉진법 첫 모델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민자사업으로 나왔다. 민자사업에서 돌파구를 찾은 포스코건설은 1995년 7월 대형 건설업체들이 구성한 컨소시엄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건설 전경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건설 전경

이 프로젝트는 인천국제공항~김포공항~올림픽대로를 연결하는 총 연장 40.2㎞의 6~8차선 자동차전용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사업이었으며, 총 사업비만 2조 62억 원이 투입된 매머드급 프로젝트였다. 포스코건설을 비롯해서 11개 국내 대형 건설회사가 참여해 도로 4개, 교량 3개 등 7개 구간으로 나누어 공사를 시행했다.

“우리가 맡은 3공구는 노선은 길지 않지만 서울시, 경기도, 인천시 등 3개의 행정구역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각종 인허가 및 민원이 다른 공구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어 공사 추진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특히 서울시 강서구 개화마을과 인천시 계양구 하야동의 주택가를 관통하는 바람에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면서 공사를 하느라 곤혹을 치렀다.” (박상곤 전 상무, 당시 현장소장)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고육지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구를 선정할 때 민원이 많고 3개 행정구역이 인접해 인허가 등 행정이 복잡한 곳을 선택했다. 특히 3공구는 다른 공구에 비해 교량, 터널 등 구조물 공사도 많아 대부분의 건설사가 꺼리던 구간이었다. 따라서 3공구의 선택은 실적 쌓기에 급급했던 그 시절의 애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었다.

3공구는 길이가 본선 5.473km와 지선 1.493km로 총 6.966km였으며, 450m의 개화육교 외 8개 교량과 988m의 개화터널이 주요 공사 대상이었다. 1995년 12월 착공에 들어간 포스코건설은 2000년 9월 30일, 착공 5년 만에 4개의 도로 구간 중 가장 먼저 공사를 종료함으로써 대형 SOC사업에서 우수한 프로젝트 관리능력을 입증했다.

2000년 11월 20일,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국내 1호 민자유치 SOC사업인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개통식이 열렸다. 포스코건설은 이 자리에서 철저한 공사 품질관리 등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단체표창을 수상했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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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4. 글로벌 시동, 플랜트 강점 살려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다        

# 신시장을 찾아 중국, 베트남으로 Go Go!

포스코건설이 출범하던 1990년대는 이데올로기 장벽이 붕괴하면서 소위 공산권이라고 불리던 북방국가에서 순풍이 불어왔다. 1992년 한국과 중국,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음으로써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들 국가들은 경제성장의 모델로 한국을 선택하고 한국기업들의 대대적인 투자를 희망해왔다.

포스코건설은 신생기업이었지만 출범 직후부터 해외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여건과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먼저 글로벌 영토 확장에 나서는 든든한 포스코가 있었고, 포스코건설의 전신인 거양개발과 PEC가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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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9.15 베트남 VPS 준공

포스코건설이 집중적으로 개척하고 들어간 시장은 중국과 베트남이었다. 거양개발과 PEC의 경우 베트남시장부터 개척에 나섰다. 거양개발은 1993년부터 비나파이프 건설공사를 수행하고 있었고, PEC는 VPS 압연공장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비나파이프는 1994년 7월에 준공됐고, VPS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바통을 이어받아 1995년 9월에 준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포스코건설은 베트남사업을 확대했다. 출범 직후 베트남 철강기업과 합작으로 포스리라마를 설립하고 철골공장을 건설했다.

제철 플랜트 외에도 거양개발은 자체 개발사업으로 건축사업을 추진했다. 호치민 중심지에 위치한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주상복합빌

딩인 다이아몬드플라자는 1995년 10월에 착공해 2000년 8월에 준공했다. 베트남에 이어 중국에서도 건축사업을 추진했는데, 상하이 중심지의 랜드마크인 포스플라자는 1996년 4월 착공에 들어가 1999년 1월에 준공됐다.

포스코건설 출범 직후 포스코의 주무대는 베트남보다는 중국이었다. 1992년 광양제철소 준공 이후 포스코는 증강된 생산능력을 소화할 만한 시장으로 세계의 공장 중국을 선택하고 집중 투자에 나섰다.

다롄 CGL, CCL 공장 전경

다롄 CGL, CCL 공장 전경

이집트 아르코 특수강공장 전경

이집트 아르코 특수강공장 전경

포스코건설은 포스코의 중국 진출에 따라 포스코 현지법인의 발주 물량을 기반으로 성공적으로 중국시장 개척에 성공했다. 중국시장 첫 프로젝트는 라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 CGL이었으며, 이어서 장쑤성(江蘇省) 장자강(張家港)에 진출해 CGL과 STS 플랜트를 수행했다.

중국, 베트남에 이어 포스코건설의 해외사업은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비롯해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와 브라질로 확대됐다. 이집트 아르코(ARCO) 프로젝트는 PEC가 개발한 사업이었다. 1993년 PEC는 아르코가 14만 톤 규모의 특수강 플랜트 건설을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1995년 2월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최저입찰자로 선정됐으나, 프로젝트 컨설팅을 맡은 일본의 NKK가 자격미달을 선언하고 포스코건설을 배제시켰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부당함을 호소했고, 우리 정부도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상황은 포스코건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시가 한-이집트 수교 직전이라 이집트정부가 부담을 느꼈고, 결국 무바라크 대통령이 재입찰을 지시했다. 더욱이 아르코는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 NKK를 컨설팅에서 제외시켰다. 재입찰 결과 1996년 1월 포스코건설은 아르코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베네수엘라 포스벤 공장 전경

베네수엘라 포스벤 공장 전경

베네수엘라 포스벤(POSVEN) 프로젝트도 PEC로부터 출발했다. 1994년 미국의 방산업체 레이시온이 미니밀 고철 대체원료인 HBI 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개발해 PEC에 사업추진을 제안해왔다. 당시 포스코가 2기의 미니밀 건설을 준비 중이어서 사업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마침내 1997년 1월 포스코를 최대주주로 하는 다국적기업 포스벤이 탄생했고,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사업관리와 엔지니어링 분야를 수주했다.

브라질 코브라스코(KOBRASCO) 프로젝트는 포스코 사업이었다. 포스코는 광양 5고로의 조업용 펠릿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1996년 3월 브라질 국영 철광석회사와 합작으로 코브라스코를 설립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설계와 설비공급을 맡았으며, 펠릿 공장은 1997년 7월 착공에 들어가 1998년 11월 준공됐다.

이처럼 포스코건설은 신생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제철 플랜트 강점을 십분 활용해 중국과 아시아를 넘어 저 멀리 북아프리카, 지구 끝 남아메리카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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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코브라스코 공장 전경

1998.11 브라질 코브라스코 준공식

1998.11 브라질 코브라스코 준공식

 

 

 

 

 

 

 

# 영일만 철강신화, 베트남에서도 통한다

“우리는 포스코와 박태준의 신도!”

1992년 도무오이 당시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말이다. 국가 쇄신을 위해 ‘도이모이’(베트남 개혁개방 정책)를 외쳤던 베트남이 경제성장 모델로 선택한 것은 한국식 경제개발과 포스코의 철강신화였다. 그들은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먼저 한국과 수교를 맺었고, 포스코를 첫 해외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들에게는 철강산업 육성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도무오이 서기장이 박태준 회장에게 철강산업 투자와 기술지원을 요청해옴에 따라 포스코도 베트남 진출을 준비했다. 1992년 3월 포스코는 베트남 정부와 철강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는 포스코의 베트남 투자가 임박했음을 시사하는 움직임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한 PEC는 조직을 갖추고 프로젝트 수주를 위한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프로젝트의 윤곽은 1993년 들어 더욱 구체화됐다. 1993년 1월 황경로 당시 포스코 회장이 철강산업 협력을 위해 베트남을 방문했다. 베트남 정부는 포스코의 투자결정에 강한 신뢰와 함께 다이아몬드플라자의 공동 추진을 제의해왔다. 다이아몬드플라자는 베트남 정부가 호치민시 중심부에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랜드마크 건축사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말레이시아의 젠팅그룹이 강한 의욕을 가지고 사업 참여를 희망했는데, 베트남 정부는 젠팅을 제치고 철강 프로젝트와 건축 프로젝트를 모두 포스코에 넘겼다. 그 결과 베트남 프로젝트는 원플러스원(1+1) 효과를 가져와 PEC가 철강 프로젝트를, 거양개발이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됐다.

포스코는 베트남과 철강협력 과정에서 베트남철강공사(VSC)와 함께 현지법인으로 VPS(VSC POSCO Steel Corporation)를 설립했다. 따라서 베트남 철강 프로젝트는 일명 VPS 프로젝트로, 7만 톤 규모의 철근과 6만 톤 규모의 선재를 비롯해 총 20만 톤 규모의 압연공장을 건설하는 제철 플랜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수주전에는 PEC 외에도 이탈리아의 다니엘리, 우리나라의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이 참여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PEC는 정확한 정보력과 오랜 준비, 그리고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1993년 11월 지명경쟁 입찰에서 국내외 경쟁사를 물리치고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PEC가 VPS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거양개발이 PEC로부터 시공 부문을 수주함으로써 엔지니어링과 건설을 대표하는 양대 패밀리사가 팀워크를 이뤄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됐다. 더욱이 두 회사의 합병으로 EPC 전문기업이 탄생하고, 이 기업이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함에 따라 VPS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처음으로 수행하는 해외사업이란 기록을 남겼다.

1994 베트남 VPS 착공식

1994 베트남 VPS 착공식

VPS 압연 플랜트는 가열로, 압연기, 정정설비의 주설비와 수전설비, 운송설비, 롤숍기기, 수처리 및 계장설비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였다. 1994년 4월 착공에 들어가 1995년 9월 완공됐다. 자국 내 최대 규모인 철강공장인 VPS 압연공장이 본격 가동에 들어감에 따라 베트남의 철강생산량은 연간 50만 톤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의 철강 수요는 연간 90만 톤에 육박했고, 개혁개방과 경제개발 정책에 따라 1996년 이후에는 그 수요가 150만 톤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이를 기회로 보고 베트남에 투자했다. 1994년 12월 베트남 건설성 산하 리라마와 철골 합작사업 계약을 체결하고, 1995년 6월 포스리라마 법인을 설립했다. 이어서 1995년 10월부터 철골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1996년 10월 준공된 포스리라마 철골공장은 총 부지면적 8만여 ㎡, 공장면적 1만여 ㎡에 용접기, 절단기, 프레스 등의 2차 가공제작 설비와 각종 운반장치, 중기, 시험장비 및 다양한 공구를 설치해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를 갖추었다.

공장 준공 이후 포스리라마는 도무오이 서기장이 현장을 방문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할 정도로 베트남 정부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았으며, 베트남 후알론 방직공장 건립공사의 1차 철골제작 설치공사 수주를 비롯해 철골, 배관, 탱크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해나갔다.

 

# 다이아몬드플라자, 도이모이의 상징이 되다

VPS 프로젝트가 포스코건설의 1호 해외사업이었다면 다이아몬드플라자는 해외 건축사업 1호에 해당되는 프로젝트였다.

1995년 4월 포스코건설은 베트남 철강공사 VSC와 합작으로 다이아몬드플라자의 건설과 운영을 위해 IBC(International Business Center)법인을 설립했다. 포스코건설이 투자자금을 출자하고, VSC가 토지를 현물 출자하는 조건이었다. 포스코건설이 40년간 임대 운영한 뒤 VSC에 지분을 무상으로 양도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1995년 10월 착공된 다이아몬드플라자는 지하 2층, 지상 20층 규모에 상가시설과 업무시설, 그리고 주거시설인 아파트로 구성된 복합건물이었다.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주상복합 건물이며, 건물 전체를 철골조로 제작함으로써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었다.

건축 분야 해외 첫 프로젝트였던 만큼 경험 미숙으로 인한 어려움이 많았다. 전반적으로 업무처리가 매끄럽지 못했고, 주요 설비자재를 한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데다 시공방법이 베트남과 상황이 달라 투자비가 상승하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선진기업들을 벤치마킹 하면서 차츰 시행착오를 줄여나갔다.

자금조달도 쉽지 않았다. 1996년 2월 차입을 통해 초기 건설자금은 확보했지만, 이후 베트남 리스크와 저팬 프리미엄에 따라 IBC의 자금 조달여건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이 지원에 나서 전액 지급보증을 함으로써 추가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분양과 준공 마무리였다.

“1998년 8월 1일, IBC 법인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다이아몬드플라자의 상가와 사무실, 그리고 아파트는 준공을 한 후 모두 임대 분양하기로 돼 있었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 게 가장 큰 임무였다. IMF 시절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본사에 있을 때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암 3기이니, 악성 종양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다 보니 호치민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문표 전 전무)

당시 다이아몬드플라자는 공정이 80% 정도 마무리되고 마지막 마감공사가 한창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분양이었다. 마케팅 에이전트인 BHP는 추진력이 부족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영국의 체스터톤으로 교체하고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적극적인 마케팅 결과, 아파트는 오픈 초기부터 인기를 끌어 금새 분양이 완료됐으며, 업무시설도 개관 초기 계약기준으로 입주율이 80%를 넘어섰다. 한국기업들의 의리가 대단했다. KOTRA, SK, 대한석유공사 등은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먼지가 풀풀 날리는 상황도 개의치 않고 즉시 입주해주었다.

그러나 상업시설 분양은 쉽지 않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포스코건설은 현지 자료조사를 통해 상가의 개념부터 재정립했다. 레이아웃과 운영방식을 현지에 맞게 수정했으며, 품질을 위해 인테리어 공사를 추가했다. 무엇보다 기존 개별분양 방식의 상가계획을 전면 수정해 백화점 방식으로 변경했다. 인테리어 공사는포스코건설이 직접 시공했다. 그 결과 베트남 첫 현대식 백화점이 탄생했으며, 준공 시점에서100% 임대 분양에 성공했다.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전경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전경

다이아몬드플라자는 호치민시 최고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옛 대통령궁과 노트르담 성당이 마주보고 있으며, 건물의 3면이 도로와 접한 사통팔달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2000년 8월 25일 준공된 이 복합건물은 미국·베트남 무역협정(2000.7.14), 베트남 증권거래소 개장(2000. 7.20) 등과 함께 베트남 경제개방 3대 상징으로 통한다.

다이아몬드플라자가 종합 준공되던 날, 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이 일대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는 주변 도로와 공원까지 점령했다. 도이모이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급기야 백화점 출입문을 통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사람들은 백화점 입구에 줄을 서 있다가 구경을 마치

2000.08 베트남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준공식

2000.08 베트남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준공식

고 나오는 사람 수만큼만 들어가야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다이아몬드플라자의 성공적 준공으로 포스코건설은 한류 전도사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국 건설의 수준 높은 기술을 베트남에 전파하는 민간외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베트남의 기준을 넘어 국제적 공사품질 관리기준을 준수하는 등 엄격한 시공관리를 통해 현지인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 결과 베트남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골든퀄리티메달(Golden Quality Medal)을 수상하기도 했다.

 

 

# 중국 철강시장에 표면처리 기술 우수성을 알리다

베트남이 도이모이를 외치며 외국 자본을 유혹하기 이전에 이미 중국은 흑묘백묘론(白猫黑猫論)을 앞세워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거대 중국의 이 같은 개혁개방 소식에 전 세계 자본이 앞다퉈 차이나 드림을 좇아 불나방처럼 모여들었다.

포스코와 포스코건설도 전략적 요충지로 중국을 선택하고 만리장성을 넘었다. 포스코의 경우 광양제철소 준공 이후 늘어난 생산물량을 소화해낼 만한 큰 시장이 필요했는데, 거대 시장 중국의 개방과 한중 수교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가 건축 분야까지 노렸다.

베트남 건축 프로젝트 추진으로 자신감을 얻은 포스코건설이 중국 내 건축시장 진출의 타깃으로 삼은 곳은 상하이였다. 당시 상하이는 개혁개방의 선두주자로, 가장 먼저 변신에 나섰다. 영국의 홍콩 반환을 앞두고 중국 정부는 상하이를 제2의 홍콩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으며,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푸동(浦東) 루자주이(陸家嘴) 지구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상하이는 외국인 투자유치가 봇물을 이뤄 점차 세계적 금융과 무역,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로 변모해갔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중국시장의 변화를 발 빠르게 읽어내고 한국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단독 투자에 나서 초고층빌딩인 포스플라자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94년 7월부터 사업추진 검토에 들어가 1994년 11월 상하이시와 토지매입 계약을 체결하고 50년간 토지사용권을 취득함에 따라 프로젝트 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건축 프로젝트에 순풍이 부는 가운데 포스코도 계획대로 중국 진출에 성공했다. 먼저 화북, 화동, 화남지역에 3대 거점을 삼각편대로 확보하고 점차 내륙으로 진출한다는 전략을 세웠으며, 그 첫 시작은 화동으로 정했다.

1995년 11월 중국 동북지역 CGL 수급 불균형을 기회로 삼아 랴오닝성 다롄에 컬러강판(CGL)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어서 1996년과 1997년에 장쑤성 장자강에 포항강판(CGL)과 포항불수강(STS) 현지법인을 각각 설립함으로써 화동지역에 코일센터로 구성된 복합 철강 생산단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상의 세 포스코 현지법인이 발주한 공사는 모두 포스코건설이 수주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다롄 CGL은 1995년 11월 착공, 1997년 9월 준공했다. 회사 내부에서는 사업 초기 경험이 부족하니 기본 엔지니어링을 선진기업에 맡기고 프로젝트를 추진하자는 일부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자신들만의 작품을 만들자는 의견이 더 많았으며, 결국 정예 인력을 구성하고 자력 엔지니어링을 실행에 옮겼다.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포스코건설은 경제적 설비 조달에 이어 35일의 공기단축 성과를 달성했다.

1996년 11월 착공, 1998년 5월 준공한 장자강 CGL은 일반 건자재는 물론 가전 용도의 고품질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로서, 중국 내에서 설비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철강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빈번하게 방문하는 CGL의 모범 사례로 인기를 끌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순수 자력 설계로 설비를 공급하고 성능 인증까지 수행함으로써 표면처리 분야 설계기술에 대한 경쟁력을 국제 철강시장에서 드높일 수 있었다.

1999.01.22 장자강 STS 준공식 석상에서 휘호

1999.01.22 장자강 STS 준공식 석상에서 휘호

1997년 2월 착공, 1999년 1월 준공한 장자강 STS는 사업 초기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 문화’라는 암초에 걸려 곤혹을 치렀다. 포스코건설은 만만디로 인한 업무 지연을 막기 위해 강한 의지로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했으며, 그 결과 오히려 착공에서 상용생산에 이르기까지 21개월의 짧은 공기로 중국 내 최대 STS 냉연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자체 기술력 향상은 물론, 국내외에서 다시 한 번 그 기술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중국 진출 이후 3개 제철 플랜트의 성공적 수행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장자강 항만 투자사업에 나섰다. 이 사업은 포스코건설이 수행하고 있던 바로 그 3개의 프로젝트들이 이용할 항만건설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1997년 8월 항만 건설을 위한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곧바로 건설공사에 들어가 1998년 7월에 준공했다.

이후 장자강 항만을 1년간 운영하다가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포스코 현지법인인 장자강 포항불수강에 매각했다. 비록 운영 1년에 그쳤지만 이 항만은 포스코건설이 해외에서 첫 SOC사업에 투자했다는 데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 상하이 포스플라자, 입주하려면 자격심사부터 받아라!

중국 내 제철 플랜트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상하이 건축 프로젝트 추진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토지사용권 취득에 이어 1995년 4월 한국은행으로부터 투자 승인을 획득했으며, 6월에는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후 포스플라자 건립을 위해 한국 건설사로는 처음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건설면허를 취득함으로써 향후에 중국 건축시장에 본격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1996년 2월 포스코건설은 중국 정부로부터 프로젝트의 초보설계비준서를 취득했다. 초보설계비준서는 중국의 건축 관련 법규상 착공 허가와 각종 인허가를 얻기 위해 필수적으로 취득해야 하는 사전심사로서 우리나라의 건축허가에 해당되며, 상세설계는 이 초보설계 비준내용을 기초로 해서 진행된다.

초보설계비준서 취득과 함께 건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건설공사에서 토목이나 골조공사는 현지업체가 수행했으나, 당시 중국의 설비기자재나 고급 마감재 기술수준이 부족해 불가피하게 많은 한국업체들이 설비기자재 공급과 시공에 참여했다. 강관파일 원자재와 철골소재는 포스코 제품을, 철근은 인천제철에서 수입했다. 외장 커튼월은 현대알미늄에서 공급과 함께 시공을 맡았다.

시공 과정에서는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파일 신공법을 현지업체와 공동으로 개발해 시공에 적용함으로써 상당한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이 공법은 신기술로 지정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건축 설계에 심혈을 기울였다.

“상하이는 참 역동적이다. 그러나 건물만 이야기하자면, 시골 처녀가 봄바람이 나서 도시로 나들이를 가고 있는 것 같다.”

포스플라자를 설계한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페이(I.M. Pei)의 말이다. 상하이의 건물이 겉으로 봤을 때는 아름다운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세련되지도 못하고 기능성도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페이의 설계에 따라 포스코건설은 미적인 요소와 함께 기능성을 강조했다. 이중바닥을 설치하고, 기둥 없는 사무공간을 구현했다. 또 중국에서는 최초로 스테인리스 마감재를 활용해 미려한 건물 외관을 완성했다.

