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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1. “인천 송도에 글로벌 경제중심 도시를 짓다”

# “바다에 잠긴 땅을 팔겠다니, 사기 당하는 기분이었다

출범 10년 이후 포스코건설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았다. 무서운 10대의 질주가 계속됐다. 청라, 영종, 송도 개발과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의 호재가 몰려있던 인천으로 달려갔고, 그 중에서도 송도를 선택하고 집중했다. 그 곳에서만 전체 수주량의 40%가 쏟아져 나와 포스코건설은 폭풍 성장 이후 또 한 번의 도약기를 맞이했다.

송도 이야기는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송도의 꿈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인천시민들은 인천의 번영을 바라며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민선 시장을 뽑았고, 인천시는 시민들의 열망을 반영해 송도 개발을 추진했다.

송도 개발의 원동력은 인천국제공항이었다. 인천시는 세계적 국제공항을 기반으로 동북아시아의 허브도시를 구상했다. 그러나 마땅한 부지가 없었다. 구도심 재개발은 꿈을 실현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무엇을 하던지 모든 것이 가능한 그런 백지 상태의 부지가 필요했다. 엉뚱하게도 그들은 그 해답을 연수구 동춘동 앞바다에서 찾았다. 이렇게 바다를 매립해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돈키호테적 발상에 따라 송도 개발의 서막이 올랐다.

그러나 송도 개발은 IMF를 겪으면서 인천시민들의 염원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2000년 들어 재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천시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이었다.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그들은 외자유치를 모색했다. 정부 역시 SOC사업에서 외화조달에 목말라 하던 터라 인천시의 외자유치 활동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인천시는 외자유치 과정에서 재미교포 제이킴 박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원자력발전소를 짓는데 도움을 준 인물이기도 했다. 제이킴 박사는 미국에서 가능성 있는 투자자 물색에 나서 게일사를 추천했다. 미국 뉴저지에 본사를 둔 게일사는 당시 미국 전역과 유럽에서 활발한 부동산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게일사와 인연을 맺은 인천시는 인천국제공항과의 접근성을 강조하면서 송도신도시를 동북아 허브도시로 적극 홍보했다. 게일사는 투자를 결정하기 전 한국을 찾았고, 인천을 방문한 게일사 일행은 헬기를 타고 송도를 둘러보았다.

“사기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바다에 잠긴 땅을 보여주면서 전망이 좋으니까 투자하라니 말문이 다 막혔다.” (스탠 게일 게일사 회장)

봉이 김선달 식의 사업제의에 선뜻 투자결정을 할 수 없었지만, 게일사는 동북아 허브공항이 될 인천국제공항의 유혹을 좀체 떨쳐내지 못했다. 결국 게일사는 3가지 조건을 내걸면서 여운을 남겼다. 그들은 ‘3가지 조건을 충족하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으니 그때 다시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한국을 떠났다. 3가지 조건이란 이랬다.

첫째, 송도와 공항을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해 접근성을 높일 것.

둘째,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한 특별한 대책을 강구할 것.

셋째, 믿을 만한 한국계 파트너로 합작투자를 구성할 것.

 

# 외국상인들로 붐볐던 개항시대 인천을 꿈꾸다

인천시는 게일사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하기로 했다. 3가지 조건에 따라 이후 그 길이가 18.38k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긴 교량인 인천대교가 탄생했고,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경제자유구역 특별법을 제정했다.

문제는 파트너 선정이었다. 인천시가 대형 건설사들에게 구애를 펼치며 동분서주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서열에 따라 구애를 하다 보니 그 순서가 포스코건설까지 왔다. 포스코건설로서도 결단이 쉽지 않았다. 당시 IMF가 지나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건설경기가 회복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막대한 투자에 대한 성공 가능성을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포스코건설에게는 제철보국이라는 DNA가 있었다. 민간기업이지만 국민기업 포스코의 피를 물려받아 국가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인천시와 인천시민의 염원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였다.

인천시민들은 100년 전 개항시대의 번영을 되살리길 바라고 있었다. 청나라, 러시아, 일본 등 외국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그들의 열망 앞에 약속했다. 외국기업들이 일하기 편한 그런 수준 높은 국제도시를 만들겠다고. 포스코건설의 결정에 포스코 역시 칭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생전에 박태준 회장은 ‘포스코가 1970년대에 포항제철소를 건설하고 1980년대에 광양제철소를 지어 나라의 경제를 이끌어갔는데, 2000년대 들어서는 포스코건설이 포스코다운 사업을 하고 있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그만큼 송도 개발은 21세기 국가 성장전략의 핵심사업이었다.” (조용경 전 부사장)

포스코건설의 참여로 송도 개발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게일사는 파트너의 상대가 포스코건설이라는데 크게 만족했다. 든든한 포스코의 후광이 일단 마음에 들었고, 민간기업이긴 하나 국민기업의 성격이 강한 만큼 일반기업처럼 한국 물정을 잘 모르는 외국계 기업이라고 해서 이용해 먹거나 쉽게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2002.03.19 송도국제도시개발 유한회사(NSIC) 합작법인 설립송도 국제 비즈니스센터 조성 세부실행 협약

2002.03.19 송도국제도시개발 유한회사(NSIC) 합작법인 설립송도 국제 비즈니스센터 조성 세부실행 협약

2002년 4월 송도 개발을 이끌어갈 포스코건설(지분 30%)과 게일사(70%) 합작의 ‘송도국제도시개발 유한회사(NSIC)’가 탄생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3년 8월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로 송도, 청라, 영종 세 지역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했다. 세 곳 중 청라지구는 국제금융과 레저산업 중심이었고, 영종지구는 물류 및 관광산업 중심이었으며, 송도지구는 국제업무와 지식기반산업 중심의 경제자유구역이었다.

송도지구, 즉 송도국제도시는 매립지가 11개 공구에다 그 규모가 5330만 ㎡이었고, 계획인구는 25만 명이었다. 단지계획에서는 포스코건설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업무단지가 중심에 있으며, 그 주변으로 연세대학교 송도캠퍼스가 있는 국제화복합단지, 포스코 글로벌R&D센터가 있는 사이언스빌리지 및 첨단산업클러스터, 바이오기업 셀트리온과 인천대학교가 위치한 바이오단지, 연구기관들이 밀집한 지식정보산업단지, 151층의 인천타워가 계획된 랜드마크시티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신항물류단지 및 아암물류단지 등이 계획돼 있었다.

송도국제도시의 핵심인 국제업무단지는 그 규모가 578만 ㎡에 투자자금이 127억 달러, 한화로는 16조 원에 이르렀고, 대부분의 개발공사를 포스코건설이 수행함으로써 송도사업이 회사의 성장을 이끌었다. 특히 인천 경제자유구역 중 송도국제업무단지만이 유일한 민간개발사업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

“송도 투자는 국가적 사명도 있었지만, 결단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인천시와 게일사가 맨해튼이나 싱가포르보다 위치가 좋다고 사업성을 자신했지만, 사업 규모가 너무나 커서 솔직히 겁이 났다. 오랜 고민 끝에 리스크관리 차원에서 게일사에게 3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30%만 투자한다. 둘째, 모든 시공은 우리가 맡는다. 셋째, 보증은 안 선다. 이 같은 조건을 게일사가 받아들여 송도 투자를 결단하게 됐다.” (박득표 전 회장)

 

# 퍼스트월드 완판, 송도국제업무단지 성공예감
2003.01.16 송도 국제 비즈니스센터 조성 세부실행 협약

2003.01.16 송도 국제 비즈니스센터 조성 세부실행 협약

경제자유구역 지정 직후 송도국제도시는 1, 2, 4공구만 매립이 완료되고, 3공구가 마무리 단계에 있는 등 매립 실적이 저조한 실정이었다. 그나마 송도국제도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국제업무단지 구역인 1, 3공구가 빠른 진행을 보이고 있어 개발공사를 가장 먼저 시작할 수 있었다.

2003년 10월 NSIC가 9000만 달러 규모의 자금조달에 성공하면서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이 본궤도에 올랐다. 이 자금으로 NSIC는 퍼스트월드와 컨벤시아 일대 33만 ㎡의 부지를 확보했고, 이어서 2004년 7월 1억 8000만 달러의 자금조달에도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그해 11월에 컨벤시아가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아직까지 투자시장의 반응이 국제업무단지 개발의 사업성공에 대해 회의적이어서 추가 자금조달에 차질이 예상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의 분석도 비관적이었다. 국제업무단지 민간개발의 특징은 개발이익의 사회 환원이었다. 그 개념에 따라 컨벤시아, 중앙공원, 국제학교, 아트센터 등을 기부체납하자면 주택 분양에서 그만한 수익이 나와 줘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송도 주변 아파트 분양가는 3.3㎡당 600만 원 수준이었다. 그 수준에 맞추게 되면 엄청난 적자가 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 수준보다 2배 정도의 분양가를 책정해야만 개발사업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고민 끝에 포스코건설은 승부를 걸었다. 먼저 동북아 허브도시 송도의 성공적 미래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국제적인 규모의 최첨단 인프라와 친환경 도시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리고 2005년 5월 분양사업의 첫 주자였던 더샵 퍼스트월드를 과감하게 3.3㎡당 1200만 원대에 내놓았다.

과감한 배팅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60대 1이라는 뜨거운 청약 열기 속에 분양이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부동산 경기가 좋았다지만, 퍼스트월드 완판에 포스코건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포스코건설은 퍼스트월드 완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는 이후 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 추진의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2005.5.4 송도 더샵 퍼스트월드 모델하우스(마케팅센터) 오픈식

2005.05.04 송도 더샵 퍼스트월드 모델하우스(마케팅센터) 오픈식

퍼스트월드의 분양 성공은 송도의 미래에 대해 반신반의하며 관망을 하던 투자자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분양 직후인 2005년 6월 NSIC는 국민은행, 우리은행, ABN암로은행 등과 1조 5000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체결했다. 이는 공공기관이나 국책은행이 아닌 민간개발사업으로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 파이낸싱이었다. 이 자금으로 NSIC는 사업부지를 추가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후폭풍도 있었다. 퍼스트월드가 분양에 성공하자 일부 언론에서는 인천시가 헐값에 부지를 넘겼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이를 인천시가 방어하는 과정에서 주거·업무·상업시설에 대한 연동제가 나왔다.

NSIC와 포스코건설은 크게 당황했다. 모든 시설을 동시에 개발하게 되면 자연히 분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NSIC와 포스코건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2005년 11월 결국 연동제가 반영된 사업계획이 정부의 승인을 통과했다.

연동제는 NSIC와 포스코건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연동제 적용 이후 2009년까지 센트럴파크, 하버뷰, 커낼워크, 그린에비뉴 등 6곳밖에 분양하지 못했다. 이후 부동산 침체기까지 겹치면서 개발연동제가 송도 개발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국내외 기업 유치 위해 서울사무소 송도이전 추진
2006.03.08 송도국제학교 착공식

2006.03.08 송도국제학교 착공식

분양이 좀 늦어지긴 했으나, 2차 파이낸싱 성공 이후 국제업무단지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2006년 송도국제학교 착공에 이어 3차부지 매입 과정에서 92만 ㎡를 확보했으며, 2007년에는 중앙공원과 동북아무역타워(NEAT 타워) 착공과 함께 4차 자금조달에도 성공했다.

2007년 11월 NSIC는 신디케이트론 주간사인 신한은행을 비롯한 국내 16개 금융기관과 총 2조 5000억 원 규모의 파이낸싱 계약을 체결했다. 이 역시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파이낸싱이었다. 이 자금은 2005년 이뤄진 송도국제업무단지 3차 파이낸싱 자금 1조 5000억 원을 상환하는데 사용됐으며, 특히 NSIC는 이 자금으로 4차부지 매입에 나서 국제업무단지에 할당된 1, 3공구의 토지를 모두 성공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순조롭진 않았다. 투자유치가 좀체 풀리지 않았다. 분양시장은 달아올랐으나, 국내기업이나 외국기업이나 관망만 할 뿐 선뜻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인천시, NSIC, 포스코건설 등이 ‘바이 인천(Buy Incheon)’을 외치며 갖은 노력을 펼쳤으나, 국내외 투자유치는 진전이 없었다.

투자유치 부진 요인으로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도시개발을 하드웨어로 정의할 때 소프트웨어는 투자여건 조성을 의미한다.

먼저 외국기업 유치를 위해 규제 완화와 세제지원 혜택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외국기업 혜택에 비해 국내기업을 위한 유인책도 부족했다. 지역우선공급제도 역시 투자유치에는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국내외 기업을 송도로 유치하기 위해 사옥이전을 결정했다. 사옥이전은 송도국제도시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과 투자를 끌어들이는 기폭제가 될 것이며, 인천지역 경제활성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한수양 전 사장)

투자유치가 부진한 가운데 2006년 초 포스코건설은 서울사무소 송도 이전이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포항과 광양에 이어 송도에 제3의 제철소를 짓는다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내린 결단이었다.

사옥이전 문제는 일부 언론의 오보로 본사 이전으로 와전돼 2007년 초 포항이 들썩이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태에 경북지사와 포항시장 등이 포스코건설 본사를 항의 방문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한수양 사장이 해명하느라 진땀께나 흘렸다.

포스코건설이 송도사옥 포스코이앤씨(POSCO E&C)타워 착공으로 투자 분위기를 띄우는 가운데 2009년 9월 대형 이벤트 하나가 송도국제도시에서 열렸다.

인천세계도시축전이 바로 그 주인공으로, 해외 105개국 도시, 국내 32개 도시 등 국내외 137개 도시와 1500개 글로벌 기업이 참가한 세계 최초 초대형 도시축제였다. 인천세계도시축전을 찾은 방문객들은 동북아 비즈니스 허브도시로 개발되고 있는 송도국제도시의 눈부신 발전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인천세계도시축전 이후 또 하나의 초대형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2014년에 인천아시안게임이 계획돼 있었다. 2009년 당시 포스코건설은 인천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투자유치 분위기가 더욱 달아오를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 송도국제도시의 중심 국제업무단지를 가다
2007.1.1 송도 국제업무단지 착공식

2007.01.01 송도 국제업무단지 착공식

서울서 송도국제도시를 가려면 제2경인고속도로나 제3경인고속도로를 한숨에 내달리면 된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송도에 진입하면 가장 먼저 퍼스트월드와 NEAT타워가 시야에 들어온다. 송도의 랜드마크인 두 빌딩을 지나가다 보면 흡사 홍콩의 초고층 빌딩촌에 온 느낌이 들 만큼 이국적인 풍경이 이어진다.

송도국제도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국제도시의 중심인 국제업무단지에 가야하고, 국제업무단지 중에서도 중심인 포스코이앤씨타워에 올라야 한다.

탁 트인 시야 정면으로 센트럴파크(중앙공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 못지않다. 중앙수로는 바다에 닿아 있고, 수상택시가 지나간다. 센트럴파크 넘어 주상복합시설인 센트럴파크 빌딩의 현란한 디자인이 또 다시 시선을 사로잡는다. 물결무늬, 역경사 각도 등 다양한 디자인이 이채롭다.

건물 뒤편 풍경도 장관이다. 주거단지 넘어 저 멀리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이 보인다. 이 골프장에서는 미국과 세계연합팀 간 골프대항전인 2015년 프레지던츠컵이 아시아 최초로 열릴 예정이다. 살짝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면 시원스레 바다가 펼쳐지고, 바다 위로 인천대교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송도국제도시는 설계 당시부터 동북아 허브도시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글로벌 비즈니스 중심지로 도시계획이 추진됐다. 외국인들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트레이드타워인 NEAT타워, 컨벤션센터인 컨벤시아를 비롯해 국제학교, 골프장, 대학, R&D센터, 센트럴파크는 물론 광역 교통 인프라까지 완벽하게 갖추었다.

특히 인천대교는 송도와 공항의 거리를 15분으로 단축시켰다. 1, 2, 3경인고속도로가 관통함으로써 서울과 수도권의 접근성을 높였고, 인천지하철 1호선도 6개 구간에 걸쳐 송도국제도시를 관통하도록 했다. 제2외곽순환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서울과 수도권의 접근성이 더욱 향상될 전망이다.

포스코건설이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국제업무단지의 마스터플랜은 미국 최대 설계사이자 일본 롯본기힐즈, 중국 상하이 파이낸셜센터 등 아시아에서도 활동이 활발한 KPF가 맡았다. KPF는 뉴욕, 파리, 베니스, 시드니 등 세계 주요 도시들의 장점을 벤치마킹해서 친환경적 미래형 첨단도시로 송도국제업무단지의 마스터플랜을 완성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마스터플랜의 콘셉트에 따라 친환경적 미래형 첨단도시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세계적인 도시에 걸맞게 미국의 그린빌딩위원회가 주도하는 친환경 건축물 인증제도인 리드(LEED) 인증을 모든 건축물에 적용함으로써 지속개발 가능한 도시를 추구했다. 모든 건축물에 고효율 에너지 설비, 자원 재활용, 환경공해 저감기술, 폐기물 감축 등 다양한 친환경 기술을 적용했으며, 또 자전거 전용도로 확충, 쓰레기 중앙 집하시스템 적용 등으로 탄소배출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 국제업무시설-컨벤시아, 포스코이앤씨, NEAT타워
7-1. night

송도 센트로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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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컨벤시아 전경

국제업무단지는 센트럴파크를 중심으로 국제업무시설과 공공시설이 밀집해 있고, 그 주변으로 상업시설과 주거시설이 산재해 있다. 그 외에 외곽으로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이 자리잡고 있다. 국제업무시설로는 컨벤시아, 포스코이앤씨타워, NEAT타워, 센트로드를 비롯해 G-타워,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스퀘어 등이 있다.

컨벤시아는 국제업무단지 시설물 중 가장 먼저 조성됐다.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5만 4157㎡ 규모의 초대형, 초현대식 국제컨벤션센터인 컨벤시아는 2005년 3월 착공해 2008년 8월에 준공했다.

컨벤시아는 기둥이 없는 대공간 전시장이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전체 지붕 구조물을 144m 간격의 단지 4곳의 지점에서 지탱하며, 실내 최대 높이는 32m에 이른다. 2010년 5월에는 아시아지역 컨벤션센터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친환경 건축물 국제인증인 LEED-NC(New Construction) 인증을 획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컨벤시아는 한국의 중첩된 산맥을 형상화한 독특한 구조를 갖춰 지붕이 마치 태백산맥 능선이 펼쳐지듯 구불구불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지붕구조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특이하다 보니 시공 당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3D 설계와 컴퓨터 제어 커팅이 적용됐고, 최고 난이도의 용접기술이 동원됐다. 또 타일형태의 지붕 패널 1만 3000장을 맞춰 얹는 작업은 고난이도의 퍼즐이었다. 지붕구조의 대구경 파이프는 도로 운반을 위해 16m 단위로 현장에 들여와 3개씩 조립해 가설 기둥 위에 올려놓고 용접 작업이 이뤄졌다. 용접이 끝난 후 166m의 대구경 파이프 트러스를 받치고 있던 52개 가설 기둥들이 차례로 제거되면서 마침내 컨벤시아가 탄생했다.” (황귀남 전 상무, 당시 현장소장)

2010.05.18 송도사옥 준공식 및 입주식

2010.05.18 송도사옥 준공식 및 입주식

송도 포스코E&C타워 전경

송도 포스코E&C타워 전경

2007년 9월 기공, 2010년 5월 준공한 포스코건설 송도사옥인 포스코이앤씨타워는 지하 5층, 지상 39층 규모의 쌍둥이 빌딩이다. 송도국제도시의 화려한 전경과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국제업무단지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14개의 전망엘리베이터로 그 경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층까지 개방된 로비는 호텔급 수준이다. 이 중 2층에는 포스코건설, 포스코엔지니어링 직원 자녀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는 어린이집인 ‘포키즈’가 들어서 있다.

3층은 비즈니스홀과 회의실로 구성돼 있으며, 회의실 규모는 대회의실 4개, 중회의실 3개, 소회의실 5개이다. 로비 4층에 위치한 450~470석 규모의 다목적홀은 동시통역실이 설치돼 있어 국제회의에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문화공연이나 영화감상실로도 활용해 인천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포스코이앤씨타워는 국제업무지구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송도국제도시의 중앙도로를 끼고 있어 인천대교와 바로 연결되고, 1, 2, 3경인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서울까지 4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더욱이 인천지하철 1호선 센트럴파크역과 곧바로 연결되는 등 최적의 교통 인프라를 갖추었다.” (김정용 상무보, 당시 현장소장)

동북아무역타워인 NEAT타워 전경

동북아무역타워인 NEAT타워 전경

동북아무역타워인 NEAT타워는 지하 3층, 지상 68층, 높이 312m의 초고층 빌딩이며, 업무시설과 호텔, 오피스텔로 구성돼 있다. 시행사는 NSIC와 모건스탠리 합작회사인 NSC Linkage2이며, 시공은 2006년 8월 착공 당시 포스코건설과 대우건설이 맡았다.

그러나 2009년부터 시행사가 자금난을 겪으면서 공사 중단과 재개가 반복됐다. 그러다 2013년 초 사업주체이기도 한 포스코건설이 대우건설과 정산을 끝내고 단독 시공에 나서면서 새롭게 돌파구를 찾았다. 더욱이 2013년 7월 대우인터내셔널이 송도 입주를 결정하고 NEAT타워를 인수함으로써 NSIC는 유동성 위기 부담을 덜었다.

NEAT타워는 2014년 7월 준공됐다. 준공 이후 36층부터 64층까지 ‘오크우드 프리미어’ 호텔이 입주해 영업 중이며, 2015년 상반기에는 대우인터내셔널이 입주할 예정이다.

 

 

 

 

 

# 공공기반시설-센트럴파크, 국제학교, 트라이볼
2010.9.10 채드윅국제학교 준공식

2010.09.10 채드윅국제학교 준공식

공원 녹지를 비롯해 문화, 교육, 의료 등 공공기반시설에서는 포스코건설이 센트럴파크, 송도국제학교, 트라이볼, 인천도시계획관을 건설했으며, 아트센터가 한창 건설 중에 있다. 그 외 삼성컨소시엄이 국제병원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2006년 5월 착공, 2009년 6월 준공된 송도국제학교는 7만 1200여 ㎡ 부지 위에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로 이루어져 있으며, 21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동북아 최고 수준의 교육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미국 사립학교 채드윅스쿨이 운영하고 있는 송도국제학교는 미국과 영국의 사립 교육기관에 버금가는 교과과정을 제공함에 따라 2009년 개교 이래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수업은 세계 각국에서 채용된 전문 교사진이 진행하며, 학습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평균 교사 1명이 10명의 학생을 맡고 있다.

2007년 3월 착공, 2009년 8월 준공된 센트럴파크는 조각 정원, 수변산책 정원, 초지원, 테라스 정원 등 4개 테마로 조성됐으며, 정자나 돌담 등 한국적인 전통을 살렸다. 주차장 규모도 엄청나다. 지하 주차장 면적이 7만 8637㎡로 주차 대수가 2715대에 이른다.

“센트럴파크는 약 40만 ㎡의 초대형 공원이다. 특히 이곳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순환시키기 위한 수로를 만들었는데,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작업이어서 건설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채영태 전 부장, 당시 현장소장)

국제학교 전경

국제학교 전경

트라이볼

트라이볼

인천 앞바다의 해수를 끌어들여 조성한 중앙수로는 길이 1.8km, 폭 12m~110m 규모의 거대한 인공수로이다. 외형뿐만 아니라 빗물 이용시설도 눈여겨볼 만하다. 포스코건설은 센트럴파크에 7개의 빗물 저장소를 설치해 물 사용량을 절감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장된 빗물은 조경 및 청소용수로 활용돼 상당한 금액의 관리비를 절약할 수 있다. 특히 이 수로에서는 수상택시, 보트, 수상자전거, 카누 등을 즐길 수 있어 센트럴파크가 레저스포츠 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트라이볼은 인천을 상징하는 하늘과 바다, 그리고 다이내믹한 광장의 개념이 물 위에 떠있는 도자기 형상으로 표현된 건축물이다. 바닥과 벽의 전통적인 구분이 사라진 3차원 표면을 따라 전시와 공연, 회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가능하다.” (최종훈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트라이볼은 세계 최초의 역쉘(易 Shell)구조로 송도, 청라, 영종지구 등 인천 경제자유구역의 3개 지구를 상징하는 주발 3개가 붙어 있는 모습이다. 1만 2300㎡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2700㎡ 규모이며, 2008년 10월 착공해 2010년 2월에 완공했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은 전기·기계·대기실 등으로 사용되고, 지상 2,3층은 500명이 입장해 연극과 음악회 등을 감상할 수 있는 공연장과 이벤트홀, 다목적홀, 디지털라이브러리 등으로 꾸며졌다. 이곳에서는 전문적인 예술 분야에 관람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 전시프로그램 등이 운영되고 있다. 2010년 말에는 독특한 외관으로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주최하는 우수디자인 시상식에서 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2009년 6월 착공한 아트센터는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와 같이 수변 공간에 조성됐다. 11만 2300㎡ 부지에 문화단지와 지원단지로 구분된다.

문화단지에는 1800석 규모의 메인 콘서트홀을 비롯해 오페라하우스, 다목적홀 등 세계적 수준의 음향시설을 갖춘 공연장이 들어서 있다. 특히 공연장 음향시설 설계에는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참여했으며, 그가 지휘하는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아트센터에 상주할 예정이다. 그 외에도 아시아 현대미술관, 음악학교 및 디자인학교 등이 조성돼 있으며, 지원단지에는 호텔, 주거 및 상업시설, 오피스텔 등이 들어서 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컨벤시아, 센트럴파크, 송도국제학교, 트라이볼, 아트센트 등을 기부 채납함으로써 개발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당초의 약속을 지켰으며, 더불어 인천지역에서 다양한 사회공헌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충실히 실천함으로써 인천의 번영을 함께할 지역 대표기업으로서의 위상을 다질 수 있었다.

