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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1. POSCO E&C 탄생 “Global E&C 닻을 올려라!”

# 영일만 허허벌판에 제철소 지은 간 큰 사람들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도대체 1994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연말이면 언론사에서 늘 하는 말처럼 사건사고도 많았고, 다사다난했던 갑술년 개띠 해였다. 유난히 폭염이 기승을 부렸는데, 52년 만의 기록이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남북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았고, 성수대교 붕괴는 한국 건설사에 오점을 남겼다.

젊은 세대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했고, 대학 농구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연세대가 대학팀으로는 처음으로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했고, 서장훈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했다. ‘사랑을 그대 품 안에’라는 드라마로 미혼 여성들이 차인표 신드롬에 빠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국 건설사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12월 1일, 포스코개발(현 포스코건설)이 탄생했다.

포스코개발, 그들은 누구인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영일만 신화의 주역이었다. 한국의 철강신화는 포스코가 국가적 사명을 갖고 이뤄낸 결과이지만, 그 주역은 설계관리를 담당했던 엔지니어링본부와 사업관리를 담당했던 건설본부의 인재들이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이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한다.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조상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제철보국(製鐵報國)! 이제부터 이 말은 우리의 확고한 생활신조요, 인생철학이 되어야 한다.”

포스코 경영다각화 체제

포스코 경영다각화 체제

그들은 박태준 회장이 부르짖는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의 구호에 따라 모래바람만 휑하게 불던 영일만 허허벌판에 제철소를 건설했다.이후 포항제철소 1기부터 출발해 1992년 10월 광양에도 4기의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포스코는 세계 최강의 철강회사로 거듭났다. 산업의 쌀인 철강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포스코건설을 만든 장본인은 포스코 내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 외에도 패밀리사에서는 포스코엔지니어링(PEC)과 거양개발이 있었다.

PEC는 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설계용역을 공정에 맞춰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1970년 7월 설립됐다. 이전까지 국내에 제철엔지니어링 분야 기술자가 전무했는데, PEC의 설립은 엔지니어링 분야 기술축적이란 사명도 있었다. PEC는 1982년에 포스코가 전액 출자하면서 성장에 날개를 달았다. 이후 종합 기술용역이 가능한 수준까지 올라 우리나라 대표적 엔지니어링회사로 성장했으며, 1990년대 들어서는 사업분야를 토목과 건축으로 확대하고 태국과 베트남 등지에서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면서 사세를 키워나갔다.

거양개발의 전신은 제철정비주식회사로, 제철설비의 정비 업무와 설비부품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1984년 4월 설립됐다. 이후 동양철관의 포항공장을 인수하면서 철구 영업을 시작했고, 일반 건설업에도 진출하면서 사세를 확대해나갔다. 1987년 1월 캐나다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기도 했다.

“제철정비는 광양제철소 1기가 준공되면서 운명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1987년 어느 날 박태준 회장이 건설본부를 방문해서는 이런 말을 남겼다. 건설본부는 광양제철소 확장을 끝내고 나면 기술적인 면으로나 윤리적인 면으로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건설회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명섭 전 사장)

이것이 구체화돼 제철정비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먼저 광양의 제철정비 분야가 분리돼 포철기연이 설립됐고, 1991년에 포항의 제철정비마저 떨어져나가면서 포철산기가 설립됐다. 마지막 남은 철구사업부와 토건사업부가 모여 거양개발(1991.5)로 거듭나는데, 이는 포스코개발 탄생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초일류 기업으로 가는 길 “E&C 회사를 만들어라

“포스코가 거양개발을 설립하고, 다시 이를 포스코개발로 확대 개편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포스코의 건설인력이 최고로 많을 때에는 건설본부 800여명, 엔지니어링본부에 300여명 등 1100여명에 이르렀다. 포스코로 보나 국가적으로 보나 이만큼 잘 훈련된 인력이 없었다.” (이명섭 전 사장)

특히 건설본부는 단순한 공사감독 업무에 그치지 않고 전반적인 프로젝트 관리(CM)까지 수행했기 때문에 건설회사는 아니었지만, 국내 여느 건설회사보다 우수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90년경 일본 다이세이(大成)건설의 보고서에서 일본의 건설회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포스코의 건설본부라고 주장했을 정도로 건설본부는 세계적인 CM 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가 종합 준공되면서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의 사후 거취가 최대 쟁점으로 부각됐다. 세계적 CM 능력을 가진 조직을 그대로 놔 두기에는 포스코로서나, 국가적으로나 큰 손실이었다. 이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에서 신설회사 설립이라는 새로운 방안이 도출됐다.