포스플라자는 건설 과정에서 품질과 안전관련 수상실적도 12건이나 올렸다. 1997년 상반기 우수현장으로 선정됐으며, 1998년 상하이 건설위원회로부터도 우수현장으로 선정됐는데, 이는 외국기업으로서는 최초의 영광이었다.

중국 상해 포스플라자 전경

중국 상해 포스플라자 전경

1999년 9월 준공과 함께 마침내 지하 4층, 지상 34층 규모의 포스플라자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2000년 5월 포스플라자는 푸동개발 10주년을 맞아 21세기 사무환경에 걸맞는 공간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아 상하이시로부터 건축 금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초기 운영 과정에서는 임대가 잘 안 돼 고민도 많았다.

“포스플라자 완공 직전인 1999년 8월에 상하이로 발령받았다. 포스플라자는 ‘코리아 센터’라는 개념에서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기업을 상대로 임대사업을 하겠다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준공 때까지 입주율이 저조했다. 준공 2개월이 지나도 계약율이 8%에 불과했다.” (박래권 전 상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스플라자 법인은 독특한 전략을 펼쳤다. 기상천외한 입주조건을 내걸었다. 글로벌 500대 기업일 것, IT나 BT 업종일 것, 서양 회사일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면 특별 우대를 하고, 조건 충족에 따라 조금씩 차등을 둔다는 단서도 달았다.

그러자 상하이 부동산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부동산업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포스플라자는 품질에 자신이 있었다. 10년, 15년 앞을 내다보고 설계했으며, 주차장도 법정 규모가 345대인데 790대가 들어가도록 지었다. 사무실 공간도 매우 실용적이어서 같은 분양 평수라도 다른 건물보다 실 평수가 훨씬 더 나왔다. 이런 내용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등 포스플라자는 최고급 전략을 펼쳐나갔다.

효과는 마케팅 5개월만에 나타났다. 미국 컴퓨터의 대명사 컴팩이 들어왔다. 컴팩을 시작으로 GM과 독일상공회의소 등이 속속 입주했다. 뒤이어 코닥과 인텔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텔은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입주하지는 않았지만,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인텔이 OK할 정도로 IT환경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입주가 러시를 이뤘고, 2001년 말 마침내 완전 입주를 달성할 수 있었다.

1994년 말 출범 이후 3년간의 성적을 놓고 볼 때 신생기업 포스코건설은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 중국과 베트남을 시작으로 해외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으며, 그 영역은 아시아를 넘어 북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이르렀다. 국내사업에서도 최고 경쟁력을 확보한 제철 플랜트를 기반으로 건설업계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업계 순위 10위 이내에 진입하며 향후 폭풍 성장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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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1. “기술력으로 IMF 파고를 넘어라!”

# 축배를 들 찰라 불청객이 찾아오다

한보철강의 부도와 기아자동차의 경영위기 등 1997년은 출발부터가 다소 불안정했지만, 그렇다고 IMF 불청객이 찾아오리라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브레이크 없는 페달을 밟으며 대한민국은 경제성장이 영원하리라고 믿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마법에 푹 빠져 안개 자욱한 한치 앞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했다.

건설판에 뛰어든 지 3년차를 맞은 포스코건설 입장에서 1997년은 나름대로 선전한 한 해였다. 수주액이 전년도에 비해 다소 줄긴 했지만, 위축된 건설경기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시공능력 10위권에 진입하면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출범 3년 만에 성장기반을 확보하고 12월 1일 창립 3주년을 맞아 축배를 들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축제는 없었다. 불청객의 방문으로 냉혹한 IMF 외환위기 상황을 맞았다.

창립기념식 열흘 전인 11월 21일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막기 위해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했으며, 마침내 12월 3일 자금지원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이 사태를 맞아 온 국민이 절망했다. IMF의 요구조건 수행에 급급한 정부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한일합병과 같은 치욕을 느꼈다.

IMF 관리체제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금리와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는 바닥을 기었다. 책상을 빼는 것이 최선이라는 씁쓸한 구조조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M&A와 빅딜 등 기업들의 생사에 변화가 많았으며, 금융기관들도 구조조정으로 힘든 시절을 보냈다.

IMF 위기극복을 위한 대한민국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나라의 빚을 갚겠다고 온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이 같은 현상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아나바다 운동’이 펼쳐졌으며, 정부와 기업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IMF 위기극복에 온 역량을 쏟았다.

2001년 8월 23일, 마침내 모든 구제금융 빚을 상환하고 대한민국은 IMF 관리체제에서 졸업했다. IMF 위기극복과 함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금리와 환율은 안정을 찾았으며, 주가도 예전 수준으로 돌아왔다. 오히려 내실은 더욱 탄탄해졌다. IMF 위기 2년 만에 고성장, 저물가, 경상수지 흑자를 달성했으며, 기업들의 경쟁력이 크게 향상되면서 일자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IMF 위기를 극복하기까지 기업들은 부침이 많았다. 극동건설, 우성과 건영 같은 건설사들을 비롯해 많은 기업들이 청산과 매각 절차를 밟았다. 대우그룹은 공중 분해됐으며, 현대그룹은 계열 분리가 가속화됐다. 이 과정에서 건설업계 1·2위 기업이던 현대건설과 대우건설이 법정관리의 운명을 맞기도 했다.공기업들의 민영화도 급물살을 탔다. 그 과정에서 2000년 9월 포스코가 민영화됐다.

 

# 포스코 투자 중단으로 존폐 위기에 몰리다

IMF 위기를 맞아 믿고 의지했던 제철 플랜트 발주가 급감하면서 포스코건설은 크게 흔들렸다. 1997년 1조 8000억 원 규모의 수주액이 IMF 위기를 맞아 1998년에 4000억 원대로 뚝 떨어졌다. 제철 플랜트에 집중된 전략이 결국 족쇄로 작용하고 만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출범 직후부터 줄곧 이 문제를 우려하고 있었다. 포스코와 제철 플랜트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사업 포트폴리오 구성상 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건축과 토목 분야 사업 확대를 지속적으로 검토했지만, 시도가 쉽지 않았다. 경쟁사들의 견제와 포스코의 만류로 대외사업을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국가적 위기 사태를 맞아 포스코는 신규 투자를 연기하고 기존의 투자사업도 중단하기 시작했다.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5767억 원 규모의 광양 2미니밀 중단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포스코란 샘물의 고갈은 포스코건설을 기아로 내몰았다.

실적이 적어 사업추진 자체가 쉽지 않았던 토목과 건축 분야는 IMF 위기에도 기본을 유지했다. 그래 봤자 1000억 원 미만의 초라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건축이었다. 실적 부족으로 경쟁입찰 참여가 쉽지 않았던 포스코건설은 자체 개발사업 추진으로 건축 분야를 키워나갔다. 그러나 IMF 위기를 맞아 포스코처럼 투자를 축소하거나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손실이 발생했다.

거양개발 시절 운영하던 아스트론 공장

거양개발 시절 운영하던 아스트론 공장

포스코건설 역사에서 구조조정은 IMF 위기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1996년 포스코 차원에서 경영진단과 함께 구조조정이 실시됐는데, 이때 회사 출범 이전 거양개발에서 하던 철구공장과 아스트론공장을 매각했다. 인력도 260명이나 내보냈다.

IMF 위기를 맞아서는 희망퇴직의 형식으로 700여명을 감축했다. 사업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건축 분야가 벌여 논 자체 개발사업들을 정리했다. 대규모 복합단지 건립을 위한 분당 프로젝트 부지 매입계약을 해지했고, 하와이 콘도사업도 중단했다. 또 건설 중이던 가락동 IT벤처타운과 유성콘도 프로젝트 공사도 중단했다.

이 풍전등화의 시기에 박득표 회장이 사령탑을 맡았다. 1998년 6월부터 거센 파고에 흔들리는 함선의 키를 잡게 된 그는 기술경쟁력 확보를 강조했다. 감래(甘來)를 위해 어떻게든 견뎌야 하는 이 시기를 기술력 확보의 기회로 활용했다. 기술력 확보와 함께 그는 다음과 같이 과

공사가 중단되었던 가락동 프로젝트

공사가 중단되었던 가락동 프로젝트

감하게 결단했다.

“취임하기 바쁘게 경영현황 전반을 돌아보니, 한마디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절체절명의 아찔한 위기에 내몰려 있었다. 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회사의 존폐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1500여 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생계가 걸린 중대한 갈림길이었다. 포스코에서 나오는 제철플랜트만 할 것이냐, 제철플랜트와 정부발주공사, 주택사업 등을 모두 하는 명실상부한 종합건설업체로 나아갈 것이냐. 양자택일이 놓여 있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박득표 전 회장)

 

 

 

 

 

 

#종합기술계획 확정, 기술력으로 중무장하다

중장기 기술 마스터플랜 성격인 종합기술계획은 포스코건설만의 독특한 R&D활동이다. 이 활동은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출발했다. 포스코건설은 신생기업이지만 신생기업답지 않은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포항제철소 1기 설비의 착공 시점을 따진다면 1990년대에 이미 제철 플랜트 30년의 기술적 연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포스코건설만의 경쟁력이었다.

반면에 회사 출범 당시 국내 엔지니어링 분야는 용어 정의나 업무영역에 대한 개념 정립마저 애매모호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발전이나 석유화학 플랜트에 비해 제철 플랜트 분야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포스코건설은 이를 체계화하고 정리할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제철소 건설과 조업을 통해 축적된 기술들이 아직 다듬어지고 포장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현장에서 엔지니어들의 머릿속에서 빛을 발하면서 숨쉬고 있었다.

종합기술계획은 제철소 건설 경험기술을 바탕으로 기술전략과 달성목표를 설정하는 작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종합기술계획을 통해 주력사업을 선정하고 이를 중점 육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POSRI와 합동으로 ‘E&C 기술력진단’을 실시해 66건의 확보대상 기술을 발굴하고 전사기술 전략과제로 등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7년 10월 처음으로 종합기술계획을 수립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더 가져야 하며,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종합기술계획의 화두는 박득표 회장의 경영시기를 맞아 더욱 구체화됐다. 그는 IMF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경쟁력 강화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이며, 포스코건설의 경쟁력은 기술력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박득표 회장은 취임 직후 전 사업본부별로 본부장과 팀장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일일이 추진계획을 직접 보고 받고 방향을 설정하는 등 종합기술계획에 한층 더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최고경영자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R&D 요원들은 회사의 보유기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며, 또 확보해야 할 기술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찾아 정량화된 기술발전 목표를 설정했다. 그 결과물이 종합기술계획 롤링플랜과 보유기술집 94권, 그리고 보유기술의 수준과 발전계획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기술 레이아웃’이었다.

“1999년 11월에 발간된 ‘기술 레이아웃’은 R&D 요원들의 수 많은 토론과 아이디어의 결정체이며, 국내 최초의 ‘기술 로드맵’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성과물을 보고 받은 박득표 회장은 ‘즉시 포스코 최고경영진과 주요 부서에 성과물과 함께 설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를 보고 받은 포스코는 우리의 기술성과를 크게 격려했다.” (김현배 전 전무)

포스코건설은 이처럼 IMF 위기 때 R&D에 집중 투자하며 종합기술계획을 확정하는 등 기술력으로 중무장하고 내일을 준비했다. 이후 종합기술계획은 매년 롤링플랜을 거쳐 현재까지 포스코건설 보유기술의 기초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현장 엔지니어들의 머리에서 정리돼 정제된 종합기술계획은 지금까지도 제철 플랜트 분야의 바이블이 되고 있다.

 

#파이넥스, 철강 제조설비의 혁신을 불러오다

종합기술계획 수립을 통해 기술력 확보에 나선 포스코건설은 제철 플랜트 분야에서 고로, 노외정련, 연주, 표면처리, 파이넥스 분야를 5대 핵심사업으로 선정하고 기술개발에 나섰다. 그 중에서 파이넥스, 시험연주기 설비, 스트립 캐스팅 상용화 기술을 비롯해 표면처리 분야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했다.

파이넥스 공정개발은 제철소 내 환경오염 제거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1980년대 이후 환경운동이 본격화되고 전 세계에서 환경규제가 엄격해지면서 이 문제는 포스코를 비롯해 모든 선진 철강회사들의 고민거리였다. 특히 제선 공정에서는 철광석을 찌고(소결), 석탄을 굽는(코크스) 과정에서 환경오염이 발생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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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1.01 코렉스 공장 착공

코렉스 공장 전경

코렉스 공장 전경

파이넥스가 개발되기 전포스코는 기존 고로를 대체할 방안으로 용융환원 제철법을 선택하고 신제선 프로세스인 코렉스 도입을 추진했다. 코렉스는 소결과 코크스 공정을 생략할 수 있어 친환경적이었으며, 아울러 2개의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어 경제적이었다.

포스코는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알피네와 설비도입 계약을 체결하고 1993년 11월부터 설비 건설에 들어갔다. 코렉스 공장 건설은 포스코건설이 맡아 1995년 11월 차세대 혁신 제철기술로 불리던 용융환원 제철법을 적용한 60만톤급 신제선 공장을 성공적으로 준공했다.

그러나 코렉스 기법은 어딘가 아쉬움이 있었다. 고로공법의 소

코렉스 공장 공사 현장

코렉스 공장 공사 현장

결과 코크스 공정은 생략할 수 있었지만, 고로와 마찬가지로 값비싼 원료인 덩어리 상태의 철광석과 석탄을 사용했다. 또 공정 중에 발생하는 가루형태의 석탄을 처리해야 하는 단점도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스코와 푀스트알피네가 손을 잡았다. 코렉스와 마찬가지로 소결과 코크스를 생략하면서도 비교적 가격이 싼 가루형태의 철광석과 석탄을 사용할 수 있는 파이넥스 공정은 가루형태의 원료를 가공 없이 직접 사용해 쇳물을 생산함으로써 설비투자와 오염물질 배출을 대폭 줄일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친환경적 용융환원 제철법이었다.

우선 RIST 주도로 하루 15톤 생산 능력의 실험로 개발에 들어갔다. 실험로 개발을 통해 기술적 타당성과 경제성을 검증한 포스코는 이어서 하루 150톤 생산 규모의 파일럿 플랜트 개발에 착수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푀스트알피네가 기본설계를 담당하고, 포스코건설은 상세설계와 설비조달, 그리고 설치공사를 수행했다.

1998년 2월 착공에 들어간 이 프로젝트는 마지막 순간까지 설계변경이 잦았다. 따라서 공기 지연을 방지하고 효율적인 공정관리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포스코건설은 패스트 트랙 기법과 P3(공정관리시스템)를 이용한 CPM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건설 공기를 10일이나 단축했다. 또 기본설계 검토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내화물의 재질 변경 등을 통한 원가절감과 함께 타워 구조물 등 설계 오류를 사전에 제거함으로써 포스코와 푀스트알피네로부터 기술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파이넥스 파일럿 플랜트

파이넥스 파일럿 플랜트

1999년 8월 준공된 파이넥스 파일럿 플랜트는 이후 1년간의 시험조업을 통해 상업화 개발 가능성 검증에 성공했다. 포스코는 파일럿 플랜트의 성공에 힘입어 후속사업으로 준상업화 규모인 연산 60만톤의 데모 플랜트 개발에 들어갔다. 이 프로젝트 역시 포스코와 푀스트알피네가 손을 잡았으며, 더욱이 파일럿 플랜트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은 포스코건설도 일정부분 투자금을 분담하고 개발에 참여했다.

개발 과정에서는 포스코건설의 역할이 파일럿 플랜트 때보다 좀더 넓어졌다. 푀스트알피네가 기본설계를 담당하고, 포스코건설이 상세설계와 설비조달, 그리고 설치공사를 수행하는 등 기본 패턴은 같았다. 그러나 데모 플랜트를 구성하는 설비 중의 하나인 성형탄 제조설비에 대해서는 포스코건설이 기본설계를 포함해 개발과 건설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2001년 1월 착공에 들어간 데모 플랜트 공사는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수행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으며, 코렉스 노체 보수공사의 셧다운 작업을 75일간이나 수행하느라 이중고를 겪기도 했다. 더구나 2002년 12월부터 약 4개월간 포항지역에 30년 만의 혹한이 찾아온 데다 계속되는 야간작업으로 프로젝트 수행자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이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스코건설은 작업별 특별 안전관리 항목을 선정·운영함으로써 2002년 11월 무재해 100만 시간을 달성했다. 그리고 2003년 6월 마침내 성공적으로 파이넥스 데모 플랜트를 준공했다.

 

# DSR 슬래브 캐스터, 차세대 연주시장 주도하다

“주조 속도 4.1, 4.2, 4.3, 4.4, 4.5m/min!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각 공정 담당자들의 긴장된 얼굴은 서서히 환하게 변했고, 끝내는 환호하며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들의 눈가엔 지난 5년이라는 각고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2002년 12월 3일, 한국 철강사의 새 장을 연 역사적인 이 날은 우리나라가 순수 독자기술로 고속 연주기 개발에 성공한 날이었다.” (정인화 전 이사보, 당시 시험연주기PJT PM)

연속주조 설비는 제철 공정의 핵심설비 가운데 하나이며, 제강 공정에서 불순물을 제거한 용강을 일정한 형태로 굳혀 슬래브로 만들어내는 설비이다.

이 설비기술은 세계적으로 강재 생산량과 원료이용 효율 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술이지만, 우리나라는 설계 기술력이 취약해 선진 엔지니어링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기업들은 연주공정의 경쟁력 우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욕심에 기술이전을 꺼렸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조강 생산량 세계 6위, 조강 생산량 중 연속주조 설비로 제조되는 비율이 98.7%에 달하는 등 조업기술이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지만, 연속주조 설비기술의 취약은 아킬레스건이었다.

결국 1998년 정부는 연속주조 설비의 설계기술 확보를 국책과제로 삼고 포스코, 포스콘, 로템 등 총 11개 기업과 연구소, 대학 등으로 대단위 산학연 협력체제를 구성했다. 포스코건설도 이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포스코건설은 한국 고유 모델로 개발된 시험연주기 설비인 DSR 슬래브 캐스터의 꾸준한 시험조업을 통해 연주기의 내구성과 정비성(整備性)을 파악하고, 주조시험을 통해 설비 성능 및 주편 시험평가를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설비의 생산성이나 품질 면에서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우리나라는 슬래브 연속주조 설비의 엔지니어링 기술을 확보했으며, 이는 해외 기술종속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국내 제철소 연속주조 설비의 턴키 베이스 자력 엔지니어링 및 건설도 가능해졌으며,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수주해 국내업체의 고용창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반도 마련했다.

2004.06.04 포스트립 데모 플랜트 착공식

2004.06.04 포스트립 데모 플랜트 착공식

파이넥스, 시험연주기 설비와 마찬가지로 스트립 캐스팅 상용화 기술 확보를 위한 노력도 이 시기 중요한 성과 중 하나였다. 스트립 캐스팅 상용화 기술은 연주설비와 열연설비를 한 공정에 통합할 수 있는 차세대 기술로 각광받았다. 주조기에서 생산된 슬래브를 연속적으로 열간 압연기에서 압연해 열연 코일을 바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로, 꿈의 주조법이라고 불릴 만큼 혁신적인 공정이었다.

포스코는 스트립 캐스팅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소규모 파일럿을 이용해 40만 톤급 상업화 규모의 데모 플랜트 설비 건설을 결정하고, 그 설비명을 ‘포스트립(poStrip)’으로 정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투자예산이 부족해 사업 참여를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철 플랜트 E&C기업으로서 스트립 캐스팅 설비의 신기술 축적이 필요하다고 판단, 적자 여부를 떠나 프로젝트 수행에 참여했다.

포스트립 데모 플랜트는 2004년 6월 착공해 2006년 6월 준공했다. 이후 포스코와 포스코건설은 상업화를 위한 조업 테스트를 시행하면서 생산제품의 상용화를 실현해나갔다

 

# 마이다스아이티, 벤처신화 이룩하다

제철 플랜트 외에도 포스코건설은 환경사업, 에너지사업, SOC사업 등의 요소기술 개발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IMF 위기를 극복해나가던 새천년 초기에는 사회적으로 벤처 열풍이 일었는데, 이를 계기로 각 기업들은 사내 벤처제도를 두고 기술개발을 독려했다. 인터넷 통합검색 대표주자 네이버도 그렇게 탄생했다.

포스코건설도 이 시기 사내 벤처제도를 운영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토목건축 분야에서는 구조설계 및 해석 프로그램인 마이다스의 상용화에 성공했고, 환경 분야에서는 슬러지 고화제를 개발하던 ‘3R’이라는 사내 벤처가 있었다. 이 중 마이다스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벤처신화를 일궈냈다.

“마이다스 신화는 1992년 4월 대한건축학회 발표회장에서 마이다스를 이용한 철골조 초고층 아파트 건축설계에 관한 연구가 소개되면서 성공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저명한 구조 엔지니어가 당시 정명식 포스코 회장에게 ‘마이다스 프로그램이 좋으니 일반인들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이형우 마이다스아이티 사장)

마이다스 개발은 핵심기술에 대한 갈망에서 출발했다. PEC 시절 외국 의존에서 벗어나 핵심기술의 자체 개발을 갈망했던 이형우 사장 같은 구조 분야 엔지니어들이 뭉쳐 프로그램 개발에 나선 것이 발단이었다.