2008.9.11 IFEZ 송도 아트센터 착공식

2008.09.11 IFEZ 송도 아트센터 착공식

건설 중인 아트센터 부지

건설 중인 아트센터 부지

 

 

 

 

 

 

 

 

 

# 주거 및 상업시설-퍼스트월드, 센트럴파크·, 커낼워크
송도 퍼스트월드 전경

송도 퍼스트월드 전경

2009.01.20 송도 더샾 퍼스트월드 점등식

2009.01.20 송도 더샾 퍼스트월드 점등식

주거시설에 있어서는 포스코건설이 퍼스트월드, 센트럴파크Ⅰ,Ⅱ, 엑스포, 하버뷰, 그린에비뉴 등 대부분의 아파트를 시공했으며, 그 외 대우건설과 GS건설도 시공에 참여했다. 상업시설로는 포스코건설이 커낼워크와 파크호텔 등을 시공했으며, 대우건설이 쉐라톤호텔을 시공했다. 롯데자산개발에서는 삼성동 코엑스몰이나 영등포 타임스퀘어 같은 백화점, 대형마트, 영화관, 아이스링크, 오피스텔 등의 복합상업시설을 추진하고 있다.

2005년 5월 착공, 2009년 1월 준공된 더샵 퍼스트월드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송도국제업무단지의 마스터플랜을 수립한 KPF가 설계를 맡았으며, 2005년 10월에는 미국 건축가협회(AIA) 최대지부인 뉴욕지부로부터 미준공부문 주거설계상을 수상했다.

선정 사유에 대해 주최측은 “고층 주거환경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성향과 뉴욕, 보스톤, 런던에서 선호하는 담이 낮은 저층주거 형태를 조화롭게 섞어놓은 것이 특징이며, 외관은 한국전통의 담장을 현대적으로 해석 설계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퍼스트월드는 64층 규모의 초고층 타워형 건물 4개 동을 포함해 모두 12개 동으로 구성돼 있으며, 아파트 1596세대와 오피스텔 1058실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내에 폭 16m, 길이 350m의 중앙수로 및 수경공간을 설치해 눈길을 끌고 있다.

녹지율도 31%에 달해 친환경 주거단지로 손색이 없다. 국내 최초로 수냉식 냉방 시스템을 도입하고 가구마다 기존 통신 속도를 10배 이상 끌어올리는 광케이블을 설치하는 등 최첨단 통신 인프라를 구축했다.

뉴욕의 센트럴파크가 모델인 중앙공원(센트럴파크)과 인접해 있는 주상복합 센트럴파크는 Ⅰ,Ⅱ,Ⅲ 시리즈로 계획됐으며, 2014년 현재 주상복합 센트럴파크 Ⅰ,Ⅱ까지 건설됐다. 13-1, 13-2

2007년 5월 착공, 2010년 11월 준공된 더샵 센트럴파크Ⅰ은 지하 2층, 지상 47층, 3개동 규모로, 다양한 평형의 729가구로 구성돼 있으며, 2007년 11월 착공, 2011년 8월 준공된 센트럴파크Ⅱ는 지하2층, 지상42~49층, 3개동으로 주택형과 펜트하우스 등 632가구로 구성돼 있다.

특히 센트럴파크 시리즈는 도시 미관을 고려해 성냥갑 같은 기존 아파트들의 천편일률적인 외관을 지양했다. 송도국제도시의 랜드마크에 걸맞게 독특한 디자인 양식을 도입했다. 센트럴파크Ⅰ은 한국의 전통 ‘바구니’와 ‘파도’를 형상화한 물결무늬 외관과 입면 디자인을 통해 율동적인 느낌의 통일감과 변화감을 느끼도록 설계했다. 센트럴파크Ⅱ는 바람에 움직이는 대나무 가지를 형상화한 휘어진 굴절입면 디자인을 통해 마치 건물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설계를 완성하기 위해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모든 요소를 섬세하게 고려했다. 다소 특이한 설계로 인해 시공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으나, 도면 해석에 골몰하며 작업자들과 끊임없는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학구 Director, 당시 센트럴파크Ⅰ 현장소장)

2008년 1월 착공, 2009년 10월 준공된 커낼워크는 지하 2층, 지상 5층의 8개 동으로, 전체 블록의 길이가 800m에 달하는 국내 최초의 스트리트형 쇼핑몰이다.

위치는 송도국제업무단지에서 초고층 업무지구와 아파트 단지의 접점지역에 있으며, 경관상의 여유를 확보하고 바람길을 터주기 위해 저밀도로 설계됐다. 단지 중앙에는 청계천을 연상하게 하는 폭 5m의 인공수로가 조성돼 있다. 1~2층은 이랜드그룹에서 유럽형 쇼핑몰 NC큐브를 운영 중이며, 3~5층은 고급오피스텔로 구성돼 있다.

커낼워크에는 수로 주변에 다양한 상업시설과 예술조형물, 야외 공연이나 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서 있다. 특히 인공수로를 중심으로 단지 양쪽에는 오피스텔과 함께 다양한 상업·문화시설들이 들어서 있어 문화와 쇼핑이 공존하는 명물거리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퍼스트월드를 시작으로 대박 신화를 이어가던 송도의 분양시장은 2009년부터 불길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커낼워크의 경우 2008년 8월 오피스텔 분양에서는 평균 190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으나, 단 6개월이 지나 2009년 3월에 실시된 상가 분양에서는 평균 1.6대 1에 그치는 저조한 실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선방했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포스코건설은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현실에서 향후 분양 일정을 놓고 고민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커낼워크 내부 전경

커낼워크 내부 전경

항공에서 본 커낼워크 전경

항공에서 본 커낼워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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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2. “복합개발과 초고층빌딩 강점을 지속해나가다”

# 개발사업의 시동, 동백쥬네브와 동탄메타폴리스

송도 프리미엄의 영향으로 건축 분야는 주택사업 성공신화에 이어 회사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지속해나갔다. 송도사업의 경우 그 규모와 영향력이 비대해져 2005년부터 건축사업본부에서 독립, 본부급으로 격상되기도 했다.

송도사업을 계기로 포스코건설은 확실한 강점 하나를 얻었다. 신도시개발 같은 복합개발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발사업의 역사는 회사 출범과 맥락을 같이한다. 회사 출범 초기 경쟁자들의 견제로 대외사업을 맘껏 펼칠 수 없었던 포스코건설은 회사가 보유한 부동산을 기반으로 자체 개발사업을 추진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조성됐다. 대표적으로 공모형 복합개발 PF(프로젝트 파이낸싱)사업이 있었다. 공모형 PF사업은 이전까지 공공 주도의 개발사업을 보완한 것이었다. 1990년대 말부터 정부는 일산, 분당, 평촌, 산본 등 신도시개발 과정에서의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시작했다. 택지공급에 치중하다 보니 인프라 구축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의 자본과 아이디어를 접목한 것이 바로 공모형 PF사업이었다.

복합개발은 2000년대 초 택지개발촉진법 개정을 통해 개발사업 공모의 법적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도시개발법의 규제 완화로 개발사업이 확대됐으며, 이후 2008년까지 과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와 국내 부동산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개발사업은 안개정국의 빠져들었다.

송도사업을 제외하고 2000년대 들어 포스코건설의 개발사업 발자취는 경기도 용인동백 테마형 쇼핑몰 PF사업에서 출발한다. 2002년 10월 포스코건설은 한국토지공사(현 LH공사)로부터 이 사업을 수주했다. ‘쥬네브’로 명명된 이 쇼핑몰은 용인동백지구 내 호수공원과 음악분수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신개념의 복합쇼핑센터였다. A, B, C 3개 블록으로 나눠 쇼핑몰이 개발됐는데, 여기서 포스코건설은 A블록인 ‘썬월드’를 맡았다. 연면적 13만 2000㎡, 지하 4층, 지상 9층 규모의 썬월드는 2004년 7월 착공, 2006년 7월 준공됐다.

사실 동백쥬네브에 앞서 2002년 4월 포스코건설은 경기도 성남시로부터 백현유원지 개발사업을 수주했다. 당초 포스코건설은 휴양지와 콘도를 연계해 개발사업을 추진하려 했으나, 성남시가 특혜시비를 우려해 휴양지 개발만 고집하는 바람에 결국 사업추진이 무산됐다.

“동탄메타폴리스는 동탄신도시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베드타운이 되기 쉬운 신도시에 자생력을 불어넣는 핵심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거시설과 업무시설,상업시설을 유기적으로 복합한 단지는 국내에서 동탄메타폴리스가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동탄메타폴리스는 신도시의 자족기능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사업이었다.” (방진혁 전 동탄메타폴리스㈜ 사장)

동탄메타폴리스 전경

동탄메타폴리스 전경

동백쥬네브에 이어 2003년 12월 포스코건설은 한국토지공사가 발주한 경기도 화성동탄 복합단지 PF사업 수주에 성공했다. 수주 이후 포스코건설은 개발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2004년 4월 LH공사, 팬퍼시픽, 신동아건설, 신한은행과 함께 동탄메타폴리스㈜를 설립했다.

설계는 한국무역센터,서울 강남 삼성동 아이파크 등의 프로젝트를 맡았던 건원건축이 맡았는데, 사업승인 과정이 가장 힘들었다. 주거, 상업, 업무 복합단지 개발이 당시로서는 동탄메타폴리스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2005년 중앙교통영향평가와 국토해양부의 마스터플랜 자문심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시설물의 배치와 규모를 조정하고 사업 기간을 재조정해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06년에 마스터플랜 심의와 사업승인을 완료하고 그해 10월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 동탄메타폴리스는 신도시의 랜드마크라는 상징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계획 단계에서부터 미국의 배터리파크시티,일본의 롯폰기힐스 등을 벤치마킹했다. 그 과정에서 주상복합 아파트와 오피스텔,오피스,백화점,호텔 등 주거·업무·상업시설을 한데 모은다는 구상이 나왔다. 국내에서는 코엑스, 롯데월드 등의 사례에서 상업시설과 융합한 사례는 있었으나, 주거 기능까지 결합한 프로젝트는 동탄메타폴리스가 처음이었다.

동탄메타폴리스의 랜드마크로서의 상징성은 분양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2007년 6월 1229가구에 대한 아파트 분양에서 3.3㎡당 1410만 원이라는 높은 분양가에도 불구하고 전 평형이 평균 2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2009년과 2010년에 1,2차로 나눠 실시된 임대방식의 상가 분양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2010년 11월 동탄메타폴리스는 1단계 사업을 완료하고 그해 12월 마침내 메타폴리스몰이 그랜드 오픈했다. 지하 5층, 지상 55~66층 4개동, 연면적 46만 2000㎡ 규모의 동탄메타폴리스는 A블록과 B블록으로 나누어진다. A블록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중심으로 아이스링크, 푸드코트, 문구, 휘트니스센터 등이 갖춰져 있으며, B블록은 대형마트와 클리닉타운을 중심으로 홈플러스, 에듀센터, 전문식당가 등이 입점해 있다.

그랜드 오픈 이후 동탄메타폴리스는 랜드마크로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강남에 타워팰리스가 있고, 분당에 파크뷰가 있다면, 수도권 남부에는 랜드마크 동탄메타폴리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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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탄 메타폴리스 내부 전경

 

# 대구 봉무산업단지와 판교 테크노밸리 연구단지 조성사업
봉무산업단지 조성사업 조감도

봉무산업단지 조성사업 조감도

동탄메타폴리스에 이어 2005년에는 아산배방과 대구 봉무산업단지 같은 굵직한 공모형 개발사업이 나왔다. 두 프로젝트를 놓고 한참 저울질했던 포스코건설은 결국 봉무산업단지 조성사업을 선택했다. 아산배방 프로젝트는 일명 아산신도시 개발사업으로 포스코건설은 동탄메타폴리스와 성격이 겹친다고 판단했고, 무엇보다 서울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사업성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봉무산업단지 조성사업은 국내 최초의 민간투자 방식의 산업단지 개발사업이었다. 또한 대구시의 ‘밀라노 프로젝트’의 주요사업 가운데 하나로, 총 117만 7000㎡의 부지에 봉재·패션 중심의 산업용지, 주거용지, 패션기능대학, 외국인학교 등을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당초 대구시가 직접 개발에 나섰다가 외자유치 실패와 사업성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민간개발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 개발사업을 놓고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을 비롯해 현대건설과 대림산업 등의 컨소시엄이 치열한 수주전을 펼쳤다. 대형 건설사들이 사활을 걸고 수주전에 뛰어든 이유는 대구시가 그만큼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자로 선정되면 공고 면적에서 ‘주거용지 20% 미만, 공장용지 13% 이상, 공공용지 40% 이상’의 비율을 준수하면서 단지의 배치, 토지이용계획, 지구단위계획 등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었다.

결과는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의 압승이었다. 2005년 12월 수주에 성공한 포스코건설은 이후 4개월간 15차례의 실무협상과 금융권의 현장답사, 신용평가, 내부결의 등의 절차를 완료했다. 그리고 2006년 4월 대구시와 1조 2500억 원 규모의 봉무산업단지 조성사업에 대한 사업협약을 체결하고 조성공사를 위한 공식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사업협약에 따라 2006년 5월 포스코건설과 대구시는 ㈜이시아폴리스를 설립했다. 포스코건설은 2007년 10월 착공에 들어가 2010년 2월까지 부지조성공사를 완료하는 등 순조롭게 이시아폴리스를 개발해나갔다.

봉무산업단지에 이어 2006년에는 경기도 성남시 판교 테크노밸리 연구단지 조성, 인천 도화 도시개발사업, 인천 영종도 운북지구 복합레저단지 조성, 인천 청라지구 개발사업 등에 포스코건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판교 n스퀘어 테크노밸리

판교 n스퀘어 테크노밸리

대표적인 성과로는 판교 테크노밸리 연구단지 조성사업이 있었다. 2006년 8월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은 경기도가 공모한 이 사업 수주에 성공했다.

“기업의 규모가 크든 작든 주관이 뚜렷한 여러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들 모두의 의견을 조율하다 보니 예기치 않게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다. 합의점이 도출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과정이 공사를 빨리 진척시켜야 하는 입장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치곤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수주 이후 ㈜유스페이스가 설립됐다. 여기에 참여한 기업이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무려 32개 기업이었고, 그 가운데 입주를 목적으로 참가한 IT기업도 28개 기업이나 됐다. 이처럼 이해관계자가 많았던 만큼 사업진행이 더디게 흘러갔다.

그럼에도 유스페이스 현장은 무재해 달성과 원가절감으로 이익률을 향상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3월 회사가 선정한 최우수 현장에 뽑혔다. 2009년 6월 착공, 2012년 2월 준공된 지하 5층, 지상 12층, 연면적 22만 ㎡의 유스페이스는 오피스와 근린생활시설, 그리고 운동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천 도화지구 도시개발사업은 인천시 도시개발공사가 발주한 사업이었고, SK건설 주간의 회원사로 포스코건설이 참여했다. 그러나 인천대 송도캠퍼스 이전 공사비 문제, 금융위기, 분양가 상한제 도입 등으로 PF 개발사업의 사업성이 급격히 악화됨에 따라 결국 2009년 11월 포스코건설이 개발사업에서 발을 뺐다.

영종도 운북지구 복합레저단지 조성사업 역시 포스코건설이 회원사로 참여했던 개발사업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와 부동산 경기침체기를 맞아 사업진행에 난항을 겪기 시작했으며, 이에 포스코건설도 철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인천 청라지구 개발사업 역시 건설경기 침체로 진행에 어려움이 많았다. 포스코건설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개발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2006년 11월 청라지구와 첫 인연을 맺었다. 2단계 개발사업인 3공구 기반시설공사에 회원사로 참여했다. 2007년 들어서는 사업자 지위를 박탈당한 대우건설을 대신해 청라국제업무타운의 새로운 사업자 선정에 의욕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 그해 11월 송도 개발의 역량을 바탕으로 LH공사의 새로운 파트너로 선정됐다.

그러나 경기침체도 주요 요인이었지만, 정부의 정책변화와 관련 법규 개정 등으로 기존 개발 구상이 심하게 훼손되면서 포스코건설의 의욕도 상당히 꺾였다. 주요 수익원이었던 서비스 레지던스 분양이 관광진흥법 개정으로 사실상 불가능해졌으며, 개발 콘셉트였던 국제금융단지 지정도 여의도와 부산시 문현동에 뺏겨 물 건너가고 말았다. 더구나 제3연육교 건설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으며, 초고층 랜드마크와 지하철 연결도 실현되지 않았다. 결국 청라지구가 신도시 수준으로 격하되면서 포스코건설은 운북지구와 마찬가지로 철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 행당동 복합개발사업과 양재동 P타워 개발

판교 유페이스에 이어 2007년에는 서울 용산역세권 개발과 유니버셜스튜디오 리조트 조성사업 등의 개발사업이 있었다. 용산역세권 개발은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민간개발사업이란 점에서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다. 정식 명칭은 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으로, 2007년 11월 국내외에 걸쳐 대규모의 컨소시엄을 구성한 삼성물산이 사업자로 선정됐다. 참여 건설사만도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17개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와 부동산 경기침체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2013년 3월 시행사가 디폴트를 선언했고, 이어서 그해 10월 서울시가 도시개발구역 지정을 해제함으로써 개발사업이 사실상 무산됐다.

경기도 화성시 유니버셜스튜디오 조성사업은 포스코건설의 제안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IT를 접목한 유시티(U-City) 같은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이에 유니버셜 한국측 사업파트너인 유스코와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2007년 10월 경기도와 한국수자원공사에 유니버셜스튜디오 리조트 조성사업을 제안했다. 이어서 2008년 12월 개발사업을 위한 투자회사가 설립되면서 경기도 화성에 들어설 리조트 조성사업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이후 부동산 경기가 계속 나빠지는 데다 한국수자원공사가 제시하는 토지가격이 너무 높아 사업추진이 쉽지 않았다. 결국 테마파크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롯데 측에 지분을 넘기고 철수했다.

2008년에는 서울 성동구 행당동 복합개발사업, 서초구 양재동 P타워, 마포구 상암 DMC 첨단업무시설, 인천 숭의운동장 도시재개발 등의 개발사업을 추진했다.

2008년 3월 포스코건설은 LH공사의 서울 행당동 복합개발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이 사업은 왕십리역과 중랑천 사이에 있는 행당지구 도시개발구역(7만 5000㎡)에 주상복합아파트(461가구)와 영화아카데미, 복합공연장 등을 짓는 개발사업이었다.

양재동 업무시설 P타워는 자체 개발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선매각이라는 독특한 아이템으로 양재동 업무시설 개발사업을 추진했다. 2008년 3월 코람코자산신탁과 선매각 약정을 체결하고 양재역 인근에 토지를 매입했다.

그런데 사업추진 도중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갑작스런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코람코 측에서 계약 취소를 통보해왔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향후 사업추진 방향을 놓고 고심을 거듭하다가 계획대로 건물을 짓고 자산을 처분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도출해냈다. 이와 병행해 계약 불이행에 대한 소송을 준비했다.

2009년 12월 착공, 2012년 8월 준공된 연면적 4만 4000㎡ 규모의 양재동 업무시설은 지하 6층, 지상 20층의 P타워로 우뚝 섰다. 준공 이후 P타워는 양재역 1분 거리라는 접근성 때문에 성공적으로 임대가 완료됐다. 포스코건설은 P타워 건설과 병행한 재판에서도 승소했다. 결국 고액의 배상금을 떠안게 된 코람코자산신탁은 결국 2013년 6월 P타워의 인수를 결정했다. 포스코건설의 투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2010.12.20 상암DMCC 신축공사 기공식

2010.12.20 상암DMCC 신축공사 기공식

행당동 복합개발사업 수주에 이어 2008년 12월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은 시울시가 공모한 상암 DMC 첨단업무시설 사업자로 선정됐다.지하 6층, 지상 21층 규모의 상암 DMC 첨단업무시설은 2010년 8월 착공, 2013년 3월 준공됐다.

인천 숭의운동장 재개발사업은 2008년 출발 당시만 해도 인천지역 대표적인 구도심 개발사업이었다. 부지는 숭의운동장 주변 준주거지역과 일반상업지역이었으며, 사업방식은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을 지어 인천시에 기부체납하고, 건설사들은 주상복합아파트를 지어 수익을 창출해내는 구조였다.

이 개발사업에 포스코건설은 회원사로 참여해 철골구조로 된 지상 1층 6개동의 체육회 훈련시설(2008.4~2008.10)을 건설했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역시 2012년 3월 준공됐다. 그러나 이 사업은 2008년 이후 계속 표류하고 있다. 부동산 침체기를 맞아 아파트를 지어 분양할 경우 막대한 손실이 예측돼 추진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부지 매각도 추진했으나, 주인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양한 개발사업의 발굴과 추진으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노하우를 쌓은 포스코건설은 2008년 의미 있는 사업들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먼저 공공기관의 지방 혁신도시 이전에 착안해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한국전력 본사부지 개발방안을 세계적 컨설턴팅사인 맥킨지, 일본 설계회사인 니켄세케니와 수립하고 서울시 및 강남구에 제안했다.

삼성동 한전부지에 관심이 많았던 삼성물산도 이 개발방안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포스코건설과 삼성물산은 한전부지에 114층 규모의 랜드마크 건립과 함께 서울시의료원, 한국감정원, 탄천, 종합운동장 주변 일대를 포함한 영동부도심 복합개발 방안을 마련했다. 이 같은 개발방안에 서울시와 감남구청이 도시경쟁력 확보와 관광객 증가에 크게 기여할 것을 기대하고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서울시, 한국전력과 수차례 개발방향과 일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포스코건설이 제안한 민간건설사 참여방식의 사업으로 진행되진 못했다. 비록 참여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이후 서울시는 포스코건설측 제안을 계기로 한국전력 이전 시기에 맞추어 개발계획 및 용도변경에 대한 기준을 수립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9월 최고가 입찰경쟁에서 현대차그룹이 한전부지의 새주인이 됐다.

한전부지와 함께 인천공항공사가 보유하고 있던 300만 3000㎡ 부지를 카지노복합리조트로 개발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정부기관이 중점 추진 중인 카지노복합리조트 개발사업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이 같은 사업제안은 그 동안의 국내 개발사업에 대한 노하우와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 및 도시경쟁력을 확대하고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포스코건설의 크나큰 자부심이었다.

한국전력 및 인천공항공사 부지 개발 제안에 이어 포스코건설은 서울에 남은 마지막 판자촌으로 유명한 구룡마을에 대한 민간개발을 강남구에 제안했다. 이 제안을 강남구가 흔쾌히 수용, 2009년 8월 민간도시개발사업이 입안되기도 했다. 그러나 민간개발 시 구룡마을 거주민들의 주거대책 확보가 불확실하다는 우려가 제기됨에 따라 2011년 4월 서울시는 공영도시개발 방안을 발표했으며, 이어서 2012년 8월 구룡마을을 공영도시개발 구역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서울시와 강남구는 개발방식을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서울시는 개발 후 땅과 건물 등을 일부 지주에게 돌려주는 ‘일부 환지방식’을 주장했으며, 강남구는 환지방식의 특혜 우려를 제기하면서 100% 현금보상 수용을 주장했다. 급기야 양측의 갈등은 법정공방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2014년 7월 구룡마릉에 대한 도시개발구역 지정이 해제되고 말았다.

이처럼 개발사업은 사업추진에 어려움이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포스코건설은 좀더 큰 계획을 가지고 복합개발 강점을 지속해나갔다.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포스코가 무에서 유를 창조했듯이, 포스코건설 역시 국가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개발사업 발굴에 열정을 쏟아나갔다.

 

# 명품 브랜드 더샵, 스타파크 한경 주거문화대상 수상
전북 전주 효자 2차 더샵

전북 전주 효자 2차 더샵

개발사업이 건축 분야의 강점이었다면 주택사업은 회사의 성장을 견인했던 밑거름이었다. 전체 건축사업의 70~80%가 주택사업에서 나왔다. 이 같은 저력으로 IMF 위기 이후 주택사업이 회사의 성장을 견인했으며, 2000년대 중반 이후에도 송도 개발의 프리미엄을 기반으로 회사의 도약과 번영을 이끌었다.

포스코건설은 2005년에도 창사 이래 가장 많은 분양 실적을 기록했다. 9개 프로젝트에서 총 9426세대를 분양했다.

첫 출발은 전북 전주 효자 2차 더샵(2005.3~2007.2)이었다. 2003년에 888가구 공급에 이어 2차까지 총 1157가구를 공급했다. 특징은 260.7㎡ 이상의 세대를 복층으로 설계했다. 3대가 함께 거주함은 물론, 가족 구성원 간 프라이버시도 보장했다.

동작구 상도동 더샵(2005.4~2007.9)은 서울지역 4차 동시분양 물량이었다. 포스코건설이 서울에 건설했던 순수 아파트 단지 중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규모가 컸다.

“22개 동, 1122세대 규모의 공사에 주어진 시간이 불과 22개월이었다. 장마까지 길어져 돌관공사를 감행하기도 했으며, 주거밀집 지역이라 지역민들의 민원 수위도 높았다.” (손주혁 상무, 당시 현장소장)

강원 춘천 더샵(2005.4~2008.2)은 춘천시 최초의 대단지 재건축사업이었으며, 춘천 더샵에 이어 송도 더샵 퍼스트월드가 성황리에 분양을 완료했다. 안양 메쎄 포스빌(2005.5~2007.6)은 순수 오피스텔이었다.

서울 송파구 잠실 더샵 스타파크

서울 송파구 잠실 더샵 스타파크

주상복합 서울 송파구 잠실 더샵 스타파크(2005.8~2008.9)는 2005년도 최고의 명품 더샵이었다. 포스코건설 역사상 최고의 분양가(2428만 원)를 기록하고도 전체 가구가 1순위에서 청약이 마감되며 강남지역에서 새로운 랜드마크로 등극했다. 명품의 명성에 걸맞게 2006년 한경 주거문화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업계 최고 브랜드의 주거명품과 결합된 적절한 마케팅 전략이 성공요인이었다. 강남권에서 부지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희소성이 더욱 높아진 것도 주요 성공요인이었다.” (조남훈 전 상무)

경기도 화성시 동탄 2차 더샵(2005.9~2008.5)은 2004년 시범단지에 이어 두 번째 분양이었다. 조경 면적이 무려 63%로, 다른 신도시 평균보다 20% 이상 높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어서 분양된 계룡 더샵(2005.10~2008.4)은 포스코건설의 대전권 첫 분양이었고, 대구 성당동 더샵(2005.10~2008.2)은 달서구 성당주공 재건축사업이었다.