더욱이 이 시기 포스코는 중요한 변화의 시점을 맞고 있었다. 포스코 역사상 최초의 외부 영입 최고경영자였던 김만제 회장이 취임했고, 문민정부는 변화와 개혁을 시도했다. 특히 UR 타결과 WTO 출범으로 세계화 물결이 크게 일면서 우리나라는 선진국으로부터 개방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이 변화의 시기에 포스코는 비전(POSCO VISION 2005)을 수립했다. 1994년 7월 확정 발표된 비전에서 포스코는 2005년까지 세계 100대 그룹 진입을 목표로 삼았다. 성장의 지렛대로는 철강, 엔지니어링과 건설(E&C), 정보통신을 선택하고 집중적으로 육성하기로 했다.

특히 포스코가 선택한 엔지니어링과 건설의 조화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세계화와 개방화가 가속화하면서 선진국과의 경쟁이 불가피해졌고, 엔지니어링 없이 단순 시공능력만으로는 국내시장을 수성할 수도, 해외시장을 개척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포스코의 비전 수립과 함께 E&C 회사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본격화됐다. 포스코의 전략에 따라 초일류기업으로 가는 여정에서 마침내 최고 수뇌부로부터 E&C회사를 만들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부정으로 얼룩진 건설판을 확 바꿔버리자!
1994.8.19 거양개발, PEC 합병계약 체결

1994.08.19 거양개발, PEC 합병계약 체결

1994년의 그 뜨거운 여름, 포스코개발 설립을 위한 E&C 통합작업이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먼저 거양개발과 PEC가 합병하고, 이어서 포스코 내 엔지니어링본부와 건설본부의 인력들이 옮겨갔다. 거양개발은 11월 15일 임시 주총을 열어 사명을 ‘포스코개발주식회사’로 정했고, 이어서 포스코개발은 12월 1일 최종적으로 PEC와의 합병 절차를 밟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E&C 사업에 주력해 포스코개발을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는 포스코에 버금가는 기업으로 키워나가겠다.”

11월 16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동원빌딩에서 포스코개발 현판이 내걸리던 날,김만제 회장의 첫 일성이었다. 최고경영자의 힘찬 포부에 현판식에 참석했던 250여명의 임직원들은 포스코개발을 세계적인 종합엔지니어링 건설업체로 거듭나게 하겠다고 결의했다.

1995년 1월 23일, 포스코개발(이하 포스코건설)은 하얏트호텔에서 창립기념행사를 열고, E&C 분야 진출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행사에는 오명 건설교통부 장관을 비롯해 국내외 귀빈 8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먼저 손근석 초대회장의 개회사가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제철소 건설 초창기부터 축적된 플랜트 엔지니어링과 시공 기술을 하나로 응집한 결정체인 만큼 경쟁력 강화의 기틀은 이미 마련됐다. 앞으로는 첨단기술 습득에 주력해 개방화와 세계화 추세 속에서 선진국가와 당당히 경쟁하는 회사로 발전해나가겠다.”

포스코의 맏형으로 거듭난 포스코건설의 강한 의욕에 김만제 회장은 동반성장과 집중투자 의지를 밝혔다.

“E&C는 25년간 철강 건설 경험과 기술이 축적된 핵심역량 부문으로서 21세기 포스코 그룹 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E&C 산업을 선진기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그 역할이 기대된다. 포스코건설은 그룹에서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3대 기축사업 가운데 하나로서 투자를 포함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포스코건설의 출현은 한국 건설업계에 신선한 자극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담합과 뒷거래, 부실시공 같은 고질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특히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건설업의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출범 과정에서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부정적 이미지의 건설문화를 확 바꿔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주요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사업 초기부터 수주 과정까지 담합하지 않겠다! 건설업 질서를 흩트리는 덤핑을 하지 않겠다! 시공과정에서 절대 부실공사를 하지 않겠다! 무담합, 무덤핑, 무부실. 이 세 가지를 창업정신으로 내걸고 신생기업이 힘찬 첫걸음을 내딛자 그 동안 관행에 젖어있던 한국 건설업계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며 포스코건설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1994.12.01 포스코개발 창립 기념식(초대 임원진)