프로그램 개발은 PEC를 지나 포스코건설로 이어져 마침내 1996년 11월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 기술은 건설 분야의 국가 기술수준을 대변하는 척도로 평가될 정도로 중요한 기술인 만큼, 선진 몇몇 국가만이 상용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이다스는 건설 분야 설계기술 자립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핵심기술이었다.

마이다스는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유명한 포스코센터의 실무 프로젝트에 적용된 결과 신뢰성과 기능의 우수성이 확인됐으며, 특히 강구조 분야에 적용성이 뛰어나다는 전문가 평가를 받았다. 포스코건설은 1996년 11월 상용화를 기점으로 우수 건설기술 인력양성에 기여하고자 교육부와 공동으로 국내 150여개 대학 토목건축학과에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기증했으며, 마이다스가 다수의 대학에서 전산구조공학의 교과목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마이다스 조직은 마이다스센터라는 사내 벤처로 활동하다가 2000년 9월 포스마이다스로 독립했으며, 2001년 2월 지금의 상호인 마이다스아이티로 거듭났다. 이후 마이다스아이티는 미국, 일본, 중국, 인도, 영국 등지의 현지법인과 35개국의 전 세계 네트워크를 통해 110여개 국가에 공학 기술용 소프트웨어를 수출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건축, 토목, 지반 등의 분야에서 시장 점유율 세계 1위라는 선도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2000.9.1 포스마이다스 창립식

2000.9.1 포스마이다스 창립식

 

 

 

 

2-2

Story2. 건축 분야, 주택사업 성공 이어 도시개발 개척에 나서다        

# IMF 위기를 기회로 극복하는 지혜

“포스코개발 280억 날렸다.”

1998년 말 주요 언론에 치욕적인 기사가 떴다. IMF 파고에 흔들리는 포스코건설의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 프로젝트 토지 계약을 해지함에 따라 계약금 280억 원을 포기해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국내 토지거래 사상 최대 규모의 위약금이었다. 당시로서는 280억 원을 포기하는 것이 중도금 2500억 원이 묶이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에서 내린 최고경영자의 참담한 심정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그 뒤끝은 씁쓸했다. 엄청난 금전적 손실에 뼈아픈 좌절을 맛보았다.

분당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출범 직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개발사업이었다. 1995년 중순 포스코건설은 신도시 건설이 추진되고 있던 분당에 대규모 레저타운을 조성하고 유통사업에 진출한다는, 이른바 분당 프로젝트 계획을 수립했다.

먼저 한국토지공사(현 LH공사)로부터 경기도 성남시 정자동 분당 신도시 일대의 부지 48만 2535 ㎡를 2808억 원에 매입하기로 하고 계약금 280억 원을 지불했다. 포스코건설은 사업비 4조원을 투입해 실내경기장을 비롯 쇼핑레저단지, 유원지 등을 조성하고, 1997년 중 공사에 들어가 1999년 말까지 완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97년 인근에 대형 유통센터들이 개점하는 바람에 수익성 확보가 어렵게 된데다 부동산 경기마저 침체돼 사업추진이 쉽지 않았다. 결국 IMF 한파라는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나 분당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말았다.

비록 분당 프로젝트의 좌초로 큰 시련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IMF 외환위기 시절 이만한 고통을 겪지 않은 기업은 별로 없었다. 포스코건설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불굴의 의지로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탄탄한 재무구조를 갖추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IMF 관리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보유 부동산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향후 진로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소위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핵심역량을 강화하는 보수적 경영을 할 것인지, 허허벌판 영일만에 제철공장을 짓듯 계속 꿈을 이어나갈 것인지 창사 이래 최대 고민에 빠졌다.

도곡동 포스코트 모델하우스 개관

도곡동 포스코트 모델하우스 개관

결단의 순간 최고경영층은 기술중시 경영과 함께 공격경영을 선언했다. 핵심역량인 제철 플랜트뿐 아니라 건축과 토목사업을 확장해 명실상부한 종합건설업 체제를 갖춰나가기로 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공격경영의 결단을 내릴 때, 위기의 신은 기회의 신으로 변신했다. 치욕을 안겼던 IMF 파고가 위기에서 기회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포스코는 재무구조 개선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에 대규모 증자를 실시했으며, 이로써 포스코건설은 탄탄한 재무구조를 갖추었다. 더욱이 포스코 패밀리라는 프리미엄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던 대형 건설사들 사이에서 포스코건설이 매력적인 파트너로 부상했다.

공격경영을 선언한 포스코건설은 보유 부동산 처분 과정에서 서울 강남구 도곡동과 삼성동 부지를 아파트로 개발했다. 이것이 폭풍 성장의 신호탄이 됐다. 꿈을 포기하지 않은 최고경영자의 단호한 결단과 주택사업 진출은 오늘날 포스코건설이 주택시장에서 강자로 우뚝 서게 된 단초이기도 했다.

“우리 회사 성장은 건축부문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출범 직후에는 철강 플랜트가 회사의 성장을 견인해왔지만, IMF 관리체제 직후에는 수주가 급락하는 위기상황에서 회사를 구해준 것이 건축부문이었다.”(박동진 전 부사장)

포스코건설은 1999년 10월 서울 강남구 도곡동 포스코트의 분양을 무사히 마침으로써 비로소 주택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회사 역사상 최초의 일반분양 아파트인 도곡동 포스코트는 부동산 투자심리가 극도로 위축된 상황에서도 분양 당시 초기 계약률 100%를 달성했다. 이어 2000년 10월 분양한 삼성동 포스코트는 25대 1의 청약 경쟁률을 기록하며 주택사업의 성공을 암시했다. 포스코건설은 도곡동과 삼성동 포스코트의 성공적 분양으로 지난 상처를 치유하고 주택사업에 강한 자신감을 얻었다.

도곡동 포스코트 외부 전경

도곡동 포스코트 외부 전경

 

 

 

 

 

 

 

 

# “큰 나무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2002.08.01 암사동 포스파크 입주자 사전점검

2002.08.01 암사동 포스파크 입주자 사전점검

일반분양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포스코건설의 보폭은 더욱 빨라졌다. 다음 타깃은 당시 주택사업의 꽃이라 불리던 재건축사업이었다. 주택사업의 노른자위인 만큼 재건축사업은 대형 건설사들의 전유물이었다. 그 만큼 빈틈이 없고 진입장벽이 높았다.

그러나 IMF 위기는 기회였다. 대형 건설사들의 부실한 재무구조는 국민들에게 심한 걱정을 안겼다. 반면 포스코건설의 풍부한 자금력과 탄탄한 재무구조는 고객들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불러왔다.

최초의 재건축아파트는 2000년 7월 분양한 서울 강동구 암사동 한강 포스파크였다. 암사동 포스파크는 소규모였으나 주택조합에서 직접 찾아와 재건축을 요청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포스코건설 입장에서는 재건축사업에서 기초체력을 다지는 좋은 보양식이기도 했다.

암사동 포스파크로 자신감을 얻은 포스코건설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동아아파트 재건축에서 새로운 신화를 써나갔다. 당시 경쟁 상대는 재건축시장 선두주자인 GS건설이었다. 초보나 다름없던 포스코건설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경쟁자였다. 건설업계 역시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고 치부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사업 수주 전 대치동 동아아파트

사업 수주 전 대치동 동아아파트

그러나 포스코건설에게는 꿈이 있었고, 불굴의 의지가 있었고, 창의적 도전이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진솔한 마음으로 조합원들에게 다가섰고, 현실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10개월 공들인 경쟁사의 전략보다 포스코건설만의 단 일주일의 차별화 전략에 조합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동아아파트는 포스코센터 뒤편에 위치하고 있어 포스코 프리미엄이 어느 정도 작용했으며, 포스코건설의 홍보전략도 파급효과가 컸다.

“홍보 콘셉트를 ‘큰 나무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로 잡고, 고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재산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어디냐?’를 판단하게 하자는 철저한 차별화 전략을 내세웠다. 당시 ‘건설회사의 IMF는 이제부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기가 바닥을 기고 있던 시점이라 이 전략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조용경 전 부사장)

2000년 10월 17일. 10개월 공든 탑이 무너졌고, 거인 골리앗이 소년 다윗의 물맷돌을 맞고 쓰러졌다. 조합원 투표 결과 압도적인 표차로 포스코건설이 대치동 동아아파트 재건축사업을 수주했다. 이 사건은 주택사업의 후발주자였던 신생기업이 대형 건설사의 콧대를 꺾으면서 일부 대기업이 독점해오던 재건축시장을 무한 경쟁체제로 변모시킨 파란으로 받아들여졌다. 완전히 자존심을 회복한 포스코건설은 일약 주택건설의 다크호스로 떠오르며 재건축시장의 강자로 부상했다.

2001.05.02 동아아파트 본계약 체결

2001.05.02 동아아파트 본계약 체결

동아아파트를 재건축해 탄생한 대치동 the# 아파트

동아아파트를 재건축해 탄생한 대치동 the# 아파트

 

 

 

 

 

 

 

 

 

# 달라진 위상 함께 일 합시다

도곡동과 삼성동 포스파크의 일반분양 성공에 이어 대치동 동아아파트 재건축 수주로 포스코건설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더 이상 소년 다윗이 아니라 대형 건설사들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청년 다윗으로 성장했다.

대치동 동아아파트 재건축 수주 이후 포스코건설은 분당 프로젝트의 치욕을 되갚을 기회를 잡게 된다. 그 동안 분당 프로젝트는 그 용도가 변경돼 있었다. 유원지와 레저단지 조성용이었으나, IMF 직후 부동산 침체기를 맞아 주택경기 활성화 차원에서 일부 부지가 택지로 용도가 변경됐다.

택지로 용도 변경된 부지를 불하받은 시행사는 현대건설에 시공을 의뢰했으나, 당시 유동성 위기를 겪던 현대건설은 사업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결국 사업추진을 포기했다. 그러자 시행사가 이번에는 재무구조가 튼튼한 포스코건설에 시공을 의뢰한 것이었다.

“분당 파크뷰는 우리의 잊지 못할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찬스였다. 당시 부동산시장의 민감한 변화와 국내경제 상황을 철저히 분석해 본 결과 나는 이 사업의 성공을 확신했다. 더 나아가 이 사업을 통해 포스코건설이 일반건설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대외에 공식적으로 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박득표 전 회장)

그러나 지난 악몽을 떨치고 사업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시공 경험이 부족해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거기에다 당시 부동산 경기가 워낙 좋지 않아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낙관할 수 없었다.

거듭되는 고뇌 끝에 마침내 사업 참여를 결정했다. 포스코건설은 원대한 꿈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마인드 컨트롤했으며, 무엇보다 자신들의 불굴의 의지를 믿었다. 대신 만약에 발생할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SK건설을 파트너로 끌어들였다.

분당 파크뷰 전경

분당 파크뷰 전경

분당 파크뷰 단지 내부 전경

분당 파크뷰 단지 내부 전경

포스코건설이 SK건설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대형 주택건설사 중에서 SK건설이 주택시공 물량이 가장 적어 그만큼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스코건설과 SK건설의 만남으로 분당 프로젝트의 공식 명칭은 ‘파크뷰’로 정해졌다. 파크뷰는 포스코건설의 포스파크와 SK건설의 SK뷰를 합성한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의 예상은 적중했다. 2001년 3월 경기도 성남시 분당 파크뷰 분양은 개장 2시간 만에 계약이 완료됐으며, 경쟁 분양된 고층부도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분당 파크뷰의 성공적 분양을 두고 당시 언론에서는 ‘침체된 국내 부동산시장을 되살렸다’고 높이 평가했다.

포스코건설의 탄탄한 재무구조는 대형 건설사들이 공동사업을 제안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 2001년경 현대건설이 제안한 경기도 용인 죽전 포스홈타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포스홈타운은 포스코건설의 포스코트와 현대건설의 주택 브랜드 홈타운을 합성한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현대건설과 공동사업 추진 과정에서 공동이행 방식을 요구했다.

포스코건설은 일반적인 형태인 이름을 빌려주고 은행 대출을 받게 함으로써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으로는 발전이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공동이행 방식으로 시공한 죽전 포스홈타운은 현대건설의 앞선 경험과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포스코건설은 이처럼 주택건설의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하면서 대형 주택건설사로 차츰 도약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용인 죽전 포스홈타운

경기도 용인 죽전 포스홈타운

 

# 부산 센텀파크, 건대 스타시티 더샵 브랜드 시대 열다

분당 파크뷰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포스코건설의 위상은 몰라보게 높아졌다. 위상이 높아진 만큼 그에 어울리는 새 옷이 필요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2002년 3월 포스코건설은 더샵(the#)을 세상에 선보였다. 더샵 브랜드 시대 개막은 도약의 신호탄이었다.

더샵은 부산 해운대 센텀파크와 강북 최대의 주상복합 아파트 스타시티를 탄생시키며 포스코건설을 주택건설 강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2002.03.22 부산 센텀파크 계약 체결

2002.03.22 부산 센텀파크 계약 체결

더샵 센텀파크 공사 현장

더샵 센텀파크 공사 현장

센텀파크는 부산 해운대구에 있던 수영비행장 자리에 들어서는 ‘센텀시티’ 내의 10만여 ㎡ 주거단지에 100~200㎡대로 구성된 3750세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단독으로 건설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센텀시티는 부산광역시가 디지털 시대에 발맞춰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21세기형 첨단 지식형 산업단지로, 당시 디지털 미디어 단지, 테마파크, 도심형 위락단지, 첨단 산업시설과 유통 및 편의시설 등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특히 이곳은 2001년 5월 국내 최대 규모의 컨벤션센터인 BEXCO가 개관돼 국제 모터쇼가 열렸으며, 12월에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조 추첨식이 거행돼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센텀파크는 분양 전부터 부산지역의 주거문화를 바꾸게 될 랜드마크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예상대로 분양은 대박이었다. 2002년 5월 2752가구의 1차 분양 당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모델하우스를 개관한 5월 17일부터 일요일인 19일까지 단 3일만에 무려 3만 5000여 명이나 방문했다. 이는 부산의 아파트 분양 사상 최고의 기록이었다. 센텀파크를 계기로 이후 부산의 아파트 대표 브랜드는 더샵으로 통했다.

더샵 스타시티 공사 현장

더샵 스타시티 공사 현장

서울 광진구 건국대 개발사업(더샵 스타시티)의 수주는 더샵이 주택 대표 브랜드로 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애초 경쟁순위에서 밀려 입찰 참가자격이 없었으나, 건국대 재단측의 요청으로 갑자기 참가하게 됐다. 건국대 재단은 국내 건설업체 중 재무구조가 가장 양호한 포스코건설을 배제할 수 없다는 논리로 건설사들의 반발을 잠재웠다.

서울에서 더 이상 그만한 입지가 없다는 판단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다. 건국대 개발사업은 포스코건설이 처음 겪어보는 민간사업이었다. 사업구도 자체도 굉장히 복잡하고 난해했다. 9개 대형 건설사 사이에서 포스코건설이 선전하기에는 여건이 여간 녹녹치 않았다. 그래도 포스코건설은 더샵을 기치로 총력전을 펼쳤다.

“우리가 건대 측에 제시한 분양가는 경쟁사들과 비슷했지만, 차이는 바로 임대시설에서 나타났다.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임대료를 보장해주기로 결정해 높은 입찰가를 제시했다.”(조남훈 전 상무)

결국 2002년 8월 포스코건설은 건국대 개발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센텀파크에 이어 스타시티 더샵의 탄생은 포스코건설 주택사업 도약의 기폭제였다.

청약 당시 더샵 스타시티에 몰린 인파

청약 당시 더샵 스타시티에 몰린 인파

건대스타시티 개발 약정식

건대스타시티 개발 약정식

 

 

 

 

 

 

 

 

 

# 민영화 모범사례, 포스코건설 신화 바통을 잡아라

주택사업 본격화 5년 만에 이룩한 포스코건설의 성과에 언론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중앙일보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03년 12월 30일자에 공기업 민영화 모범사례로 ‘포스코건설 신화 바통을 잡아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파크뷰를 통해 성공적으로 데뷔한 포스코건설은 2002년에 아파트 브랜드 더샵을 내놓으면서 부동산시장에 안착했다. 포스코건설의 수주액은 연간 2조 9000여억 원, 매출 1조 4880억 원이며 시공능력 기준으로 당당히 건설업계 7위에 올라있다. 불과 2~3년의 업력(業力)치고는 결코 만만치 않은 성적이다”

‘이코노미스트’는 포스코건설의 성공요인을 ‘믿을 수 있는 브랜드 신뢰도’라고 평가했다. 특히 IMF 이후 건설업체의 줄도산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거둔 것은 ‘경제가 불안해지면서 민영기업보다는 민영화된 공기업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도가 더욱 커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주택 브랜드 더샵의 성장은 포스코의 기업이미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실 포스코는 건설업 특성상 포스코건설이 오랫동안 쌓아온 포스코의 좋은 이미지에 손상을 입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해 고학봉 전 사장은 포스코건설이야말로 포스코그룹의 좋은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첨병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는 회사라고 말한다.

“포스코건설은 2004년부터 매년 1만 세대 가까운 주택을 준공해 고객을 입주시키고 있다. 이는 매년 포스코라는 브랜드를 강력하게 인식하는 4만 명 이상의 고객이 생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포스코건설이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고객만족을 위한 세심한 경영을 펼쳐나간다면 고객과 가까운 친숙한 기업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포스코의 의도는 포스코건설을 통해 그 효과가 크게 발휘될 것이다.”(고학봉 전 사장)

 

# 당당하게 외부사업 경쟁에 나서다

주택부문의 성공으로 포스코건설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더구나 재무구조가 탄탄한 우량기업이라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건축과 토목 분야가 처음으로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포스코의 민영화로 경쟁사들의 견제도 훨씬 줄어들었다. 오히려 재무구조와 능력을 믿고 같이 일해보자고 찾아올 정도로 업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회사 출범 당시에는 건축과 토목이 통합된 토건사업본부로 있었으나, 일감이 늘어남에 따라 2002년에 건축사업본부로 분리됐다. 초창기에는 토건사업본부에 100여명의 인력이 있었으나, 2004년엔 건축사업본부에만 400여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80% 가량은 외부에서 영입한 인력이었다. 그만큼 자체적으로 인력을 양성할 틈도 없이 건축 분야가 급속히 성장했다.” (박동진 전 부사장)

2004.07.19 용인동백 쥬네브 쇼핑몰 착공식

2004.07.19 용인동백 쥬네브 쇼핑몰 착공식

2003.2.12 부산 피에스타 착공식

2003.2.12 부산 피에스타 착공식

주택사업의 영향으로 건축 분야는 인원도 많이 늘고 사업도 크게 활성화됐다. 출범 초기 경쟁사들의 견제를 피해 자체사업과 포스코 물량에 의존하던 때와는 달리 IMF 위기를 맞아 외부사업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 성공 요인이었다.

건축 분야는 주택사업 외에도 민간과 공공부문에서 다양한 실적을 쌓았다. 분당벤처타운(2002.3~2005.8)은 성남시가 발주한 민자제안 사업으로 벤처시설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다. 기존의

2003.08.01 용두동 한방천하 착공식

2003.08.01 용두동 한방천하 착공식

벤처밸리가 자연발생적이고 비체계적인 구조를 지녔다면 분당벤처타운은 업무와 주거, 휴식과 비즈니스, 레저 등의 모든 벤처 관련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복합 벤처타운이었다. 한국토지공사(현 LH공사) 민자사업으로는 용인동백쇼핑몰(2004.7~2006.7)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부산에서는 센텀파크의 명성을 등에 업고 서면 중심부에 아이온시티(2002.9~2005.6), 피에스타(2003.3~2006.3) 등의 대형 상업시설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이 지역에서의 지명도를 더욱 높였다. 용두동 한방천하(2003.8~2006.10)는 도심 재개발공사이며, 상가와 업무시설로 구성된 주상복합 빌딩이었다.

포스코건설은 공공건축에서도 선전했다. 늘 실적이 없어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주택사업 성공에 용기를 얻어 공공건축에 과감히 도전했다.

경북 봉화군 청사(2001.11~2003.12)는 포스코건설이 자력으로 조달청 발주공사 입찰에 참여해서 수주한 최초의 건축 관급공사였다. 최초의 공공 턴키는 경남 김해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2003.11~2005.7)였다. 건축 분야에서의 턴키 수주는 업계 빅3가 아성을 구축하고 있어

경북 봉화군 청사 전경

경북 봉화군 청사 전경

다른 건설사가 뚫고 들어가기는 매우 힘든 여건이었으나, 포스코건설이 2001년 12월 대형 건설사들을 제치고 최종 낙찰자로 선정됐다. 2004년에는 최초의 병원공사인 서울시립 아동병원 증개축 공사를 턴키로 수주하기도 했다.

이 시기 오피스텔 브랜드로는 포스빌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서울 광진구의 건대역 한림 포스빌을 비롯해 당산역 한강 포스빌, 분당 포스빌, 신도림역 포스빌, 천안 신부동 포스빌 등이 있었다.