특히 2002년 분양과정에서 부산에 더샵 브랜드의 복음을 전파했던 센텀파크가 2006년 7월 ‘살기좋은 아파트 선발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맑은 날 센텀파크는 집안에서도 대마도를 볼 수 있다. 센텀파크는 우리 회사가 처음으로 수행한 초고층 아파트라는 의미가 있으며, 국내 초고층 건축물 시장에서 선두주자의 위치를 확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신영태 Director, 당시 공무팀장)

 

 

# 더샵의 고객만족, 주문자문단 활동과 반올림 서비스 실시
부산 서면 더샵 센트럴스타

부산 서면 더샵 센트럴스타

2005년에 대량의 물량이 쏟아진 반면 2006년에는 473세대 거제 더샵 단 한 건의 프로젝트에 머물렀고, 2007년에 다시 한 번 분양사업이 달아올랐다. 평택, 동탄, 송도, 부산, 아산, 대전 등 8개 프로젝트에서 6633세대를 분양했다.

송도와 동탄메타폴리스를 제외하고 가장 관심을 끈 프로젝트는 부산 서면 더샵 센트럴스타(2007.6~2011.6)였다. 포스코건설은 센텀파크, 아델리스, 센텀스타 등 해운대 불패신화의 자신감으로 부산 도심 한 가운데 대단위 주상복합아파트를 선보였다.

센트럴스타는 선큰(Sunken) 광장과 120m 가로수길을 조성하는 등 41%에 해당하는 약 1만 2000㎡의 조경공간을 확보했다. 뿐만 아니라 발렛파킹 등 호텔식 서비스를 도입해 세간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특히 2007년은 고객만족과 마케팅에 심혈을 기울인 한 해였다. 주부자문단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입주 후 서비스인 ‘반올림 서비스’가 시작된 시점도 2007년이었다. 직접 사용해보고 계약을 결정하는 체험마케팅이 실시되기도 했다.

2007년도 입주 단지로는 강북의 타워팰리스라 불리는 서울 광진구 건대 더샵 스타시티가 화제를 모았다. 2003년 분양 당시부터 190대 1이라는 높은 청약경쟁률을 보이며 인기를 끌었는데, 2007년 3월 입주 이후 그해 10월 한국건축문화대상에서 공동주거 부문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에서 스타시티는 서울 강북의 상징적인 랜드마크로 단지 중앙광장의 공용공간이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음과 분진 피해 감소를 위한 최초 풍선방음벽 개발, 그리고 이동식 방음벽, 다각적인 계측방법으로 치밀하게 관리한 지반조사 등은 시공관리의 소중한 경험이었다. 초고층 시공기술의 진보를 보여준 초고강도 콘크리트, 홍수조절과 재활용이 가능한 국내 최초의 빗물이용시설도 스타시티 현장이 남긴 결실이었다.” (김광홍 전 이사보, 당시 현장소장)

2008년과 2009년에는 인천 송도에서 3개, 청라에서 1개 등 총 4개 프로젝트에서 2773세대를 분양했다. 그 중 청라 더샵 레이크파크(2009.12~2013.4)는 청라지구 초고층 랜드마크로서 지하 1층, 지상 45~58층, 4개동으로 구성됐다. 녹지율이 46%에 달해 사실상 단지 절반이 조경공간으로 꾸며졌다. 2013년 4월 입주 이후 그해 10월 살기좋은 아파트 선발대회에서 최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울 광진구 건대 더샵 스타시티

서울 광진구 건대 더샵 스타시티

 

# 초고강도 콘크리트로 초고층 기록을 갱신해나가다

개발사업과 함께 포스코건설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강점 분야는 초고층건물 시공기술이었다. 후발주자로서 딱히 내세울 것이 없었던 포스코건설은 초고층건물에 집착했다. 경쟁자들과 차별화된 자신만의 강점 분야를 갖고자 했던 욕심 때문이었다.

IMF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주택사업에 뛰어들었고, 아파트를 지을 때마다 귀신에 홀린 듯 초고층 기록을 경신해나갔다. 경쟁자들은 포스코건설을 이해하지 못했다. IMF 위기로 경기도 안 좋은데 공사비가 많이 들어가는 초고층에 올인하다가 끝내 쪽박 찰 거라는 비아냥이 무성했다.

그러나 경쟁자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세상 물정 몰라 사고만 칠 것 같았던 신출내기는 쪽박 대신 대박을 선물 받았다. IMF 이후 부동산 경기가 되살아나면서 초고층 붐이 일었고, 신출내기라고 비웃던 경쟁자들도 초고층 경쟁에 뛰어들었다.

초고층건물 시공기술은 초고강도 콘크리트 기술이 발전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전까지 초고층건물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같은 철골구조로 시공됐다. 그러나 초고강도 콘크리트 기술이 발전하면서 경제성 및 시공성에서 철골구조 시공을 앞서게 돼 국내 초고층 시장에서 시공법의 변화가 생겼다. 바로 그 중심에 포스코건설이 있었다.

콘크리트의 강도를 나타내는 가늠자는 메가파스칼(MPa)이다. 1MPa은 1㎠당 10㎏의 하중을 견디는 강도를 말한다. 통상 초고층건물은 40MPa 정도의 고강도를 적용해야 시공이 가능하다.

부산 해운대의 랜드마크 센텀파크

부산 해운대의 랜드마크 센텀파크

포스코건설 초고층 역사에서 40MPa의 전환점이 된 단지는 부산 해운대의 랜드마크 센텀파크였다. 이전까지 아파트의 강도가 21MPa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술의 진보라 할 수 있었다. 40MPa로 센텀파크는 51층까지 올라갔다. 뒤이어 착공에 들어간 해운대 우동 아델리스는 47층까지 올라갔다. 센텀파크는 일명 ‘성냥갑’이라고 불리던 벽식 아파트로는 국내 최고의 고층 아파트였다.

초고층의 두 번째 터닝포인트는 건대 스타시티였다. 50MPa이 적용됐다. 50MPa로 스타시티는 58층까지, 뒤이어 착공에 들어간 해운대 센텀스타는 60층까지 올라갔다. 서울과 부산에서 연일 초고층건물이 건설되면서 ‘아침에 눈 뜨고 보면 한 층씩 올라가 있더라’ 하는 전설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만큼 초고강도 콘크리트의 양생 속도는 빨랐다.

세 번째 전환점은 퍼스트월드였다. 무려 60MPa까지 진보했다. 송도는 바다를 메운 부지여서 한 마디로 뻘밭이었고, 기초를 다지느라 엄청난 양의 기초콘크리트파일을 모내기 하듯 박아나갔다. 따라서 포스코건설은 60MPa을 적용해야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좀더 많은 강도를 필요로 하는 중간부인 33층과 상층부인 61층의 아웃리거층에는 80MPa를 적용했다.

2007년 4월과 9월 두 번에 걸친 80MPa 초고강도 콘크리트 타설 때에는 펌프압송이 장관이었다. 높이 110m의 33층에 단 한 번의 압송으로 7000㎥ 가량이 타설됐고, 두 번째 220m의 61층에도 단 한 번의 압송으로 7000㎥ 가량이 타설됐다. 두 기록을 합하면 1만 4000㎥가 되는데, 이는 2005년도 일본에서 한 해 동안 타설한 80MPa 이상 초고강도 전체 실적과도 맞먹는 엄청난 규모였다. 당연히 국내에서도 최초의 기록이었다.

이즈음 국내에서는 건설사마다 초고강도 콘크리트에 대한 자존심 경쟁이 벌어졌다. 먼저 롯데건설이 포문을 열었다. 120MPa을 개발했다며 대대적인 홍보전을 펼쳤고, 이에 맞서 삼성물산이 150MPa을 내놓았다.

사실 100MPa 이상은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현실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었다. 삼성물산이 시공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UAE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도 80MPa 정도였다.

소모적인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포스코건설이 나섰다. 2007년 11월 동탄메타폴리스 현장에서 세계 최초로 200MPa 초고강도 콘크리트 시험 타설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자존심 경쟁이 수그러들지 않자 2008년 12월 한국건자재시험연구원의 시험인증을 거친 250MPa 초고강도 콘크리트 개발 성공 소식을 대내외에 알렸다. 이로써 초고강도 콘크리트에 대한 자존심 경쟁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퍼스트월드 이후로도 기록 갱신은 계속 이어졌다. 송도 더샾 하버뷰Ⅱ가 70MPa을 기록했고, 2010년 7월에는 국내 최초로 100MPa의 초고강도 콘크리트를 테스트나 부분적용이 아닌 실적용으로 청라 더샵 레이크파크 현장에 타설했다.

부산 센텀파크에서 청라 레이크파크까지, 포스코건설은 열정적으로 기록을 경신해가며 세계 초고층건물 기술 발전에 새로운 장을 열어나갔다.

 

# 초고층건물 안전기술을 업그레이드해나가다

포스코건설은 초고강도 콘크리트 기술 외에도 지진과 바람, 화재예방을 위한 기술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왔다. 대표적으로 고강도 콘크리트 폭렬 제어기술과 풍진동 제어기술 등이 있었다.

초고강도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은 화재가 발생했을 때 내부 수증기가 빠져 나오지 못해 일순간 터져버리는 폭렬 현상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철근 내력이 약해져 건물이 붕괴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에 정부는 2008년 7월부터 50MPa 이상의 기둥, 보 부재에 대해서 건축물의 피난·방화·구조 등의 기준에 관한 규칙에 의거 내화성능 검증을 의무화했다.

포스코건설은 이미 폭렬 제어기술을 확보하고 퍼스트월드를 비롯해 송도국제업무단지 내 초고층건물에 이 기술을 적용해왔다. 이 기술은 폭렬 현상을 없애주는 건식방식의 PFB(POSCO E&C Fire Board) 공법으로, 2010년 건설신기술로 지정 받았다. 습식공법으로는 2009년 8월 섬유 혼입으로 200MPa급 초고강도 콘크리트를 개발하고, 국제적 공인 인증기관인 일본의 총합연구소로부터 내화 인증을 받았다.

풍진동은 바람에 의해 건물의 최상층이 흔들리는 현상으로, 심할 경우 구토나 어지럼증이 나타날 수 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풍진동을 제어하는 제진장치를 적용해 진동으로부터 쾌적하고 안락한 사용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으며, 이를 센텀파크, 퍼스트월드, 포스코이앤씨타워 등에 적용했다. 2010년에는 국내 최초로 풍진동에 대한 초고층건물의 움직임을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감시하기 위한 ‘원격 풍진동 모니터링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이를 포스코이앤씨타워, 센텀파크, 퍼스트월드 등에 적용했다. 이 시스템을 통해 포스코건설은 초고층건물의 사용성 확보뿐만 아니라, 적용된 제진장치의 제진성능도 검증하고 있다.

포스코건설의 초고층 안전기술은 대외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2008년경 초고층건물 화재문제가 언론으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언론사 실험 결과 초고강도 콘크리트의 폭렬 현상이 확인됐으며, 이 장면이 방송을 타면서 많은 파장을 불러왔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폭렬 예방기술을 갖추고 있었고, 미처 준비를 못한 대부분의 건설사들은 포스코건설에게 폭력 제어기술에 대한 협력을 요청해오기도 했다.

2011년 서울 구의동 테크노마트 이상진동도 큰 화제를 불러왔다. 유독 38층에만 이상진동이 감지돼 정부 차원에서 안전진단이 실시됐다. 이 점검단에 뛰어난 풍진동 제어기술을 확보한 포스코건설 연구진이 합류해 지하층 휘트니센터의 집단 뜀박질이 이상진동의 원인임을 밝혀내는데 일조했고, 이후 국책과제에도 참여했다.

바벨탑처럼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의 초고층 기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전기술이다. 포스코건설은 초고층건물 강자의 책임감으로 초고층 안전기술 향상에도 더욱 노력하고 있다.

3-3

Story3. 토목·환경 “천덕꾸러기 설움 딛고 정상을 향해 나아가다”        

# 도로분야 실적한계, 민자제안으로 넘는다

“오늘 아주 즐겁고 좋은 날 이 자리에 함께하게 돼 기쁘다. 이 자리는 여기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이 모여 목표를 달성한 것을 자축하기 위한 자리이다. 후발업체로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는 선발업체들이 거쳐온 과정을 연구해서 열정과 투지로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해왔다.” (한수양 전 사장)

2006년 12월 27일. 토목환경사업본부의 특별한 송년회가 펼쳐졌다. 마침내 수주 1조 원 시대를 연 자축연이었다.

그 동안 토목·환경은 설움이 많았다. 회사의 균형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로 따가운 눈총을 받아왔다. 이런 평가에 환경 분야는 억울해 했다. 토목과 묶여 도매금으로 넘겨졌지만, 환경 분야는 줄곧 빅3로 정상을 달려왔다.

토목이라고 다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건 철도에서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꾸준히 실적을 쌓아왔고, 김해경전철 수주를 계기로 그 자부심이 한층 높아졌다. 그렇다면 누가 역적일까? 모든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바로 도로 분야였다. 도로는 절치부심, 열정과 투지를 불살랐지만, 실적이 부족해 선발업체의 높은 장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2004년 시작과 함께 토목환경사업본부는 수주 1조원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리고 3년 만에 그들은 목표를 달성했다. 그 이면에는 환경과 철도의 선전도 무시할 수 없지만, 도로 분야의 눈물겨운 도전이 있었다.

도로 분야는 목표 달성을 위해 턴키시장에서 최저가 출혈을 감수하면서 실적을 쌓아갔으며, 한편으로는 민자제안을 통한 SOC사업에 주력했다.

용인~서울간 고속도로

용인~서울간 고속도로

포스코건설의 SOC 민자투자사업은 인천공항고속도로와 인천공항철도로 출발했으며, 이어서 2002년부터 집중적으로 SOC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제2영동고속도로, 창원~부산간 도로, 용인~서울간 도로, 제2경인연결(안양~성남) 도로, 부산항 제2배후도로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들은 회원사 자격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후발업체로서 처음에 회원사 자격으로 경험을 쌓았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사업제안에 나섰다. 그 첫 프로젝트가 학의~고기간 도로였다.

학의~고기간 도로 이야기는 2002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경기도에 석수~분당간 도로 사업계획을, 롯데건설은 국토부에 제2경인연결(안양~성남) 도로 사업계획을 제안했다. 두 계획에서 중복구간이 발생하자 조정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중복구간을 롯데건설에 넘기고 자신의 구간을 학의~고기간 도로로 조정했다. 그 대신 제2경인연결(안양~성남) 도로에 회원사로 참여했다.

그런데 학의~고기간 도로는 2008년 8월 입찰 과정에서 RTB코리아의 저가 투찰로 최초제안자인 포스코건설이 탈락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이후 이 사업은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RTB코리아가 금융권 투자유치에 실패함에 따라 사업권이 다시 포스코건설로 넘어왔다. 그러나 그 사이 사업계획이 많이 변해 있었다. 이대로는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한 포스코건설은 결국 사업추진을 포기했다.

 

# 민자제안 7, SOC 만자투자사업 정상에 올라

학의~고기에 이어 2005년 11월 포스코건설은 두 번째 도전에 나섰다. 부산시에 산성터널 민자사업을 제안했다. 산성터널 제안에 부산시는 화명~기장 연결도로를 끼워 넣었다. 사업성 검토결과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한 포스코건설은 부산시에 수용 불가를 통보했으며, 이에 2007년경 부산시는 대림산업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림산업 역시 사업성 검토결과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 사업에서 발을 뺐다. 결국 부산시는 화명~기장 연결도로를 포기하고 포스코건설을 다시 찾아왔으며, 2010년 10월 최초제안대로 산성터널 민자사업이 재추진됐다. 이 사업은 최초제안에 사업추진까지 성공한 첫 사례로, 포스코건설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학의~고기, 산성터널에 이어 포스코건설은 2007년 7월에 과천~송파간 도로, 2008년 5월에 검단~장수간 도로 사업계획을 제안함으로써 대도시권 사업발굴 역량을 한층 다졌으며, 민자사업에서의 위상도 정상급으로 올라섰다.

과천~송파간 도로는 수도권 도로사업의 포화로 인해 사업 발굴이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창의성을 발휘한 우수제안으로 평가받았다. 검단~장수간 도로는 검단신도시 개발에 따른 광역도로의 개설 필요성과 교통정체 해소를 위해 인천시에 제안한 것이었다.

독특한 사업으로는 홍대 지하주차장 민간투자사업이 있었다. 이 사업은 민간 제안이 아닌 마포구청이 시설사업기본계획에 따라 발주한 프로젝트였다. 2008년 11월 포스코건설은 이 사업 입찰에 참여해 사업자로 선정됐다. 이 프로젝트는 규모는 작지만, 지하공간 민간투자사업 준비를 위한 시범사업 성격이어서 향후 대규모 본사업 추진이 기대되는 사업이었다.

제2외곽순환고속도로 인천~김포 구간은 우연한 행운으로 주간사의 지위를 확보한 사업이었다. 최초 제안은 2002년이었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송도~파주 구간을, 금호산업은 인천 송현동과 불로동 구간을 제안했다. 이후 두 회사는 2005년 6월 두 구간을 인천 신흥동과 김포시 양촌면으로 통합 제안하면서 금호산업이 주간사를 맡고, 포스코건설은 2위 회원사를 맡았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제2외곽순환고속도로 인천~김포 구간은 2010년 4월 금호산업이 워크아웃 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포스코건설이 주간사를 승계했고, 이후 금융약정을 거쳐 2012년 3월 착공에 들어갔다. 결국 이 사업은 포스코건설이 주간사로서 착공에 들어간 최초의 민간투자사업이었다.

절치부심 15년. 2002년을 기준으로 이전까지 포스코건설은 7년 동안 선발업체들을 쫓아다니며 회원사로서 경험을 쌓았으며, 2002년 이후 7년 동안은 적극적으로 사업제안에 나서 SOC 민간투자사업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했다. 5개 프로젝트에서 주간사의 지위를 확보, 명실공히 토목 분야 정상급 건설사로 도약했다.

이 시기(2005~2009) 포스코건설이 참여한 민자 도로 중 착공에 들어간 프로젝트는 용인~서울간 도로, 창원~부산간 도로 등이 있었다.

대우건설이 주간사를 맡은 용인~서울간 고속도로(2005.10~2009.7)는 수도권 남부지역의 교통량 분산을 위해 사업이 추진됐으며, 민자 5700억 원을 포함해 총 1조 4932억 원이 동원된 대형 프로젝트였다.

포스코건설은 2007년 7월 성지건설과 함께 가장 늦게 합류해 총 6개 공구 중 5공구를 맡았다. 해당 구간에는 영업소 1개, 교량 3개, 터널 2개가 지어졌다. 5공구는 다시 2개로 쪼개졌는데, 포스코건설이 경부고속도로를 횡단하는 금토3교 강교가설이 포함된 가장 까다로운 5-2공구를 맡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한국도로공사는 횡단공사를 위해 경부고속도로를 전면 차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 10분을 차단해도 10km에 걸쳐 교통체증이 발생하다 보니, 빗발치는 민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1년여 동안 설득 끝에 야간에 공사를 진행한다는 조건으로 10분간 전면 차단을 허락받아 무사히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특히 5공구는 다른 공구보다 2년이나 늦게 착공에 들어가 5공구만 공기를 못 맞추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지만, 우리는 열정과 패기로 뒤처진 공기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동규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 저가 출혈 딛고 턴키시장 정상급에 오르다
전주~광양 고속도로

전주~광양 고속도로

인천대교 연결도로

인천대교 연결도로

민자투자사업 못지않게 토목 분야는 턴키시장에서도 분전했다. 초창기 저가 출혈의 고통도 있었으나, 차곡차곡 실적을 쌓아나가 선발업체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이 시기 착공에 들어간 도로공사로는 고속도로 확장에서 88고속도로 담양~성산 구간, 남해고속도로 냉정~부산 구간 등이 있었다. 신설 고속도로는 동서고속도로 동홍천~양양 구간, 울산~포항 고속도로, 전주~광양 고속도로 등이 있었다.

그 외 도계~신기 도로확장, 광암~마산 도로확장,영덕~오산 광역도로, 행정도시 대전~유성간 도로, 행정도시 우회도로, 교동연육교, 인천대교 연결도로, 여수산단 진입도로 등의 프로젝트가 있었다.

88고속도로는 1984년 5공화국 시절 영호남 화합의 상징으로 개통됐으나, 왕복 2차선의 열악한 교통환경으로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이 같은 교통여건을 개선하고자 추진된 사업이 바로 144km의 담양~동고령 구간의 왕복 4차선 확장 및 직선화 공사였다.

포스코건설은 이 사업에서 담양~성산간 도로 확장 3공구와 13공구(2008.11~2012.12)를 맡았다. 3공구의 경우 고속도로 확장공사 실적 확보 차원에서 저가 출혈의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출혈은 곧이어 남해고속도로 냉정~부산간 8공구(2009.2~2014.3)를 수주하는데 큰 힘이 됐으며,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적정 수익성을 확보했다.

신설 고속도로인 117.8km의 순천~완주고속도로는 2003년 호남지역에서 장거리 수송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하기 위해 추진된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그 중에서 전주~광양 구간인 8공구(2005.3~2011.12)를 맡았는데, 회사로서는 최초의 호남지역 고속도로 현장이었다. 특히 ILM 교량공법의 장대교 5개소, 소교량 7개소, 총 4개의 터널공사 등 당시로서는 도로공사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공정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준공 이후 남원JCT교는 2012년에 대한토목학회가 주최한 올해의 토목구조물상 시상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높이 70m의 교량공사에 적용된 ILM 압출공법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공법이었다. 기존 공법과는 달리 거푸집 선이 보이지 않아 미관상 보기에 좋았고, 품질관리가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쉬지 않고 콘크리트를 쳐야 하기 때문에 직원들이 24시간 대기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이남일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동서고속도로는 국토의 균형발전과 미래 교통수요 대처를 위해 추진됐다. 2004년부터 추진된 서울~양양간 동서고속도로 공사에서 포스코건설은 마지막 구간인 동홍천~양양노선에 참여했다. 동홍천~양양 15공구는 2009년 3월 착공, 2015년 12월 준공 예정이다.

“연장 450m의 PCT거더교가 110m 지간에 67m 높이의 FCM공법으로 설치될 예정이다. PCT거더교는 가설장비가 간편하고 공기를 단축할 수 있는 데다 외관이 화려한 신공법이다. 아직 국내 시공사례는 없지만, 최근 신설 고속도로에 많이 적용되고 있다. PCT거더교가 마지막 구간인 만큼 화룡점정으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정광호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울산~포항간 고속도로 신설 10공구(2009.6~2014.12)는 포스코건설에게는 2.45km의 장대터널을 시공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특히 현장 여건에 맞게 터널 시공에 앞서 설계변경을 단행함으로써 원가절감과 실행이익률을 개선할 수 있었다.

영덕~오산 광역도로 공사 현장

영덕~오산 광역도로 공사 현장

고속도로 외에도 많은 도로공사를 수행했는데, 그 중 영덕~오산간 광역도로 1공구(2006.10~2009.8)는 포스코건설이 처음으로 턴키공사 주간사를 맡은 프로젝트였다. 특히 최초 사장교 시공의 경험을 축적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총 연장 2.32km, 폭 20m 규모에 교량 9개소, 터널 3개소, 교차로 1개소 등을 시공했다.

도계~신기 확장도로는 태백~도계~신기~미로 38번 국도 확장공사 중 중간 구간이었다. 강원 내륙지역에 위치한 38번 국도의 4차선 확장을 통해 강원 산악지역의 열악한 교통환경을 개선하고, 국토의 균형발전과 지역주민의 편의성을 개선하는 것이 건설사업의 주요 목적이었다. 도계~신기 확장공사(2007.2~2014.12)는 수주와 시공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의 역량이 빛을 발했던 성공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건교부 국토관리청 발주공사로는 처음으로 대표사를 맡았던 이 프로젝트는 최저가 입찰방식의 변경으로 먼저 저가사유서를 작성하고, 심사 대상업체로 선정된 후, 심의위원회 심사를 통과해야만 낙찰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실적이 적어 저가사유서 작성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 요원들은 타사와의 활발한 교류로 필요한 정보를 입수해 저가사유사의 경쟁력을 높였고, 결국 공격적인 저가사유서를 제출해 1순위 업체로 선정됐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최종 조달청 심사에서 9명의 위원 중 7명 이상에게 A등급을 받아야 하는데, 조달청마저 지금까지 과반수 이상이 A등급을 준 적이 없으므로 통과가 힘들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임직원이 적극적으로 홍보에 열의를 보였고, 심의 당일에도 임원들이 심의장에 찾아와 회사의 공사 수주 의지를 위원들에게 각인시켰다. 그 결과 심의위원 전원으로부터 A등급을 받았는데, 이는 조달청 심의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홍재문 상무, 당시 현장소장)

7.8km 4차로 확장공사인 도계~신기 구간은 난공사 구간이었다. 산악지대를 횡단하는 구간으로, 전 노선의 70%가 산을 통과하는 터널과 교량 등의 구조물 작업으로 구성돼 있었다. 특히 영동선 철도를 횡단하는 차구교와 2-Arch 터널 2개소는 가장 어려운 공정으로 철저한 사전계획 수립이 필요했다. 이 같은 어려움에 불구하고 하천부의 가시설 형식을 철구조에서 복합형으로 변경해 차수 효과와 시공성을 향상시키고, 보강 작업을 통해 터널의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킴에 따라 공사비 증액에 크게 기여했다.