 

 #세계적 E&C 회사 미국의 벡텔이 되겠다!
1995.01 POSEC VISION 2005

1995.01 POSEC VISION 2005

포스코건설은 포스코의 비전이라는 사업계획에 따라 새 생명을 얻었다. 포스코가 설계하는 2005년의 비전은 세계 100대 클럽에 합류하는 것이었고, 성장의 지렛대로 포스코는 포스코건설을 선택했다. 그러니 포스코건설도 그에 걸맞은 비전이 필요했다.

1995년 1월 포스코건설은 비전(POSEC VISION 2005)을 수립했다. 처음부터 목표를 거창하게 잡았다. 세계적 E&C 회사인 미국의 벡텔을 타깃으로 설정했다. 벡텔의 목표로 삼아 21세기 세계 으뜸 E&C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포부였다.

불과 10년 만에 신생기업이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허무한 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포스코 철강신화의 주역답게 포스코건설의 꿈은 그렇게 원대하고 높았다. 결국 세계 1등 E&C기업이란, 10년으로 안 되면 20년, 20년이 안되면 30년 걸려서라도 철강신화에 이어 마침내 E&C신화를 이룩하겠다는 포스코건설만의 강한 신념의 표현이었다.

실현 가능한 비전의 목표로는 수주 8조 원과 매출 6조 원을 설정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제철 플랜트를 주축으로 환경, 에너지, SOC 분야를 주력사업으로 삼았고, 민자발전, LNG터미널 사업 등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또 선진 수준의 엔지니어링 기술을 조기에 확보해 사업 기획에서 건설관리까지 일괄적으로 수행하는 고수익 사업을 전략적으로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비전에서처럼 선진 엔지니어링 기술의 조기 확보를 위해 포스코건설은 출범과 동시에 자체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R&D 과정에서는 비전의 성공적 실천을 위해 주력 분야인 제철 플랜트, 환경, 에너지, SOC 분야의 기술확보에 역량을 모았다. 초창기 기술확보 과정에서는 선진 건설사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기술도입에 주력했다. 연구인력의 역량 강화와 기술경쟁력 조기 확보를 위해 대단위 기술연구소 건립도 추진했다.

미국의 벡텔 같은 세계적인 E&C회사를 지향한 포스코건설은 포스코그룹의 수직적 경영관계에서 벗어나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부문별 사장제를 도입했다. 이에 대표이사에 손근석 회장, 엔지니어링 부문에 박준민 사장, 건설 부문에 이정부 사장을 각각 선임하고, 고학봉 사장은 해외사업을 담당했다. 이로써 포스코건설은 한동안 1회장 3사장 체제를 유지하면서 초창기 조직의 화합과 성장을 위한 협력과 분권의 절묘한 조화를 이뤄나갔다.

출범 직후 포스코건설은 포스코의 의지에 따라 혁신활동으로 경영진단을 실시했다. 경영진단은 경영효율화를 위한 조직진단으로, 1996년 6월 추진위원회와 추진반을 구성하면서 그 막이 올랐다. 이후 1단계로 업무 진행과정 개선과 조직관리를 1995년 11월말까지 완료하고, 2단계로 기술 및 원가관리에 대한 경영진단을 1996년 11월 완료했다.

 

#한 지붕 세 가족, BEST POSEC으로 하나되다
1996.03.23 BEST POSEC 출범식

1996.03.23 BEST POSEC 출범식

“초대 회장으로 선임됐다는 연락을 받고는 내심 걱정이 앞섰다. 개인적으로는 포스코경영연구소의 초대 사장으로 조직을 운영해 보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데서 회사를 만드는 과정은 경험했지만, 포스코건설처럼 기존에 있었던 조직을 합쳐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있는 조직을 합쳐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회사를 새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손근석 전 회장)

포스코건설 출범 직후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조직의 화합이었다. 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거양개발과 PEC, 포스코의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 이들 조직의 통합을 두고 처음에 포스코는 사뭇 기대가 컸다. 각각 나름대로 기술과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절묘한 조합이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 선진화를 앞당기리라 믿었다.