 

 

 

 

최초의 병원공사인 서울시립 어린이병원 증개축 공사 조감도

최초의 병원공사인 서울시립 어린이병원 증개축 공사 조감도

신도림역 포스빌 전경

신도림역 포스빌 전경

 

 

 

 

 

 

 

 

# 미래형 도시개발에서 향후 10년 먹거리를 캐내다

주택사업 성공 이후 건축 분야는 도시개발 사업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섰다. 2000년대 들어 조직과 전략의 변화를 살펴보면, 조직에서는 2002년 3월 토건사업본부에서 처음으로 순수 건축사업본부로 독립했다.

전략에서는 주택사업 성공을 기반으로 좀더 원대한 포부를 그려나갔다. 포스코건설은 대형 건설사처럼 똑같이 해서는 그들을 앞서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국민기업 포스코의 이미지를 더욱더 살려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사업을 발굴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차원에서 난개발과 나홀로 개발을 지양하고, 포항과 광양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듯이 새로운 개발사업을 발굴하는데 역량을 집중해나갔다. 포스코건설의 대표적 국가적 사명의 개발사업 중 하나가 바로 송도국제도시 개발이었다.

“송도국제도시 개발은 IMF 여파로 큰 타격을 입었다. 2001년경 최기선 전 인천시장과 포스코건설 경영층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날 최 전 시장은 포스코건설이 송도 개발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이 만남이 결과적으로 오늘의 송도국제도시를 태동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이문표 전 전무)

인천시의 요청에 포스코건설은 제철보국의 사명감으로 송도 개발 참여를 결단했으며, 2001년 7월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인천광역시, 게일사 3자간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을 위한 MOU가 체결됐다. 이어서 포스코건설과 게일사는 2002년 4월 합작법인인 ‘송도국제도시개발 유한회사(NSIC)’를 설립하고 약 127억 달러를 유치해 개발하는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송도신도시 국제비즈니스타운 조감도

송도신도시 국제비즈니스타운 조감도

127억 달러라면 한화로는 16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포스코건설은 송도 개발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향후 10년의 먹거리를 확보한 셈이었다.

그러나 송도 개발의 결단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IMF 위기로 모든 대형 건설사들이 인천시의 러브콜을 외면할 때 포스코건설은 제철보국의 정신으로 모두가 우려하던 위험부담을 떠안았다. 포스코건설은 포항과 광양에 이어 인천 송도에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송도 개발에 뛰어들었다.

포스코건설이 송도 개발의 결심을 굳힐 때 국내에서는 공모형 복합개발 PF사업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정부는 공공기간 주도의 개발사업에서 벗어나 공공-민간 복합개발을 확대했다. 공공기관 주도의 수도권 신도시개발 과정에서 인프라가 제때 갖춰지지 못했던 점을 보완한 것이었다. 공공과 민간이 노하우와 아이디어를 공유한 결과 주택 단지조성과 편의시설 인프라가 제때 갖춰짐으로써 지역주민의 삶의 질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2004.3.3 화성 동탄 복합단지 PF사업 계약식

2004.3.3 화성 동탄 복합단지 PF사업 계약식

공모형 PF사업 추진에 앞장섰던 대표적 공공기관은 한국토지공사(현 LH공사)였으며, 대표적 프로젝트로는 동탄 복합단지 PF사업이 있었다. 이 사업에 포스코건설이 참여해 2003년 12월 경기도 화성시 동탄메타폴리스 개발사업을 수주했다.

이 사업은 당시로는 단일 프로젝트 국내 최대 규모의 개발사업이란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총 사업비가 1조 5000억 원 규모였으며, 연면적 약 80만 m², 최고 지상 66층, 최고 높이 275m의 규모에 미디어센터를 비롯해 대형 복합단지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였다. 8개 대형 컨소시엄이 참여했으며, 치열한 경쟁을 뚫고 포스코건설이 컨소시엄의 주간사로서 이 사업의 민간사업자로 선정됐다.

동탄 신도시 개발사업은 포스코건설의 능력을 과시하는 시험대라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2003년 6월부터 포스코건설은 총 4만여 호가 들어설 동탄 신도시의 부지조성공사를 수행했다. 또 2004년 7월 분양한 시범단지를 시작으로 2008년까지 총 2000세대에 이르는 아파트 건설물량을 확보했으며, 무엇보다 신도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탄메타폴리스 건설사업을 추진하면서 동탄 신도시 개발사업을 주도했다.

 

경기도 화성 동탄 메타폴리스

경기도 화성 동탄 메타폴리스

2-3

Story3. 토목 분야, 경전철과 SOC사업에 역량을 집중하다

# 출혈을 무릅쓰고 턴키시장을 공략하다

건축 분야가 비약적 성장을 이룩한 반면 토목 분야는 쉽게 기지개를 펴지 못했다. 도로와 교량부문에서는 광안대교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빼고는 1999년까지 이렇다 할 실적이 없었다. 포스코 발주공사이거나 지역 연고의 포항시 공사, 그리고 회원사로 2~3건의 고속도로 공사에 참여한 것이 고작이었다.

“우리 회사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철강 분야의 기술을 고도화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회사의 균형 발전을 위해서는 토목 분야가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의 성장을 해야만 한다. 어쩌면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이 토목환경 분야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이장오 전 부사장)

2004년에 이장오 전 부사장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처럼 토목 분야는 어떻게든 회사의 균형 발전에 기여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이 같은 균형 발전의 각오를 새롭게 다진 해가 바로 1999년이었다. 기회가 좋았다. 1999년 관급 토목공사의 발주제도가 PQ 방식이나 턴키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재무상태가 우량한 포스코건설의 입지가 넓어졌다.

2006.12.13 경부고속도로 확장 개통식(김천-영동

2006.12.13 경부고속도로 확장 개통식(김천-영동

최초로 단독 수주한 관급공사인 서천~공주간 고속도로 공사전경

최초로 단독 수주한 관급공사인 서천~공주간 고속도로

좋은 기회가 오자 회사가 토목사업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경쟁사들의 견제가 사라진 만큼 더 이상 강구조개발본부로 위장할 필요가 없어 1999년 1월 토건사업본부로 환원시켰다. 무엇보다 수익성 위주의 안정적인 운영방식에서 벗어나 양적 확대를 위해 과감하게 공격적으로 턴키시장에 도전했다. 토목 요원들은 PQ 방식에 의한 최저가 입찰에도 몸을 사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회사는 일정 수준의 실적이 쌓일 때까지 최저가 출혈을 감내해내기로 하고 위험분담금 확보를 위해 전략수주펀드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수주한 것이 서천~공주간 고속도로 4공구와 김천~영동간 확장 2공구였다. 서천~공주간 4공구(2001.12~2009.9)는 포스코건설이 관급 공사를 단독으로 수주한 최초의 공사라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공사 과정에서는 집단민원으로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민원의 원인은 부여백제휴게소 부지 내에 포함된 마을 보호수 때문이었다. 이 보호수를 살리기 위해 4년에 걸쳐 설계가 변경됐다. 이로 인해 공정추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결국 보호수를 보존할 수 있게 돼 지역주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었으며, 그 결과 이후 공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품질에 역점을 둬 준공 후 서천~공주간 고속도로 중 노면 평탄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문중옥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경부고속도로 김천~영동간 확장 2공구(2001.12~2006.12)는 포스코건설이 50%의 지분을 가진 주간사로서 코오롱건설, 지역 건설업체인 일양건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수주한 것이었다. 이 공사는 포스코건설이 처음으로 고속도로 확장공사에 참여했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신설 도로와는 달리 기존의 교통량을 처리하면서 시공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공사였다. 2002년엔 태풍 루사로, 2004년에 폭설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런 자연재해 때마다 현장 요원들이 대민봉사에 나서 주민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얻었다.

“도로 확장 과정에서 이 구간에 포함된 8개의 교량들도 똑같은 확장 넓이로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특히 철도가 통과하는 교량은 열차가 다니지 않는 새벽에 공사가 진행됐다. 교량에 설치될 빔을 운반하는 작업은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운행되고 있는 도로를 전면 차단할 수 없어 시나리오를 시간대별로 짜 도로 이용자들이 아무것도 모를 정도로 감쪽같이 해치웠다.”(윤인섭 전 이사보, 당시 현장소장)

 

# 국내 최초 민자사업 인천국제공항철도 건설 참여
인천국제공항철도 기공식

인천국제공항철도 기공식

턴키공사와 함께 민자사업에서도 성과를 얻었다. 철도 부문 국내 최초의 민자사업인 인천국제공항철도 건설에 참여했다.이 프로젝트는 우연하게 기회가 찾아왔다. 2001년 4월부터 시작되는 1단계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던 일본 스미토모은행이 정부와의 협상과정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돌연 불참을 선언했다. 이에 정부가 포스코건설에게 컨소시엄 참여를 요청해와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공사현장 배정 과정에서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민자사업 경험이 빛을 발했다. 포스코건설은 수익성과 시공성, 그리고 민원 등을 고려해 지원도시에서 인천국제공항 방향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선택해 1-4공구를 배정받았다. 아울러 공동 지분사였던 ㈜대호의 포기 지분을 인수해 1-3b공구를 획득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2004년에 발주된 2단계 사업의 2-2b공구의 수주에 성공, 이 사업에서 총 3개의 현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철도

인천국제공항철도

1-3b공구(2001.4-2007.3)와 1-4공구(2001.4-2007.3)는 인천시 중구 운서동 구간이었다. 이 중 1-3b공구는 접속교 외 9개소 및 기타 부대공사로, 변전소 1개동에 8.907km 궤도를 부설했다. 1-4공구는 지하 개착박스 1.6km와 신공항 내에 정거장 1개소를 건설했다.

2-2b공구(2004.1-2009.12)는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 구간으로, 연장 2.185km, 본선터널 1.852km, 본선 개착박스 1.675km, 정거장 2개소, 환기구 5개소 등을 건설했다. 2단계 사업의 완료로 인천공항철도는 2010년 12월 개통됐다.

인천국제공항철도 민자사업 수주를 통해 토목 분야는 좀더 명확한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다. 1999년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 도전에 나선 결과 초라하지만 처음으로 수주액이 1000억 원대를 넘어섰으며, 2001년 들어 턴키와 민자사업에서 잇달아 승전보를 올리면서 6000억 원선을 넘어섰다.

그 여세를 몰아 2002년 3월 토목 분야는 토건사업본부에서 독립해 토목환경사업본부로 거듭났다. ‘토목환경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구호 아래 중단기적으로 1조원 수행체제를 목표로 삼았으며, SOC 민자사업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2003년에는 ‘토목환경의 힘찬 도약’으로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으며, 2004년에는 ‘가자! 정상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1조원 목표 달성을 향해 힘껏 달려갔다.

 

# 광양제철소 경험으로 인천국제공항 2단계 3활주로 수행하다
인천국제공항 2단계 활주로 부지조성 공사

인천국제공항 2단계 활주로 부지조성 공사

토목사업이 회사의 균형 발전에 다소 뒤쳐지기는 했으나, 나름대로 선전한 분야도 있었다. 철도 분야에서는 노반공사를 많이 수행했다. 광양제철소를 건설하면서 100㎞가 넘는 철도공사를 수행해본 경험이 소중한 자산이었다.

제철소 건설의 저력은 부지조성과 항만, 환경 분야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부지조성 사업으로는 대표적으로 인천국제공항 2단계 3활주로 공사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부지가 모두 갯벌이어서 연약지반 개량공사의 경험과 실적이 평가의 핵심사항이었다.

이 문제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1982년에 착공한 광양제철소 부지조성 작업은 바다를 메웠던 대표적인 연약지반 개량공사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런 공사를 맡길 업체가 없어 포스코건설이 직접 일본 기술을 도입해 자력으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그 결과 연약지반 개량공사에 대한 소중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 저력을 바탕으로 당당히 입찰에 참여해 2단계 3활주로 중 4공구(2003.12~2008.8)는 주간사로, 5공구(2003.12~2007.1)는 회원사로서의 자격을 획득했다.

“이 프로젝트는 준설토로 매립된 지반 위에 70cm 두께로 모래를 부설한 후 PBD(Plastic Board Drain)를 타설하는 지반개량공사를 먼저 시행하고, 그 상단에 토석으로 성토 다짐시공하는 공사였다. 토석으로는 인근 오성산을 절취해 사용했다. 토석의 운송은 일반적으로 덤프트럭를 이용하나, 우리는 제철소 건설 경험을 바탕으로 플랜트사업본부가 제작한 벨트 컨베이어를 도입했다. 이를 국내 최초로 현장에 적용해 친환경적이고 선진화된 기술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2004년에는 모래 파동이 발생해 가격이 껑충 뛰었다. 우리는 이로 인한 공정차질을 막기 위해 현장의 요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 발굴에 골몰했으며, 마침 인근 골프장 건설현장에서 다량의 골재가 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이에 모래 대신 골재로도 시공이 가능한지 검토했고, 다행히 25mm 골재를 부설해도 PBD타설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결과치를 가지고 발주처를 설득했으며, 결국 모래(Sand Mat) 대신 골재(Stone Mat)로 공법을 변경해 공기 준수는 물론, 상당한 금액의 원가절감 효과도 얻었다.”(유기춘 전 이사보, 당시 현장소장)

 

# 마산 원전항, 국내 최초 부유식 강재 방파제 선보여

항만에서의 경쟁력은 기술력이었다. 먼저 포스코건설은 제철소 건설 경험을 통해 만만찮은 실력을 쌓았다. 포항과 광양 제철소가 바다를 끼고 있어 많은 항만공사가 있었고, 회사 출범 이후에도 포스코의 해상 수송로를 따라 마산항, 아산항, 평택항, 중국 장자강 등에서 굵직한 항만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포스코 울타리에서 벗어나 대외사업 도전에서도 항만 분야는 저력을 과시했다. 몇몇 대형 건설사들이 토목사업을 싹쓸이 하는 통에 실적에 목말라 기아에 허덕이던 포스코건설에게 항만 분야의 대안입찰은 그야말로 위기탈출의 새로운 대안이었다. 그렇다고 대안입찰이 쉬운 경쟁방식은 아니다. 원안설계보다 월등한 그 무엇을 입증해야 한다. 항만 대안입찰에서 포스코건설이 보여준 경쟁력은 기술력이었다.

마산 원전항 대안입찰에서는 국내 최초로 부유식 강재 방파제를 선보였다.이는 250m의 철강재를 방파제로 만들어 물에 띄우는 공법으로, 바닷물이 자유롭게 흐를 수 있어 친환경적이고, 수심이 깊을수록 경제적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원전항 건설공사는 바닷물이 빠져있는 정조시간(停潮時間)에 맞춰 작업 하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만조와 간조의 차이가 2m 정도인데, 그 차이가 일정치 않아 작업 일수가 충분치 않았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 때는 현장사무소가 바다로 쓸려간 아찔한 경험도 있었다. 그럼에도 5년간 경미한 재해 없이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 (엄도흠 Sr.Manager, 당시 현장소장)

원전항(2002.12~2007.11)에 이어 부산항 국제여객 및 해경부두 건설(2003.12~2006.6)도 맡았다. 부산 프로젝트 대안입찰에서 적용한 신기술 중 가장 큰 특징은 소파판이었다. 소파판은 강관파일식 잔교 구조물에 적절히 물을 통과시키면서도 항내를 정온하게 유지시키고자 고안됐으며,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구조물이었다.

원전항 부유식 강재 방파제

원전항 부유식 강재 방파제

부산항 국제 여객 및 해경부두 공사 현장

부산항 국제 여객 및 해경부두 공사 현장

 

 

 

 

 

 

 

 

 

# 기술력으로 환경 분야 정상에 오르다

환경 분야에서도 기술경쟁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부지조성, 항만과 마찬가지로 제철소 건설 경험을 통해 그 실력을 닦았고, 그 자신감을 밑천으로 대외사업에서는 하수처리와 쓰레기 소각 분야에 집중했다. 하수처리에서는 고도처리 기술로 무장했으며, 쓰레기 소각에서는 용융식 소각로 기술을 확보했다.

환경 사업은 포스코건설이 출범하면서부터 역점을 두었던 사업 중의 하나였다. 그동안 포항제철소나 광양제철소에서 발생하는 폐수, 배기가스와 폐기물을 처리하는 사업들을 많이 수행해 이 분야에서는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었다.

포스코건설의 환경사업은 1994년 포스코건설 출범 이전에 PEC에서 소규모로 수행하였으며, 거양개발에서는 건설 중심으로 제철소 내 환경사업을 수행했다. 하지만 포스코는 PEC나 거양개발이 계열사이지만 실적과 기술력이 부족해 대부분의 공사를 다른 건설사에 발주했다.

이후 포스코건설이 설립되면서 포스코에서 발주하는 환경 관련 공사를 일괄 턴키 방식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포스코에서 발주되는 공사의 물량이 만만치 않았다. 제철사업에 수반되는 폐수처리 공사, 각종 폐기물 처리 공사, 폐가스 등으로 인한 대기 오염 방지를 위한 집진설비와 탈황설비 공사 등을 도맡아 하게 되면서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 분야 국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1997년을 기점으로 포스코의 조강증산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환경관련 공사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결국 환경 분야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바깥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1998년 하수 고도처리 기술도입을 완료하고 대외사업에 진출한 포스코건설은 1999년 하반기에 울진 하수종말처리장 수주에 성공하며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이후 승승장구, 2003년에는 공공 턴키 총 9건 중 7건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해냈으며, 2004년 들어서는 중랑하수처리장(2004.2~2007.10), 파주 LCD단지 폐수처리시설(1단계 : 2004.7~2006.11, 2단계 : 2005.12~2007.9) 등 대형 프로젝트를 잇달아 수주하며 업계 정상에 올랐다.

중랑천 하수종말처리장 착공식

중랑천 하수종말처리장 착공식

2004년 1월 중랑하수처리장(현 중랑물재생센터) 수주전은 당시 환경 분야 빅 이벤트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하수종말처리장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으며,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이곳에는 3가지 공법이 적용되고 있었는데, 이처럼 다양한 공법의 적용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때문에 환경사업을 수행하는 대부분의 건설사들이 사활을 걸고 이 프로젝트 수주에 뛰어들었다.

포스코건설로서도 사활을 건 도전이었다. 하수처리 용량이 46만톤이나 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이전까지 이만한 용량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고작 8만톤 수행 경험이 최대 실적이었다. 따라서 이 사업만 수주한다면 업계 정상 등극은 기정사실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환경 턴키 심의제도가 이 프로젝트부터 기술위원 평가방식에서 기술위원과 평가위원의 2원화 체계로 바뀌었다.

서울시가 입찰에 앞서 내건 과제도 까다로웠다. 전체 1~4처리장의 171만 톤 중 1, 2처리장의 46만 톤을 먼저 고도처리로 개조하고, 이어서 2처리장을 헐고 그 자리에 1, 2처리장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라는 내용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 온 역량을 투입했다. 쟁쟁한 경쟁자들이 모두 참여한 상황에서 웬만한 기술 제안으로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저한 분석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준공된 지 30여년이 지나 1, 2처리장의 경우 시설 노후화가 심각한 상황이어서, 이 같은 노화시설의 성능만 잘 개선하면 좋은 제안이 나올 것 같았다.

실제로 포스코건설은 2처리장의 반응조와 침전지를 철거한 후 신설하는 등 제3처리장 개조와 연계한 마스터플랜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평가위원들을 감동시킨 것은 친환경적인 선진국형 환경시설 모델이었다. 설계안에는 1, 3처리장 부지를 복개해 지상을 체육시설 및 공원으로 조성,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으로 되돌려준다는 신선한 발상이 있었다. 그 결과 포스코건설이 중랑물재생센터 건설사업 사업자로 선정됐다.

양산 자원회수시설 전경

양산 자원회수시설 전경

쓰레기 소각 분야 대표 프로젝트로는 양산 자원회수시설(2004.10-2008.1) 공사가 있었다. 양산 자원회수시설 이전까지 쓰레기 소각은 스토커 연소방식이 일반화돼 있었다. 이 방식은 2000년 말 쓰레기 소각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이옥신이 사회적으로 문제화되면서 여론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이즈음 포스코건설은 쇳물을 만드는 포스코의 용광로 운영 노하우를 토대로 열분해 용융방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때마침 신일본제철이 고로를 파일럿 규모로 축소한 용융식 소각로 기술을 확보하기 있었으며, 특히 이 기술은 일본 내에서도 30기 이상 적용에 성공한 기술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기술을 2002년 포스코건설이 전수받았다.

다이옥신 이슈 이후 국내에서도 용융식 소각로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포스코건설이 확보한 기술은 1700도에 이르는 고열의 열분해 용융방식으로 폐기물을 소각해도 냄새와 분진이 발생하지 않고, 소각하고 남은 부산물을 자원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처럼 청정기술에 대한 요구가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마침내 2003년 양산시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쓰레기 소각장이라는 표현 대신 자원회수시설이라는 명칭을 붙여 용융소각로 공사 입찰공고를 발표했다.

국내 최초의 용융식 소각로 입찰에 건설사들의 관심이 집중됐으며, 치열한 경쟁 끝에 앞선 기술력과 발 빠른 준비 작업으로 포스코건설이 수혜자가 됐다. 양산 자원회수시설 건설사업에서 포스코건설은 1일 200톤 용량의 열분해 용융시설과 1일 80톤 용량의 재활용센터를 건립했다.