여수산단 진입도로 개설공사 4공구(2007.11~2013.4)는 세계에서 3번째로 긴 현수교인 이순신대교를 연결하는 해상교량 공사였다. 포스코건설은 광안대교와 길호대교 프로젝트 성공 이후,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의욕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어 1075m의 해상교량 실적을 확보했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높은 교각, 급한 종단경사, 총 연장 등을 고려해 신개념의 분리형 MSS공법을 채택했다. 포스코건설은 중앙 박스부를 MSS 장비로 1차 시공한 후, 외측 슬래브를 이동식 거푸집차(Form Traveller)로 2차 시공해 장비가 대형화되는 것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고, 그 결과 원가절감과 공기단축이라는 소중한 성과를 얻었다.

세종시~대전유성 확장공사(2008.8~2012.5)는 도로 중앙 자전거길이 특징이었으며, 세종시 국도 1호선 우회도로 1공구(2008.6~2013.3)는 포스코건설이 처음으로 시공한 개착식 지하차도였다. 인천 교동연륙교(2008.10~2014.6)는 해상교량 실적 확보 차원에서 프로젝트에 참여해 310m의 콘크리트 사장교를 시공했으며, 광암~마산간 도로 확포장공사(2009.6~2014.9)는 경기도 지자체 사업으로 2km 이상급 장대터널이 특징이었다.

“세종시-대전유성 프로젝트에서 개통한 4대강 국토종주 자전거길은 최초로 중앙선에 만든 자전거도로였다. 보통은 교차로가 있으면 건널목을 건너는 불편함도 있는데, 이 도로는 중간에 길이 끊어지는 일이 없이 8.78km를 끝까지 달릴 수 있다. 또 자전거 도로 상에 한국서부발전에서 태양광 발전시설도 지었다. 이것도 국내 최초로 시도된 것이었다.” (안병수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 경전철 기술력을 바탕으로 철도 분야 강자로 부상

도로 분야가 민자제안과 턴키공사 저가 출혈을 감내하고 절치부심 끝에 정상에 올랐다면, 철도 분야는 김해경전철이라는 신교통 분야를 선점함으로써 정상에 우뚝 섰다. 특히 포스코건설은 시장 선점에 머무르지 않고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 분야 정상을 유지했다.

경전철 노선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운행 시뮬레이션 기술이다. 신규 노선에 필요한 운전 데이터를 얻으려면 수많은 실험을 수행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안전문제와 함께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운행 시뮬레이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포스코건설은 김해경전철 수행 과정에서 국내 최초로 운행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인 ‘스마트(Smart) LRT’를 개발했다. 스마트 LRT는 노선선정, 교통수요, 운전계획의 핵심요소를 최상위 수준으로 설정한다. 이를 통해 경전철 용량, 표정속도, 운전시격, 운행시각표, 전력사용량 등의 주요 운전 데이터를 생성한다. 생성된 운행 시뮬레이션은 신규 노선의 QoS(Quality of Service)를 예측하고 최적의 목표를 설정해 설계, 건설, 운영 시 적용이 가능하다.

2000년대 들어 새롭게 부각된 신교통 경전철 사업에서 포스코건설은 김해경전철과 의정부경전철, 서울시 사업으로는 우이~신설 등 동북권 사업에 주력했다.

김해~부산간 경량전철 노선도

김해-부산간 경량전철 노선도

김해~부산간 경량전철 민간투자사업 건설공사 현장

김해~부산간 경량전철 민간투자사업 건설공사 현장

2006년 4월 착공에 들어간 ‘김해~부산간 경량전철 민간투자사업 건설공사’는 2011년 4월 준공 이후 우수 유입에 따른 보완, 소음저감시설 설치, 시스템 장애 보완 등을 마무리하고 9월 9일 마침내 개통됐다. 경전철 구간은 총 21개 역으로 구성돼 있으며, 평균 시속 38㎞로 부산 사상역에서 김해 삼계동까지의 소요 시간은 약 37분이었다.

김해경전철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 구간 지상 무인 자동방식으로 운행되는 도시철도로서, 중전철이나 지하철에 비해 건설비와 인건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전 구간이 지상 약 10m 지점에서 운행돼 낙동강 등 수려한 주변 풍광을 감상할 수 있으며, 또 김해국제공항의 접근성 개선과 부산지하철 2, 3호선과 연결되는 환승체계를 구축해 지역주민들의 생활에 큰 편의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부산지하철 2호선 사상역에서 김해 삼계동 차량기지까지 23km 구간의 김해경전철 건설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12km의 3, 4공구의 시공을 맡았으며, 아울러 이 사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5공구 차량기지의 무인 운행 최첨단 시스템이자 차량, 신호, 전기, 통신, 기계 등 소프트웨어 작업인 E&M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노선이 김해시 주 도로인 국도 14호선을 따라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상가 밀집지역을 통과하다 보니 이런저런 민원이 많았다. 2008년 8월쯤인가는 가시설 공사 중 상수도관이 터져서 김해시 일부 지역이 단수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때 현장 직원들이 직접 시청에 가서 빗발치는 민원을 응대하고, 단수문제도 2~3일간 밤샘작업을 통해 완벽하게 해결했다. 그 밖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슬기롭게 극복하고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쳐 보람을 느낀다.” (최창용 전 Sr.Manager, 당시 현장소장)

2000년대 들어 김해경전철을 필두로 경기도 용인과 의정부 등에서도 경전철 건설이 추진되는 가운데 2001년에 서울시도 7개 노선에 대한 경전철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의 ‘도시철도 중장기 기본계획안’에 따라 포스코건설은 우이~신설 구간에 역량을 집중하고 컨소시엄을 구성해 2003년에 지하경전철을 골자로 하는 최초제안을 서울시에 제출했다. 우이~신설 지하경전철 제안은 국토연구원의 심의를 거쳐 2006년 말 사업계획이 확정됐으며, 2007년 초 서울시의 사업자 모집공고에 그해 5월 말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제안서를 단독 제출, 결국 사업자로 선정됐다.

2008.10.31 우이신설 경전철 기공식

2008.10.31 우이신설 경전철 기공식

사업자 선정 후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은 대우건설, 두산건설 등 건설사들을 비롯해 17개사로 구성된㈜우이트랜스를 설립했다. 이어 2008년 11월 기공식과 함께 서울시 최초의 경전철사업이 본격화됐다. 민간투자사업으로 추진된 이 사업에는 총 7554억 원이 투입됐으며, 사업비용은 정부 12%, 서울시가 28%, ㈜우이트랜스가 60%를 부담했다.

2009년 9월 착공한 우이~신설 경전철은 총 연장 10.72km에 13개역을 경유하며, 전 구간 소요시간은 22분이다. 노선은 우이동 유원지를 출발해 수유, 정릉, 미아동을 지나 성심여대입구역, 보문동역, 종착역인 신설동역 등 지하철 1, 4, 6호선과 연결되는 경제구간이다. 특히 우이~신설 경전철은 서울 강남북의 균형발전과 강북지역 교통난을 해소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포스코건설은 이 사업에서 전체 4개 공구 중 지분율 75.88%를 확보한 4공구의 시공을 맡았다. 아울러 김해경전철에서 확보한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한 스마트 LRT를 적용했으며, 가장 중요한 E&M 작업을 진두지휘함으로써 앞선 기술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2014년 9월 준공 예정이었던 우이~신설 경전철은 토지보상과 공사에 따른 민원 등으로 공기가 지연되면서 2016년 11월로 준공 일정이 연기됐다.

 

# 국내 최초 철도 분야 BTL 민자사업에 참여하다

포스코건설은 경전철 외 민간투자사업으로는 신분당선 도시철도, 전라선 익산~신리 구간과 경전선 함안~진주 철도 BTL 등에 참여했다. 대부분의 철도공사에서는 노반공사를 많이 했으며, 경부고속철도와 호남고속철도 노반공사에도 참여했다. 도시철도에서는 대구지하철, 인천지하철, 서울지하철 7, 9호선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2006년 10월말 건설교통부에서 주관한 ‘경전선 함안~진주간’과 ‘전라선 익산~신리간’ 복선전철 민간투자사업에서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특히 전라선 익산~신리간 복선전철 공사(2007.7~2012.4)는 국내 최초 철도 BTL 민간투자사업이었다. BTO와 BTL의 구분은 정부나 지자체가 소유권을 갖고, 민간이 일정기간 운영권을 갖는 방식은 같으나, BTL의 경우 수익이 취약한 사업에 적정 수익률을 보장해주기 위해 정부가 임대해서 운영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포스코건설은 총 연장 34.39km의 익산~신리간 복선전철 공사에서 3개 공구 중 가장 긴 3공구를 맡았다. 그러나 시작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2007년 7월 착공에 들어갔으나 토지보상 행정이 늦어져 공사부지 확보를 비롯해 지장물 이설에 장장 11개월이란 시간이 기약 없이 흘러갔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부지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한 마음에 공정추진이 가능한 터널구간 작업에 착수하자 인근마을에서 장비통행으로 인한 피해를 주장하며 현장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현장 요원들은 소통과 협력으로 복잡하게 꼬인 민원의 실타래를 끈기 있게 풀어나갔고, 공사 정상화와 함께 놓친 공기를 만회하느라 밤낮 없이 자신이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완수함으로써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익산~신리간 복선전철의 성공적 개통으로 서울과 여수까지 무려 5시간 13분이나 걸리던 시간이 새마을호 기준 1시간 55분이나 짧아졌다. 향후 호남고속철도까지 개통되면 그 시간은 더욱 짧아질 전망이다.

“우리 회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철도 BTL에 대한 다양한 수행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다. 1.845km의 터널실적도 추가로 확보했으며, 운행선 근접시공 경험까지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양재문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턴키 분야에서는 대표적으로 경의선 용산~문산간 복선전철과 동해선 포항~삼척간 노반 건설공사에 참여했다. 46.4km의 경의선 용산~문산간 복선전철화 사업은 서울 도심구간인 서울역~신촌~가좌구간 대신 화물노선으로만 이용되는 용산~효창~서강~가좌 구간을 지하철도화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 사업에서 포스코건설은 도심지 지하철도 구간인 1-2b공구(2005.3~2014.12)를 맡았다. 1-2b공구는 마포구 일대 1.5km에 이르는 까다로운 개착터널 구간으로, 포스코건설은 서강역과 홍대입구역을 신설했으며, 터널 시공과정에서는 TRcM, NTR 및 F/J 등 특수공법을 시도했다.

2009년 4월 포스코건설은 동해선 포항~삼척간 철도건설 3, 4공구와 울산~포항간 복선전철 6공구를 동시에 수주했는데, 포항~삼척간 3공구의 경우 포스코건설 최초의 턴키입찰 주관사 철도 현장이었다. 포항~삼척간 3, 4공구(2009.4~2014.4)는 각각 9.13km와 9.5km의 철도노반 신설공사였으며, 울산~포항 6공구(2009.4~2014.4)는 9.78km 구간의 단선철도를 복선 전철화하는 사업이었다.

새만금산업단지 신항만 방파제 2공구 조감도

새만금산업단지 신항만 방파제 2공구 조감도

항만 분야에서는 영일만 신항 민간투자사업, 아야진항 건설공사, ⑫새만금산업단지 1-1공구 준설토 매립공사, 인천신항 진입도로 및 호안축조공사 2공구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 중 인천신항 진입도로 및 호안축조공사 2공구(2009.11~2013.4)는 포스코건설 두 번째 사장교 시공 현장이란 의미가 있으며, 5.9km의 진입도로와 810m의 호안축조와 함께 사장교 431m의 실적을 확보했다.

부지조성 분야에서는 인천 청라지구, 파주 운정지구, 고양 삼송지구, 남양주 별내지구 등 많은 택지개발에 참여했으며, 충주기업도시, 광주산업단지 등의 조성공사에도 참여했다.

충주기업도시 기반시설 조성사업(2008.6~2012.8)은 토목 분야 대표적 개발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이 주간사로서 컨소시엄에는 충주시, LH공사, 임광토건, 엠코, 포스코ICT, 동화약품, 농협중앙회 등이 참여했다. 충주시 주덕읍과 이류면, 가금면 일대 약 693만 ㎡의 부지에 국비 221억 원, 지방비 149억 원, 민간자본 5285억 원 등 총 5655억 원 규모의 사업비가 투자됐다.

“충주기업도시는 전국 6개 기업도시 중 가장 먼저 개발된 성공모델이었다. 과거의 산업단지들은 생산기능에 치중해 개발됐지만, 충주기업도시는 산업적인 입지와 함께 주거, 교육, 문화 등 종합적인 정주환경을 고루 갖춘 복합자족도시로 거듭났다. 앞으로도 충주기업도시는 지역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중부내륙권의 성장거점 도시로 더욱 발전해나갈 것이다.” (김대현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 환경 분야, 수처리 이어 하수관거 정비사업 정상 달려

환경 분야는 기존의 하수 고도처리 기술과 용융 소각로 기술에 하수슬러지 연료화 기술을 추가하며 업계 정상을 계속 유지했다.

수처리 분야에서는 인천 학익, 파주 LCD, 김포, 포항, 경산등 전국의 하수종말처리장을 대상으로 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전국적으로 하수처리장 사업이 한창인 가운데 2000년대 중반 이후 관로 오염방지와 수질 향상을 위해 하수관거 정비사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은 정부나 지자체가 예산부족으로 대부분 민자사업으로 추진했으며, 민자방식은 사업자의 적정 수익성 보장을 위해 임대형 민자사업(BTL)으로 추진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분야에서도 수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하수처리장에 이어 하수관거 정비사업에서 업계 정상을 달렸다. 상주시 하수관거정비사업(2006.6-2010.11)을 시작으로 주간사 10개, 회원사 14개 등 도합 24개 2조 2000억 원 규모의 하수관거 정비사업(포스코건설 지분 7000억 원 규모)을 수주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내 하수관거 BTL 최대 실적 보유사의 업적을 달성했다. 특히 BTL사업 중 최대 규모(1140억 원)였던 천안시 하수관거정비 사업(2008.4~2012.8)을 대우건설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수주에 성공하면서 환경 분야 탑 클래스의 진면목을 과시했다.

자원재이용 분야에서는 용융 소각로 기술로 양산시 자원회수시설(2004.10-2008.1)에 이어 고양시 환경에너지시설 신기술 대체사업(2006.5-2010.8)에 참여했다. 하수슬러지 연료화 기술로는 수원시 하수슬러지처리시설(2007.6-2011.11)와 양산시 하수슬러지처리시설(2008.2-2009.12)를 수행했으며, 쓰레기자동집하시설로는 용인흥덕 자동크린넷시설((2006.9-2009.3), 인천청라 자동크린넷시설(2008.4-2011.6), 파주운정 쓰레기자동집하시설(2007.9-2012.8)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파주 LCD산업단지 폐수종말처리시설

파주 LCD산업단지 폐수종말처리시설

인천 학익 하수종말처리시설

인천 학익 하수종말처리시설

수처리 분야의 대표적 프로젝트로는 파주 LCD산업단지 폐수종말처리시설 2단계(2005.12~2007.10), 인천 학익 하수종말처리시설(2005.8~2008.8), 김포시 하수도시설 민자사업(2009.7~2012.10) 등이 있었다.

파주 프로젝트는 GS건설이 석권하던 지역에 타 건설사로는 유일하게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으며, 1단계의 성공적 준공에 힘입어 2단계까지 맡아 포스코건설의 고도처리 기술을 과시했던 프로젝트였다.

“1단계 공사에 이어 파주 LCD단지에서 발생하는 폐수를 안전하게 처리해 만우천으로 방류할 수 있도록 처리량 하루 7만 ㎥의 고도처리시설을 설치하는 공사였다. 1단계와 같이 짧은 공사기간으로 인해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진행하는 패스트 트랙(Fast Track) 방식을 채택했으며, 1단계 공사와의 중복으로 인한 시공상 간섭이 발생해 공정을 더욱 촉박하게 진행해야 했다.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모든 현장 직원이 하나로 뭉쳐 고품질 무사고 시공을 달성했다.” (김일동 전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인천 학익 프로젝트는 하수처리장 사업비 규모로는 당시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대규모였던 만큼 내로라하는 환경 분야 정상급 업체가 모두 참여했으며, 포스코건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다.

학익 하수종말처리장의 특징은 친환경이었다. 설계 단계부터 시민공원의 역할을 최대한 반영했다. 나들공원, 테마공원, 환경놀이터 등 아름다운 조경시설은 물론이고, 학이 나는 모습을 형상화한 ‘환경정보센터’가 환경학습의 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가시설 작업으로 인한 땅울림과 교통문제가 발생하는 차집관로 공사에 땅을 개복하지 않고 지하에서 굴진해서 밀어내는 세미쉴드(Semi-shield) 공법을 적용했다. 지반이 약한 지역이나 도심지에 효과적이었고, 소음이나 분진 피해도 줄어들었다. 땅 위에서 굴착하면 상하수도나 가스관 등이 걸리기 마련인데, 이런 방해 요소를 피할 수 있어 작업속도가 빨라졌다. 특히 민원이 줄고 품질수준도 크게 향상됐다.” (이운옥 상무, 당시 현장소장)

 

# 신뢰와 통큰 이미지 남긴 김포시 하수처리장 민자사업

BTO방식의 민자사업이었던 김포시 프로젝트의 출발 시점은 2005년 중순이었다. 당시 계획 인구 15만 명에 1000만 ㎡ 규모의 김포 한강신도시 개발이 시작되고 있었다. 기존 인구 5만 명을 합치면 향후 20만 김포시민을 위한 인프라구축이 최우선 과제였지만, 김포시는 사업경험이 부족했다.

하수처리와 관련해서는 4만 톤 처리용량의 김포하수처리장이 유일했다. 이에 김포시는 기존 김포하수처리장의 4만 톤 증설과 통진과 고촌지역에 각각 4만 톤과 1만 톤 규모의 하수처리장 신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정 부족에다 하수도 행정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마침내 김포시가 사업추진에 한계를 드러냈다.

사건의 발단은 섣부른 설계용역 발주였다. 김포시가 상수도정비 기본계획도 없이 설계용역 발주를 내버린 것이었다. 정식 절차대로라면 환경부 승인을 거쳐야 했다. 결국 담당공무원이 징계위기에 몰렸다. 이런 사전정보를 가지고 포스코건설이 김포시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먼저 포스코건설은 김포시가 안고 있던 문제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제정 부족문제에 대해서는 민자사업을 제안하고, 기존 설계용역의 발주 취소를 권고했다. 하수도 행정에 대해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환경부를 대상으로는 담당공무원의 징계가 없도록 진정도 넣었다. 이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나면서 실무진과 담당공무원 사이에 탄탄한 신뢰가 쌓이면서 김포시 프로젝트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후의 일정이 탄탄대로를 달린 건 아니었다.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경쟁사인 GS건설이 최고경영층 인맥을 배경으로 로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담당공무원이 당당하게 버텼다. 그는 지금까지 쌓아온 포스코건설과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다. 많은 시간과 인내가 요구되는 민자사업 추진에서 상호 신뢰구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었다.

포스코건설도 지혜롭게 처신했다. 혼자 독식하기보다는 GS건설을 설득해 컨소시엄의 회원사로 끌어들였다. GS건설을 해결하고 나니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될성싶은 사업에 손님이 들끓기 마련이듯, 최초제안에 이어 마지막 제안경쟁에서 대림산업이 등장했다.

한국환경공단의 제안서 평가에서 포스코건설이 승리는 했지만, 포스코건설은 경쟁하기보다 상호 협력을 통한 동반 성장을 추구했다. 포스코건설이 대림산업마저 안고 컨소시엄을 꾸리자 안팎으로 ‘통큰 회사’란 칭찬이 자자하게 퍼져나갔다.

2009년 7월 착공과 함께 ‘김포시 하수도시설 민자사업’이 본 궤도에 올랐다. BTO방식의 민자사업으로,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시설물을 짓고 소유권을 김포시에 이전한 후 20년간 운영권을 갖는 조건이었다. 총 공사비 2048억 원 규모의 이 사업에서 포스코건설은 30%의 지분을 갖고 GS건설, 대림산업 등 8개사와 공동으로 시공에 들어갔다.

프로젝트명은 ‘하수를 깨끗한 물로 재생해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 휴식공원’이란 의미를 담아 레코파크로 정했다. 레코파크 프로젝트는 2012년 12월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김포레코파크에는 기존 4만 톤 규모의 하수처리시설 옆에 같은 규모의 시설이 지하에 추가됐으며, 지상에는 축구장이 들어섰다. 통진레코파크 역시 4만톤 규모의 처리장과 함께 지상에 축구장, 농구장, 게이트볼장 등 다양한 체육시설이 조성됐으며, 고촌레코파크에는 1만톤 규모의 하수처리시설 외에 아름다운 녹지공원이 꾸며졌다.

특히 기존 김포하수처리장은 김포시에서 배출되는 하수의 50% 정도만 처리했지만, 신설 하수처리장은 김포와 통진, 고촌 등 3곳에 하수처리시설이 가동되면서 한강신도시에 입주할 20만 명을 포함해 김포시 하수를 100% 정화할 수 있게 됐다.

“김포시 프로젝트는 2011년도 전사 우수프로젝트에 선정되기도 했다. 최초제안의 내용도 좋았고, 실행이익률도 좋았다. 후속 프로젝트인 하수관거 정비사업도 수행할 수 있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우리회사 최초의 O&M(Operation & Maintenance) 회사인 블루O&M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블루O&M의 효율적인 운영으로 매년 상당한 수준의 운영수익이 발생하고 있다.” (박하진 Sr.Manager)

 

# 하수슬러지 및 자동크린넷 자원재이용 사업개발

자원재이용 분야에서는 자원회수시설, 하수슬러지 처리시설, 자동크린넷시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경험과 기술을 축적했다.

용융식 소각로 기술 확보와 함께 양산시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한 저력을 바탕으로 2006년 1월 포스코건설은 환경관리공단에서 발주한 ‘고양시 환경에너지시설 신기술 대체사업’수주에도 성공했다. 턴키방식으로 추진된 이 사업의 입찰경쟁에서 수주 성공요인은 기존 소각장과 달리 다이옥신 소각재에 의한 2차 오염 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신기술인 열분해가스화 용융방식의 적용이었다. 2006년 2월 착공에 들어가 2010년 12월 150톤 규모의 열분해가스화 용융시설 2기와 50톤 규모의 재활용시설 1기를 준공했다.

자동크린넷과 하수슬리지 분야는 새롭게 개척한 사업 분야였다. 인천 청라지구 자동크린넷의 경우 용인 흥덕지구와 파주 운정지구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포스코건설 최초로 주간사로서 추진했던 프로젝트였다. 포스코건설은 높은 수익률보다는 미래 경험치에 무게를 두고 전략적으로 접근해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청라지구 자동크린넷 시설공사(2008.4~2013.12)는 첫 시도였던 만큼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내부에서 참고할 자료가 많지 않아 하나부터 열까지 자력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게다가 ‘세계 최대’라는 만만찮은 규모가 심적 압박을 가중시켰다. 약 1700만 ㎡라는 거대한 면적을 아울러야 하는 데다 다루는 분야가 복잡다단한 복합공정이었다.

“하나의 지구 내에 있는 시설 규모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곳이 청라지구 자동크린넷시설이었다. 집하장 숫자가 다섯 군데나 되는 것도 최초였고, 넓은 범위에 관로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어 몇 배의 공력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다시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모든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다.” (정봉진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이전까지 새롭게 구축된 신도시들이 첨단 폐기물 처리시스템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초기에 발생하는 시행착오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타 도시에서 제기됐던 문제점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국내와 해외에서 최다 실적을 갖고 있던 기술공급사와 협력하며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여나갔다.

그 결과 성공적 준공과 함께 이 프로젝트는 송도 5, 7공구 자동집하시설과 충남도청 이전 자동집하시설 등의 프로젝트 수주에 크게 기여했다.

송도국제도시 5, 7공구 생활폐기물 자동집하처리시설(2010.8-2013.3)은 5공구의 경우 규모가 관로 7.1km에 1일 폐기물 수거량이 19톤이었으며, 7공구는 관로 8.1km에 1일 폐기물 수거량이 27톤이었다. 2010년 10월 착공, 2015년 10월 준공 예정인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자동집하시설 건설공사는 집하장 2개소, 관로 약 27km, 투입구 160개 규모였다.

하수슬러지 분야는 지속적인 기술개발에서 출발했다. 2000년대 들어 포스코건설은 고유가 극복과 원유 대체를 위한 신재생에너지 확보 차원에서 폐기물 에너지화 기술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폐자원인 유기성 슬러지를 이용해 혼합, 성형, 건조 공정을 거쳐 고품질·친환경 슬러지 연료탄을 생산하는 하수슬러지 연료화 기술을 개발해냈다.

이 기술은 2003년 환경신기술 인증과 함께 2006년에 국가 100대 우수과제에 선정됐으며, 2007년에는 제8회 환경기술상인 환경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2007년과 2008년에 신재생에너지 부문에서 친환경대상을 2년 연속 수상하기도 했다.

하수슬러지 연료화 기술이 주목을 받는 가운데 2004년 12월 수원시는 하수슬러지 처리시설 민간투자사업 기본계획을 고시했다. 총 사업비의 50%를 정부, 25%를 경기도가 지원하고 나머지 25%는 사업자가 지원 후 향후 15년간 사용료로 수원시로부터 상환받는 BTO방식의 민자사업이었다.

이 경쟁에서 포스코건설은 현대건설, 두산산업개발과 경합해 2005년 5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으며, 2006년 9월 수원시로부터 최종 사업자로 지정받았다. 2007년 6월 착공, 2009년 12월 준공된 1일 450톤 처리규모의 수원시 하수슬러지 처리시설은 단위 규모로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한편 2009년 연말 서울 역삼동 사옥 인근에서 토목환경사업본부의 호프데이가 열렸다. 2006년 1조 달성에 이어 마침내 토목환경 분야가 수주 2조원 시대를 열었다.

“모두 단합해 타사와 경쟁의 경쟁을 거듭하고 얻은 값진 수주들로 목표달성을 일궈낸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내년에 호랑이의 기상,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토목시장에서 최고의 강자가 되기를 바란다.” (정동화 전 부회장)

늘 회사의 균형 발전을 저해하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토목환경사업본부. 그 동안 도로 분야는 저가 출혈을 감내하고 턴키시장에서 정상급으로 성장했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으로 민간제안 사업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철도 역시 경전철 경쟁력을 기반으로 업계 정상에 올라섰으며, 환경 분야는 기술력을 더욱 다져 업계 정상을 계속 유지했다. 그 같은 도전과 열정으로 이제 토모환경사업본부는 천덕꾸러기의 설움을 딛고 회사 균형 발전에 꼭 필요한 사업조직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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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4. 에너지사업본부 출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라!”        