그러나 막상 뭉쳐놓고 보니 상황이 심각했다. 조직 구성이 너무 복잡했다. 회사로 보면 3개 회사가 모였고, 조직으로 보면 4개 조직의 인력이었다. 그래서 한 지붕 세 가족이니, 네 가족이란 말이 나돌았다.

상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술연구소 조직으로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과 포철산기 인력이 들어왔고, 신생기업이다 보니 신규사업을 위해 경력사원을 대대적으로 뽑았다. 결국 보기에 따라서는 한 지붕 다섯 가족, 여섯 가족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무엇보다 서로 간 조직문화가 달랐다.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는 포스코의 특성상 제조업의 문화가 있었고, 거양개발은 건설업, PEC는 엔지니어링이라는 특성이 있었다. 게다가 통합 이전 이들의 관계는 발주자와 시행사로, 소위 갑을 관계였다.

더욱이 거양개발이 PEC를 흡수 합병하는 형식이라 PEC로서는 거양개발이 ‘점령군’으로 비춰졌고, 포스코에서 건너온 인력들의 경우 발주자에서 시행사로 지위가 떨어져 불안한 심정도 어느 정도 있었다.

내부 갈등 외에 당시의 문제점으로 손근석 회장은 구성원들의 영업력 부족을 꼽았다. 아직까지 공기업 문화가 남아 있어 민간기업처럼 치열한 생존본능이 부족했다. 이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기 위해 포스코건설은 서로간 이질적 문화를 버리고, 자신만의 고유문화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1996년부터 BEST POSEC 운동을 추진했다.

BEST에서 B는 Build로서 건설, 창조를 의미하고, E는 Economic minds로 경쟁력 제고를 뜻한다. S는 Skills로 기술향상을, T는 Trust로서 신뢰 구축을 의미한다. ‘21세기 세계 으뜸 E&C 기업’이라는 슬로건 아래 ‘미래도전, 가치창조, 참여경영’을 회사의 경영이념으로 삼았고,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며, 바르게 행동한다’를 사원정신으로 선정했다. 결과적으로 BEST POSEC 운동은 신설회사로서의 기본을 만드는 과정이었고, 구성원들에게 회사의 정체성과 비전, 그리고 사원정신을 상기시키는 사상교육이었다.

출범 직후 포스코건설은 국내 건설업계의 후발주자로서 신생아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각종 건설부문에 실적이 없었으며, 전문인력 부족으로 신규 수주 개척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구성원들의 창의성과 자율적 일 처리능력 부족도 문제였다. 그래서 포스코건설은 기업문화 혁신활동을 추진하면서 자율과 창의를 통한 경영을 강조했고, 상향식 의사결정을 원칙으로 자율책임과 결과에 대한 평가 시스템을 강화했다.

1997.08.19 BEST POSEC 한마음 실천교육

1997.08.19 BEST POSEC 한마음 실천교육

특히 간담회, 워크숍, 세미나 등을 계층별, 부문별로 실시했다. 처음에는 임원들부터 합숙훈련에 참여해 토론문화를 이끌어나갔다. ‘과연 회사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목표대로 발전할 수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등의 토론과제를 집중 논의해 회사의 목표와 업무처리방향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갖도록 노력했다.

이 같은 집중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포스코건설은 짧은 기간 내에 통합에 따른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고, 빠른 시간 내에 성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출범 3년 만에 시공능력 7위로 올라섰고, 수주액도 2조 원대에 진입했다.

 

1-2

Story2. 제철 플랜트 시동, 건설업계 판도를 뒤흔들다

# 싹쓸이 괘씸죄, 50%만 먹어라

인류는 석기와 청동에 이어 철기시대를 열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극빈층으로 전락했을 때 그들은 철에서 희망을 찾았다. 산업의 ‘쌀’인 철은 위대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좋은 철이 있었기에 조선 강국도, 자동차 강국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 제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비웃었다. 힘 있는 나라가 기술과 자금을 제공해도 그걸 만들고 지킬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들은다름 아닌 위대한 대한민국이었으며, 위대한 포스코였다. 그리고 제철신화의 숨은 주역으로 건설본부와 엔지니어링본부가 있었다. 그들은 신화창조의 출발선인 포항제철소 건설의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광양제철소를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994년, 그들이 다시 모여 포스코건설을 만들었다. 그들의 실력은 이미 검증을 받았다. 우향우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다진 실력이었다. 그 기세에 눌려 포스코건설이 영업을 시작하던 날, 건설업계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포스코건설이 출범하면서 포스코의 설비를 시공해왔던 대형 건설사들의 철강사업부가 된서리를 맞았다. 포스코는 외자설비만 직접 발주하고 내자설비와 공사 전부를 포스코건설에게 맡겼다. 그러자 대형 건설사들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공기업이 그렇게 방만하게 경영해서 되겠느냐!”