“양산과 중랑 프로젝트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수주전이 펼쳐졌다. 초반에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과한 욕심을 부렸다. 그러다 보니 역량이 분산됐고, 양산 프로젝트 수주전을 코앞에 두고는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에 우리는 역량을 한데 모아 양산에 집중해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고, 그 여세를 몰아 한달 뒤 진행된 중랑 프로젝트마저 수주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결국 집중력의 결과가 두 마리 토끼를 다 낚는 원동력이었던 셈이다.”(김익희 전 부사장)

 

# 김해경전철,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다

이 시기 토목 분야 대표적 프로젝트는 단언컨대 김해경전철이었다. 경전철은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분야로 모든 경쟁자들이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했으며, 따라서 그 첫 사업인 김해경전철을 수주한다는 것은 시장 선점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토목 분야에서 쉽게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포스코건설에게 김해경전철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등대의 불빛과도 같았다.

경전철은 1990년대에 도심과 연결되는 외곽 중소도시의 교통난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본격적인 사업화가 추진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구간이 짧고 경량인 만큼 공사기간도 짧고 건설비용이 저렴하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민간사업자 입장에서 사업비 조달이 발목을 잡았다. 지하철보다 저렴하다고는 하나 1조원에 이르는 사업비는 양측 모두에게 부담을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김해간 경전철만이 사업승인을 획득하고 민간사업자 모집에 나섰다. 그러나 1995년 2월 첫 모집부터 신청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1997년 2월 기본설계까지 나왔지만 신청자는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건설사들이 경전철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업성을 두고 계속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지만,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결국 정부가 한발 물러나 사업비의 40%를 재정 지원할 수 있다는 조항을 끼워 넣으면서 김해경전철 사업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랜 관망 끝에 2000년 1월 건설교통부가 새롭게 사업자 모집에 나서자 즉각 컨소시엄 구성에 들어갔다. 우선 현대산업개발과 손을 잡고, 수송부문 시공실적 세계 1위인 프랑스의 브이그, 경전철 설계실적 세계 1위인 프랑스의 시스트라와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경쟁자로는 금호산업 컨소시엄이 등장했다. 금호산업은 시장점유율 세계 1위의 캐나다 경전철 생산업체인 봄바르디아, 싱가포르의 이콘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이후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지만, 포스코건설은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제시한 경제적 사업비와 한국형 경전철 모델이 경쟁자보다 월등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2000년 8월 금호산업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예상 밖의 결과에 오랫동안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김해경전철은 한국형 모델을 공급해야 한다. 외국기업이 차량공급자로 선정될 경우 기본설계와 정부의 표준화 사양과 전혀 다른 차량이 공급될 뿐만 아니라, 이미 양산 준비단계에 있는 국산 기술이 사장될 우려가 있다. 특히 외국기업이 선정될 경우 차량과 시스템 전체를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또 수입차량 전체의 가격은 국산차량보다 3백억 원이나 비싸다!”(포스코건설측 주장)

“차량의 수송능력이나 효율성 및 안정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차량가격만 비교하는 것은 사업취지에 맞지 않는다. 외국기술이 들어올 경우 기술이전 효과가 커 한국의 관련 산업계에 상당한 이익과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이다.”(금호산업측 주장)

양측의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금호산업은 협상 과정에서 정부와도 갈등을 빚었다. 금호산업은 비싼 수입 차량의 가격을 낮추지 않았으며, 정부의 재정 지원도 50%나 요구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측 주장처럼 정부의 경전철 표준화 시책과 시스템 국산화에 어긋나 있었으며, 건설교통부의 기본설계와 달라 설계를 변경해야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결국 평행선을 달리던 양측의 협상이 결렬되자, 2002년 1월 정부는 우선협상대상자를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으로 변경했다. 협상 과정에서는 정부측 요구사항이 이미 제출한 사업계획서에 반영돼 있어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다만 컨소시엄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프랑스 브이그가 빠지고 포스코건설과 현대산업개발이 각각 49%로 지분을 확대했다. 시스트라의 지분은 2%로 대폭 줄어들었다.

마침내 2002년 12월 13일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다. 전체 사업비가 7742억 원으로 책정됐으며,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4819억 원을 부담하고, 정부와 부산광역시, 김해시가 모두 2923억 원을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준공 후에는 소유권이 부산광역시와 김해시로 넘어가지만, 운영권은 30년간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갖도록 돼 있었다.

컨소시엄은 원활한 사업추진을 위해 2003년 1월 부산~김해경전철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포스코건설은 전체 4개 공구 중 3공구와 4공구를 수주해 2006년 4월부터 시공에 들어갔다. 이후 포스코건설은 김해경전철을 계기로 토목 분야에서 새로운 희망을 쏘아 올리며 후속사업 개발을 위해 힘껏 달려 나갔다.

2006.2.15 부산~김해 경량전철 기공식

2006.02.15 부산~김해 경량전철 기공식

2002.12.13 김해경전철 협약식

2002.12.13 김해경전철 협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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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4. 제철 플랜트, 앞선 기술력으로 해외에서 선전하다

# 50% 가이드라인 폐지, 더 이상 믿을 회사가 없다!

제철 분야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아무리 IMF 위기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포스코가 투자를 축소했다고는 하지만, 실적이 무너져도 너무 무너졌다. 주택사업의 반전 드라마가 없었더라면 회사 경영위기의 역적이란 소리를 듣고도 남았다.

포스코의 빙하기는 좀체 풀리지 않았다. 2004년 들어서야 겨우 IMF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는데, 그때까지 장장 6년 동안 실적이 낮은 포복 수준이었다. 회사에서 기여도도 건축 분야에 밀려 20%대로 떨어져 맏형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집트,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등에서의 프로젝트 실패로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포스코건설이 이 정도라면 다른 건설사들의 제철 사업은 어땠을까? 그렇잖아도 포스코건설의 장벽이 만리장성처럼 느껴지던 시절, IMF 위기와 포스코 투자축소 사태를 맞아서는 아예 사업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리 퇴각하고 말았다. 그 사이 포스코건설은 기술을 연마하면서 IMF 모진 세월을 고스란히 견뎌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포스코로서는 더 이상 믿을 만한 회사가 없었다. 어려울 때 묵묵히 옆을 지켜주는 파트너, 오직 포스코건설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다른 건설사들의 생떼에 못 이겨 포스코건설이 50% 이상 프로젝트를 수주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두었던 가이드라인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철강 침체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꾸준히 기술력을 다진 결과 해외에서 소중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고로와 표면처리 분야에서 기술 수출의 자랑스런 성과를 달성했다. 고로의 경우는 광양 5고로 신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열사의 땅 이란에 고로를 포함해 제선설비 일체를 수출했다.

표면처리 분야에서는 CGL과 CCL이 많았다. 철강재는 공기나 습기를 만나면 쉽게 녹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아연이나 알루미늄 등으로 강판 표면을 도금하는 설비가 꼭 필요하다. 강판 표면에 아연을 녹여서 도금하면 CGL이 되고, 색깔을 입히면 컬러강판이라 불리는 CCL이 된다. 포스코건설은 1990년대 말 광양 4CGL 신설 과정에서 주요 설비의 국산화에 성공했고, 이 같은 기술과 노하우를 자력 엔지니어링 도구로 체계화해서 해외시장을 적극 공략했다. 주요 무대는 중국과 대만이었다.

국내에서도 철강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유독 CGL 사업만은 경기가 좋았다. 광양제철소에서만 4CGL에 이어 5CGL과 6CGL이 연속으로 쏟아졌으며, 포스코강판에서도 CGL 합리화에 이어 2CGL 신설 프로젝트가 나왔다.

 

# 발전에너지 분야 성과, 남제주화력 3, 4호기 수주
2004.7.6 남제주화력발선소 착공식

2004.07.06 남제주화력발선소 착공식

에너지사업에서도 작지만 소중한 성과가 있었다. 2004년 4월 한국전력공사의 발전 자회사인 남부발전으로부터남제주화력발전소 3, 4호기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포스코건설이 에너지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회사 출범 직후였다. 포스코에서 많은 발전설비를 수행했던 경험을 살려 플랜트 사업을 에너지 분야로 확대하고자 하는 강한 의욕이 있었다. 1995년에는 전문 인력을 대거 영입해 에너지사업본부를 신설했고, 포스코 물량을 중심으로 대외사업 수주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러나 IMF 위기를 맞아 의욕이 많이 꺾였다. 1997년 에너지사업본부를 플랜트사업본부의 팀 조직으로 축소하고 포스코 물량에만 집중했다. 그 사이 포항과 광양에서 LNG복합화력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침체를 겪던 에너지사업에 재충전의 기회가 찾아온 건 철강경기의 해빙기가 시작된 2004년이었다. 당시 남제주화력 프로젝트에 발전소 건설 실적이 많았던 상위 건설사들이 모두 참여했다. 포스코건설도 강한 의욕을 가지고 현대중공업과 컨소시엄을 구성했으며, 역량을 집중한 결과 마침내 수주에 성공했다. 남제주화력 3, 4호기는 2004년 7월 착공, 2007년 3월 준공됐다.

“2002년 조직이 해체되면서 흩어졌던 인력들이 다시 모여 감회가 새로웠다. 건설 과정에서는 기후변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바람이 강하고 비가 잦은 데다 날씨마저 변화무쌍해 공사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마을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는 데만 3개월이 소요됐다. 결국 공기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돌관공사를 통해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김충경 전 이사보, 당시 현장소장)

 

# 이란에 고로 수출, “무조건 깎아주는 그런 회사 아니다!”

국내 제철 실적이 부진하고 IMF 위기 여파로 이집트와 남미에 벌여 논 해외사업마저 죽을 쑤는 민망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 멀리 이란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국내 제철 역사상 최초로 고로를 수출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고로 수출은 일관제철소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는 만큼 그 의미가 남달랐다. 포스코건설은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내용적의 증강 없이도 출선량을 10만 톤이나 늘린 포항 2고로 2차 개수의 성공적 완료 경험이 있었으며, 더욱이 설비계획부터 시공까지 전 과정을 자체 기술로 완벽히 수행한 광양 5고로 신설의 소중한 경험이 있었다. 이를 통해 고로 분야의 필수적 요소기술을 100여 건이나 보유할 수 있었다.

고로 수출의 진원지는 이란의 국영 철강기업 니스코였다. 니스코는 자회사 에스코의 에스파한 제철소 3고로 신설을 추진했으며, 이란어로 ‘균형’이란 뜻의 타바존을 프로젝트 명칭으로 정했다.

프로젝트 범위는 고로 1기, 소결 1기 및 부대설비의 설계, 설비 공급, 기술지도, 시운전 및 감리까지 수행하는 조건이었다. 입찰 과정에서는 신일본제철, 영국의 크베너 메탈, 독일의 만네스만 데마그 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입찰에 참여하기까지 많은 고뇌가 있었다. 예상 가격이 썩 좋지 않았다. 경쟁 출혈이 과열될 경우 최저가를 감수해야 하는데, IMF 위기 시기여서 결단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포스코건설은 최초 고로 수출이라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또 하나 미끼도 있었다. 이란 정부가 당시 700만 톤 규모의 생산능력에서 2010년까지 2500만 톤으로 추가 확장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1999.12.21 이란 TAVAZON 프로젝트 계약식

1999.12.21 이란 TAVAZON 프로젝트 계약식

결국 포스코건설은 최초 고로 수출에 의미를 두었으며, 이란에서의 향후 후속작을 기대하고 과감하게 결단했다. 당당히 입찰에 나서 경쟁자들을 제치고 타바존 프로젝트를 수주하는데 성공했다. 그 소식이 세기말 새천년을 코앞에 두고 빅뉴스로 타전됐다.

“포스코개발, 2억 3300만 달러에 고로 해외 첫 수출”(연합뉴스, 1999.12.21)

한편 최종 가격 확정에 얽힌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고로 및 부대설비를 공급하는 이란의 타바존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몇 차례 제안서를 내고, 금액을 디스카운트해서 우리 회사가 수행하기로 합의가 됐다. 최종 사인은 한국에서 박득표 회장과 하기로 약속했다. 이란의 차관이 서명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차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최종 금액에서 2% 정도 디스카운트한 후에 사인을 하기로 합의했다.”(이찬우 전 전무)

이 사실을 이찬우 전무는 한국으로 돌아와 박득표 회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막상 양측이 대면한 자리에서는 이란 차관이 당초 약속을 깨고 5.6%의 가격 인하를 요구했다. 계산을 해보니 1000만 달러 규모였다. 차관의 요구에 박득표 회장은 단번에 거절했다.

“깎아달라면 무조건 깎아주는 그런 회사 아니다. 그런 요구를 계속 한다면 여기서 이야기를 그만 끝내자.”

박득표 회장의 단호한 태도에 이란의 협상단은 당황했고, 그대로 1차 협상이 결렬됐다. 이후 그들은 포스코건설측 협상단에게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용인 즉, 이란에서 계약이 끝나고 나서 일본 경쟁업체에서 로비가 들어왔는데, 그들이 제시한 조건이 포스코건설과 계약한 것보다 1000만 달러 인하된 금액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초 약속한 2%선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체면이 안 선다는 내용이었다.

상대측의 사정을 들어보니 유연성을 가지고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박득표 회장은 실무선에서의 재협상을 지시했다. 밀고 당기는 재협상 결과 당초 2%에서 0.9%를 추가로 깎아주는 선에서 합의가 성사됐다. 후일담으로는 이란 협상단이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예전에 만난 한국의 어떤 기업은 협상 과정에서 깎아달라고 하면 요구대로 다 깎아주었다. 그런데 포스코건설은 다른 것 같다.”

 

# 중국과 대만에서 포스코정신의 저력을 보이다
2005.3.11 청도 STS준공식

2005.03.11 청도 STS준공식

고로 수출의 희소식과 함께 중국과 대만에서도 낭보가 날아들었다. 중국에서는 포스코를 배경으로 많은 냉연 플랜트를 수행했다. 랴오닝성 다롄 CGL(1995.11-1997.9), 장쑤성 장자강 CGL(1996.11-1998.5)과 STS 플랜트(1997.2-1999.1)를 시작으로 광둥성 순더(顺德)에서는 다기능 표면처리 설비인 MCL(2001.10~2003.2)을, 산둥성 칭다오(靑島)에서는 STS 프로젝트(2003.1~2004.12)를 수행했다.

비록 포스코를 쫓아 중국에 진출했지만, 포스코건설은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중국 철강기업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포스코건설이 주목한 분야는 냉연 표면처리 기술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이를 무기화해서 중국 철강시장을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 가시적인 성과가 2000년 9월 처음 나타났다. 유럽과 일본의 엔지니어링사 일색의 중국 철강시장에서 당당한 경쟁을 통해 자국 내 최대 가전업체로 유명한 하이얼사의 CCL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프로젝트의 범위는 주설비의 설계와 설비를 공급하는 EP 수행이었다.

하이얼 CCL(2000.10~2001.9)의 성공적 수행은 곧바로 입소문을 타고 중국 철강시장으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2002년 말에서 2003년 초까지 단 2달 만에 CCL 3기와 CGL 1기를 수주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세계적 엔지니어링사들과 경합을 통해 2002년 12월 한단강철 CCL 2기를 수주했으며, 이어서 2003년 1월 곤명강철 CGL과 CCL를 수주했다. 4기의 냉연 설비는 하이얼사와 마찬가지로 모두 EP 수행이었다.

2000.10.12 중국 청도 하이얼 CCL 계약

2000.10.12 중국 청도 하이얼 CCL 계약

2002.12.10 한단강철 칼라강판 설비공급 계약체결식

2002.12.10 한단강철 칼라강판 설비공급 계약체결식

2기의 한단강철 CCL(2003.4~2004.6), 각각 1기의 곤명강철 CGL과 CCL(2003.1~2004.8)은 착공과 준공을 비슷한 시기에 본 인연만큼이나 중국 내에서 포스코건설의 저력을 보여준 대표적 프로젝트였다.

한단강철의 경우 발주처와 신뢰를 쌓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프로젝트 초반 계약 2달 만에 설계도면을 제출하라는 등 무리한 일정을 요구해왔다. 심지어 도면을 검토하겠다는 구실로 20명이나 서울사무소로 몰려와 진을 치고 눌러

2003.2.2 프로스페리티사와 CGL 공급계약 체결

2003.02.02 프로스페리티사와 CGL 공급계약 체결

앉았다. 이들을 상대로 도면 수정 검토를 받느라 진땀을 흘렸으며, 주말이면 서울관광을 시켜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휴일도 없이 수발을 들어야 했다.

특히 2003년은 중국발 사스 공포가 한창일 때였다. 포스코건설 사내 통신망인 ‘모아광장’에서는 계약을 파기해서라도 그들을 회사로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연일 빗발쳤다. 그러나 프로젝트 요원들은 질병을 두려워할 여유조차 없이 호텔로 회의장소를 옮겨 발주처와의 교감을 형성해나갔다.

가장 큰 문제는 설비제작이었다. 85%가 현지 제작업체로 발주됐는데, 대부분의 제작사들이 납기일정을 지키지 않았다. 포스코건설이 제작한 설비는 이미 도착해 몇 개월째 비만 맞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설치가 완료되고 시운전 단계에 이르렀는데, 또 다시 발주처에서 무리한 일정을 요구해왔다.

“갑자기 공장장이 찾아와서는 보름 만에 제품을 생산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우리는 며칠 밤을 새고 13일 만에 첫 번째 시제품을 생산해냈다. 그러자 발주처가 크게 놀라며 우리의 운전기술과 설비의 우수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서용구 전 부장, 당시 한단강철PJT PM)

중국에서의 성공 스토리는 다시 입소문을 타고 대만으로 퍼져나갔다. 대만 역시 중국처럼 제철 플랜트는 일본과 유럽 엔지니어링사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런 관례를 깨고 2004년 2월 포스코건설은 대만 철강기업인 프로스페리티사와 CGL 설비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대만 제철 플랜트 진출은 이것이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미 입찰경쟁을 통해 일본과 유럽의 엔지니어링사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펼쳐 최종 낙찰자까지 선정돼 있었다. 그 상황에서 돌연 발주처가 포스코건설을 방문했으며, 상담 두 번 만에 전격적으로 수의계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선택 받은 자의 입장에서는 실적과 기술력을 믿고 맡겼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여러모로 따져볼 때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결국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의문점이 풀리기 시작했다. 당시 발주처 제철소에서는 3개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는데, 포스코건설 외에도 일본과 유럽 기업도 포함돼 있었다. 다시 말해 발주처는 각 나라 기업의 프로젝트 수행 능력을 쉽게 비교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발주처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고, 중국에서처럼 다시 한 번 포스코 우향우 정신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결과 발주처는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으며, 당시 CGL 프로젝트 수행(2004.2~2005.9) 때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2007년에 PGL 프로젝트(2007.9~2009.6)를, 2008년엔 CCL 프로젝트(2008.2~2009.6)를 다시 한 번 맡겼다.

“우리는 발주처가 3개 나라 기업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더욱 열심히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계약 직후 물류 개선, 조업 및 정비 효율성, 건설 공사비 절감 등을 모두 반영한 수정 레이아웃을 제안하자 발주처가 크게 감동했다. 엔지니어링, 설치, 시운전 등 각 단계에서 발주처가 직접 수행해야 하나 능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마치 그들의 직원처럼 일했고, 그 결과 적기에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있었다. 이것이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최종담 전 부장, 당시 냉연팀 근무)

 

# 중국 장자강에 STS 포스코왕국을 건설하다

중국 진출에서 최대의 성과는 포스코 현지법인이 발주한 장자강 STS 상공정 프로젝트 수행이었다. 그 범위가 전기로에서 제강, 연주, 열연, 소둔산세 공정까지 이르는 방대한 규모였다. 외국회사가 자국의 본토에서 쇳물을 뽑아 특수강을 생산하는 체제를 갖춘 것은 중국 역사상 포스코가 처음이었다. 포스코 역시 해외에서 상공정 구축이 최초였는데, 투자 금액이 10억 달러로 당시로서는 해외투자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포스코가 스테인리스스틸(STS) 사업을 처음 추진한 건 1980년대 말이었다. 강도가 뛰어나고 녹이 슬지 않는다는 특수강의 장점으로 점차 수요가 늘어나자 국산화에 나서 1990년대 초까지 42만 톤의 생산체제를 갖추었다. 그럼에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1990년대 중반 증설사업을 추진했는데, 이때 42만 톤 규모의 STS 증설사업을 포스코건설이 수행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소중한 경험을 축적했다. 최신 환경설비 기술을 축적했으며, 고순도 청정강을 생산할 수 있는 최신 정련로를 구비하고 극박재 형상제어 기술, 고광택 강판제어 기술 등의 신기술도 도입했다. 이런 소중한 경험과 기술축적을 바탕으로 중국에 진출해 장자강 STS 프로젝트, 칭다오 STS, 그리고 대망의 장자강 STS 상공정을 수주할 수 있었다.

“장자강 STS 상공정은 최초 정보 입수부터 수주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진행상황을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대응하면서 발주처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했기에 최대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발주처의 원가절감 요구를 반영하고 우리의 참여 범위를 최대화하기 위해 분할 발주를 제안했으며, 효율적인 사업관리를 위해 현지법인을 설립하기도 했다.”(최석용 전 상무)

포스코가 막대한 투자를 통해 중국에 STS 상공정 건설을 추진한 근본 배경은 원가절감에 있었다. 당시 포스코 현지법인은 2기의 STS 냉연 설비를 운영하면서 소재 전부를 한국에서 수입했다. 그러다 보니 운송비 부담이 만만치 않았으며, 특히 중국의 수입 소재에 부가하는 관세도 큰 부담이었다.