# 발전에너지에서 숨은 역량을 찾아내다

에너지 분야 중무장의 계기는 위기의식에서 출발했다. 역설적으로 포스코건설은 잘 나가던 시절인 2000년대 중반 왠지 모를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한수양 사장이 막 새로운 CEO로 부임하던 순간과 맞물렸다.

그는 플랜트와 주택, 송도사업에 편중된 사업구조를 걱정했다. ‘모멘텀은 언제 바뀔지 모른다’ 그런 위기의식이 회사 전반에 만연하기 시작했고, 한수양 사장은 플랜트, 공공 SOC, 건축 등 적정 포트폴리오의 사업구조를 강조했다. 특히 주택에 이어 새로운 성공신화를 창출해낼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포스코건설은 에너지사업을 선택했다.

에너지사업본부가 탄생하기까지 그 과정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에너지사업 조직은 회사 출범과 운명을 같이했다. 당시 포스코의 석탄화력 민자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과 기술인력을 갖추면서 사업조직이 태동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대로 포스코의 석탄화력 민자사업이 취소되면서 포스코건설의 에너지사업은 존폐 기로에 섰다. 다행히 포스코 내부 물량이 뒷받침되면서 조직의 규모를 축소하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500MW급 광양 복합발전과 350MW급 포항 복합발전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포스코의 발전설비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에너지 조직은 국내외 발전설비 공사를 추가로 개발해내지 못했다. 결국 2002년 3월 조직이 해체되고 인력 대부분이 퇴사하거나 다른 부문으로 전출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끈질겼다. 공중 분해됐던 에너지사업은 2004년에 다시 한 번 회생의 기회를 잡았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요구하는 한수양 사장이 취임했고, 포스코에서는 광양 9호 발전설비 프로젝트가 나왔다. 더구나 플랜트사업본부가 처음으로 외부 프로젝트인 남제주화력 3, 4호기공사를 경쟁입찰을 통해 수주하는 성과까지 올렸다.

이즈음 플랜트사업본부는 CEO의 요구사항이기도 했던 성장동력 확보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4년 중반 플랜트사업본부는 경주에서 워크숍을 실시했다. 당시 고영균 본부장을 비롯해 모든 참석자들은 계급장을 떼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에너지사업을 선택했다. 발전에너지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데다 당장 일거리가 있으니 바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화공에너지 같이 과감한 배팅에 대한 위험부담도 덜했다.

2004년 7월 마침내 에너지사업 조직이 회생했다. 발전사업팀과 발전영업팀이 신설됐는데, 이전과 다른 점은 영업조직의 태동이었다. 이전까지 에너지사업은 내부 물량에만 안주했다. 그러다 보니 포스코의 투자 전략에 따라 에너지사업의 희비가 엇갈렸다. 이제 더 이상 그 같은 전철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 따라 영업조직이 태동한 것이며, 다시 회생한 그들은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대외사업 경쟁에 뛰어들었다.

막상 에너지사업의 돛을 올렸지만, 국내 발전에너지 시장 진출은 녹록치 않았다. 한국전력 발전자회사와 선발 건설사들의 장벽이 너무 높았다.

또 다시 고민하는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전문가를 영입했다. 포스코에서 29년간 환경·에너지 분야 베테랑으로 명성을 날리던 김호섭 본부장을 사령탑으로 맞이하고, 2006년 12월 업계 최초로 에너지사업본부를 신설했다. 첫 출항에 나선 에너지사업본부는 해외 발전사업 진출을 모색하고, 새롭게 그린에너지 사업발굴에도 나섰다.

한편 화공에너지는 발전에너지보다 그 시장규모가 3배 이상 거대하다는 매력이 있지만, 장치산업이라 초기 투자비용이 많고, 또 정유사를 보유한 SK건설이나 GS건설 등 기존 선발업체들의 높은 장벽을 넘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 육성사업 대상에서 한발 밀렸다. 그럼에도 2006년 12월 에너지사업본부 신설 때 처음으로 동력사업팀이라는 조직을 갖췄으며, 2007년 6월에는 화공사업그룹으로 조직이 성장하기도 했다.

 

# 그린에너지 첫 작품, 태기산 풍력 성공적 준공

태기산 풍력발전단지

그린에너지는 국가·세계적 사명과 기업이념인 이윤 창출이 충돌하는 사업 분야이다. ‘우리별 지구환경을 지키자’는 측면에서 당연히 모든 기업이 사명감을 갖고 나서야 하지만, 투자비용에 비해 발전에너지 만한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윤 창출의 기업이념 차원에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포스코건설은 국가적 사명과 수익사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 그린에너지 분야에 진출했다. 계륵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제철보국 유전자를 지닌 포스코건설은 국가적 사명을 먼저 염두에 두었다.

포스코건설의 그린에너지 포트폴리오는 다양했다. 풍력, 태양광, 조력, RDF 등 재생에너지를 비롯해 신에너지인 연료전지까지 갖추었다. 풍력에서는 태기산 풍력발전소(2006.12~2008.11)를 준공·운영하고 있으며, 태양광의 경우 영암에 태양광발전소를 지었다. 조력 분야에서는 한국서부발전이 추진하는 가로림 조력발전소 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연료전지 분야에서는 부곡, 포항, 율촌 등에 연료전지 발전소를 지어 운영하기도 했다.

태기산 풍력발전단지는 그린에너지 첫 작품이었다. 이 사업은 강원도가 유러스에너지재팬(EEJ)과의 외자유치에 성공하면서 본격화됐다. EEJ는 일본 최대 풍력개발 회사로 세계 풍력시장의 37%를 점유하는 등 6개국에서 62개의 풍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강원도는 외자유치에 이어 EEJ와 함께 2004년 12월부터 강릉시 왕산면과 횡성군 둔내면에 풍력계측기를 설치해 풍력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강릉 왕산은 초당 7.6m, 횡성 1, 2호기는 각각 6.4m와 7m의 풍황 결과치를 얻었다.

이후 2005년 4월 MOU 체결과 함께 포스코건설이 참여하면서 강원도의 풍력개발 추진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MOU 체결 이후 2006년 2월 MOU 후속 조치로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강원도, 강릉시, 횡성군, EEJ 등이 모여 풍력단지 조성을 위한 5자간 공동개발 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들에 의해 특정목적회사(SPC)인 ㈜태기산풍력발전이 탄생했다. 2007년 1월에는 포스코건설이 태기산 SPC로부터 풍력발전단지 조성사업을 수주함에 따라 태기산 프로젝트가 본 궤도에 올랐다.

“풍력발전단지 개발에 있어서 사업성이 우선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하지만 시행 단계에 있어서는 지자체와의 협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아무리 사업성이 좋아도 지자체 의지가 부족하면 추진 자체가 어렵다. 민원 및 사업 인허가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은 만큼 지자체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차태선 상무보)

태기산 프로젝트 역시 인허가 과정이 가장 힘들었다. 풍력단지가 횡성군과 평창군에 걸쳐 있었고, 지방 산림청도 2곳이나 관여하고 있었다. 물론 강원도로부터도 허가를 받아야 했다. 사업 인허가를 얻기 위해 프로젝트 요원들은 횡성, 평창, 강릉, 춘천 사이를 한 달 평균 7000㎞ 이상 뛰어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2008.11.26 태기산 풍력발전 준공식

2008.11.26 태기산 풍력발전 준공식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결국 모든 인허가 획득에 성공했다. 정공법을 택한 덕에 이해관계가 복잡한 공공기관의 마음을 하나로 움직일 수 있었고, 이후의 과정은 오히려 더 빨리 진행됐다. 꼼수를 부리지 않은 묵묵히 정공법을 택한 결과였다.

2007년 7월 착공 이후에도 정공법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린에너지답게 환경훼손을 최소화했으며, 지자체나 산림청에서 지적하는 사항은 즉시 해결했다. 그 결과 2008년 11월 태기산 풍력발전단지가 성공적으로 준공됐다.

120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자된 태기산 풍력발전단지는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과 평창군 봉평면에 걸쳐있는 태기산 일대에 2MW급 20기, 발전용량 40MW 규모로, 이는 2만 5000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이었다 특히 강원도는 연간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6만 톤 가량 줄여 3000ha 규모의 산림대체 효과를 얻었다.

풍력발전단지 준공식에서 당시 정준양 사장은 인사말에서 “정부의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에 부응해 그린에너지사업을 꾸준히 개발하고 관련산업 성장에 이바지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풍력 발전사업은 이후 지지부진했다. 경북 청송과 영덕 등에서 의욕적으로 여러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나, 사업성 부족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기기 가격이 계속 오르는 반면 발전차액 기준가격이 계속 낮아진 것이 한 요인이었고,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사업을 할 만큼 풍력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었다.

 

# 그린에너지 독보적 존재, 국가적 녹색성장에 기여
영암 태양광발전소

영암 태양광발전소

태양광 발전은 태양의 방사에너지를 전기로 변환하는 솔라셀(Solar Cell)의 광전효과를 이용한 것이며, 포스코건설은 국내 최초로 영암 태양광발전소(2007.2~2008.2)를 지었다. 총 발전용량은 3MW로 단일 규모로는 당시 세계 최대 발전용량을 자랑했다.

3MW는 영광군 법성리 1500가구 전체가 6개월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며, 특히 5400배럴의 원유 절감효과와 2200톤의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포스코건설의 합작법인인 ㈜한국솔라파크가 발주했던 당시 프로젝트에서 포스코건설은 EPC 턴키로 사업 인허가부터 최종 준공까지 일괄 수행해 그 기술력을 과시했다.

연료전지는 수소와 산소로 전기화학 반응을 일으켜 전기를 생산하고 난 뒤 폐열을 온수로 활용하는 고효율 신에너지이다. 포스코건설은 포항에서 2개의 프로젝트, 충남 당진과 전남 순천에서 각각 1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포항에서는 북구 흥해읍 영일만항 배후 산업단지에 포항연료전지발전㈜이 발주한 설비용량 2400kW(1200 kW, 2기)의 연료전지 발전소(2008.9~2008.11)를 EPC로 건설했으며, 아울러 포스코에너지가 발주한 연산 50MW의 포항 연료전지 발전소(2008.10~2009.7)도 EPC로 영일만 배후 산업단지에 건설했다.

부곡 연료전지 발전소(2008.10~2009.7)는 GS EPS가 발주한 프로젝트였다. 포스코건설은 충남 당진군 부곡 산업단지 GS EPS 발전소 내에 설비용량 2400kW 1기의 연료전지 공장을 EPC로 건설했다. 전남 순천 율촌 산업단지 MPC 율촌발전소 내에 EPC로 건설한 연료전지 발전소(2008.2~2009.8)은 설비용량이 4800kW(2400 kW, 2기)로 포스코건설이 건설한 연료전지 발전소 중 그 규모가 가장 컸다.

조력발전은 해양에너지를 이용하는 발전시스템으로, 주로 서해안의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한 해수의 운동에너지로 터빈을 구동시킨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로림만이 조수간만의 차(7~9m)가 커 국내외에서 조력발전소의 최적지로 평가받았다. 이에 한국서부발전이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와 태안군 이원면 내리에 2㎞의 제방을 쌓아 520㎿의 전기를 생산하는 가로림 조력발전소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포스코건설도 사업비 1조 2000억 원 규모의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2007년 8월에는여러 대형 건설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SPC법인이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 최대 규모로 기대를 모았던 가로림 조력 프로젝트는 환경단체와 일부 주민들의 반대에 막혀 지금까지 계속 발이 묶여 있다.

태기산 프로젝트부터 시작해 그린에너지 추진 5년. 포스코건설은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대부분의 건설사들이 기피하는 사업군에다 실제로 수익적 측면에서 큰 성과는 없었으나, 포스코건설은 다양한 시도와 개척을 통해 국가적 과제인 녹색성장 정책에 기여했다.

 

# 국내 발전에너지, 대외사업 경쟁 통해 사업경험 축적
2005.3.15 화성열병합 발전소 계약식

2005.03.15 화성열병합 발전소 계약식

2004년 극적으로 회생한 에너지사업 조직은 국내 발전에너지 분야에서 포스코 물량에 안주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외사업 경쟁에 나섰다. 2005년 3월 그 첫 결실을 맺었다. 한국지역난방공사가 발주한 화성열병합발전소 건설사업에서 대우건설 주간의 회원사로 참여해 수주에 성공했다.

2005년 4월 착공, 2007년 11월 준공된 화성열병합발전소는 한국지역난방공사 최초의 중대형 열병합발전소로, 총 3000억 원이 투자됐으며, 170MW급 가스터빈 2기와 배열회수보일러 2기, 165MW급 스팀터빈 1기 등 발전시설과 지역난방시설로 이루어졌다. 준공 후 화성열병합발전소는 시간당 총 525MW의 전기와 513Gcal의 지역난방열을 생산해냈다.

화성 프로젝트 수주 성공에 이어 2005년 5월 포스코건설은 조선내화, 케너텍과 함께 대전 3, 4공단 열병합발전소 인수에 참여해 대전열병합발전㈜을 설립했다. 대전열병합발전소는 설비용량 88.1MW, 보일러 용량 660톤, 부지 1만 5000평의 규모로 대전 3, 4단지와 주변지역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었다. 에너지관리공단은 정부의 민영화 정책에 따라 대전열병합을 매각했으며, 포스코건설은 대전열병합 관할의 둔산지구 집단에너지사업을 노리고 대전열병합의 인수와 설립에 참여했다.

실제로 2005년 12월 포스코건설은 대전열병합이 발주한 둔산지구 지역난방 열배관 설치공사를 수주하기도 했다. 이후 둔산지구 프로젝트가 모두 끝나자 더 이상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2007년 9월 대전열병합에 대한 지분을 매각했다.

화성과 대전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포스코건설은 이후 한국지역난방공사가 발주한 파주와 의정부 집단에너지시사업 경쟁입찰에 참여했다.

파주 집단에너지 발전사업(2007.3~2011.2)은 교하지구의 난방용 집단에너지 공급을 위한 LNG 열병합 복합화력발전소 건설과 함께 열공급 시스템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였다. 의정부 집단에너지 발전사업(2008.9~-2013.3)은 민락2지구 1만 5000세대에 난방열 집단에너지 공급을 위한 LNG 열난방시스템을 설치하는 사업이었다.

화성과 파주, 의정부로 이어지는 한국지역난방공사 발주의 사업들은 경쟁입찰이긴 하나, 포스코건설이 회원사로 참여한 프로젝트였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 포스코건설은 선발업체들의 회원사로 참여해 대외사업에 대한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이 시기 포스코패밀리 발주 물량 중 착공에 들어간 프로젝트로는 광양제철소 9호 발전설비(2004.11~2006.8), 포항제철소 파이넥스 복합발전 설비(2005.5~2007.7), 포스코에너지 인천 복합발전 5,6호기(2008.12~2011.6)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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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제철소 9호 발전설비 건설 현장

광양 9호 발전설비의 건설 목적은 고로 용선증대 및 조강증산으로 발생되는 잉여 부생가스를 발전에너지로 활용함으로써 연간 300억 원의 에너지 절감을 통해 원가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실제 설비증설로 광양제철소의 자가발전 능력은 기존 1390MW에서 1490MW로 늘어났다. 당시 공사에서 포스코건설은 안정적인 설비공급 및 철저한 시공으로 당초 공정대비 공기 100일을 단축했고, 특히 우수한 시공품질로 발주처인 포스코로부터 감사패를 수여받는 등 발전설비에 대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설비용량 1000MW급의 인천 LNG 복합화력 5, 6호기는 포스코에너지의 민자 발전사업으로, 수도권 지역에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목적이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포스코건설 요원들에게는 갯벌과의 사투로 얻은 영광의 현장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갯벌을 메워 땅으로 만드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배수공을 설치해 지하 갯벌층의 수분을 외부로 배출하는 작업과 함께, 매립토를 전량 외부에서 반입해야 했기에 덤프트럭이 하루 700대나 드나들었다.” (조현조 전 부장, 당시 현장소장)

특히 인천 복합화력 5, 6호기는 친환경공법으로 청정에너지 터전을 마련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준설토 매립 과정에서는 폐기물 발생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대나무네트를 활용했으며, 재하성토 과정에서는 지중을 진공상태로 만드는 진공압밀공법도 부분적으로 도입했다. 그 외에도 설계 및 검토 전 단계에 걸쳐 6건 이상의 친환경공법을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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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산소공장

광양 3호기 LNG탱크 증설공사 전경

광양 3호기 LNG탱크 증설공사 전경

한편 화공에너지 분야에서는 광양 3호기 LNG탱크 증설공사를 비롯해 동력설비로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에서 수많은 산소설비 신설공사를 수행했다. 포항에서는 13, 14, 15호기 산소설비에 참여했으며, 광양에서는 14, 15호기 산소설비 공사를 수행했다. 광양 3호기 LNG탱크 증설공사(2007.7~2010.9)는 광양 LNG터미널 내 LNG 저장탱크 1기 증설공사로, 대림산업과 공동으로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2004년 에너지 조직 회생 이후 5년간의 기간은 포스코패밀리 물량 수행을 통해 기술을 축적하고, 아울러 선발업체 회원사로 참여해 대외사업에 대한 경험을 쌓아나가는 과정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안산 복합발전 민자사업 등 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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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5. 경쟁자 없는 제철 플랜트, “기술력 진보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 파이넥스 2공장 준공, 세계 최초 상용화 성공

포스코건설 출범의 기반이었던 제철 플랜트는 전체 사업부서의 맏형으로서 꾸준히 회사 성장에 기여해왔다. 2008년까지 건축 분야와 함께 회사 성장을 리딩해왔으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2009년에 일시적으로 실적이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제철 플랜트는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해 곧바로 부진을 훌훌 털고 일어섰다.

무엇보다 제철 플랜트는 더 이상 국내 경쟁자가 없는 고독한 시절을 맞았다. 그렇다고 기술력 연마를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세계를 상대로 기술력을 다지는 과정은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이 시기 제철 플랜트의 기술력 연마는 제선과 제강 분야에서 돋보였다. 독보적인 친환경 고로인 파이넥스는 2공장 준공으로 그 기술력이 한층 더 향상됐으며, 광양 5고로 신설 이후 고로 신설과 개수 기술력은 세계 최강을 자랑했다. 특히 포항 신제강, 광양 5코코스 등 대규모 신설사업을 수행하면서 새롭게 기술력을 다져나갔다.

“파이넥스 완성은 영일만에 철강산업의 불을 지핀 지 40년 만에 세계 철강사를 새롭게 쓴 쾌거이자, 우리경제가 가야 할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준공식 치사에서)

“세계 주요 철강사들이 대형화, 통합화를 통해 경쟁우위를 회복하고 있고, 후발 철강사들의 도전이 더욱 거세지는 상황에서 파이넥스공장 준공은 포스코의 경쟁력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구택 전 포스코 회장, 준공식 기념사에서)

2007.6.5 파이넥스 준공식

2007.06.05 파이넥스 준공식

세계 최초의 상용화 설비인 파이넥스 2공장이 착공 34개월만인 2007년 5월 마침내 준공됐다. 60만 톤의 데모 플랜트보다 그 용량이 150만 톤으로 커졌고, 데모 플랜트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들을 개선해 설계, 제작, 시공에서의 오류를 최소화했다.

파이넥스 공정은 가루 형태의 철광석을 가스로 환원시켜 순수한 철 성분으로 바꾸어 주는 유동환원로, 환원된 철광석과 석탄을 일정한 모양으로 만드는 HCI 설비 및 성형탄 설비, 그리고 철광석과 석탄을 녹이고 환원에 필요한 일산화탄소와 수소를 만들어 내는 용융로로 구성돼 있고, 이 4가지 공정이 파이넥스 공법의 핵심기술이었다.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에서는 유동환원로와 HCI 설비 개선이 특징이었다. 먼저 데모 플랜트의 HCI 설비를 광폭 HCI로 개선함으로써 원료비와 설비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특히 유동환원로 개선으로 그 동안 용광로의 특성상 사용할 수 없었던 알루미나(Al2O3)나 아연(Zn) 성분이 많이 포함된 철광석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4단 유동환원로에 가스를 불어넣어 가루 형태의 철광석을 날리면서 4차례에 걸쳐 환원시키기 때문에 통기성 문제나 아연 성분의 기화로 노벽에 붙는 현상을 제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원료의 무제한 사용이라는 세계 철강업계의 숙원을 해결할 수 있었다.

파이넥스 2공장 준공 과정에서는 오스트리아 푀스트알피네사가 기본설계를 맡았고, 포스코건설이 상세설계와 제작, 시공을 담당했다. 플랜트 단일공사로는 공사비용 6610억 원으로, 당시로는 최대 규모였다. 시공 물량만도 기계공사 8만 6000톤으로, 300만 톤 고로 2기를 동시에 건설하는 것과 맞먹는 대규모 공사였다.

무엇보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은 프로젝트였다. 해외 유명 철강사들이 신제선 공법을 개발하고도 상업화에 잇달아 실패하면서 포스코의 파이넥스 상용화 성공 여부에 세계 철강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또 정부의 10대 기술과제로도 선정돼 국가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준공 과정에 어려움도 많았다.

“2006년에 포항지역 건설노조의 83일간 장기간 파업으로 공사가 중단된 적도 있었고, 공사 진행 중 본체설비의 엔지니어링 변경으로 약 3개월간 주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장문재 전 이사보, 당시 현장소장)

그럼에도 프로젝트 요원들은 세계 최고의 파이넥스 상용화 성공을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 그 결과 2005년 하반기, 2006년 상반기 연속으로 회사차원의 품질·안전·환경 평가에서 우수현장에 선정됐다. 또 파이넥스 기술개발과 건설을 병행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과업을 완수함으로써 EPC 일괄 수행체제 모범 현장의 선례를 남겼다.

 

# 고로 개수 기술력, 세계가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

“고로 개수는 1992년 포항 1고로 2차 개수부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신일본제철이 고로 개수를 맡았고, 그들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아 기술력을 확보했다. 이후 10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의 기술력은 세계 정상에 올라섰고, 오히려 일본이 우리에게 기술을 배우는 신세로 전락했다.” (진재기 상무보)

고로 개수 실적은 2014년까지 총 14개 프로젝트가 진행됐고, 광양 5고로 1차 개수가 진행 중에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기록으로, 포스코건설만의 경쟁력이었다. 대표적 프로젝트로는 광양 2고로 1차(2005), 포항 3고로 2차(2006), 광양 3고로 1차(2007), 광양 1고로 2차(2013) 개수등이 있었다.

광양 2고로 1차 개수

광양제철소 2고로 전경

광양 2고로 1차 개수의 성과로는 내용적이 3800㎥에서 4350㎥로 그 크기가 14.5% 커졌으며, 쇳물을 뽑아내는 능력도 총 출선량 8400톤에서 1만 100톤으로 연간 46만 톤 증산이 가능해졌다. 아울러 노체냉각방식을 변경해 냉각반 대신 스테이브(Stave)를 설치해 노수명을 향상시켰다.

가장 큰 성과는 공기단축이었다. 66일 만에 완료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최단기간 기록이었다. 공기단축으로 인한 성과는 컸다. 고로 셧다운을 하루 앞당기면 1만 톤을 더 생산할 수 있었고, 10일이면 10만 톤을 더 생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승용차 1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이었다.

당시 공기단축의 배경은 타워크레인에 있었다. 이전까지 60톤 규모의 크레인을 사용해 보통 100일 정도 걸리던 고로 개수 기간을 광양 2고로 1차 개수부터 1000톤의 크레인을 투입함으로써 공기를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광양제철소 3고로 전경

광양제철소 3고로 전경

광양 2고로 1차 개수에서 세운 최단기간 기록은 포항 3고로 2차 개수에서 다시 갱신됐다. 기록 갱신의 배경은 대블록이었다.

“어느 날 이구택 회장이 일본 출장길에 가져온 사진 3장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신일본제철 고로 개수 장면으로, 세계 최초로 대블록 4개를 적용한 것이었다. 이 사진은 세계 최고라는 우리의 자존심에 불을 지폈으며, 우리는 달랑 사진 3장을 갖고 대블록 개발에 들어갔다.” (조운석 전 이사보, 당시 PM)

이전까지 포스코건설은 고로 개수에서 소블록 14개를 적용했다. 그러나 신일본제철에 자극받아 1년여의 연구과정을 거쳐 마침내 세계 최초로 3개로 이루어진 대블록 개발에 성공하고, 이를 포항 3고로 2차 개수 때 세계 최초로 적용했다. 당시 기록한 58일의 공기단축도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이를 통해 포스코건설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기록은 또 다시 깨졌다. 광양 3고로 1차 개수에서 55일만에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또 다시 세계 최단기간 기록을 갱신했다. 이때 기록 갱신의 원동력은 중블록 개발과 낭비요소 제거를 위한 3정5S(3정: 정위치, 정품, 정량, 5S: 정리, 정돈, 청소, 청결, 습관화) 혁신활동이었다.

대블록에서 중블록으로 바꾼 이유는 경제성 때문이었다. 포항 3고로 2차 개수 때는 대블록을 적용하느라 추가비용이 200억 원이나 늘어났다. 이에 고로개수 전담 요원들이 연구개발에 들어가 중블록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고, 광양 3고로 1차 개수 때 중블록 8개를 적용해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증명했다.

3정5S 혁신활동도 공기단축에 큰 힘이 됐다. 공사 잔재가 발생할 때 즉시 처리하는 것이 시간낭비를 줄이고 안전과 품질을 확보하는 지름길이었다. 이로 인해 물류 흐름이 원활해졌고, 작업 능률도 향상됐다. 무엇보다 안전사고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였다.