“국민기업이라면서 문어발식 확장이 왠 말이냐!”

하루아침에 일거리를 잃고 철강사업부를 유지해야 할지, 폐쇄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 그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이 같은 노골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포스코가 한발 물러섰다. 1996년 중반 포스코건설 직접 발주 물량을 50%로 제한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나머지 물량에 대해서는 포스코건설도 대형 건설사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입찰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50% 가이드라인도 무용지물이었다. 게임이 되질 않았다. 포항과 광양에서 8기의 제철소를 건설하면서 쌓은 실력이다 보니 경쟁을 해도 포스코건설의 성적이 월등히 높았다. 입찰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면 경쟁사들은 닭 쫓던 개마냥 먼 산만 바라보았다.

 

#광양 5고로, 우리기술로 세계 최강 제철소 만들다
광양 5고로 착공식

광양 5고로 착공식

출범 시작부터 건설업계를 바짝 긴장시켰던 제철 분야는 포스코건설이 성장기반을 구축해가던 1997년까지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용광로나 고로에 철광석을 녹여 선철을 만드는 제선 분야에서는 대표적으로 광양 5고로 신설, 포항 2고로 2차 개수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고로를 대체할 새로운 제철공정으로 코렉스 프로젝트도 수행했다.

광양제철소 5고로 건설은 포스코가 조강생산 능력 총 2800만 톤 체제를 구축, 세계 1위의 철강기업으로 도약하는데 디딤돌이 된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로서는 설계에서 기자재 조달, 시공, 성능 보장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자체 기술로 완벽히 수행한 사업으로, 제철 플랜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였다.

먼저 광양 5고로는 정부의 요청에 따라 사업이 발굴됐다.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 4기 준공 이후 포항과 광양을 비롯해 총 8기에서 2100만 톤 생산체제를 갖추고, 가동률도 95% 이상을 유지하는 데도 철강 수요가 계속 급증하면서 철강 부족 현상이 해소되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주력 산업인 조선과 자동차 산업의 철강재 공급 차질을 우려하면서 포스코에게 제철 생산량 확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정부의 요청과 수요 예측에 따라 1995년 6월 포스코는 연산 300만 톤 규모의 고로 1기와 연산 200만 톤 규모의 미니밀 1기 신설에 대한 투자를 결정했으며, 포스코건설은 포스코로부터 이 사업을 수주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러나 사업 수행 도중 포스코건설은 IMF 위기를 맞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 마디로 비상 상황이었다. 환율이 치솟으면서 자고 나면 환차손이 커져갔다. 우리는 확보된 기술력과 사업관리 능력을 총동원해 수익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설비의 합리적인 구매 필요성이 강조됐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발주 단위를 세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발주 단위가 무려 160개로 늘어났다. 비슷한 규모의 포항 4고로 1차 개수 때의 발주 단위 16개와 비교하면 그 노력이 참으로 대단했다. 발주의 세분화와 함께 국산 기자재 사용 비율도 대폭 늘렸다. 이 같은 조치를 통해 손실 폭을 줄이고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고영균 전 부사장)