포스코건설은 포스코가 이런 속앓이 과정에서 상공정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직후부터 자청하고 자문 역할 수행에 나서 적정 설비사양 및 투자비 등을 검토해 자료를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경험과 기술수준을 감안할 때 전체 공정을 일괄 수행한다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했으며, 발주처의 원가절감 측면에서도 분할 발주가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무엇보다 포스코는 투자비 최소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포스코의 또 하나 걱정거리는 세금이었다. 2003년까지 STS 사업은 중국 정부의 권장 사업이어서 외국 설비에 대한 세금이 없었다. 이는 STS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STS 수요가 안정화되자 중국 정부는 곧바로 외국 설비에 대한 세금 부과를 계획했다.

결국 원가절감을 위해서는 중국에서 설비를 조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포스코건설은 이런 포스코의 심중을 정확히 읽어내고 가장 이상적인 방안으로 장자강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국내에서 대부분의 설비를 자신들이 조달했듯이 중국에서도 그런 역할을 전담하겠다는 의도였다.

마침내 포스코건설의 제안대로 장자강 STS 상공정 프로젝트가 제강 및 연주설비, 압연설비, 소둔산세 등 3개의 패키지로 분리돼 발주됐다. 이 프로젝트 입찰에는 유럽과 일본 등 쟁쟁한 엔지니어링사들이 참여했으며, 포스코건설은 3개 패키지 모두 참여했다.

입찰에서는 제강 및 연주설비에서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알피네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수주에 성공했으며, 압연설비에서는 일본의 미쓰비시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수주에 성공했다. 특히 소둔산세 프로젝트는 푀스트알피네와 경쟁해 단독 수주에 성공했다. 그 결과 앞서 두 프로젝트의 일부 지분참여와 소둔산세의 단독 추진으로 전체 발주 금액의 56%를 확보할 수 있었다.

2002.12.02 중국 장가항 STS안전기원제 및 기전착공식

2002.12.02 중국 장가항 STS안전기원제 및 기전착공식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단독으로 수행했던 소둔산세(燒鈍酸洗)의 성공적 완료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이 공정은 소둔과 산세로 구분되는데, 소둔은 열처리를 의미하고, 산세는 산으로 세척하는 과정이다. 냉연공장에서 품질을 높이는 주요 공정이라 할 수 있다. 포스코건설은 자력 엔지니어링으로 설계에서 설치, 감리, 시운전까지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완료(2004.12~2006.10)함으로써 그 기술력을 널리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중국 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해 첫 공정인 토목공사가 계속 늦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코건설은 설비의 적기 공급과 품질이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초기부터 3명의 전문가를 중국 제작사에 파견해 현지 기술지도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제작 기간도 단축하고 품질도 높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착공이 늦어지자 전체 공기 만회를 위해 설비제작과 시운전 과정을 3개월이나 단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해외 현지 제작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프로젝트 요원들은 제작사로 달려가 도면을 검토하고 직접 수정까지 하면서 휴일 밤낮을 잊은 채 온 열정을 쏟았다. 그 결과 예상 공기보다 4개월 보름이나 앞당길 수 있었다. 특히 소둔산세뿐 아니라 전체 프로젝트 관리를 수행한 현지법인의 숨은 노력이 돋보였다.

“우리는 모든 설비 공급을 중국 내 350여개에 달하는 설계회사들의 가격을 일일이 조사한 끝에 최저입찰로 수주해 조달했다. 이에 포스코로부터 대단한 성과라는 칭찬도 받았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각 설비별로 PM요원을 배치하고 밀착 관리했다. 아울러 30여명의 현지 직원들을 현장에 파견해 프로젝트 수행을 지원했다.”(안해성 전 전무)

 

<생각하는 페이지>
-출범 초기 플랜트 해외사업과 건축 자체 개발사업의 교훈

흔히 10년 단위로 정리되는 우리나라 기업사의 특징은 성과 위주의 서술이 대부분이었다. 기록 보존의 의미도 분명히 표방했지만, 그 보다는 기념비적 축제의 의미나 홍보에 더 치중하다 보니 그런 결과들이 나타났다.

포스코건설 20년사는 이 같은 경향을 따르지 않고, 실패에 대한 기록도 서술했다. 그렇다고 누구누구의 잘잘못을 가리자는 것은 아니었다. 실패나 실수를 분명히 밝혀 반성과 함께 교훈을 얻고자 했다. 특히 교훈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패사례를 더 큰 회사로 성장하기 위한 소중한 자료로 기록하자는 의도가 있었다.

실패나 아쉬운 이야기는 본문에도 많이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자칫 소중한 성과들이 실패사례의 기세에 묻힐 우려가 있어 그렇게 많이 담아내지는 못했다. 실패사례라도 정확한 반성과 함께 극복사례가 나타나면 적극적으로 서술했으나, 그렇지 못한 내용들은 기술을 자제했다. 대신 ‘생각하는 페이지’라는 코너를 만들어 시기마다 주요 실패사례를 전반적인 시각에서 정리했다.

1994년 12월 출범 이후 3년간인 사업기반 구축기(1995-1997)에는 이렇다 할 실패사례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실적 부족과 경쟁사들의 견제로 건축과 토목 분야가 시련을 겪었다는 것 정도가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러나 위기극복과 성장기(1998-2004)에는 그 동안 잠재돼 있던 과오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플랜트 부문의 해외사업과 건축 부문의 자체 개발사업에서 뼈아픈 실패들이 있었다. 플랜트부터 소개하자면, 이집트 아르코 프로젝트와 베네수엘라 포스벤 프로젝트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출범 초기 대단한 성과로 선전했던 아르코 프로젝트는 공기지연과 설비 품질문제가 분쟁의 씨앗이었다. 공기지연이야 현지 시공업체의 능력부족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쳐도, 설비품질 저하에 대한 책임은 피해갈 수가 없었다.

발주처 아르코는 판매부진으로 경영이 악화되자 바짝 독이 올라 포스코건설을 압박했다. 설비품질과 불완전한 조업을 문제 삼으며 준공 승인(FAT)과 미수금 지불을 거부했다. 더구나 37개나 되는 설비 추가 공급과 2년간 소모품 무상 공급을 요구했다.

포스코건설이 이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계약금 반환 청구소송으로 대응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집행금지 신청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이 사건은 파리에 있는 ICC 국제상사중재원으로 넘어가 2년을 허송세월해야만 했다.

이 소모적인 분쟁은 2003년 5월 양측이 조건 없이 아르코 프로젝트 종료를 선언하면서 마침내 막이 내려졌다. 포스코건설로서는 금전과 시간, 특히 정신적 상처까지 많은 손실을 보았던 프로젝트였다.

아르코 프로젝트의 실패 요인은 저가 수주, 사업타당성 분석능력 부족, 리스크 관리능력 부족, 발주처 소통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프로젝트 수행능력 부족이었다. 실력에 비해 너무 큰 욕심을 부려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포스벤 프로젝트는 포스코와 포스콘(2010년 1월 포스코ICT로 합병)까지 관련된 패밀리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의 지분까지 합치면 포스코패밀리는 60%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였다.

이 프로젝트 역시 공기지연과 조업품질이 문제였다. 시공과 시운전 과정에서 20개월이나 지연됐다. 시공 과정에서는 현지 노동생산성도 문제였지만, 강성 노조로 파업이 잦았다. 멕시코 파트너사의 능력부족으로 시운전 과정에서도 7개월이나 공기가 지연됐다. 공기지연과 조업품질 저하로 판매까지 부진하자 발주처는 준공 승인을 연기했으며, 그 결과 포스코건설은 차입금 상환 부담을 떠안았다.

더 큰 문제는 포스코의 철수였다. 노조 파업으로 공장 가동중단과 법정 공방까지 이어지자 포스코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선언했다. 이에 포스코건설 역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포스벤 프로젝트도 아르코와 마찬가지로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사업관리 능력부족이었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강성 노조 파업과 같은 현지 국가 리스크에 대한 학습이 부족했다.

분당 프로젝트는 사업계획에 앞서 부지부터 매입한 것이 화근이었다. 5년 상환 조건으로 토지공사에 계약금 280억 원을 지불한 이후에도 사업계획이 갈팡질팡했다. 스키장 유치를 구상하다 실패하고, 월드컵 축구경기장 구상도 검토에만 그쳤다.

마지막으로 겨우 내놓은 구상이 종합 레저쇼핑단지였으나, 이미 주변으로 삼성플라자와 청구백화점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로 인해 사업성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IMF 위기까지 닥쳤다. 결국 토지공사의 중도금 상환 압박에 시달리다가 사업포기를 결정하고 말았다.

분당 프로젝트의 실패 요인은 사업성 분석능력의 부족이었다. 일을 거꾸로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철저한 사전준비와 사업계획 하에 개발사업을 추진해야 하는데, 무턱대고 땅부터 사놓고 덤비는 신생기업의 경험부족이 화를 자초했다.

유성 프로젝트도 사전준비가 부족했다. 포스코건설은 과학관련 정부청사의 대전 이전과 도심형 레저 수요 확대를 단순하게 연결시켰으며, 포스코 직원용 콘도 유치에 크게 의지했다. 그러나 건물과 토지의 소유주인 지주기업과의 협력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으며, 각종 의혹으로 4차례나 감사를 받기도 했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IMF 위기를 맞아 포스코 콘도 유치가 어려운 상황에서 유성 프로젝트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사업 중단으로 인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이후 지주기업측과의 법정공방으로 손실 규모가 더 늘어났다. 마지막 철골조공사에서 중단됐던 유성 프로젝트는 끝내 포스코건설이 사업권을 모두 떠안고 매각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유성 프로젝트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충분한 사전검토도 없이 포스코만 믿고 사업을 밀어붙였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당시 현지 부동산업자들에 대한 시장조사만 철저히 했더라도 콘도사업이라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부 반성이 있었다.

이 네 프로젝트는 경험과 사업수행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심도 깊은 현지 조사와 철저한 사전준비가 중요하다는 깨달음도 소중한 교훈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소중한 경험을 얻기까지 치러야 했던 수업료 치고는 과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한편 다잡은 물고기인 의정부경전철을 놓친 사건은 이 시기 토목 분야의 대표적 실패사례라 할 수 있었다. G사의 적자운영 결과만을 놓고 내부 일각에서는 놓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지만, 과정을 놓고 볼 때는 분명한 실패사례이자 창피한 사건이었다.

이미 끝난 사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간단하게 펙트를 언급하자면 이랬다. 포스코건설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고 나서 G사측에서 사소한 문서 하나를 위조로 몰아붙였다. 이를 포스코건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적당히 대응했고, G사는 죽기 살기로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결과는 위조란 판결을 받으며 G사에게 의정부경전철을 빼앗겼다. 안일한 생각과 치밀하지 못한 대응에 대한 뼈를 깎는 반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2-5

Story5. 소통과 재무건전성으로 폭풍 성장하다

# 시공능력 7, 수주액 4조 원 달성하다

포스코건설 20년 역사에서 2기(1998~2004)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었던 역동적인 시절이었다. 전반에는 시베리아 한파가 매서웠으며, 후반에는 고도성장을 내달렸다.

IMF 관리체제가 시작된 1998년에는 밑도 끝도 없이 추락했다. 수주액이 전년보다 무려 75.1%나 줄어 4564억 원을 기록했다. 이는 건설업계 전반의 공통 현상으로 시공능력 평가액에서 5000억 원 이상이 1997년의 28개사에서 10개사나 줄어 고작 18개사에 불과했다. 포스코건설의 경우 포스코의 투자 중단이 가장 큰 근본 원인이었다. 전년에 1조 2072억 원이었던 포스코 수주분이 고작2755억 원에 그쳤다.

이후 1998년의 구조조정 효력이 나타나고, 적극적인 대외 수주활동을 펼쳐 1999년 8477억 원, 2000년 1조 301억 원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증가세는 2001년 2조 299억 원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2조 원 시대를 열었다. 이어서 2002년 2조 9168억 원, 2003년 3조 3780억 원으로 계속 증가했다. 2004년에는 4조 700억 원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수주 4조원 시대를 열었다. 시공능력 평가에서도 2002년 이후 줄곧 7위를 유지해왔다.

2000년대 들어 이처럼 수주가 급증한 이유는, 포스코 물량에 안주하지 않고 주택사업과 공공발주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결과였다. 주택사업의 경우 1998년 95억 원에 불과했으나 1999년 729억 원으로 늘어났으며, 2000년 1190억 원, 2001년 5688억 원, 2002년 1조 1234억 원, 2003년 1조 6010억 원, 2004년 1조 8648억 원으로 급신장하면서 포스코건설의 고도성장을 견인했다.

사업본부별 실적을 살펴보면, 플랜트와 건축의 위치가 역전됐다. 출범 초기 회사의 성장을 이끌었던 플랜트가 쇠퇴하고 건축부문이 급성장했다. 플랜트의 회사 기여도는 1997년 91.1%로 최고 정점을 찍고 이후 계속 추락해 20%대에 머물렀다. 반면 1997년 고작 3.8%에 불과했던 건축부문은 회사의 폭풍성장을 견인하면서 2003년에 60%대를 넘어섰다. 토목·환경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수주액 1조 원을 목표로 분전했으나, 실적이 따라주지 못했다.

주택사업 성공이 몰고 온 폭풍성장 이면에는 업계 최고의 신용등급과 건실한 재무구조가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국내 기업신용 평가 전문기관인 한국신용정보㈜의 단기 신용평가에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7년간 최우수 등급을 획득했다. 단기 신용도를 나타내는 기업어음 부문과 장기신용도를 나타내는 회사채 부문에서도 7년 연속 각각 A1과 AA- 등급 판정을 받았다. 이는 건설사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순수한 자체 신용만으로도 저리의 자금을 적기에 조달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조달청 입찰 때도 PQ 가점에 반영된다. 무엇보다 국내 건설사 최고의 신용등급으로 대외 신인도가 크게 향상됨에 따라 포스코건설은 강한 자신감으로 가지고 대외사업을 펼칠 수 있었다.

 

# 포스코개발에서 포스코건설로 사명변경
2002.02.28 사명 선포 및 현판식

2002.02.28 사명 선포 및 현판식

시공능력 7위, 수주액 4조 원 시대를 연 이 시기 조직에서는 우선 경영진의 변화가 있었다. 1998년 6월 박득표 회장이 최고사령탑으로 취임했다. 박득표 회장은 IMF 위기극복을 위해 기술중시 경영과 일반건설 진출을 강조했으며, 그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1999년 강구조개발본부를 토건사업본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토목과 건축 분야의 대외사업 추진에 적극 나섰다. 2002년에는 그 의지를 더욱 다져 토건사업본부를 건축사업본부와 토목환경사업본부로 분리했다.

특히 2002년 2월 포스코건설은 사명을 변경했다. 포스코개발에서 포스코건설로, 영문은 POSEC에서 POSCO E&C로 각각 바뀌었다.

사명의 변경은 내부 여론에서부터 출발했다. 개발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소규모 기업이라는 여론이 있었으며, 개발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사업 영역을 모호하게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따라서 ‘개발’ 대신 ‘건설’이라는 큰 그릇에 담아 고객에게 친숙한 기업이미지를 정립하기 위해 사명을 변경한 것이었다. 사명 변경 선포식 식사에서도 박득표 회장은 그런 의미를 충분히 강조했다.

“건설회사의 위상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사명을 바꾼 만큼 고객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자. 사명 변경을 계기로 회사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전 임직원이 힘을 합쳐 나가자.”

한편 2004년엔 또 한 번의 경영진의 변화가 있었다. 박득표 회장 후임으로 한수양 사장이 취임했다. 이어서 송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송도사업본부가 신설됐다.

2004.03.18 한수양 사장 취임식

2004.03.18 한수양 사장 취임식

 

 

 

 

 

 

 

 

 

# 지식경영을 위한 지식경영 하지 말라!

주택사업의 성공신화와 함께 이 시기 또 하나의 성과로는 지식경영이 있었다. 포스코건설뿐 아니라 이 시기는 사회 전반적으로 지식경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IMF 위기 이후 구성원 개인이나 조직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과 경험을 하나로 결집시켜 모든 회사 구성원이 공유하는 것이 최선의 경쟁력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다.

특히 IMF 위기 때의 인력구조조정은 인건비 절감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이들이 갖고 있던 기술과 경험이 유출되는 단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구조조정의 여파로 개인의 역량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함에 따라 조직의 정보공유 체계가 많이 훼손되고 있었다. 이런 부작용을 해소하자는 차원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지식경영 도입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출범 초기 BEST POSEC 운동으로 조직 융합의 경영성과를 달성했던 포스코건설 역시 IMF 위기의 상처를 추스르고 다시 한 번 조직의 일체감을 조성해 경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경영혁신의 도구로서 지식경영을 선택했다.

그러나 붐 조성이 쉽지 않았다. 지식경영에 대한 이해부족이 근본 원인이었다. 처음 포스코건설은 시스템적 측면에서 지식경영에 접근했다. 홈페이지나 지식경영시스템(KMS)을 구축하고 IT 시스템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지식경영이라는 잘못된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기술정보팀이 지식경영 추진을 주관했으며, 자연히 직원들의 호응도도 떨어졌다.

“지식경영을 위한 지식경영은 하지 말라. 목표 달성을 성급하게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겠다.”

사내 포털인 POKINS 화면

사내 포털인 POKINS 화면

박득표 회장의 표현은 KMS 구축이 지식경영 전체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1999년 말 그는 지식경영 추진방향의 재설정을 주문했다. 이후 포스코건설은 인사관리 측면에서 지식경영에 다시 접근했다. 주관 부서도 인력개발실로 변경하고, 문화적이고 인간적이며 신뢰라는 측면에서 지식경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모아광장’을 도입하고 임직원 모두가 회사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회사 내에서 건전한 토론문화가 정착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모아광장’은 지식경영 활동의 중요한 축으로 떠올랐다.

지식경영 촉진을 위해 ‘지식 마일리지제도’도 도입됐다. 이 제도는 지식활동 공헌도에 따라 일정 마일리지가 부여되고, 파격적인 보상이 이뤄지도록 설계됐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지식경영에 대한 직원들의 호응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시스템적 측면에서는 2001년 8월 KMS와 문서관리시스템인 EDMS를 구축하고 사내 포털인 POKINS에 지식경영 기능을 추가했다. EDMS에서는 모든 문서를 데이터베이스화했으며, EDMS 중 전사적으로 공유할 활용가치가 높은 지식은 KMS에 따로 등록했다.

 

# 소통의 메카 모아광장, 태도와 마음을 변화시키다

“주제에 관계없이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해진 다음에는 승진이나 제도 등의 민감한 문제까지도 거론되기 시작됐다. 특히 ‘펄프픽션’이란 필명으로 회사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풍자적으로 쓴 글이 전 직원들의 뜨거운 관심과 흥미를 유발했는데, 이것이 모아광장 활성화에 커다란 분수령이 됐다. 이런 글을 올려도 되는지 직원들 모두가 놀라움을 갖기도 했지만, 회사에서 의연하게 대처함으로써 직원들이 회사를 신뢰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었다.”(이상필 전 상무)

온라인 커뮤니티 모아광장은 2000년 2월 전 직원의 의견을 모아 더 큰(more) 경쟁력을 보유하자는 의미에서 출발했다. 계급장을 떼고 하는 자유토론 방식이 특징이었는데, 토론의 주제는 운영팀에서 선정했다. 경영층 지시사항이나 직원들의 요구사항 중에서 주요 이슈를 뽑았다.

그러나 혁신적인 자유토론 방식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응도가 예상보다 높지 않았다. 접속 수는 많았으나, 선뜻 토론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다. 기명 방식이 문제였다. 계급장을 떼고 하는 자유토론이라 해놓고 기명을 요구하는 건 뭔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 문제를 놓고 경영층은 고뇌를 거듭했다. 일각에서 무기명으로 갈 경우 비방 수위를 조절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영층에서는 최종적으로 무기명 방식을 과감하게 결단했다. 시행 초기 잠시 혼란이 있을 수는 있으나, 무기명 방식의 자유토론이 결국에는 열린 의사소통과 신뢰구축의 기반이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자유토론의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우려와는 달리 직원들은 차분하게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 결과 1년 동안 인사, 노무, 총무, 영업, 기술 등 회사경영 전반을 대상으로 다양한 주제토론을 벌여 150건의 크고 작은 문제 개선의 효과를 얻었다.

그 1년 사이 직원들의 목소리가 크게 높아졌다. 자유토론에 이어 운영방식의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성역 없는 주제와 자유 운영방식에 대한 여론이 빗발쳤다. 경영층에서는 이 모든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야말로 활화산 같은 열기가 치솟았다. 성역 없는 주제와 자유 운영방식은 직원 참여율에 불을 더욱 지피는 효과를 가져왔다.

초반에는 승진, 노사관계 등 상사들이 읽으면 껄끄러운 내용도 많아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후 함량미달의 의견에 대해서는 자체적으로 반박하는 자정작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결국 모아광장은 성역 없는 비판 속에서도 대안을 제시하는 성숙한 토론문화를 만들어냈으며, 회사의 정책이나 제도에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실례로 ‘승진’이라는 주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지자 그 동안 승진에서 누락된 직원들의 경우 자신들이 승진하지 못한 이유의 부당성을 집중 성토했다. 그 결과 인사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 작업이 이뤄졌으며, 승진에서 누락됐던 직원들의 상당수가 구제되기도 했다.