광양 1고로 2차 개수 때는 그 동안 포스코건설이 축적한 기술과 노하우가 모두 반영됐다. 1000톤에 이어 1350톤의 크레인을 투입했으며, 블록도 효율적인 중블록 8개를 선택했다. 그 결과 계획대비 11일을 단축하고, 무재해 3배수도 달성했다. 특히 광양 1고로 2차 개수의 가장 큰 성과는 내용적 확대 기술력이었다. 3950㎥의 내용적을 세계 최대인 6000㎥로 확장하는 등 세계 최고의 고로 개수 기술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 포항 신제강 신설, 독자수행 EPC 능력 확보
포항 신제강 착공 부지

포항 신제강 착공 부지

파이넥스, 고로의 신설과 개수 등 제선 분야에서는 세계가 따라올 수 없는 기술력을 확보했지만, 제강 분야 기술력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신예화와 합리화 경험은 있었으나, 아직까지 설계능력을 확보할 기회가 없었다.

드디어 그 기회가 2007년에 찾아왔다. 포항제철소가 전로 조업의 호환성 확보와 저원가 생산 및 품질향상을 위해 포항 신제강 신설에 나선 것이었다. 이는 기존 포항제철소의 1제강과 2제강 체제에서 2제강 규모의 신제강을 신설해 465만 톤 생산능력을 구축하기 위한 포스코의 미래 전략이었다.

포항 신제강 신설은 제강 프로젝트로는 초대형급이었다. 신제강 신설을 위해 51개의 프로젝트가 단계별로 추진됐으며, 투자비용만 1조 500억 원에 이르렀다. 그 중 순수 신제강 신설 단독 프로젝트에만 전체 사업비의 53% 수준인 5300억 원이 들었다.

초대형급이었던 만큼 사업추진 준비기간이 1년이나 걸렸다. 사전 설계검토, 견적가 산출, 원가절감 방안 마련 등에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 기간 동안 포스코건설은 EPC 턴키 수주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사업추진 기간 보여준 신뢰와 열정을 포스코로부터 크게 인정받아 2007년 12월 사상 처음으로 제강 분야 신설사업 EPC 수주에 성공했다.

그러나 사업추진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008년 말 갑작스런 글로벌 금융위기로 환율과 원자재 가격이 상승해 대규모 리스크가 발생했다. 발주 설비 가격이 크게 상승했는데, 중국 발주 물량의 경우 145% 이상이나 급상승했다. 이에 포스코는 인도적 차원의 소재비 보전을 추진, 환차손에 의한 원자재 가격 상승 품목을 대상으로 일부 보전을 추진함으로써 모든 협력업체와 고통을 분담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공기연장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기연장이 무려 11개월이었다. 첫 번째 공기연장은 2009년도 상반기였다.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로 포스코가 6개월 공사중단을 지시했고, 이로 인해 일부 협력업체에서 부도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두 번째 공사중단은 2010년도 하반기로, 기간은 5개월이었다. 포항시의 건축 인허가 오류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고도제한에 대한 사전 검토가 미흡했다.

포항 신제강 공사현장

포항 신제강 공사현장

“공사현장이 포항공항 인근이라 건축물의 높이에 대한 규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항시가 실수로 인허가를 냈고, 건축물이 서고 나서 관할 군부대가 원상복구를 요구하자 그때서야 실수를 인지한 포항시가 공사중단 처분을 내린 것이었다. 결국 66.5m 고도제한 규정을 맞추느라 85m까지 올라갔던 구조물을 철거하고 다시 설치하느라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고, 공사중단으로 협력업체들의 고통도 가중됐다.” (오헌주 상무, 당시 현장소장)

한편으론, 11개월 공기연장은 포스코건설에게 소중한 보약이었다. 이 기간에도 프로젝트 요원들은 쉬지 않고 기술검토와 수정을 반복했다. 그 결과 2011년 3월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료됐으며, 준공 후에도 트러블 없이 조기 조업 성과를 달성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제강 분야 EPC 턴키 기술력 확보였다.

“신예화나 합리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맨 땅에 대규모 제강공장 신설사업을 독자적으로 수행해 EPC 턴키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감을 확보했다. 이때 확보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관련 경험인력들이 해외 프로젝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신동철 상무, 당시 PM)

또 하나의 성과는 경영혁신이었다. 경영혁신 시범현장으로 선정돼 수많은 설계 및 시공개선을 통해 원가절감을 실현했으며, 2008년에 경영혁신 최우수 현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경영혁신의 가장 큰 성과는 EPC 통합 운영이었다.

설계와 시공 분야의 분리 운영 관행을 깨고 EPC를 통합 운영함에 따라 엔지니어링 단계부터 시공 분야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시공 과정에서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턴키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감도 확보할 수 있었다.

 

# 광양 5코크스 신설, 위기극복하고 EPC 기술력 확보

제강 기술력 확보에 이어 제선 분야 중 코크스 신설 EPC를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코크스 공정은 유연탄을 고로 선출의 연료인 코크스로 만드는 과정으로, 전체 제철 프로세스 중 가장 먼저 시작되는 공정이기도 하다.

그 동안 포스코는 고로 개수에 따른 출선량 증대로 코크스 부족현상이 발생하자 주로 중국에서 코크스를 수입해왔다. 그러나 수입에 따른 비용부담도 있었고, 또 연료의 품질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자 연간 230만 톤 생산의 광양 5코크스 신설로 방향을 바꾸었다.

광양 5코크스 신설은 오븐, 화성 설비, CDQ 설비, 선탄 설비 등 4가지 패키지로 구성된 대규모 프로젝트로, 여기에 투입되는 사업비만도 5593억 원에 이르렀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대형 프로젝트의 수주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특히 포스코건설의 최대 목표는 EPC 기술력 확보였다. 코크스 신설은 20년 전 광양 4코크스 이후 처음인데다 그 동안 합리화나 신예화도 별로 없어 EPC 기술력을 확보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수주 경쟁에는 코크스 설계로 유명한 독일의 우데(Uhde)사와 광양 4코크스 신설 당시 시공을 맡았던 롯데건설이 뛰어들었다. 포스코는 포스코건설의 의욕과 그 동안의 신뢰관계를 높이 평가해 2008년 중반 전체 EPC를 포스코건설에게 맡겼다. 다만 핵심설비인 오븐과 화성 설비의 설계는 독일의 우데사에 발주했다.

1단계(2008.11~2010.11)와 2단계(2009.12~2011.11)로 나눠 추진된 광양 5코크스 신설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금융위기로 인한 공사 중단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2009년에 공사가 잠시 중단됐으며, 2010년엔 건설노조 파업과 유독 길었던 장마로 많은 곤혹을 치렀다. 그러다 보니 그간 까먹은 공기를 만회하느라 프로젝트 요원들은 불철주야 공기와의 전쟁을 벌였다.” (손용철 상무, 당시 현장소장)

EPC 경험부족도 프로젝트 진행에 고통을 가중시켰다. 모르면 알 때까지, 안 되면 될 때까지 서적을 파고들었다.

토목공사에서도 공기를 많이 까먹었다. 공사현장 부지가 제철 폐기물 매립장이어서 고로의 부산물인 슬러그가 쌓여 있었다. 바다 인근이라 자갈 모양의 슬러그 빈틈을 타고 바닷물이 오랜 세월 흘러들었고, 그러다 보니 땅을 팔 때마다 물이 고였다. 인근의 모든 양수기를 동원해 바닷물을 퍼냈는데, 그 시간이 무려 석 달이나 걸렸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반을 다지기 위해 파일 항타를 했더니, 파일이 박히지 않았다. 이번에도 문제는 철광석을 녹이고 남은 찌꺼기인 제강의 부산물 자금덩어리였다. 자금덩어리 역시 나름 철광석이어서 파일 항타를 견뎌낸 것이었다. 이번에는 대형 장비를 동원해 이걸 다 들어냈는데, 무려 30톤이나 나왔다. 따라서 이 과정이 작업도 더디고 가장 힘들었다. 까먹은 공기를 만회하기 위해 패스트 트랙 공법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 같은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모든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준공 이후 광양 5코크스는 동양 최초의 자동화설비 구축과 함께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고, 아울러 세계적으로도 최신예 제철소라는 명성을 얻었다.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과도 많았다. 가장 큰 성과는 국산화를 통한 원가절감이었다. 가스처리 설비인 굴뚝 모양의 스택(Stack)의 경우 독일의 우데사 설계에서는 높이 178m에 직경이 6m로 나왔다. 이 설비가 너무 고가라 조사 및 연구를 했더니 165m 높이에 5m의 직경이면 충분하다는 결론이 나왔고, 국산화가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결국 국산화에 성공했고, 원가절감에도 성공했다.

그 외 내화벽돌의 국산화에도 성공했고, 스택과 내화벽돌을 연결하는 지지대인 앵커레일(Anchor rail)의 국산화에도 성공했다. 이 같은 연구개발과 국산화는 포스코건설 독단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계사인 우데사와 레터 교신을 통해 기술검토 과정을 거쳤다. 포스코건설이 계속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자 우데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안전관리에서는 현장 특성에 따른 맞춤식 안전활동으로 2011년 5월 플랜트부문 최초로 무재해 5배수를 달성하기도 했다. 특히 포스코건설은 어렵게 확보한 EPC 기술력인 만큼 모든 기술적인 자료를 수집해 데이터로 축적했다. 아울러 이 기술력으로 무장한 경험인력들은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대형 해외 프로젝트 현장으로 달려나가 자신들의 역량을 맘껏 펼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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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6. 해외사업, “기회와 희망 찾아 베트남·중남미로 달려가다”        

# ‘제철소 건설사’ 꼬리표를 떼라!

시공능력 7위, 수주액 4조 원 돌파. 10년 전과 비교하면 국내에서 포스코건설의 위상은 몰라보게 높아졌다. 그렇다면 해외에서는 어떨까? 한 마디로 초라한 실적이었다.

해외사업은 전체 수주액에서 기여도가 채 10%를 넘지 못했고, 그나마 제철 플랜트만의 전유물이었다. 그 외 실적은 건축 분야의 상하이 포스플라자, 호치민 다이아몬드플라자, 그리고 하와이 콘도사업 정도가 고작이었다.

제철 플랜트의 향후 전망도 어두웠다. 포스코를 등에 업고 성공적으로 중국시장 진출에 성공했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최저가로 공습해오는 중국 현지업체들의 인해전술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제철소 건설사’라는 꼬리표를 떼는 것이었다.

출범 당시 포스코건설은 ‘제철소 일만 하는 건설사’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말은 IMF 위기 이후 쏙 들어갔다. 주택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면서 더샵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고, 모두가 주저할 때 과감하게 송도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제 해외사업에서도 그런 딱지를 뗄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특명에 건축과 토목, 그리고 에너지가 첨병으로 나섰다. 건축과 토목은 기회를 쫓아 베트남으로 달려갔고, 에너지는 희망을 찾아 중남미 개척에 나섰다. 중국에서 설 땅을 잃은 제철 플랜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능성을 타진했다.

먼저 건축과 토목의 베트남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외형상으로는 장밋빛이었다. 국내기업으로는 드물게 신도시 건설에 성공했으며, 천년 고도 하노이시의 미래 설계를 맡길 만큼 베트남 정부로부터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토목 분야마저 3개의 고속도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포스코건설은 한류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스플랜도라 신도시가 착공하기까지, 토목 분야가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에서 성공하기까지 그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출발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떠이호떠이와 북안카잉을 놓고 고민했다. 떠이호떠이는 대우건설이 오래 공들인 신도시 개발사업으로, 많은 건설사들이 컨소시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위치는 하노이 시청에서 5km 떨어진 변두리였고, 규모는 208만 ㎡ 정도였다. 대우건설은 이곳에다 한국형 신도시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북안카잉 신도시 개발사업의 정보는 70여개의 계열사를 이끌고 있던 베트남 최대 건설 공기업인 비나코넥스로부터 제공받았다. 북안카잉은 하노이시 경계 지점이자 APEC회의 장소이기도 했던 하노이 컨벤션센터에서 5km 떨어져 있어 향후 신시가지로서 전망이 밝았고, 규모는 떠이호떠이보다 조금 큰 264만 ㎡ 정도였다. 비나코넥스는 호치민시의 랜드마크인 다이아몬드플라자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이 있었고, 이에 포스코건설에게 북안카잉 신도시 공동개발을 제안했다.

포스코건설은 두 건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북안카잉을 선택했다. 떠이호떠이는 도심 변두리여서 인허가, 이주보상 등 향후 사업추진 과정이 쉽지 않으리라 전망했고, 무엇보다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것보다 현지 국영기업을 끼고 주도적으로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정식 명칭이 스타레이크시티와 스플랜도라로 바뀐 신도시 개발사업에서 포스코건설의 스플랜도라가 대우건설의 스타레이크시티보다 착공이 훨씬 빨랐다. 떠이호떠이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컨소시엄도 다 떨어져나가 대우건설만이 고군분투했다.

 

# 베트남서 두 번의 실패 딛고 다시 일어나

스플랜도라는 광채를 의미하는 영어 ‘스플랜도(splendor)’와 금을 나타내는 ‘오흐(Or)’의 합성어로 부귀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사업은 1, 2단계로 나눠 2020년까지 총 2조 6530억 원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포스코건설은 스플랜도라를 선택하면서 첫 번째 단추를 잘 채웠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2005년부터 시작된 물밑 접촉에 이어, 2006년 들어서는 양사간 기본협약을 체결하고 베트남 정부로부터도 승인을 받아 투자허가서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곧 착공에 들어갈 것 같았던 스플랜도라는 이후 사업추진 과정에 시간이 걸렸다.

랑~호아락 고속도로가 발목을 잡았다. 포스코건설이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 비나코넥스, 베트남 정부와 맺은 주요 계약조건은 이랬다. 하노이의 랑과 하노이 인접 하떠이성의 호아락을 연결하는 27.8km의 고속도로를 건설해 주고, 그 대가로 베트남 정부로부터 부지를 제공받는 조건이었다.

이 조건을 포스코건설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히려 고마운 계약조건이었다. 건축과 토목의 동반 진출도 의미가 있었지만, 토목 분야 최초의 베트남 진출이기도 했다. 또 랑~호아락 고속도로는 베트남 최초의 현대식 고속도로이자, 자동차와 이륜차를 분리한 최초의 고속도로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사업경험 부족의 현실은 냉혹했다. 토목 분야는 해외사업에 미숙했고, 현지 사정에도 어두웠다. 2006년 7월부터 파트너인 비나코넥스를 따라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뛰어들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경제성은 나오지 않고 리스크만 커져갔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리스크를 털어내기 위해 랑~호아락 고속도로에서 탈출했고, 대신 스플랜도라는 직접 투자방식으로 사업구조를 바꾸었다.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건설 전 부지 전경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건설 전 부지 전경

랑~호아락에서 호되게 신고식을 치른 건축과 토목 분야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베트남 시장 안착을 위해 새로운 사업개발에 골몰했다. 그 결과 2008년에 토목과 건축 양 전선에서 각각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토목 분야는 카이멥 국제항만공사 프로젝트를 수주했으며, 건축은 베트남 천년 수도 하노이시 마스터플랜 수주에 성공했다.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2008.3-2011.3)은배후부지 48만 ㎡에 안벽 600m를 건설해야 하는 항만공사로, 연간 컨테이너 115만 TEU를 처리할 수 있는 규모였다. 수주금액은 1억 1200만 달러였다. 현장은 호치민에서 남쪽으로 125km 가량 떨어진 붕따우에 위치하고 있으며, 베트남 정부는 이 붕따우 지역에 전체 공단의 절반 가량이 위치한 남부 집중경제구역(SFEA)의 물동량 증가에 대비해 이 사업을 추진했다. 발주처는 세계 1위 해운선사인 덴마크 몰러 머스크(A.P.Moller-Maersk)의 합작법인 CMIT였으며, 포스코건설은 삼환기업과 조인트벤처 형태로 이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건축 분야는 웃었고, 토목은 또 다시 눈물을 삼켰다. 철저한 사전대비에도 불구하고 토목 분야는 이번에도 미숙함을 들어냈다. 불리한 조건에서 계약을 한 데다 외주공사 발주 과정에서 전기설계 용량을 놓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했다. 결국 사업성 확보에 실패하고 적자운영의 전철을 반복했다.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전경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전경

# 천년 고도 하노이의 2050년을 설계하다

“2050년이면 총면적 3300㎢에 인구 1000만 명이 살게 될 베트남의 천년 수도 하노이! 그 하노이광역시의 미래 설계를 당신들에게 맡긴다.”

2008년 9월 23일 베트남총리실에서 날아온 낭보였다. 수주 최종 통보에 2주간의 합숙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던 프로젝트 실무진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이 사업은 당시 921㎢인 수도 하노이의 면적을 이보다 3배 이상 확대해 3300㎢로 설계하는 도시개발 프로젝트였다. 이는 서울 총 면적의 5배를 초과하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규모였다.

베트남 정부는 2010년 하노이 천도 1000주년을 맞아 수도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의욕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했다. 2008년 5월말 베트남 국회 역시 하노이시를 명실상부한 베트남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하노이시 광역도시계획 수립’을 최종 의결했다. 이로써 전 세계 유명 건설사들의 발길이 하노이시로 속속 몰려들기 시작했다.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 600년 전 삼봉 정도전이 한양천도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 수주는 도시계획 분야의 우수한 기술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뿐 아니라, 향후 하노이시의 폭넓은 도시 인프라 건설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김병호 전 전무)

하노이 마스터플랜은 그만큼 매력적인 프로젝트였다. 확장된 도시조성을 위한 신도시 개발, 도로, 상하수도, 전력, 하천정비, 철도, 정보통신 등 많은 프로젝트를 양산해내야 할 로드맵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그러니 수주액이 불과 640만 달러밖에 안 되는데도 미국과 일본, 독일, 프랑스, 호주, 싱가포르 등 8개국 12개 업체가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특히 일본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고, 포스코건설 역시 당시 이구택 포스코 회장과 한수양 사장 등 최고경영층이 수차례 베트남을 방문해 고위층 인사들을 만나는 등 포스코패밀리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포스코건설의 입찰 참여는 베트남 고위층의 요청에서 시작됐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스플랜도라와 카이멥 국제항만터미널 외에도 포스코-베트남 냉연공장 등 3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이전에도 다이아몬드플라자를 비롯해 여러 제철 플랜트를 수행하면서 우호적인 인사를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

2008.12.26 하노이 마스터플랜 계약식

2008.12.26 하노이 마스터플랜 계약식

마스터플랜 수립사업의 국회 통과와 함께 본격화된 수주 경쟁에서는 4차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2008년 7월 말 한국, 일본, 미국 등 3개국의 대표 기업들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포스코건설은 뉴욕에 본사를 둔 미국의 글로벌 도시설계 회사인 퍼킨스 이스트만, 그리고 한국의 도시설계 전문회사인 진아건축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입찰경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최종 제안서 제출 보름을 앞두고 저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 개발에 골몰했다. 포스코건설은 2주간 합숙훈련에 돌입, 실무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고 또 짜냈다. 결국 2008년 8월 3일 최종 설명회 당일 포스코건설은 기발한 옵션 하나를 제시했다. 하노이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대형 모형과 그 모형을 전시할 전시관을 지어 기증하겠다는 옵션이었다.

“우리의 제안에 일본은 우리보다 더 큰 모형과 전시관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발 더 나갔고, 심지어 아예 마스터플랜 자제를 공짜로 해주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만큼 일본의 수주 의지도 우리만큼 강했다.” (김창묵 Director)

그러나 2008년 9월 23일 운명의 여신은 일본의 프로포즈를 외면하고 포스코건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포스코건설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우선 제안서의 내용이 좋았다. 개발과 보존을 고려한 생태학적 자연환경 보존계획, 도시의 난개발 방지를 위한 그린벨트 설정, 환경문제를 고려한 적정밀도 계획 등 우수한 마스터플랜이 발주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 하나 더, 동영상 프리젠테이션이 관심을 증폭시켰다. 제안서 작성에도 버거운 짧은 기간에 포스코건설만이 유일하게 야근과 철야를 반복해서 동영상을 완성했다. 더구나 파트너십도 빛났다. 설명회 당일 동영상 프리젠테이션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퍼킨스 이스트만 회장이 직접 사회자로 나서자 장내는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 스플랜도라 착공과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수주

스플랜도라 개발사업은 랑~호아락 고속도로의 리스크를 덜어내고 2006년 12월 비나코넥스와 함께 합작법인 ‘안카잉JVC’를 설립하면서 순항하기 시작했다.

총 6단계로 나눠 2020년에 완공될 예정인 스플랜도라 신도시에는 빌라와 테라스하우스 외에도 아파트 4481세대, 주상복합형 건물 2605세대 등 모두 8593세대의 주거단지가 들어서고, 아울러 호텔, 사무실 용도의 75층 규모의 랜드마크 빌딩이 계획돼 있었다. 또 입주민들의 편익을 위해 관공서, 공원 등도 예정돼 있었다.

그 가운데 1단계 사업이 2009년부터 본격화됐다. 포스코건설은 16~22층 아파트 496가구, 3층 단독빌라 317가구, 4층 테라스하우스 236가구 등 모두 1049가구를 짓는 1단계 사업의 분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2009년 12월부터 착공에 들어갔다.

“분양 과정에서는 한 채에 한국 돈으로 15억 원이나 하는 고급 빌라인데도 물량이 없어 팔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베트남 정부 한 고위층 인사가 ‘왜 내가 이걸 못 사느냐’고 항의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희도 Director, 당시 현장소장)

2009.4.25 베트남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착공식

2009.4.25 베트남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착공식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공사 현장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공사 현장

두 번의 수업료를 치른 토목 분야는 베트남 현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아픈 만큼 좀더 성숙해졌다. 카이멥 항만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 수주에 총력을 기울였다.

포스코건설은 두 번의 실패 이후 여기서도 실패하면 해외사업에서 토목사업을 접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스플랜도라 파트너인 비나코넥스까지 참가한 결코 쉽지 않은 국제경쟁이었다.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는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역점사업인 ‘메콩유역 개발사업’(GMS)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사업이었다. 하노이와 중국 운남성 쿤밍을 잇는 연결 고속도로로, 하노이 국제공항에 위치한 노이바이에서 출발, 국경지역인 라오까이까지 총 연장 264km에 8개 공구로 구성됐으며, 전체 사업비는 12억 5000만 달러 규모였다.

특히 이 고속도로는 베트남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었다. 베트남 정부는 노이바이~라오까이 고속도로가 수도 하노이와 하이퐁, 쿤밍시 사이의 운송 기간을 하루 이내로 단축시킴으로써 중국과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과 같은 인접국과의 무역을 활성화할 것으로 크게 기대했다.

하노이 노이바이 첫 구간인 1공구는 27km 길이의 4차선 고속도로로 약 1억 5000만 달러 규모였다. 2009년 3월 입찰에서는 중국, 베트남 등 총 9개 건설사가 참여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결과는 최후 각오를 다지면서 배수진을 쳤던 포스코건설이 수주에 성공하면서 최대 경쟁자였던 비나코넥스를 놀라게 했다.

1공구 수주의 여세를 몰아 포스코건설은 2009년 10월과 11월 입찰에서도 2공구와 3공구를 연속으로 수주하는데 성공했다. 2공구는 22.12km의 4차선 아스팔트 포장공사와 19개의 교량을 건설하는 도로공사였으며, 포스코건설은 1~3공구 수주를 통해 총 81km의 시공물량을 확보했다. 더욱이 8개 공구 중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우리나라 건설사가 6개 구간을 석권함으로써 베트남 현지에서 한국 토목의 기술력을 과시했다.

 

# 지구 끝 중남미에서 찾은 블루오션, 석탄화력발전

건축과 토목 분야가 베트남에서 성공드라마를 써나가는 사이, 신생조직 에너지 분야는 지구 끝 중남미에서 블루오션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경험의 석탄화력발전이었다.

“동남아나 중동에 뒤늦게 뛰어들어서 같이 피 흘리는 것보다 중남미나 CIS 국가 등 우리나라 기업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지역에서 블루오션을 찾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칠레가 바로 그렇게 해서 찾아낸 블루오션이었다.” (김대호 전 부사장)

2004년 7월, 에너지 조직을 재정비한포스코건설은 에너지사업에 대한 연륜은 짧았지만, 의욕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일찌감치 국내시장을 레드오션으로 파악하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먼저 중남미시장에 대해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운명적으로 AES와 인연을 맺었다. 미국 텍사스주 알링턴에 본사를 두고 있던 AES사는 전 세계 27개국에 15개의 전력회사와 124개의 발전소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2005년 당시 110억 달러의 매출과 297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글로벌 전력회사였다.

AES와 관계가 시작된 건 2005년 9월이었다. 중남미 현지조사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칠레의 석탄화력발전 프로젝트와 민간발전사업자인 AES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칠레는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 국가인데다 전체 산업의 50%를 차지하는 광산산업에서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환경규제가 심해 원자력발전은 엄두도 못 내고, 볼리비아에서 아르헨티나를 거쳐 공급되는 가스발전에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폭설로 가스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결국 칠레 정부는 발전능력 확충을 위해 민간발전사업자(IPP) 모집에 나섰고, 포스코건설은 지난 30년간 칠레에 전력을 공급해오면서 전체 발전량의 20%를 점유하고 있던 AES를 가장 매력적인 민간발전사업자로 보았다. 무엇보다 칠레는 앞으로 계속 대규모 발전 프로젝트가 쏟아질 블루오션이었다.

사업정보 입수 직후 포스코건설은 2006년도 발주 예정인 여러 프로젝트 중에서 AES의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를 선택하고 역량을 집중했다. AES를 수차례 방문해 적극적으로 기술력을 홍보하는 등 총력전을 펼친 결과, 2006년 2월 입찰참가자격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수주 경쟁은 치열했다. 프랑스의 알스톰, 캐나다 SNC-라발린, 일본의 미쓰비시 등 세계적 EPC업체 10개사가 경쟁에 참여했다. 그해 5월 제안서 제출 후에는 최종 경쟁에서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미쓰비시, 알스톰 등 3개 업체가 남았다.