국산 기자재 사용 비율을 대폭 늘리면서 포스코건설은 고로 설비의 국산화에 크게 기여했다. 고로 설비에 사용되는 기자재의 경우 국제적으로도 제작업체가 한정돼 있고, 높은 신뢰성이 요구되는 전문 설비들이어서 주요 설비의 국산화에는 신중한 기술검토와 검증 과정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코건설은 설비별로 국내 전문 제작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국내업체들이 고로의 조업과 수명 결정에 필요한 핵심설비 국산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광양 5고로 건설공사는 1996년 10월 착공 이후 포스코건설의 자력 엔지니어링 기술에 의해 1999년 3월말 준공됐다. 6-1특징으로는 소결공장과 코크스공장을 신설하지 않고 기존 설비를 사용했기 때문에 별도의 부대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어 경제적이었고, 특히 인공지능 시스템과 미분탄 취입 기술 등을 최대한 활용한 최신예 고로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 수행을 통해 포스코건설은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우선 기술축적의 성과가 있었다. 고로 개수와 광양 5고로 신설과정에서 습득한 각종 기술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는데, 그 성과물이 무려 총 37건, 4만 2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사업관리에 있어서도 ISO 절차에 의한 프로젝트 관리기법을 적용했다. 더욱이 미국의 엔지니어링사인 레이시온의 프로젝트 관리기법을 전수받아 대형 고로 프로젝트의 종합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공사 안전관리와 시공 품질 면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엄격한 시공 품질관리를 통해 공사 기간을 대폭 단축함으로써 시운전 기간을 6개월 이상 확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광양 5고로 신설 경험을 바탕으로 포스코건설의 기술력이 고로를 상품화해서 판매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는 점이었다. 이후 포스코건설은 최신 고로 기술로 무장하고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 첫 성과가 이란 타바존 프로젝트에서 나타났다.

광양 5고로 준공

광양 5고로 준공

 

#광양 1미니밀, 친환경과 저원가 시대를 열다

철강 생산 공정은 처음 쇳물을 만드는 제선공정에서 출발, 쇳물에서 불순물을 제거해 강철로 만드는 제강공정으로 넘어간다. 이 시기 포스코건설은 포항과 광양제철소에서 용선 예비처리 설비, 용강 승온설비, 탈가스 설비(RH-OB) 등 제강공정 중 쇳물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노외정련 공정에서 설비 설치공사를 여러 차례 수행했다.

제강공정 중 주요 프로젝트로는 광양 1미니밀 설비가 있었다. 미니밀 설비는 전기로에서 고철을 녹여 얇은 슬래브를 만든 뒤 가열로와 조압연설비를 거치지 않고 사상압연설비에서 열연강판을 생산할 수 있는 제철 설비이다.

광양 미니밀 공장 전경

광양 미니밀 공장 전경

광양 5고로 추진배경 때와 마찬가지로 국내 강재 소비가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자 포스코는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설비 증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철강 수요가 2000년을 전후로 고비를 맞아 2010년이 되면 쇠퇴기로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예측됨에 따라 포스코는 생산량을 조절하기 어려운 고로보다는 미니밀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사업에서 일부 설비공급과 시공을 맡았는데, 이 사업은 연산 180만톤 규모에 수주 금액이 외자를 제외한 설비공급과 시공을 합쳐 2880억 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1995년 1월 착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돌입해 굴착 102만㎥, 항타 1만 300본, 콘크리트 22만 4000㎥, 기계설치 4만 2000톤, 케이블 포설 3891㎞ 등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고 많은 설비를 도입했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는 난관도 많았다. 항타와 굴착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 수처리 설비 스케일 피트 굴착(GL-23m) 완료 시점에 시간당 30㎜ 이상의 폭우가 3시간에 걸쳐 100㎜나 쏟아져 토질이 변형되고 매몰되면서 굴삭기 1대가 침수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주야를 가리지 않는 복구작업에도 불구하고 7일 정도의 공정이 지연되고 경비도 많이 소요됐다.

기계 기자재 중 연주의 신설비인 코일 핸들링 시스템은 제작과정에서 문제점이 발견돼 납품이 지연됐으며, 고압가스 설비 중에서는 인허가를 받지 않은 제품이 반입돼 이를 교체하는 작업에도 많은 시간과 인력이 낭비됐다.

그뿐 아니라 일부 협력업체의 임금 체불로 인해 근로자들의 농성이 발생했으며, 일부 협력업체는 부도를 맞아 후속업무가 지연되기도 했다. 환경단체의 고발을 해결하는 데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렸다.