일반 기업에서는 금기시하는 조직개편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핵심사업 분야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한 조직 확충에 대해서도 뜨거운 논쟁이 일어 회사에서 TF팀을 만들어 토론 내용의 상당부분을 반영해 조직개편을 단행한 사례도 있었다.

모아광장이 활활 타오르면서 직원들의 태도와 마음가짐도 훨씬 밝아졌다. 2002년 초 사내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 경영층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회사의 미래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많이 발전할 것이다’(55%)와 ‘발전할 것이다’(34%) 등 긍정적 답변이 89%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전년도 5월 똑같은 주제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어려워질 것’이라고 응답한 직원들이 55%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모아광장을 통한 지식경영이 KMS 구축만으로 끝나지 않고 바야흐로 진정한 경영혁신으로 진화하는 순간이었다.

모아광장과 함께 포스코건설은 지식경영을 추진하면서 공정하고 철저한 보상시스템으로 지식 마일리지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제안제도, Q&A, 연구논문, 지식교류회 등의 활동을 통해 직원들의 일상생활에 녹아들었으며, 또 경영자와 관리자의 리더십을 이끌어내면서 지식의 품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도 유용하게 활용됐다.

지식경영으로의 대동참을 이끌어냈던 모아광장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모아광장에 올라온 글을 회사가 임의로 삭제하거나 추적하지 않겠다던 초심을 버리지 않았다.

토론 내용에 대해 관련부서는 사소한 것이라도 신속하게 답변했다. 최고경영자의 지대한 관심도 큰 힘이었고, 특히 토론에서 드러난 문제점에 대해 신속하게 제도개선이 이루어진 것이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는 곧 상하간 불신해소와 조직 일체감 조성으로 이어졌으며, 포스코건설이 성장하는데 든든한 밑바탕이 됐다.

 

# Top 30 비전 수립, SMART Global E&C Company를 향해

숨 가쁘게 10년을 달려왔다. 되돌아보니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4년 거양개발과 PEC가 통합할 당시 두 회사의 수주실적을 합친 금액이 6604억 원 수준이었다. 그리고 10년 후 포스코건설은 4조원 시대를 열었다. 무려 6배나 성장했다.

시공능력도 실적을 뒷받침하고 있다. 출범 진전 37위였는데, 무려 30계단을 뛰어올라 7위로 올라섰다. 이만하면 충분히 성장했다고 자축할 수도 있다. 하지만 10년 전 세웠던 비전을 되짚어보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장기 비전(POSEC VISION 2005)에서 포스코건설은 수주액 목표치를 8조 원으로 잡았다. 실제 실적과 비교한다면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사업포트폴리오 측면에서는 제철 플랜트를 주축으로 환경, 에너지, SOC 분야를 주력사업으로 삼겠다고 피력했다. 이 부분에서는 일단 건축, 토목, 환경 등 포트폴리오 다양화의 경우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사업 분야별 균형 성장이 과제로 남았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10년의 평가와 반성 속에 창립 10주년을 맞아 새로이 비전을 수립하고 각오를 다졌다. 먼저 SMART Global E&C Company를 지향했다. 상징적인 목표로는 Global Top 30위 진입으로 정했으며, 현실적으로는 수주액 7조 원, 매출액 6조 원을 목표로 삼았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기술력을 기반으로 사업포트폴리오를 균형 발전시켜나가기로 했으며, 2000억 원 이상 경쟁력 있는 상품을 10개 이상 확보하기로 했다. 지향점이 글로벌 기업인만큼 해외시장 비중도 더욱 확대하기로 했다.

사업별 전략을 살펴보면 플랜트 부문은 우선 파이넥스와 표면처리를 주력사업으로 삼아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대체 에너지와 발전에 대한 투자를 늘려 플랜트 영역을 확대해나가기로 했다.

토목·환경 부문은 중장기적으로 도로, 철도, 항만을 주력사업으로 하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 경전철과 장대교량에 투자를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턴키 베이스 자력 수주능력을 확보하는 한편, 해외 SOC 진출을 모색하는 등의 노력으로 1조 원 수행체제 구축을 목표로 삼았다. 환경 분야는 기술력을 배가해 국내 1위의 선도기업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가기로 했다.

건축·주택 부문은 중장기적으로 아파트와 주상복합 등을 주력사업으로 하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 실버 및 미래 주택과 리모델링사업 육성을 통해 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위험성이 높은 오피스텔 사업은 축소하기로 했다. 장기적으로는 브랜드 인지도를 높여 국내 3위권에 진입하는 한편, 제안형 프로젝트의 특화 개발 분야를 주도해나가기로 했다.

2004.11.30 창립 10주년 기념 및 비전선포

2004.11.30 창립 10주년 기념 및 비전선포

2004.11.25 창립 10주년기념 기술전시회

2004.11.25 창립 10주년기념 기술전시회

포스코건설 창립 10년, IMF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IMF 위기 직후 4000억 원대까지 떨어졌던 실적을 단 6년 만에 4조 원대까지 끌어올리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박득표 전 회장은 창립 2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IMF 사태가 위기이자 곧 기회였다고 말했다. 건전한 재무구조가 돋보이는 시대가 찾아왔고, 포스코의 민영화도 좋은 기회였다고 평가했다. 외부의 간섭과 견제가 사라지면서 공격경영의 여건이 갖춰졌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조용경 전 부사장은 모기업 포스코의 높은 신뢰도와 포스코건설의 탄탄한 재무구조를 꼽았다. 여기에 덧붙여 “사업다각화와 수주 확대, 그리고 송도 신도시 개발 참여 결정 등 고비마다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려야 했던 경영진의 노력과 ‘세계 최고의 기술과 인재’를 바탕으로 ‘고객이 만족하는 기업, 직원이 사랑하는 기업, 사회가 신뢰하는 기업’을 만들고자 한마음이 됐던 임직원들의 의지와 노력의 결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성장비결은 사람으로부터 나왔다. 포스코건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패기와 열정으로 뭉쳐 창립 10주년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 이제 포스코건설이 다음 신화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 10년의 저력을 바탕으로 스마트한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며 다음 10년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역대 CEO 인터뷰_박득표 전 회장>
 주인의식을 가지고 세계적 경쟁력을 다져 해외로 뻗어나가길

박득표 전 회장은 1968년 포스코에 입사, 포스코 사장을 거쳐 1998년 6월 포스코건설 CEO에 취임했다. IMF 위기란 어려운 시기에 CEO를 맡아 포스코건설의 성장기를 이끌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과감하게 주택사업에 진출해 성공신화를 열었으며, 기술중시 경영으로 EPC 기술력을 더욱 강화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CEO를 맡아 부담이 컸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위기에서도 과감하게 일반건설 진출을 결단하셨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포스코의 플랜트 건설 중심이 아닌 일반건설 위주의 사업결단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과연 우리 회사가 기존 현대건설과 같은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한 건설업체를 이길 수 있는 기술경쟁력과 수주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IMF 발생 이후 기존건설 업체에서 물러난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면 단 기간 내 기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봤다. 현대건설 등 기존 건설 업체는 재무구조가 취약하여 수주능력이 없었으며 우리 회사는 재무구조가 좋아 최고의 수주경쟁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때가 아니면 절대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도곡동 부지 내 포스코트를 건설하게 되었다. 부산 센텀파크와 건대 스타시티 성공담 등도 잊지 못할 기억들이다.”

 

재임 중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분당 프로젝트 포기로 인한 손실이 매우 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국내 토지거래 사상 최대 규모의 위약금으로,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로서는 계약금을 포기하는 것이 대규모 위약금과 잔금을 지불하는 것 보다 낫다고 판단하고 내린 결단이었지만,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분당 파크뷰 분양 성공으로 손실을 만회해서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주택사업 성공과 함께 기술중시 경영도 재임 중 큰 업적이었습니다. 기술력 강화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성과들이 있었는지요?

“부임을 해서 제철 분야 경쟁력을 점검해 보니 문제가 많았다. 포스코 시절부터 다져온 사업관리 능력은 뛰어났으나, 가장 중요한 엔지니어링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R&D 분야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우선 고로, 표면처리 기술 등 강점 분야부터 다지면서 부족한 면을 채워나갔다. 그 결과 이란 타바존과 중국 곤명강철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어 큰 보람을 느꼈다. 더욱이 오늘날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관제철소 건설 능력을 갖춘 것을 보니 전임자로서 대단히 자랑스럽다.”

 

재임 시 남기신 업적을 바탕으로 그 동안 포스코건설은 지속적으로 성장해왔습니다. 창립 20주년을 맞아 후배들이 더욱 분발하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수주액이 10조 원을 넘어서고, 해외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니 우선 임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앞으로도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세계적인 기술경쟁력이 필요한데, 그 기본 바탕은 주인의식이다. 포스코가 세계적 기업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전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했기 때문이다.”

 

<역대 CEO 인터뷰_고학봉 전 사장>

내실을 다지고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하길

고학봉 전 사장은 1969년 포스코에 입사, 포스코의 미국 현지법인인 UPI 수석부사장으로 재임 중 1995년 2월 해외담당 사장으로 선임되면서 포스코건설에 합류했다. 포스코건설 창립의 일원으로서 10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회사의 영광과 고난을 함께했다. 그 기간 동안 포스코건설은 국내 건설사 순위 37위에서 일약 7위까지 성장했다.

 

포스코건설이 출범할 당시 건설업계는 성수대교 붕괴사고 등 사회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았습니다. 이 같은 시기에 건설업을 시작하면서 무엇인가 남다른 각오가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담합과 뒷거래, 부실시공 같은 고질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따라서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건설문화를 확 바꿔보자는 의도를 가지고 출발했으며, 무담합, 무덤핑, 무부실을 창업정신으로 내걸었다.”

 

회사가 사업기반을 갖춰가던 과정과 IMF 이후 고도 성장하기까지 근 10년의 시간을 함께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지요?

“좋은 순간들이 많았지만 건대 스타시티, 부산 센텀파크 등 주택사업 추진과정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주택사업 성공비결은 포스코에서 물려받은 시공 품질 정신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제철소를 건설하면서 하자가 있는 건물은 다이너마이트로 폭발시켜서 다시 지으라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시공 품질을 강조했다.”

 

회사가 성장하기까지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일반건설에 진출하기까지 경쟁업체들의 견제가 심했으며, IMF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기억은 무엇인지요?

“구조조정 과정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직원들을 내보낼 때가 가장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회사가 곧바로 위기를 극복하고 많은 인력을 다시 확충해 다소나마 미안함을 덜 수 있었다. 그들의 살신성인과도 같은 구조조정 덕에 회사가 재무적 안정을 되찾아 고도성장할 수 있었다.”

 

포스코건설 창립 20주년을 맞아 감회가 남다르리라 생각됩니다. 회사 창립의 일원이자 선배로서 앞으로 후배들이 더욱 분발하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업계 3위와 수주액이 14조 원을 넘어서는 등 그 동안의 성과를 지켜보며 포스코건설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아직까지 건설경기가 많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럴 때 일수록 내실을 다져야 하며, 아울러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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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1. “인천 송도에 글로벌 경제중심 도시를 짓다”

# “바다에 잠긴 땅을 팔겠다니, 사기 당하는 기분이었다

출범 10년 이후 포스코건설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았다. 무서운 10대의 질주가 계속됐다. 청라, 영종, 송도 개발과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의 호재가 몰려있던 인천으로 달려갔고, 그 중에서도 송도를 선택하고 집중했다. 그 곳에서만 전체 수주량의 40%가 쏟아져 나와 포스코건설은 폭풍 성장 이후 또 한 번의 도약기를 맞이했다.

송도 이야기는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송도의 꿈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인천시민들은 인천의 번영을 바라며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민선 시장을 뽑았고, 인천시는 시민들의 열망을 반영해 송도 개발을 추진했다.

송도 개발의 원동력은 인천국제공항이었다. 인천시는 세계적 국제공항을 기반으로 동북아시아의 허브도시를 구상했다. 그러나 마땅한 부지가 없었다. 구도심 재개발은 꿈을 실현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무엇을 하던지 모든 것이 가능한 그런 백지 상태의 부지가 필요했다. 엉뚱하게도 그들은 그 해답을 연수구 동춘동 앞바다에서 찾았다. 이렇게 바다를 매립해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돈키호테적 발상에 따라 송도 개발의 서막이 올랐다.

그러나 송도 개발은 IMF를 겪으면서 인천시민들의 염원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2000년 들어 재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천시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이었다.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그들은 외자유치를 모색했다. 정부 역시 SOC사업에서 외화조달에 목말라 하던 터라 인천시의 외자유치 활동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인천시는 외자유치 과정에서 재미교포 제이킴 박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원자력발전소를 짓는데 도움을 준 인물이기도 했다. 제이킴 박사는 미국에서 가능성 있는 투자자 물색에 나서 게일사를 추천했다. 미국 뉴저지에 본사를 둔 게일사는 당시 미국 전역과 유럽에서 활발한 부동산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게일사와 인연을 맺은 인천시는 인천국제공항과의 접근성을 강조하면서 송도신도시를 동북아 허브도시로 적극 홍보했다. 게일사는 투자를 결정하기 전 한국을 찾았고, 인천을 방문한 게일사 일행은 헬기를 타고 송도를 둘러보았다.

“사기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바다에 잠긴 땅을 보여주면서 전망이 좋으니까 투자하라니 말문이 다 막혔다.” (스탠 게일 게일사 회장)

봉이 김선달 식의 사업제의에 선뜻 투자결정을 할 수 없었지만, 게일사는 동북아 허브공항이 될 인천국제공항의 유혹을 좀체 떨쳐내지 못했다. 결국 게일사는 3가지 조건을 내걸면서 여운을 남겼다. 그들은 ‘3가지 조건을 충족하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으니 그때 다시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한국을 떠났다. 3가지 조건이란 이랬다.

첫째, 송도와 공항을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해 접근성을 높일 것.

둘째,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한 특별한 대책을 강구할 것.

셋째, 믿을 만한 한국계 파트너로 합작투자를 구성할 것.

 

# 외국상인들로 붐볐던 개항시대 인천을 꿈꾸다

인천시는 게일사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하기로 했다. 3가지 조건에 따라 이후 그 길이가 18.38k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긴 교량인 인천대교가 탄생했고,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경제자유구역 특별법을 제정했다.

문제는 파트너 선정이었다. 인천시가 대형 건설사들에게 구애를 펼치며 동분서주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서열에 따라 구애를 하다 보니 그 순서가 포스코건설까지 왔다. 포스코건설로서도 결단이 쉽지 않았다. 당시 IMF가 지나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건설경기가 회복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막대한 투자에 대한 성공 가능성을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포스코건설에게는 제철보국이라는 DNA가 있었다. 민간기업이지만 국민기업 포스코의 피를 물려받아 국가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인천시와 인천시민의 염원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였다.

인천시민들은 100년 전 개항시대의 번영을 되살리길 바라고 있었다. 청나라, 러시아, 일본 등 외국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그들의 열망 앞에 약속했다. 외국기업들이 일하기 편한 그런 수준 높은 국제도시를 만들겠다고. 포스코건설의 결정에 포스코 역시 칭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생전에 박태준 회장은 ‘포스코가 1970년대에 포항제철소를 건설하고 1980년대에 광양제철소를 지어 나라의 경제를 이끌어갔는데, 2000년대 들어서는 포스코건설이 포스코다운 사업을 하고 있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그만큼 송도 개발은 21세기 국가 성장전략의 핵심사업이었다.” (조용경 전 부사장)

포스코건설의 참여로 송도 개발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게일사는 파트너의 상대가 포스코건설이라는데 크게 만족했다. 든든한 포스코의 후광이 일단 마음에 들었고, 민간기업이긴 하나 국민기업의 성격이 강한 만큼 일반기업처럼 한국 물정을 잘 모르는 외국계 기업이라고 해서 이용해 먹거나 쉽게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2002.03.19 송도국제도시개발 유한회사(NSIC) 합작법인 설립송도 국제 비즈니스센터 조성 세부실행 협약

2002.03.19 송도국제도시개발 유한회사(NSIC) 합작법인 설립송도 국제 비즈니스센터 조성 세부실행 협약

2002년 4월 송도 개발을 이끌어갈 포스코건설(지분 30%)과 게일사(70%) 합작의 ‘송도국제도시개발 유한회사(NSIC)’가 탄생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3년 8월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로 송도, 청라, 영종 세 지역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했다. 세 곳 중 청라지구는 국제금융과 레저산업 중심이었고, 영종지구는 물류 및 관광산업 중심이었으며, 송도지구는 국제업무와 지식기반산업 중심의 경제자유구역이었다.

송도지구, 즉 송도국제도시는 매립지가 11개 공구에다 그 규모가 5330만 ㎡이었고, 계획인구는 25만 명이었다. 단지계획에서는 포스코건설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업무단지가 중심에 있으며, 그 주변으로 연세대학교 송도캠퍼스가 있는 국제화복합단지, 포스코 글로벌R&D센터가 있는 사이언스빌리지 및 첨단산업클러스터, 바이오기업 셀트리온과 인천대학교가 위치한 바이오단지, 연구기관들이 밀집한 지식정보산업단지, 151층의 인천타워가 계획된 랜드마크시티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신항물류단지 및 아암물류단지 등이 계획돼 있었다.

송도국제도시의 핵심인 국제업무단지는 그 규모가 578만 ㎡에 투자자금이 127억 달러, 한화로는 16조 원에 이르렀고, 대부분의 개발공사를 포스코건설이 수행함으로써 송도사업이 회사의 성장을 이끌었다. 특히 인천 경제자유구역 중 송도국제업무단지만이 유일한 민간개발사업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

“송도 투자는 국가적 사명도 있었지만, 결단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인천시와 게일사가 맨해튼이나 싱가포르보다 위치가 좋다고 사업성을 자신했지만, 사업 규모가 너무나 커서 솔직히 겁이 났다. 오랜 고민 끝에 리스크관리 차원에서 게일사에게 3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30%만 투자한다. 둘째, 모든 시공은 우리가 맡는다. 셋째, 보증은 안 선다. 이 같은 조건을 게일사가 받아들여 송도 투자를 결단하게 됐다.” (박득표 전 회장)

 

# 퍼스트월드 완판, 송도국제업무단지 성공예감
2003.01.16 송도 국제 비즈니스센터 조성 세부실행 협약

2003.01.16 송도 국제 비즈니스센터 조성 세부실행 협약

경제자유구역 지정 직후 송도국제도시는 1, 2, 4공구만 매립이 완료되고, 3공구가 마무리 단계에 있는 등 매립 실적이 저조한 실정이었다. 그나마 송도국제도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국제업무단지 구역인 1, 3공구가 빠른 진행을 보이고 있어 개발공사를 가장 먼저 시작할 수 있었다.

2003년 10월 NSIC가 9000만 달러 규모의 자금조달에 성공하면서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이 본궤도에 올랐다. 이 자금으로 NSIC는 퍼스트월드와 컨벤시아 일대 33만 ㎡의 부지를 확보했고, 이어서 2004년 7월 1억 8000만 달러의 자금조달에도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그해 11월에 컨벤시아가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아직까지 투자시장의 반응이 국제업무단지 개발의 사업성공에 대해 회의적이어서 추가 자금조달에 차질이 예상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의 분석도 비관적이었다. 국제업무단지 민간개발의 특징은 개발이익의 사회 환원이었다. 그 개념에 따라 컨벤시아, 중앙공원, 국제학교, 아트센터 등을 기부체납하자면 주택 분양에서 그만한 수익이 나와 줘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송도 주변 아파트 분양가는 3.3㎡당 600만 원 수준이었다. 그 수준에 맞추게 되면 엄청난 적자가 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 수준보다 2배 정도의 분양가를 책정해야만 개발사업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고민 끝에 포스코건설은 승부를 걸었다. 먼저 동북아 허브도시 송도의 성공적 미래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국제적인 규모의 최첨단 인프라와 친환경 도시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리고 2005년 5월 분양사업의 첫 주자였던 더샵 퍼스트월드를 과감하게 3.3㎡당 1200만 원대에 내놓았다.

과감한 배팅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60대 1이라는 뜨거운 청약 열기 속에 분양이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부동산 경기가 좋았다지만, 퍼스트월드 완판에 포스코건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포스코건설은 퍼스트월드 완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는 이후 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 추진의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2005.5.4 송도 더샵 퍼스트월드 모델하우스(마케팅센터) 오픈식

2005.05.04 송도 더샵 퍼스트월드 모델하우스(마케팅센터) 오픈식

퍼스트월드의 분양 성공은 송도의 미래에 대해 반신반의하며 관망을 하던 투자자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분양 직후인 2005년 6월 NSIC는 국민은행, 우리은행, ABN암로은행 등과 1조 5000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체결했다. 이는 공공기관이나 국책은행이 아닌 민간개발사업으로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 파이낸싱이었다. 이 자금으로 NSIC는 사업부지를 추가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후폭풍도 있었다. 퍼스트월드가 분양에 성공하자 일부 언론에서는 인천시가 헐값에 부지를 넘겼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이를 인천시가 방어하는 과정에서 주거·업무·상업시설에 대한 연동제가 나왔다.