막판 수주전은 더욱 치열했다. 포스코건설의 투지도 더욱 달아올랐다. 발주처인 AES의 요구사항은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철저히 반영했고, 지구 끝 정반대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도 메일이 오면 곧바로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런 성실함에 AES가 차츰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포스코건설은 더욱 자신들의 기술력을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심지어 AES측 책임자를 한국으로 초청해 포항제철소 코크스공장의 석탄 설비, 용광로 미분탄 설비, 자가발전 설비 등을 견학시켜 주기도 했다. 당시 견학에 대한 AES측의 만족도는 폭발적이었다. 결국 2006년 9월 AES는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의 EPC 턴키 사업자로 포스코건설을 선택했다.

“석탄보일러 중 우리가 제안했던 PC보일러(미분탄연소)가 수주 성공에 기여한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나머지 업체들은 CFBC보일러(순환유동층)를 제안했는데, 우리는 그들과 다르게 PC보일러를 채택해 가격경쟁력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김원석 상무)

9.E-D-132-00

2007.10.17 칠레 벤타나스 4호기 계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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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11 칠레석탄화력발전소 착공식

 

# 돈 다 날려도 좋으니, 공기·품질향상 지켜라!

포스코건설이 수주한 누에바-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는 수도 산티아고에서 북서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칠레의 유력 산업도시 벤타나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전용량 240MW에 사업규모는 3억 7000억 달러였다.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의 수주는 한국 건설계는 물론, 포스코건설 해외진출 역사에서도 많은 의미를 남겼다. 국내 건설사 중 최초의 중남미 진출이었으며, 해외 석탄화력발전소 EPC 턴키로도 국내 최초라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포스코건설 조직에 큰 변화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초대형 해외사업을 수주함에 따라 인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09년까지 경력직만 매년 100명씩 뽑으면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에너지 전문가들을 포스코건설이 싹쓸이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는 한국 건설계로서도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그 동안 불황으로 구조조정 당했던 에너지 전문인력들이 되살아나면서 묵혀있던 기술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벤타나스 수주는 일개 팀 조직을 사업본부로 격상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벤타나스 수주에 힘입어 2006년 12월 에너지사업본부가 출범했다. 국내에서 본부급의 에너지 조직은 당시 포스코건설이 유일했다. 이는 최고경영층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으로, 당시 한수양 사장은 틈만 나면 지구 끝 칠레로 날아가서 직원들에게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이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업비를 다 날리는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회사가 끝까지 지원할 테니 반드시 공기준수와 품질확보의 과업을 완수해주기 바란다.” (한수양 전 사장)

2008.8.27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착공

2008.8.27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착공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공사현장

칠레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공사현장

최고경영층의 예상대로 2006년 12월 착공 이후 추진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현지 협력업체 확보였다. 당시 현지업체들은 자국에 처음 진출한 포스코건설의 능력을 의심했다. 그들은 벤타나스 프로젝트를 외면하고 산타마리아나 앙가모스 등 다른 프로젝트를 찾아 다녔다. 그러다 보니 포스코건설의 하도급 입찰장은 텅 비었고, 현장 책임자들은 현지업체들을 직접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모셔와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무시와 천대를 극복하는 데는 단 6개월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포스코건설이 아무 문제없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반면, 당시 같이 출발했던 다른 프로젝트들은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칠레 사회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포스코건설의 실력을 인정하면서 부르지 않아도 같이 일하고 싶다는 현지업체들이 길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발주처 AES의 신뢰도 고무적이었다. 칠레 지역에서 믿고 맡길만한 회사가 포스코건설밖에 없다고 판단한 AES는 벤타나스 이후 모든 프로젝트를 몰아주면서 계약방식도 수의계약으로 변경했다. 그렇게 해서 포스코건설은 캄피체 석탄화력발전소(2007.10-2011.2)와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2007.10-2011.8)등을 연이어 수주할 수 있었다.

캄피체는 누에바-벤타나스와 같은 벤타나스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전용량 270MW에 사업비는 4억 4000만 달러 규모였다. 앙가모스는 캄피체보다 2배의 규모였다.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약 1300km 떨어진 칠레의 북부 항구도시 안토파가스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전용량 520MW(260MW, 2기)에 사업비도 8억 7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처럼 포스코건설은 벤타나스 효과로 단 1년 만에 에너지 분야에서 무려 13억 1000만 달러를 수주하는 놀라운 실적을 달성했다.

 

# 벤타나스, 공기단축·성능향상·동반성장 세 마리 토끼를 잡다
칠레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 Boiler Package

칠레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 Boiler Package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의 성공적 준공은 칠레 국가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성적인 전력난에 허덕이던 칠레 산업에 숨통을 틔워준 데다, 같이 출발했던 다른 프로젝트들보다 먼저 준공해서 칠레 사회에서 포스코건설에 대한 신뢰가 더욱 높아졌다. 앙가모스는 아예 시작도 못했으며, 나머지 두 곳은 기술적인 문제로 준공을 2년이나 연기하면서 우리 회사에 대한 인지도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를 앞질렀다.” (김호섭 전 부사장)

2009년 12월 마침내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가 발전을 시작했다. 벤타나스의 성공적 준공을 통해 포스코건설은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가장 큰 성과는 공기단축이었다. 프로젝트 수행 전부터 공기준수는 회사의 특명이었다. 해외 EPC가 처음인 만큼 적기 공기준수는 향후 해외사업의 지속성이 걸린 중대한 임무였다.

공기준수 특명을 받은 책임요원들은 철저한 사전준비를 통해 모든 자재를 완성품으로 제작해 대형장비로 설치함으로써 작업시간을 최소화했다. 시급한 작업에는 숙달된 국내 전문가를 투입했으며, 현지 근로자에게도 작업표준서를 만들어 지도하는 등 현장 오류를 최대한 막았다. 특히 지반공사부터 24시간 철야 교대근무를 실시했다. 그 결과 공기준수라는 지상과제를 달성할 수 있었고, 덤으로 공기단축의 영광도 얻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지상과제는 품질확보, 즉 성능향상이었다. 먼저 포스코건설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진에 대비해 규모 7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는 내진설계를 적용했으며, 유럽만큼 까다로운 칠레 정부의 인허가 기준을 만족시킴으로써 설계·시공 능력은 물론 친환경 기술력을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성능향상 과정에서는 최저의 비용으로 각 부문의 품질, 공사기간, 안정성 등의 요구조건을 달성하기 위한 VE(Value Engineering) 혁신활동이 큰 힘이 됐다. VE 활동 결과 최종 성능시험에서 계약보증 조건보다 4% 이상 향상된 252.2MW의 발전출력을 달성했으며, 열소비율도 당초 계약보다 크게 향상시켰다.

국내 기자재 적용도 의미 있는 성과였다. 벤타나스 프로젝트에는 90% 이상 국내 기자재와 설비를 적용했고, 인력관리에서도 대부분 국내 협력업체를 활용했다. 그 결과 국산 기자재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국내 협력업체 동반 해외진출 등 포스코건설이 추구하는 동반성장경영을 실현할 수 있었다.

 

# 제철 플랜트, 전 세계에서 가능성을 타진하다

건축과 토목, 에너지 분야가 베트남, 칠레에서 선전하면서 ‘해외사업도 제철소 건설사’라는 딱지를 떼어낸 반면, 전통적으로 해외사업 강자였던 제철 플랜트 분야는 거대 중국시장에서 쫓겨난 이후 향후 전략 마련에 부심했다.

그러나 명예회복을 위한 이들의 의지는 이 시기 어느 때보다 강했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지구촌 곳곳을 누비면서 그들의 신발 밑창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시기 제철 플랜트는 어느 때보다 가장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업가능성을 타진했다.

극동·동남아 지역에서는 일본과 베트남을 넘나들었고, 인도와 함께 중동 지역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포스코를 따라 저 멀리 중남미 멕시코까지 날아가기도 했다.

이 시기 2005년에서 2009년까지대표적으로 7건의 프로젝트 수행 결과 3건에서 수익을 창출하며 43% 정도의 승률을 올렸다. 고무적인 사실은 포스코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인상적이었다. 포스코 물량 2건을 빼고 나머지 5건이 대외사업이었고, 가장 큰 성과는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프로젝트의 성공적 수행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냉연과 멕시코 CGL 등 포스코 물량 2건 모두가 100% 수익 창출에 성공한 반면, 대외 물량 중 아시아특수강을 빼고 나머지 4건의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운 대목이었다.

아쉬움을 남긴 프로젝트는 인도와 중동 지역에 집중됐다. 먼저 중동 지역 사우디아라비아부터 출발했다. 200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 최대 철강사인 하디드사로부터 연산 12만톤 규모의 칼라강판(CCL) 수주에 성공했다. 제철 플랜트의 사우디아라비아 CCL 수주는 창립 10주년 이후 새롭게 각오를 다질 때라, 첫 출발치고는 산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우디 하디드 CCL공장 전경

사우디 하디드 CCL공장 전경

특히 하디드 CCL(2005.4~2007.8)은 비록 수주금액이 350억 원 수준이었지만, 유럽의 철강설비 공급사들이 독점해오던 사우디아라비아에 첫 진출했다는 의미가 있었다. 국제입찰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알피네, 이탈리아의 다니엘리 등 세계적 기업을 제쳐 그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

그러나 너무 산뜻한 출발에 함정이 숨어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사전준비가 부족했다. 먼저 중동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특히 유럽적인 사고로 절차와 규격을 중시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계약서의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승리에 도취돼 유럽의 쟁쟁한 경쟁자들이 갑자기 왜 발을 뺐는지 의심하지 않았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절차와 규격을 중시하는 그들의 문화와 계약 구조상의 문제로 인해 적잖은 손실을 보았다.

승인절차가 까다롭다는 사실만 사전에 파악했더라면 유럽 방식대로 상세설계를 만들어 사전에 잡음을 차단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해 프로젝트 내내 발주처의 수많은 요구사항에 시달려야만 했다. 규격 역시 독일 규격인 DIM이 표준이란 사실을 모르고 KS나 JIS를 내밀었다가 된통 곤혹을 치렀다. 계약에서는 시공에 대한 책임보증이 문제였다. 현지 시공업체의 잘못을 다 떠안고 말았다.

2007.10.16 인도 이스코 고로프로젝트 계약 서명식

2007.10.16 인도 이스코 고로프로젝트 계약 서명식

사우디 첫 진출에 이어 2007년 9월 포스코건설은 인도에 첫 진출했다. 제철 플랜트 중 인도에서 활약한 분야는 제선공정의 핵심 고로였다. 이미 광양 5고로 신설의 기술력을 확보한 포스코건설은 해외사업에서 이 기술의 적용을 의욕적으로 시도했지만, 이란 타바존 이후 별다른 실적이 없었다. 당시 인도와 대만 등에서 고로 물량이 간간이 나왔지만, 강력한 경쟁자인 룩셈부르크 폴워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07년과 2008년에 연속적으로 이변이 발생하는데, 포스코건설이 폴워스를 누르고 인도 이스코 고로와 세일사 고로를 수주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세일사 고로는 중간에 중단됐으며, 이스코사 고로(2007.10~2010.3)는 추진과정이 길어지면서 적잖은 손실이 발생했다.

가격이 문제였다. 세일사는 사업자를 선정하고도 가격을 더 깎으려고 현지업체와 양다리를 걸쳤으며, 이스코의 계약 내용은 불량했다. 계약조건에 선수금이 빠져 있었다. 그러니 폴워스 같은 유럽의 경쟁자들이 입찰경쟁에서 등을 돌린 것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최초 인도 진출과 실적에 급급해 덥석 고기를 물었지만, 적잖은 손실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 기술이전 받던 나라에 플랜트 역수출, 일본 아시아특수강
2007.12.27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사업 계약식

2007.12.27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사업 계약식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실패사례에 이어 수익을 올렸던 일본과 베트남, 멕시코에서도 아쉬움은 있었다. 그나마 일본은 성공 프로젝트라 할 수 있었다.

2007년 12월 포스코건설은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신설사업 수주에 성공했다. 이 프로젝트는 총 사업비가 약 180억 엔, 한화로는 2347억 원으로, 60톤 규모의 전기로 제강공장, 연간 생산용량 12만 톤의 조괴공장 시공 및 설비공급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신설사업의 위치는 키타규슈 히비키나다 지역이며, 아시아특수제강이란 회사는 포스코P&S와 일본 특수강용 블룸 전문제조회사인 고토부키공업이 설립한 합작회사였다. 엄밀히 따지면 이 역시 포스코패밀리 물량인 셈이었다.

어쨌든 이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먼저 일본 첫 진출이자 전기로시장 개척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 1968년 포항 영일만에 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들어간 기술 대부분이 일본 작품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근 40년 만에 포스코건설이 플랜트 역수출의 가슴 벅찬 성과를 이룩한 것이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없었다. 유럽의 선진 엔지니어링사들도 쉽게 진출하기 힘든 곳이 일본이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짧은 공기와 일본관청의 까다로운 인허가 과정이었다. 모든 문서와 의사소통이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진행해야 하는 것도 해외사업에서는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기술적인 장벽도 높았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의 볼트도 망치로 두드려 풀림을 확인할 정도로 발주처는 완벽한 기술력을 요구했다.

“우리는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열정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발주처와의 약속과 신뢰를 지키기 위해 꼼꼼하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적극적인 기술지원과 설득을 통해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끌어나갔다.” (심재향 Director, 당시 PM)

수주 이후 8개월만인 2008년 8월경 늦게 착공에 들어간 아시아특수제강 프로젝트는 짧은 공기에도 불구하고 까다로운 시운전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2009년 10월 준공을 맞았다. 그간의 노력과 공로에 대해 발주처로부터 감사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멕시코 알타미라 포스코 CGL공장 전경

멕시코 알타미라 포스코 CGL공장 전경

포스코-멕시코 CGL 프로젝트(2007.10~2009.6) 추진 과정에도 시련이 많았다. 포스코와 포스코건설 모두 실수를 범해 어려움을 자처하기도 했으나, 포스코 특유의 정신을 발휘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프로젝트의 시작은 2007년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자동차강판 공급사였던 포스코는 꾸준히 그 영역을 전 세계로 확대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2000년대 중반 멕시코가 북미지역 신흥 자동차생산기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GM과 닛산, 현대, 벤츠 등 글로벌 자동차사들이 대규모 생산라인을 갖추면서 멕시코는 220여만 대의 자동차 생산능력을 확보했다. 특히 멕시코는 미국 남동부 지역과 가까워 최적의 자동차강판 공급기지란 매력이 있었다. 포스코로서는 저렴한 노동력도 구미를 당겼다.

포스코-멕시코 CGL은 멕시코 알타미라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업비 2억 6000만 달러, 연산 40만톤 규모의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였다. 포스코는 비용절감 차원에서 분할 발주를 추진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토목과 건축을 제외하고 설계와 설비공급, 기계·전기공사를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포스코가 사업경험이 없다 보니 토목과 건축이 늦어져 공기가 지연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포스코건설이 토목과 건축을 다시 수행했으며, 돌관공사로 무사히 공기를 준수했다.

포스코건설 측에서도 실수가 있었다. 수주금액이 적어 사업비 규모를 맞추는 과정에서 중국으로 많은 설비를 발주했다. 그 결과 품질문제가 발생해 시운전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자초했다.

 

# 베트남 냉연, 해외 최초 단독 EPC 수행
포스코 베트남 냉연공장 전경

포스코 베트남 냉연공장 전경

포스코-베트남냉연공장은 일본 아시아특수제강이나 멕시코 CGL과 비슷한 시기에 착공·준공된 프로젝트로,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앞서 두 프로젝트보다 베트남 냉연공장이 좀 더 드라마틱하고 의미도 남달랐다.

베트남 냉연공장은 포스코가 동남아 고급 철강 수요를 겨냥해 동남아 최대 규모로 계획한 프로젝트였다. 연산 120만 톤 규모의 PL/TCM 1기, 연산 70만 톤 규모의 CAL 1기, RCL/CPL 각 2기와 유틸리티 설비를 신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호치민에서 남쪽으로 125km 떨어진 붕따우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사업비는 약 2억 2465만 달러 규모였다.

2007년 8월 착공, 2009년 9월 준공된 이 프로젝트는 착공부터 난관이 많았다. 우기를 맞아 빗물과 사투를 벌였으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부지가 초 연약지반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포항과 광양에서 겪어보지 못한 난관으로, 냉연공장이 위치한 강변 맹그로브 숲 늪지의 부지는 갯벌보다도 더 안 좋다는 강벌이었다.

이대로는 결코 공기를 맞출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정밀조사에 착수했다. 정밀조사 결과 포항, 광양과 같은 지하구조물 시공으로는 공기, 비용, 안전성 측면에서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추가 경비를 감수하고 지하구조물 설계를 변경했다. 구조물 레벨을 4~5m 상향으로 설계 변경하고, 가설토류벽 없이 오픈 굴착공법을 적용했다. 최초로 시도된 지하구조물의 상향으로 압연기(TCM), 산세(PL), 소둔(CAL) 설비 등의 구조물이 지상에 떠 있는 형태가 됐다.

구조물 레벨의 상향으로 핵심 리스크는 해결책이 나왔으나, 막상 굴착에 착수하고 보니 파일 변이로 인한 전도사고가 발생함에 따라 연속 시공이 불가능했다. 이 역시 원인은 연약지반에 있었다. 설계 검토 끝에 부지 레벨을 1m 상향해 굴착 레벨 깊이를 1m 줄임으로써 파일 변이를 막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설계 변경으로 연약지반 문제를 해결했지만, 1개월의 공기연장이 발생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24시간 철야작업에 들어갔으며, 주요 공사에는 국내 기술진을 투입했다. 이 같은 노력 덕에 잃어버린 1개월의 시간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사전준비가 미흡했다. 현지조사를 통해 연약지반을 미리 확인했더라면 설계 변경이라는 이중고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에 글로벌 프로젝트 조직을 갖추지 못한 점도 아쉬움이었다. 이런 문제들로 발주처와 갈등을 빚으면서 결국 현장소장이 교체돼 내가 후임으로 왔다.” (임재신 상무)

토건공사에서 리스크가 우기와 연약지반이었다면 기전공사에서는 정밀시공과 품질관리가 리스크였다. 베트남 현지의 건설 인프라 취약으로 품질확보의 어려움이 예상됐다. 현지 시공업체의 제철설비 경험이 전무했으며, 플랜트 시공에 경험 있는 기능인력도 부족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스코건설은 주요 설비를 국내업체에게 맡기고, 현지 인력에 대한 기능교육을 강화함으로써 기전공사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기전공사에서 위기를 넘기나 싶었으나, 수전공사에서 1개월의 공기연장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정도면 베트남에서는 매우 선방한 것이었다. 통상 베트남에서는 유럽이나 일본 기업이라도 기후와 지역 특성상 1년 정도의 공기지연이 기본이었다. 베트남 전력청도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수전을 요청해오면 6개월 늦게 넣어주는 것이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이 같은 관행을 막고자 포스코건설은 수전공사를 앞두고 전력청 간부들을 현장으로 초청해 설명회를 개최했다. 현장 실무진들은 전력청 간부들에게 포스코건설의 전통이 철저한 공기준수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현장을 둘러본 전력청 인사들은 빠른 진행 속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를 계기로 포스코건설은 그 동안의 관례를 깨고 빨리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특히 공기준수 전통이 알려지면서 베트남 사회에서 포스코건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1개월 정도의 공기연장은 이후 철야작업으로 거뜬히 만회했다. 2009년 9월 마침내 초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최초의 공기 준수에 성공하고 경제적 운영으로 수익성을 확보하는 등 포스코-베트남 냉연공장 신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베트남 냉연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성과는 당시로서는 해외 최초 단독 EPC 수행이었다. 더구나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CAL 핵심설비의 자력설계와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냉연공장 EPC 기술력을 세계적으로 과시했다.

2009.7.23 이란 타바존 화입식 초도 출선

2009.7.23 이란 타바존 화입식 초도 출선

한편 1999년 국내 최초 제철 플랜트 수출로 관심을 모았던 이란 타바존 프로젝트가 이후 10년만인 29.2009년 7월 고로에서 첫 쇳물을 생산하면서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공기지연의 원인은 발주처의 자금 부족이었다. 당시 포스코건설은 EP를 맡아 시공이 끝날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계속 기다렸다. 반면 시공을 맡은 현지업체는 공사대금이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며 공기를 지연시켰다.

타바존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성과는 신뢰구축이었다. EP 중에서도 포스코건설은 고로와 소결을 맡았고, 코크스는 우크라이나가 맡았다. 그리고 중국이 발전을 담당했다. 이 세 외국기업 중 중국과 우크라이나는 자금조달이 늦어지자 미련 없이 이란에서 철수했다. 오직 포스코건설만이 고로에서 쇳물이 솟아질 때까지 남아 책임을 완수했다.

그 결과 이란 사회가 크게 감동하며 포스코건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었다. 아쉬운 점은 이런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2006년경 3억 3000만 달러 규모의 이란 철강플랜트 수주에 성공했으나,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제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향후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들의 신뢰가 변치 않는 한 미국과의 긴장이 사라지고 새롭게 봄이 오면 이란의 제철 플랜트시장은 가장 먼저 포스코건설을 초대할 것이다.

 

 

<생각하는 페이지>
건축 분야 부산 불패신화에 대한 오판과 교훈

주택사업 성공에 힘입어 2000년대 들어서며 건축 분야가 포스코건설의 성장을 주도했다. 건축 분야는 어떤 사업 분야보다도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괄목할 만한 성과들도 많이 도출해냈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성과 이면에는 수행 프로젝트 가지 수가 많았던 만큼 실패나 실수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 지역이었다. 포스코건설은 부산 주택시장에서 센텀파크를 시작으로 아델리스, 센텀스타 등으로 불패신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서면 피에스타와 아이온시티에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다.

두 프로젝트 모두 시행사 운이 없었다. 미분양에 이은 시행사 부도로 포스코건설이 건물을 떠안아야 했으며, 미분양 해소와 건물 매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이 두 사건의 교훈은 치밀한 사업성 분석의 중요성이었다. 사전에 시행사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해볼 필요가 있었고, 부산지역 상업시설에 대한 시장조사도 선행돼야 했다. 당시 부산지역 상권은 불황이 심해 분양의 무덤으로 불릴 만큼 상업시설 투자 여건이 좋지 않았다.

경기도 오포아파트 역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실패사례였다. 2003년 토지를 매입하고 사업추진에 나섰으나, 첫 시작부터 인허가 과정이 쉽지 않았다. 2005년경 인허가 로비 의혹으로 곤혹을 치르기도 했으며, 2009년에는 성급하게 사업승인을 예측하고 분양에 나섰다가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토지매입 7년 만에 사업계획 승인이 났으나, 개발사업의 장기간 정체로 사업추진 여건이 악화됐다. 그 동안의 금융비용을 감안한다면 고분양가 책정이 불가피했으나, 부동산 침체로 미분양이 우려됐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사업구조를 변경하는 등 사업정리 수순을 밟았으나, 2012년 함께 사업을 추진했던 정우건설의 법정관리와 자금보충 약정에 덜미가 잡혀 또 한 번 손실을 보았다. 이 사건에서는 복잡한 사업추진 과정에서 진작 결단을 내리고 신속히 부실을 털어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었다.

플랜트 분야는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사우디아라비아 하디드사 CCL, 인도 세일사 및 이스코사 고로 프로젝트 등이 주요 실패사례로 꼽혔다. 이들 프로젝트에서는 현지 국가 문화 분석의 중요성이 소중한 교훈이었으며, 해외 실적에 대한 성급한 판단이 뼈를 깎는 반성 요인이었다.

토목환경 분야는 본문에서 언급했던 베트남 랑~호아락 고속도로, 카이맵 국제항만공사 외에 나이지리아 철도, 고양시 환경플랜트 등도 속을 많이 썩였던 프로젝트였다.

2006년경 포스코건설은 나이지리아 철도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철저한 사전준비와 함께 신속히 현지법인을 설립하는 등 많은 공을 들였다. 정부에서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이지리아를 방문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수주계약 직전까지 갔던 이 프로젝트는 중간에 중국기업이 끼어들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차관 30억 달러에 눈이 먼 나이지리아 정부가 포스코건설과의 계약을 뒤집어버렸다. 포스코건설은 2단계 사업이라도 건지고 싶어 재차 협상을 시도했지만, 한번 공짜 맛을 본 나이지리아 정부는 중국의 차관 제공을 예로 들며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결국 포스코건설은 눈물을 머금고 나이지리아에서 철수했다.

고양시 환경플랜트는 설비품질이 문제였다. 준공 후 성능 미달로 개보수를 실시했으나, 그래도 당초 약속했던 성능이 나오지 않았다. 이를 두고 시공을 맡았던 포스코건설과 운영을 담당했던 한국환경공단 간 공방이 벌어졌다.

한국환경공단은 설비의 성능 미달을 주장했으며, 포스코건설은 운영미숙과 쓰레기 질의 불량이 성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준공 2년이 지나도록 고양시는 공사비 지급을 거부했고, 이는 법정 소송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 사건의 교훈은 신공법 도입 때의 사전 철저한 검증 작업의 중요성이었다. 마땅히 그랬어야 할 이 같은 과정을 소홀히 해 포스코건설은 엄청난 사후 관리비용을 물어야 했다.

3-7

Story7. 도약과 번영의 해법, “10년 앞을 내다보라!”

# 발전에너지와 해외사업, 새 성장엔진으로 삼다

“회사 설립 이후 10년간 우리는 수주액 규모에서 회사 출범 이후 무려 6배나 성장했다. 시공능력에서도 30계단이나 뛰어올라 7위의 위상을 갖추었다. 10년 이후 맞이한 2005년은 또 다른 10년을 시작하는 해이다. 따라서 2005년은 스마트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도전과 변화의 원년이 될 것이다.” (한수양 전 사장)

IMF 위기를 극복하고 폭풍 성장을 이룩한 포스코건설은 도약과 번영의 새 시대를 열면서 스마트 비전(SMART Global E&C Company)으로 무장했다.