NSIC와 포스코건설은 크게 당황했다. 모든 시설을 동시에 개발하게 되면 자연히 분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NSIC와 포스코건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2005년 11월 결국 연동제가 반영된 사업계획이 정부의 승인을 통과했다.

연동제는 NSIC와 포스코건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연동제 적용 이후 2009년까지 센트럴파크, 하버뷰, 커낼워크, 그린에비뉴 등 6곳밖에 분양하지 못했다. 이후 부동산 침체기까지 겹치면서 개발연동제가 송도 개발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국내외 기업 유치 위해 서울사무소 송도이전 추진
2006.03.08 송도국제학교 착공식

2006.03.08 송도국제학교 착공식

분양이 좀 늦어지긴 했으나, 2차 파이낸싱 성공 이후 국제업무단지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2006년 송도국제학교 착공에 이어 3차부지 매입 과정에서 92만 ㎡를 확보했으며, 2007년에는 중앙공원과 동북아무역타워(NEAT 타워) 착공과 함께 4차 자금조달에도 성공했다.

2007년 11월 NSIC는 신디케이트론 주간사인 신한은행을 비롯한 국내 16개 금융기관과 총 2조 5000억 원 규모의 파이낸싱 계약을 체결했다. 이 역시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파이낸싱이었다. 이 자금은 2005년 이뤄진 송도국제업무단지 3차 파이낸싱 자금 1조 5000억 원을 상환하는데 사용됐으며, 특히 NSIC는 이 자금으로 4차부지 매입에 나서 국제업무단지에 할당된 1, 3공구의 토지를 모두 성공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순조롭진 않았다. 투자유치가 좀체 풀리지 않았다. 분양시장은 달아올랐으나, 국내기업이나 외국기업이나 관망만 할 뿐 선뜻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인천시, NSIC, 포스코건설 등이 ‘바이 인천(Buy Incheon)’을 외치며 갖은 노력을 펼쳤으나, 국내외 투자유치는 진전이 없었다.

투자유치 부진 요인으로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도시개발을 하드웨어로 정의할 때 소프트웨어는 투자여건 조성을 의미한다.

먼저 외국기업 유치를 위해 규제 완화와 세제지원 혜택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외국기업 혜택에 비해 국내기업을 위한 유인책도 부족했다. 지역우선공급제도 역시 투자유치에는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국내외 기업을 송도로 유치하기 위해 사옥이전을 결정했다. 사옥이전은 송도국제도시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과 투자를 끌어들이는 기폭제가 될 것이며, 인천지역 경제활성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한수양 전 사장)

투자유치가 부진한 가운데 2006년 초 포스코건설은 서울사무소 송도 이전이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포항과 광양에 이어 송도에 제3의 제철소를 짓는다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내린 결단이었다.

사옥이전 문제는 일부 언론의 오보로 본사 이전으로 와전돼 2007년 초 포항이 들썩이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태에 경북지사와 포항시장 등이 포스코건설 본사를 항의 방문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한수양 사장이 해명하느라 진땀께나 흘렸다.

포스코건설이 송도사옥 포스코이앤씨(POSCO E&C)타워 착공으로 투자 분위기를 띄우는 가운데 2009년 9월 대형 이벤트 하나가 송도국제도시에서 열렸다.

인천세계도시축전이 바로 그 주인공으로, 해외 105개국 도시, 국내 32개 도시 등 국내외 137개 도시와 1500개 글로벌 기업이 참가한 세계 최초 초대형 도시축제였다. 인천세계도시축전을 찾은 방문객들은 동북아 비즈니스 허브도시로 개발되고 있는 송도국제도시의 눈부신 발전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인천세계도시축전 이후 또 하나의 초대형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2014년에 인천아시안게임이 계획돼 있었다. 2009년 당시 포스코건설은 인천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투자유치 분위기가 더욱 달아오를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 송도국제도시의 중심 국제업무단지를 가다
2007.1.1 송도 국제업무단지 착공식

2007.01.01 송도 국제업무단지 착공식

서울서 송도국제도시를 가려면 제2경인고속도로나 제3경인고속도로를 한숨에 내달리면 된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송도에 진입하면 가장 먼저 퍼스트월드와 NEAT타워가 시야에 들어온다. 송도의 랜드마크인 두 빌딩을 지나가다 보면 흡사 홍콩의 초고층 빌딩촌에 온 느낌이 들 만큼 이국적인 풍경이 이어진다.

송도국제도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국제도시의 중심인 국제업무단지에 가야하고, 국제업무단지 중에서도 중심인 포스코이앤씨타워에 올라야 한다.

탁 트인 시야 정면으로 센트럴파크(중앙공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 못지않다. 중앙수로는 바다에 닿아 있고, 수상택시가 지나간다. 센트럴파크 넘어 주상복합시설인 센트럴파크 빌딩의 현란한 디자인이 또 다시 시선을 사로잡는다. 물결무늬, 역경사 각도 등 다양한 디자인이 이채롭다.

건물 뒤편 풍경도 장관이다. 주거단지 넘어 저 멀리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이 보인다. 이 골프장에서는 미국과 세계연합팀 간 골프대항전인 2015년 프레지던츠컵이 아시아 최초로 열릴 예정이다. 살짝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면 시원스레 바다가 펼쳐지고, 바다 위로 인천대교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송도국제도시는 설계 당시부터 동북아 허브도시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글로벌 비즈니스 중심지로 도시계획이 추진됐다. 외국인들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트레이드타워인 NEAT타워, 컨벤션센터인 컨벤시아를 비롯해 국제학교, 골프장, 대학, R&D센터, 센트럴파크는 물론 광역 교통 인프라까지 완벽하게 갖추었다.

특히 인천대교는 송도와 공항의 거리를 15분으로 단축시켰다. 1, 2, 3경인고속도로가 관통함으로써 서울과 수도권의 접근성을 높였고, 인천지하철 1호선도 6개 구간에 걸쳐 송도국제도시를 관통하도록 했다. 제2외곽순환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서울과 수도권의 접근성이 더욱 향상될 전망이다.

포스코건설이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국제업무단지의 마스터플랜은 미국 최대 설계사이자 일본 롯본기힐즈, 중국 상하이 파이낸셜센터 등 아시아에서도 활동이 활발한 KPF가 맡았다. KPF는 뉴욕, 파리, 베니스, 시드니 등 세계 주요 도시들의 장점을 벤치마킹해서 친환경적 미래형 첨단도시로 송도국제업무단지의 마스터플랜을 완성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마스터플랜의 콘셉트에 따라 친환경적 미래형 첨단도시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세계적인 도시에 걸맞게 미국의 그린빌딩위원회가 주도하는 친환경 건축물 인증제도인 리드(LEED) 인증을 모든 건축물에 적용함으로써 지속개발 가능한 도시를 추구했다. 모든 건축물에 고효율 에너지 설비, 자원 재활용, 환경공해 저감기술, 폐기물 감축 등 다양한 친환경 기술을 적용했으며, 또 자전거 전용도로 확충, 쓰레기 중앙 집하시스템 적용 등으로 탄소배출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 국제업무시설-컨벤시아, 포스코이앤씨, NEAT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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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센트로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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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컨벤시아 전경

국제업무단지는 센트럴파크를 중심으로 국제업무시설과 공공시설이 밀집해 있고, 그 주변으로 상업시설과 주거시설이 산재해 있다. 그 외에 외곽으로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이 자리잡고 있다. 국제업무시설로는 컨벤시아, 포스코이앤씨타워, NEAT타워, 센트로드를 비롯해 G-타워,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스퀘어 등이 있다.

컨벤시아는 국제업무단지 시설물 중 가장 먼저 조성됐다.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5만 4157㎡ 규모의 초대형, 초현대식 국제컨벤션센터인 컨벤시아는 2005년 3월 착공해 2008년 8월에 준공했다.

컨벤시아는 기둥이 없는 대공간 전시장이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전체 지붕 구조물을 144m 간격의 단지 4곳의 지점에서 지탱하며, 실내 최대 높이는 32m에 이른다. 2010년 5월에는 아시아지역 컨벤션센터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친환경 건축물 국제인증인 LEED-NC(New Construction) 인증을 획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컨벤시아는 한국의 중첩된 산맥을 형상화한 독특한 구조를 갖춰 지붕이 마치 태백산맥 능선이 펼쳐지듯 구불구불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지붕구조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특이하다 보니 시공 당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3D 설계와 컴퓨터 제어 커팅이 적용됐고, 최고 난이도의 용접기술이 동원됐다. 또 타일형태의 지붕 패널 1만 3000장을 맞춰 얹는 작업은 고난이도의 퍼즐이었다. 지붕구조의 대구경 파이프는 도로 운반을 위해 16m 단위로 현장에 들여와 3개씩 조립해 가설 기둥 위에 올려놓고 용접 작업이 이뤄졌다. 용접이 끝난 후 166m의 대구경 파이프 트러스를 받치고 있던 52개 가설 기둥들이 차례로 제거되면서 마침내 컨벤시아가 탄생했다.” (황귀남 전 상무, 당시 현장소장)

2010.05.18 송도사옥 준공식 및 입주식

2010.05.18 송도사옥 준공식 및 입주식

송도 포스코E&C타워 전경

송도 포스코E&C타워 전경

2007년 9월 기공, 2010년 5월 준공한 포스코건설 송도사옥인 포스코이앤씨타워는 지하 5층, 지상 39층 규모의 쌍둥이 빌딩이다. 송도국제도시의 화려한 전경과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국제업무단지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14개의 전망엘리베이터로 그 경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층까지 개방된 로비는 호텔급 수준이다. 이 중 2층에는 포스코건설, 포스코엔지니어링 직원 자녀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는 어린이집인 ‘포키즈’가 들어서 있다.

3층은 비즈니스홀과 회의실로 구성돼 있으며, 회의실 규모는 대회의실 4개, 중회의실 3개, 소회의실 5개이다. 로비 4층에 위치한 450~470석 규모의 다목적홀은 동시통역실이 설치돼 있어 국제회의에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문화공연이나 영화감상실로도 활용해 인천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포스코이앤씨타워는 국제업무지구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송도국제도시의 중앙도로를 끼고 있어 인천대교와 바로 연결되고, 1, 2, 3경인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서울까지 4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더욱이 인천지하철 1호선 센트럴파크역과 곧바로 연결되는 등 최적의 교통 인프라를 갖추었다.” (김정용 상무보, 당시 현장소장)

동북아무역타워인 NEAT타워 전경

동북아무역타워인 NEAT타워 전경

동북아무역타워인 NEAT타워는 지하 3층, 지상 68층, 높이 312m의 초고층 빌딩이며, 업무시설과 호텔, 오피스텔로 구성돼 있다. 시행사는 NSIC와 모건스탠리 합작회사인 NSC Linkage2이며, 시공은 2006년 8월 착공 당시 포스코건설과 대우건설이 맡았다.

그러나 2009년부터 시행사가 자금난을 겪으면서 공사 중단과 재개가 반복됐다. 그러다 2013년 초 사업주체이기도 한 포스코건설이 대우건설과 정산을 끝내고 단독 시공에 나서면서 새롭게 돌파구를 찾았다. 더욱이 2013년 7월 대우인터내셔널이 송도 입주를 결정하고 NEAT타워를 인수함으로써 NSIC는 유동성 위기 부담을 덜었다.

NEAT타워는 2014년 7월 준공됐다. 준공 이후 36층부터 64층까지 ‘오크우드 프리미어’ 호텔이 입주해 영업 중이며, 2015년 상반기에는 대우인터내셔널이 입주할 예정이다.

 

 

 

 

 

# 공공기반시설-센트럴파크, 국제학교, 트라이볼
2010.9.10 채드윅국제학교 준공식

2010.09.10 채드윅국제학교 준공식

공원 녹지를 비롯해 문화, 교육, 의료 등 공공기반시설에서는 포스코건설이 센트럴파크, 송도국제학교, 트라이볼, 인천도시계획관을 건설했으며, 아트센터가 한창 건설 중에 있다. 그 외 삼성컨소시엄이 국제병원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2006년 5월 착공, 2009년 6월 준공된 송도국제학교는 7만 1200여 ㎡ 부지 위에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로 이루어져 있으며, 21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동북아 최고 수준의 교육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미국 사립학교 채드윅스쿨이 운영하고 있는 송도국제학교는 미국과 영국의 사립 교육기관에 버금가는 교과과정을 제공함에 따라 2009년 개교 이래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수업은 세계 각국에서 채용된 전문 교사진이 진행하며, 학습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평균 교사 1명이 10명의 학생을 맡고 있다.

2007년 3월 착공, 2009년 8월 준공된 센트럴파크는 조각 정원, 수변산책 정원, 초지원, 테라스 정원 등 4개 테마로 조성됐으며, 정자나 돌담 등 한국적인 전통을 살렸다. 주차장 규모도 엄청나다. 지하 주차장 면적이 7만 8637㎡로 주차 대수가 2715대에 이른다.

“센트럴파크는 약 40만 ㎡의 초대형 공원이다. 특히 이곳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순환시키기 위한 수로를 만들었는데,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작업이어서 건설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채영태 전 부장, 당시 현장소장)

국제학교 전경

국제학교 전경

트라이볼

트라이볼

인천 앞바다의 해수를 끌어들여 조성한 중앙수로는 길이 1.8km, 폭 12m~110m 규모의 거대한 인공수로이다. 외형뿐만 아니라 빗물 이용시설도 눈여겨볼 만하다. 포스코건설은 센트럴파크에 7개의 빗물 저장소를 설치해 물 사용량을 절감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장된 빗물은 조경 및 청소용수로 활용돼 상당한 금액의 관리비를 절약할 수 있다. 특히 이 수로에서는 수상택시, 보트, 수상자전거, 카누 등을 즐길 수 있어 센트럴파크가 레저스포츠 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트라이볼은 인천을 상징하는 하늘과 바다, 그리고 다이내믹한 광장의 개념이 물 위에 떠있는 도자기 형상으로 표현된 건축물이다. 바닥과 벽의 전통적인 구분이 사라진 3차원 표면을 따라 전시와 공연, 회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가능하다.” (최종훈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트라이볼은 세계 최초의 역쉘(易 Shell)구조로 송도, 청라, 영종지구 등 인천 경제자유구역의 3개 지구를 상징하는 주발 3개가 붙어 있는 모습이다. 1만 2300㎡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2700㎡ 규모이며, 2008년 10월 착공해 2010년 2월에 완공했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은 전기·기계·대기실 등으로 사용되고, 지상 2,3층은 500명이 입장해 연극과 음악회 등을 감상할 수 있는 공연장과 이벤트홀, 다목적홀, 디지털라이브러리 등으로 꾸며졌다. 이곳에서는 전문적인 예술 분야에 관람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 전시프로그램 등이 운영되고 있다. 2010년 말에는 독특한 외관으로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주최하는 우수디자인 시상식에서 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2009년 6월 착공한 아트센터는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와 같이 수변 공간에 조성됐다. 11만 2300㎡ 부지에 문화단지와 지원단지로 구분된다.

문화단지에는 1800석 규모의 메인 콘서트홀을 비롯해 오페라하우스, 다목적홀 등 세계적 수준의 음향시설을 갖춘 공연장이 들어서 있다. 특히 공연장 음향시설 설계에는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참여했으며, 그가 지휘하는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아트센터에 상주할 예정이다. 그 외에도 아시아 현대미술관, 음악학교 및 디자인학교 등이 조성돼 있으며, 지원단지에는 호텔, 주거 및 상업시설, 오피스텔 등이 들어서 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컨벤시아, 센트럴파크, 송도국제학교, 트라이볼, 아트센트 등을 기부 채납함으로써 개발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당초의 약속을 지켰으며, 더불어 인천지역에서 다양한 사회공헌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충실히 실천함으로써 인천의 번영을 함께할 지역 대표기업으로서의 위상을 다질 수 있었다.

2008.9.11 IFEZ 송도 아트센터 착공식

2008.09.11 IFEZ 송도 아트센터 착공식

건설 중인 아트센터 부지

건설 중인 아트센터 부지

 

 

 

 

 

 

 

 

 

# 주거 및 상업시설-퍼스트월드, 센트럴파크·, 커낼워크
송도 퍼스트월드 전경

송도 퍼스트월드 전경

2009.01.20 송도 더샾 퍼스트월드 점등식

2009.01.20 송도 더샾 퍼스트월드 점등식

주거시설에 있어서는 포스코건설이 퍼스트월드, 센트럴파크Ⅰ,Ⅱ, 엑스포, 하버뷰, 그린에비뉴 등 대부분의 아파트를 시공했으며, 그 외 대우건설과 GS건설도 시공에 참여했다. 상업시설로는 포스코건설이 커낼워크와 파크호텔 등을 시공했으며, 대우건설이 쉐라톤호텔을 시공했다. 롯데자산개발에서는 삼성동 코엑스몰이나 영등포 타임스퀘어 같은 백화점, 대형마트, 영화관, 아이스링크, 오피스텔 등의 복합상업시설을 추진하고 있다.

2005년 5월 착공, 2009년 1월 준공된 더샵 퍼스트월드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송도국제업무단지의 마스터플랜을 수립한 KPF가 설계를 맡았으며, 2005년 10월에는 미국 건축가협회(AIA) 최대지부인 뉴욕지부로부터 미준공부문 주거설계상을 수상했다.

선정 사유에 대해 주최측은 “고층 주거환경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성향과 뉴욕, 보스톤, 런던에서 선호하는 담이 낮은 저층주거 형태를 조화롭게 섞어놓은 것이 특징이며, 외관은 한국전통의 담장을 현대적으로 해석 설계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퍼스트월드는 64층 규모의 초고층 타워형 건물 4개 동을 포함해 모두 12개 동으로 구성돼 있으며, 아파트 1596세대와 오피스텔 1058실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내에 폭 16m, 길이 350m의 중앙수로 및 수경공간을 설치해 눈길을 끌고 있다.

녹지율도 31%에 달해 친환경 주거단지로 손색이 없다. 국내 최초로 수냉식 냉방 시스템을 도입하고 가구마다 기존 통신 속도를 10배 이상 끌어올리는 광케이블을 설치하는 등 최첨단 통신 인프라를 구축했다.

뉴욕의 센트럴파크가 모델인 중앙공원(센트럴파크)과 인접해 있는 주상복합 센트럴파크는 Ⅰ,Ⅱ,Ⅲ 시리즈로 계획됐으며, 2014년 현재 주상복합 센트럴파크 Ⅰ,Ⅱ까지 건설됐다. 13-1, 13-2

2007년 5월 착공, 2010년 11월 준공된 더샵 센트럴파크Ⅰ은 지하 2층, 지상 47층, 3개동 규모로, 다양한 평형의 729가구로 구성돼 있으며, 2007년 11월 착공, 2011년 8월 준공된 센트럴파크Ⅱ는 지하2층, 지상42~49층, 3개동으로 주택형과 펜트하우스 등 632가구로 구성돼 있다.

특히 센트럴파크 시리즈는 도시 미관을 고려해 성냥갑 같은 기존 아파트들의 천편일률적인 외관을 지양했다. 송도국제도시의 랜드마크에 걸맞게 독특한 디자인 양식을 도입했다. 센트럴파크Ⅰ은 한국의 전통 ‘바구니’와 ‘파도’를 형상화한 물결무늬 외관과 입면 디자인을 통해 율동적인 느낌의 통일감과 변화감을 느끼도록 설계했다. 센트럴파크Ⅱ는 바람에 움직이는 대나무 가지를 형상화한 휘어진 굴절입면 디자인을 통해 마치 건물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설계를 완성하기 위해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모든 요소를 섬세하게 고려했다. 다소 특이한 설계로 인해 시공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으나, 도면 해석에 골몰하며 작업자들과 끊임없는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학구 Director, 당시 센트럴파크Ⅰ 현장소장)

2008년 1월 착공, 2009년 10월 준공된 커낼워크는 지하 2층, 지상 5층의 8개 동으로, 전체 블록의 길이가 800m에 달하는 국내 최초의 스트리트형 쇼핑몰이다.

위치는 송도국제업무단지에서 초고층 업무지구와 아파트 단지의 접점지역에 있으며, 경관상의 여유를 확보하고 바람길을 터주기 위해 저밀도로 설계됐다. 단지 중앙에는 청계천을 연상하게 하는 폭 5m의 인공수로가 조성돼 있다. 1~2층은 이랜드그룹에서 유럽형 쇼핑몰 NC큐브를 운영 중이며, 3~5층은 고급오피스텔로 구성돼 있다.

커낼워크에는 수로 주변에 다양한 상업시설과 예술조형물, 야외 공연이나 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서 있다. 특히 인공수로를 중심으로 단지 양쪽에는 오피스텔과 함께 다양한 상업·문화시설들이 들어서 있어 문화와 쇼핑이 공존하는 명물거리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퍼스트월드를 시작으로 대박 신화를 이어가던 송도의 분양시장은 2009년부터 불길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커낼워크의 경우 2008년 8월 오피스텔 분양에서는 평균 190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으나, 단 6개월이 지나 2009년 3월에 실시된 상가 분양에서는 평균 1.6대 1에 그치는 저조한 실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선방했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포스코건설은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현실에서 향후 분양 일정을 놓고 고민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커낼워크 내부 전경

커낼워크 내부 전경

항공에서 본 커낼워크 전경

항공에서 본 커낼워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