목표 달성 연도 2015년의 스마트 비전에서는 글로벌 Top 30위를 상징적 목표로 삼았으며, 규모로는 수주액 7조 원과 매출액 6조 원을 설정했다. 목표 달성의 해법으로는 기술력 기반의 사업포트폴리오 균형·발전을 추구했다. 플랜트 분야에서는 파이넥스를 비롯해 EPC 기술력 확대를 추구했으며, 토목환경 분야는 경전철과 장대교량 기술력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건축 분야는 초고층 기술력을 더욱 배가해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스마트 비전 수립 직후인 2005년에는 부동산 가격 급등에 따른 정부의 규제정책을 감안해 보수적 목표치를 설정했다. 수주액 4조 300억 원, 매출액 3조 500억 원 달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는 플랜트와 건축 분야의 선전으로 수주액 4조 332억 원, 매출액 3조 9250억 원을 기록하는 등 무난히 목표치를 달성했다.

2005년도 경영활동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신사업 분야의 확정이었다. 스마트 비전에서 사업포트폴리오의 균형 발전을 위해서는 토목환경 분야의 선전이 필요했고, 한편으론 회사의 성장을 이끌어갈 새로운 사업 분야 발굴이 시급했다. 지난 시절 주택사업을 선택해 IMF 이후 회사의 성장을 견인하고, 또 다시 송도 개발에 뛰어들어 향후 10년의 일거리를 확보했듯이, 송도 이후를 대비해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 임무가 플랜트사업본부에게 맡겨졌고, 전 직원 난상토론 끝에 이들은 발전에너지 분야를 선택했다. 이후 발전에너지 조직은 해외사업과 그린에너지 사업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러나 해외사업 역량 부족은 핸디캡이었다. 제철 플랜트 의존도가 높은 해외사업은 2005년도 전체 수주액 비중에서 10%는커녕 560억 원으로 1%를 겨우 넘어섰다. 이 역시 사업포트폴리오 균형 발전에는 걸림돌이었다.

2006년도 목표 설정 과정에서는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규제와 공공물량 축소가 예상돼 더욱 보수적인 목표치를 내놓았다. 수주 3조 9500억 원, 매출 3조 5600억 원으로 전년도보다 낮은 목표치를 설정했으나, 주총 과정에서 마이너스 성장에 대한 우려가 제기돼 수주 규모를 5조 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결과는 플랜트, 건축과 토목 분야가 고른 선전을 보이면서 무난히 목표치를 달성했으며, 처음으로 수주 5조 원 시대를 열었다(수주 5조 2531억 원, 매출 3조 6704억 원). 특히 토목환경 분야의 선전이 돋보였다. 처음으로 수주 1조 원 클럽에 가입하며 사업포트폴리오 균형 발전에 기여했다.

2006년도 경영활동에서의 주요 변화는 해외영업 조직의 신설이었다. 치열한 국내경쟁의 대안으로 포스코건설은 발전에너지에 이어 해외시장 개척을 매력적인 성장동력으로 선택했다.

해외영업지원팀, 해외플랜트영업팀, 해외토건영업팀 등 3개 조직을 신설하고 적극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나선 결과, 건축과 토목 분야가 베트남 진출에 성공했다. 더욱이 발전에너지 분야는 국내 최초로 중남미에 진출, 칠레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를 수주하며 본부급으로 격상돼 플랜트, 건축, 토목환경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해외사업의 회사 기여도 역시 상당히 개선됐다. 건축과 에너지 분야의 선전에 힘입어 전체 수주액 비중에서 20%대에 근접, 9826억 원을 달성하면서 사업포트폴리오 균형 발전의 걸림돌이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났다.

 

# 최단기간 수주 10조 달성, 업계 성장역사를 갈아치우다

2007년을 맞아 포스코건설은 전년도 성과에 자극 받아 공격적 목표치를 설정했다. 수주 7조 원, 매출 3조 4000억 원 달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에너지 분야와 해외사업의 선전으로 가볍게 목표치를 달성하고 사상 첫 수주 7조 원 시대를 열었다(수주 7조 7063억 원, 매출 3조 4100억 원).

먼저 해외사업의 성장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2년 전 560억 원에 불과하던 수주 규모가 40배나 뛰어오르며 2조 2045억 원으로 크게 늘어났다. 전체 기여도에서도 30%대에 육박했다. 급성장의 배경은 제철 플랜트와 에너지 분야의 뒷심이었다.

포스코-베트남 냉연공장 전경

포스코-베트남 냉연공장 전경

플랜트는 일본 아시아특수제강, 포스코-베트남 냉연공장, 포스코-멕시코 CGL 등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주했으며, 에너지 분야는 벤타나스 석탄화력발전소의 성공적 수행에 힘입어 칠레의 캄피체와 앙가모스 석탄화력발전소 수주에 연속으로 성공했다.

에너지 분야의 비약적 성장도 인상적이었다. 본부 조직 신설 1년 만에 2조 916억을 수주하며 제철 플랜트 규모와 맞먹었으며, 토목환경과 건축을 더블스코어 차이로 따돌렸다. 급성장의 배경은 해외사업의 선전이었다.

한편 이 시기 조직에 변화가 있었다. 팀 중심에서 그룹 조직으로 개편됐다. 그룹제는 대팀의 개념으로, 그룹장의 권한이 확대되면서 조직 슬림화의 효과를 가져왔다. 기존 102개 팀이 60개 그룹으로 축소됐으며, 해외영업 분야의 경우 조직 축소 없이 그룹으로 그 위상이 격상됐다.

2008년을 맞아서는 행정도시, 혁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공공사업 확대가 기대된 반면, 지방 미분양, 분양가 상한가 등의 영향으로 주택경기 침체가 예상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코건설은 지난 3년간 지속적인 성장에 편승해 공격적인 목표치를 설정했다. 수주와 매출 목표를 전년 대비 각각 12%, 30% 늘어난 10조 원, 4조 원으로 설정했다. 처음으로 해외 목표치를 설정, 3조 2000억 원으로 책정했다.

2008년도 마감 결과 부동산 경기가 하강 국면에 접어들면서 분양 연기 등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목표치를 근소하게 달성했다. 수주 10조 44억 원, 매출 4조 5173억 원을 달성했으며, 해외 수주는 기대에 못 미처 1조 3424억 원을 기록했다.

해외사업의 경우 수주액은 낮았지만, 베트남과 중남미에서의 선전은 여전했다. 베트남에서는 카이멥 국제항만공사와 하노이시 마스터플랜을 수주했으며, 중남미에서는 엘살바도르 석탄화력발전소 EPC 턴키공사를 수주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수주액에서 금자탑을 이룩했다. 3년 연속 국내 건설사 가운데 최단기간 연간 수주액 최고 기록을 갱신했다. 2006년과 2007년에 각각 최단기간 수주 5조 원, 7조 원을 돌파했으며, 마침내 2008년 창사 14년 만에 국내 건설사 가운데 최단기간 연간 수주액 10조 원 달성의 쾌거를 이룩했다.

조직에서는 홍역이 있었다. 한수양 사장이 물러나고, 2008년 11월 정준양 포스코 사장이 새 CEO에 올랐다. 해외영업 조직은 전년도 그룹 단위 격상에 이어 해외수주영업실로 확대됐다.

 

# 대우엔지니어링 인수, 석유화학 플랜트 진출 모색
2008.5.6 대우ENG와 포스코건설 Win-Win을 위한 임원 워크숍

2008.5.6 대우ENG와 포스코건설 Win-Win을 위한 임원 워크숍

2008년도 가장 눈길을 끈 경영활동으로는 대우엔지니어링(현 포스코엔지니어링) 인수가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2008년 4월 대우엔지니어링의 주식 60%를 인수하고 경영권을 확보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위치한 대우엔지니어링은 1976년 10월 설립, 1990년 9월 대우그룹에서 분리 독립해 사원지주회사로 전환했다. 설립 이후 한국 엔지니어링 산업과 함께 성장해온 대우엔지니어링은 화공, 플랜트, 토목, 건축 등 건설 전 분야에서 다수의 엔지니어링 실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석유화학 플랜트 분야에서 두드러진 실적과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미주, 유럽, 중동은 물론 중앙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지에서도 엔지니어링 경험을 보유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의 대우엔지니어링 M&A 추진의 가장 큰 목적은 화공에너지 분야 진출이었다. 발전에너지로 성장동력을 다져가던 포스코건설은 화공 분야까지 진출, 명실공히 제철-발전-화공 플랜트 삼각 편대 구축의 야망을 드러냈다.

둘째, 날로 늘어만 가는 해외사업에서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설계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국내 턴키시장에서의 토목 분야 수주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대우엔지니어링은 화공 플랜트와 해외사업 외에도 국내 토목 분야에서 풍부한 설계 경험을 확보하고 있었다. 대우엔지니어링 인수를 통해 포스코건설은 화공에너지 진출기반을 확보하고, 해외에너지와 토목사업에 대한 설계 경쟁력을 다질 수 있었다.

2009년은 전년도 말 미국 리먼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한파가 매서웠다. 특히 포스코의 투자 축소로 제철 플랜트가 크게 위축됐다.

2009.3.2 윤석만 회장, 정동화 사장 취임식

2009.3.2 윤석만 회장, 정동화 사장 취임식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라 2009년 목표치는 현상유지에 맞춰졌다(수주 10조 5000억 원, 매출 6조5000억 원). 2009년 마감 결과 수주 9조 5965억 원, 매출 6조 6757억 원으로 수주액이 목표치에 살짝 못 미쳤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한파를 감안해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철 플랜트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건축, 토목환경 분야 모두 전년도보다 향상된 실적을 기록했다. 특히 토목환경 분야는 처음으로 수주액 2조 원 시대를 열며 후발업체로서의 실적부진을 말끔히 씻어내고 상위 업체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해외사업에서도 역대 최대 실적인 2조 2505억 원을 달성하는 등 좋은 성과를 얻었다. 무엇보다 토목 분야가 베트남에서 크게 선전했다. 하노이와 중국을 잇는 노이바이~라오까지 고속도로 신설공사에서 3개를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회사의 명성을 드높였다.

조직에서는 송도사업본부가 건축사업본부로 흡수 통합됐으며, 국내수주영업실과 해외수주영업실이 수주영업실로 통합됐다. 한편 정준양 사장이 포스코 회장으로 영전됨에 따라 윤석만 회장과 정동화 사장이 취임했다.

 

# PI 1기 구축, 업무 수행방식 혁신적 변화 통해 내부역량 강화

최단기간 수주 10조 원을 달성했던 도약과 번영의 이 시기 대표적 경영혁신 활동으로는 PI 1기 구축과 VP 활동이 있었다.

“프로세스 혁신인 PI 개념은 2000년대 들어 포스코가 ERP를 구축하면서 국내 기업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포스코는 모든 패밀리사에 PI 추진을 권고했으나, 우리 회사는 2003년 이후 국내 건설회사에 적합한 ERP 모듈이 개발되는 추이에 따라 추진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던 중 모아광장에서 ‘사내에 시스템은 많은데 연계성이 부족해 사용하기에 불편하다’는 직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이것이 계기가 돼 기술연구소가 PI 추진을 위한 보고서를 임원회의에 제출하게 됐다.” (안상목 Director, 당시 프로세스기획팀장)

2002년 7월 기술연구소의 임원회의 보고로 출발한 PI 추진은 준비과정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경영기획실 주도로 PI 추진반을 구성하고 1개월간 사례 조사와 부서별 의견 수렴을 거쳐 추진계획을 임원회의에 보고했으나, 추진 사유가 미흡하다는 지적에 따라 호응을 얻어내는데 실패했다. 다행히 당시 회의에서 박득표 회장이 ‘우수한 컨설팅사를 선정해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지시함에 따라 꺼져가던 PI 불씨가 다시 되살아났다.

이후 베어링포인트사를 컨설팅사로 선정하고 회사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자체 검토를 거쳐 2003년 5월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그러나 임원회의와 오너 워크숍 과정에서 전사적 공감대 형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본부장들이 직접 본부별 업무 프로세스 개선 추진계획을 발표하게 됐고, 그제야 어느 정도 PI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e-프로세스추진반’이 출범했으며, 2003년 10월 9일 PI 출범식을 갖고 본격적인 시스템개발에 들어갔다.

“시스템개발 과정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무엇보다 PI에 대해 회사 전체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특히 PI 가동으로 인해 현업 프로세스의 많은 부분이 바뀌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에 대해 현업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변화의 타당성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힘든 작업이었다.” (구병모 전 이사보, 당시 추진반장)

2003년 5월 마스터플랜 수립으로 본격화된 PI 1기 추진은 ‘업무 수행방식의 혁신적인 변화를 통한 내부역량 강화’를 시스템 구축의 목표로 삼았다.

이후 기본설계, 상세설계 및 시스템설계, 시스템구축 및 테스트 과정을 거쳐 마침내 2006년 1월 2일 PI 1기 작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이 기간 동안 99개 시설물별 분류코드와 1만 3557개의 자재코드, 1098종의 자료코드, 그리고 회계업무의 핵심인 계정과목 등의 분류체계가 정비됐다.

업무체계 측면에서는 프로젝트 기획에서부터 설계, 공사 및 사후관리가 일관된 흐름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시스템개발의 초점이 맞춰졌다. 프로젝트에 투입된 인원은 연인원 기준 무려 5만 5720명이었고, 194회에 걸쳐 토론회가 진행됐으며, 변화관리와 시스템교육에 6500여 명이나 동원됐다. 뿐만 아니라 데이터 이행을 위해서만 수십 회에 걸쳐 수천 명이 투입된 대역사였다.

특히 횟수만 4년에 걸쳐 장기간 수행된 포스코건설 PI는 당시 건설업계 최대 규모이자 최초 프로젝트였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된 이유는 국내 건설업에서 PI 사례가 전무한 데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 수집 때문이었다. 건설업 특성상 일정한 패턴이 없다 보니 데이터 확보도 힘든 작업이었다. 그렇다고 데이터 수집을 소홀히 한다면 PI 구축의 의미가 반감되기 때문에 건설의 A부터 Z까지 모든 업무를 시스템화하기 위해 책상 서랍 속에 들어있는 모든 서류들을 꺼내 데이터화했다.

PI 1기 시스템의 성공적 구축으로 포스코건설은 영업부문의 사업기획 역량강화, 엔지니어링부문의 관리체계 통일화를 통한 업무효율 증대 및 자료축적의 자동화, 표준분류체계 구축, 공사·용역 조달체계의 개선, 재무ERP 도입에 따른 스피드경영체계 구축 등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아울러 포스코건설은 EP 시스템을 구축해 국내외 현장은 물론 자택에서도 결재 및 기간 시스템을 통한 업무가 가능토록 시스템을 구성했다. 특히 투명하고 공정한 업무기반이 구축됨에 따라 포스코건설이 최고의 경영이념으로 지향하는 윤리경영 정착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었다.

 

# VP 혁신활동, 나는 너의 업무를 전부 알고 있다!
2007.12.27 경영혁신 자랑대회

2007.12.27 경영혁신 자랑대회

PI 1기의 성공적 완료로 스피드 경영체제를 구축한 포스코건설은 이후 현장 중심의 동아리활동으로 혁신활동을 강화했다. 2000년대 초 지식경영과 함께 추진된 동아리활동은 공식적인 업무 팀은 아니지만, 공통사안에 대해 집단토론과 지식의 공유 및 학습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임 활동이었다.

2007년 9월에는 경영혁신팀을 신설하고 동아리활동을 더욱 독려했으며, 이때부터 혁신문화의 정착과 각 현장 간 정보교류를 위해 경영혁신 자랑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2007년 12월말 행사에는 159개 동아리가 참가해 혁신활동 발표, 혁신활동을 주제로 한 연극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기업들의 모습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변신타위(變新打危)의 자세를 갖춰 늘 앞선 생각과 앞선 기술, 앞선 열정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기업만이 미래 성장을 기약할 수 있다.” (정동화 전 부회장)

혁신활동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더욱 활성화됐다. 당시 정동화 사장은 위기가 곧 기회라는 신념을 가지고 새롭게 변신해 위기를 타개하자는 의미에서 변신타위를 강조했으며, 아울러 원가혁신, 공정혁신, 기업문화 혁신, 일하는 방식의 혁신 등 4대 혁신활동을 강력히 추진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원가경쟁력이었다. 마른 수건도 다시 짜는 심정으로 주변의 낭비요소 제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에 공정과 원가, 프로세스의 비효율적 요소를 제거해 업무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낭비제거 활동을 추진했다. 이어 영업이익률 확보를 통한 경영목표 달성을 위해 원가혁신을 추진했으며, 아울러 핵심 요소기술 개발, 시공성을 고려한 설계 및 공법 개선, 협력업체 수행능력 제고, 제도개선 및 사업관리 강화 등 선진 공정관리체계 구축을 위해 공정혁신을 추구했다.

기업문화 혁신 과정에서는 경영혁신 활성화를 위한 계층별 토론회를 실시했으며, 본부별 임원과 직책보임자에게 SFCF에 대한 개인별 행동원칙을 설정하고, CEO가 서명함으로써 혁신활동을 위한 실천력을 확보했다. 또 이를 VP 보드에 부착해 직원들로 하여금 리더의 변화된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SFCF란 자기희생(Self Sacrifice), 솔선수범(To be First), 의사소통(Communication), 코칭과 피드백(Feedback)의 약자로, 직책보임자의 실천적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었다.

2009년부터 시작된 혁신활동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왕성하게 추진된 활동은 일하는 방식의 혁신인 VP 활동이었다.

VP는 비주얼 플래닝(Visual Planning)의 약자로서, 2006년 10월 포스코가 먼저 시작했다. ‘버리고’ ‘채우는’ 혁신활동으로, 잘못된 업무관행과 비효율적 업무처리 방식, 불필요한 지시나 보고·회의 등 낭비요인을 버리고 대신 그곳에 가치 있는 업무로 공간을 채워나가자는 캠페인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임직원들은 자신의 업무와 문제점들을 남김없이 드러내야 하고, 무엇보다 VP 활동의 성공 여부는 상사와 부하, 동료직원들 간 신뢰와 화합의 기업문화에 달려 있었다.

직원 각자 업무를 시각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VP 도입에 따라 업무계획의 공유, 계획의 실행력과 업무생산성 향상을 위해 VP 보드판이 만들어졌다. 이후 조직 내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포스코건설 직원들은 하루 업무를 VP로 시작한다. 매일 업무 개시 전 15분 내지 20분 정도 VP 보드판 앞에 서서 업무를 협의한다. 협의는 업무보고가 아닌 피드백과 코칭이 일어날 수 있도록 중요 업무나 이슈 중심으로 개인별로 진행한다. 또 전일 업무내용의 이행 여부를 확인하고 이슈를 공유하며, 금일 업무계획의 공유와 업무 부하에 대한 조정도 이루어진다. 특히 그룹장은 그룹 중점추진 업무에 대해 수시로 설명함으로써 그 내용을 전 그룹직원들과 공유한다.

2009.12.18 2009 IF행사

2009.12.18 2009 IF행사

2009년 연말에는 4대 혁신활동 추진성과를 점검하는 IF(Innovation Festival) 행사가 처음으로 열렸다. 당시 행사에는 포스코패밀리 및 우수 협력업체 대표들도 참석했으며, 원가와 공정, 그리고 일하는 방식의 혁신에 대한 우수사례 발표를 주요 축으로 직원들의 공연이 곁들여진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한편 포스코건설은 수주 7조 원, 매출 6조 원의 스마트 비전을 2007년에 수주액에서, 2009년 매출액에서 조기 달성함에 따라 새 비전을 수립하고 2009년 11월 30일 창립 15주년 기념식 및 비전 선포식을 개최했다.

새 비전에서는 2018년까지 수주 25조 원, 매출 15조 원을 달성해 세계 20위의 건설회사로 성장할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목표달성을 위해 수주 창출력 극대화, 종합 수익력 제고, 글로벌 인프라 구축을 3대 전략방향으로 설정했다.

이 외에도 주력분야 경쟁력 제고, 신성장동력 발굴, 핵심 기술개발 역량 확보, 국내외 네트워크

구축 및 활용, 조직운영 및 지원체계 고도화, 글로벌 인재확보 및 육성을 전사 6대 중점 전략과제로 책정했다.

2009.11.30 창립 15주년 기념식

2009.11.30 창립 15주년 기념식

창립 15주년. 포스코건설은 창립 10년의 폭풍 성장 이후 창립 15년까지 도약과 번영을 이룩했다. 수주액과 매출액에서 5년 전에 비해 2.5배 성장했다. 수주액 10조 원 달성은 한국 건설업계 역사상 최단기간 기록이었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 송도사업이 성장을 이끌었으며, 하반기에는 에너지 분야와 해외사업의 선전으로 스마트 비전의 조기 달성과 수주 10조 원의 금자탑을 이룩했다.

그렇다면 도약과 번영의 해법은 무엇일까? 포스코건설에게는 10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에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철저히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성장동력을 확보해나갔다.

제철 플랜트에 올인하면서 한편으론 건축과 토목 진출을 모색했으며, 주택사업의 성공 드라마를 써나가면서도 송도 개발이라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후 에너지 분야와 해외사업을 육성, 회사 성장과 도약의 초석을 다졌다. 결국 철저한 준비와 지속적인 성장동력 확보 노력이 도약과 번영의 시대를 연 원동력이었다.

 

 

<역대 CEO 인터뷰_한수양 전 사장>
 계속 해외에서 희망을 찾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한수양 전 사장은 1971년 포스코에 입사, 광양제철소장을 거쳐 2004년 3월 포스코건설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재임 기간 해외사업과 에너지사업을 적극 육성해 베트남과 중남미 진출의 기반을 닦았으며, 국내 건설사 가운데 최단기간 수주액 10조원 달성의 경영성과를 달성했다.

 

재임 기간 스마트 글로벌 E&C 컴퍼니비전을 세우시고, 국내기업 중 최단기간 수주 10조원 달성의 업적을 이룩하셨습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인지요.

“취임 직후 수주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뒤주론’으로 임직원들에게 수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뒤주론이란 뒤주 안에 쌀이든, 보리든, 잡곡이라도 들어 있어야 밥을 짓던, 떡을 만들던, 죽을 쑬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경영방침을 임직원들이 잘 따라주어 정체된 국내시장보다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짧은 기간에 수주 10조원을 달성할 수 있었다.”

 

재임 초기 해외사업 실적이 미천했으나, 적극적인 해외사업 추진으로 오늘날 포스코건설이 베트남과 중남미에서 크게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으셨습니다. 재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무엇인지요?

“칠레 벤타나스 프로젝트를 잊을 수가 없다. 실적이 없어 자격이 안 되는데도 발주처를 한국으로 초청해 포스코의 대규모 발전설비를 보여주면서 우리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공기 내 건설 완료를 약속했다. 그러자 모든 칠레 사회가 반신반의 했지만, 마침내 그 약속을 지켜내자 칠레 사회가 우리에게 찬사를 보내며 발주처들도 함께 일하자고 찾아왔다.”

 

송도국제업무단지는 포스코건설 20년 역사에서 건축 분야 최고의 걸작입니다. 그러나 서울을 두고 송도로의 사옥 이전을 결정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파트너인 게일사가 외국기업 투자유치를 장담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국내기업 유치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앞장서서 분위기 조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어려움이 많았지만, GCF 유치 이후 투자유치가 활성화되고 있다. 앞으로도 잘 되리라 믿는다.”

 

취임했을 즈음이 10주년이었는데, 또 다시 10년이 흘러 창립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앞으로 10, 20, 백년대계를 이끌어갈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국내사업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 아무리 힘들더라고 계속해서 해외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해외시장 개척 과정에서는 겸손이라는 덕목이 중요하다. 겸손을 통해 발주자의 호의를 얻어내는 것이 개인과 회사 발전의 출발점인 것이다. 특히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자세가 중요하다.”

 

<역대 CEO 인터뷰_정동화 전 부회장>
해외사업에서 희망을 찾고, 주인의식을 갖고 정진해나가길

정동화 전 부회장은 1976년 포스코에 입사, 광양제철소 부소장을 거쳐 2007년 3월 부사장에 선임되면서 포스코건설에 합류했다. 2009년 3월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어려운 시기에 CEO를 맡아 포스코건설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했다. 내실경영과 성장 전략을 적절히 구사해 2011년 처음으로 국내 건설사 중 빅4에 진입했으며, 2013년엔 수주·매출·영업이익 목표 초과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많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재임 시기 어떤 전략으로 위기극복에 임했으며, 가장 큰 성과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금융위기로 건축 분야가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위기극복 과정에서는 수익성 제고를 위해 다양한 경영혁신을 추진했다. 내실경영과 함께 성장 전략으로는 에너지 분야의 중남미 성과에 힘입어 해외사업에 많은 역량을 쏟았다. 그 결과 빅4 진입이라는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빅4는 메이저 건설사 진입의 상징이며, 창립 20주년의 의미 있는 성과라 할 수 있다.”

 

2011년에 국내 건설사 중 해외 수주 1위를 달성하는 등 해외사업에서 성과가 많았습니다. 베트남에서는 건축과 토목 분야가, 중남미에서는 에너지 분야가 두각을 나타냈으며, 제철 분야는 일관제철소의 꿈을 일궈냈습니다. 해외사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무엇인지요?

“칠레 앙가모스 프로젝트를 잊을 수가 없다. 지구 정 반대편,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거웠고, 돌아가는 발걸음도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조기 준공의 성과를 달성하고 발주처로부터 인센티브까지 받아냈다. 나는 그들이 포스코건설의 영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아부다비 담수, 사우디아라비아 얀부하수처리장 등에서 적자가 발생하는 등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재임 중 가장 아쉬운 프로젝트라면 무엇이 있는지요?

“한때 언론에다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호주 로이힐 프로젝트를 놓친 게 가장 아쉽다. 호주 현지에 100여명의 인력을 파견해 2년간이나 준비작업을 했건만, 국내 경쟁업체의 상식 밖의 가격경쟁에 휘말려 결국 수주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무리하게 가격을 더 내렸더라면 지금쯤 회사가 경영위기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창립 15주년에 CEO에 올라 많은 업적을 남기셨는데, 벌써 창립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전임 CEO로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힘이 되는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해외사업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선진국보다는 개도국에서 가능성을 타진하고, 그들과 윈-윈할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해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포스코 DNA라는 성공유전자가 있다. 직원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정진해나간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