비록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도 많았으나 모두가 합심해 불철주야 노력을 경주한 끝에 당초 준공일 대비 15일을 단축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1996년 10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이 성대하게 거행됐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미니밀 전 설비에 대한 시운전은 아니었지만, 제강설비와 수처리 설비에 대해 포스코건설이 자력으로 주어진 일정에 무사히 시운전을 마침으로써 포스코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특히 내부적으로도 많은 경험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연 인원 86만 명이 동원돼 포항 지역 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는 당시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지 않아 도급계약 21개 차수에 45개 협력업체와의 202건에 달하는 계약을 관리하느라 고초가 많았다. 특히 협력업체 월 기성 지급 때는 현장소장이 350~400회 이상 결재를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포스코도 성과가 많았다. 광양 1미니밀은 제철소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용광로에 의한 일관제철 방식을 완전히 탈피해 고철을 주원료로 해서 전기로로 쇳물을 생산하기 때문에 용광로, 코크스, 소결설비가 지니는 환경오염 배출 요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아울러 두께 90㎜ 이하의 박슬래브를 고속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고속 연주기가 연결돼 있어 고생산성과 저원가 조업이 가능해졌다.

결과적으로 포스코는 이 설비를 통해 기존의 고로설비 대비 최고 50%의 설비비를 절감할 수 있었으며, 제조 기일도 8일이나 단축할 수 있었다. 특히 에너지를 40% 절감시키고, 노동생산성을 30%나 증가시키는 등 포스코건설은 발주자 포스코가 저원가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 광양 4냉연, 엄청난 규모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철강 생산 공정은 제선과 제강공정을 지나 연주공정으로 넘어간다. 연주공정은 액체 상태의 철이 고체가 되는 과정인데, 이를 반제품이라고 한다. 반제품은 다시 압연공정으로 넘어가 열연코일, 후판, 선재 등 철강 제품이 된다.

압연공정은 열간압연과 냉간압연으로 나뉘는데, 특히 냉연강판은 미려한 표면과 정확한 치수, 가공성 등의 장점을 지녀 자동차, 가전, 가구, 사무용품, 건자재 등 이용범위가 넓고 일상생활에 가장 가까운 철강 제품이다.

출범 이후 3년간 포스코건설은 연주공정으로는 광양 1연주공장 4연주기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열연에서는 포항 1열연 신예화와 포항 3후판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냉연에서는 광양 4냉연 신설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 중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광양 4냉연을 꼽을 수 있었다.

포스코는 가전용, 건자재용, 자동차용 등 냉연강판의 수요가 급증하자 1977년 2월포항 1냉연공장을 준공한 이후 포항 2냉연공장과 광양에 1~3냉연공장을 건설하는 등 냉연강판 생산능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왔다.

5개의 냉연공장을 가동하면서 포스코는 ‘냉연 제품이 회사의 사활과 직결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냉연 품질 혁신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러나 광양 3냉연공장 가동 이후에도 자동차, 가전제품 등 냉연제품 수요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포스코는 조만간 국내 냉연시장의 공급부족을 전망하고 광양 4냉연 건설에 착수했다.

연간 180만 톤의 생산 능력을 갖춘 광양 4냉연공장은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공장 길이가 1㎞가 넘고, 공장 폭이 300m에 이르렀다. 토건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는 하루 수행 인원만 4500여 명에 달했고, 평균 3800여 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포스코의 투자 금액이 무려 9812억 원에 달했고, 포스코건설의 수주 금액도 6280억 원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로서는 포스코건설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플랜트라 할 수 있었다.

광양 4냉연 EGL(전기도금설비)

광양 4냉연 EGL(전기도금설비)

1995년 9월 착공해 1997년 8월 준공한 이 공장은 냉간압연설비(PL/TCM), 연속소둔설비(CAL), 전기도금설비(EGL), 정정설비(RCL) 등으로 구성됐다. 포스코건설은 공기 준수를 위해 공사관리에 총력을 기울였다. 규모에 비해 1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콘크리트 49만 7000㎥, 철골 4만 4200톤, 기계 및 배관 설치 5만 2000톤, 케이블 포설 6800㎞ 등의 엄청난 물량을 처리하느라 심신이 고달팠다. 그래도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공기를 맞춰나갔다.

특히 토건공사의 공기 준수가 전체 공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여러 설비 중에서 기초 구조물이 복잡하고 협소한 지역에 대규모 물량이 집중돼 있는 TCM(냉간압연기)의 경우 압연지역 공장건설 사상 최초로 타워크레인을 설치해 사용했다. 더구나 포항 지역에서는 구조물 설치업체를 찾을 수 없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마땅한 업체를 찾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또 복잡하고 많은 구조물을 단기간에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밀도에 오류가 발생해 기계설치 작업 전에 많은 수정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나중에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냉연설비의 구조물 시공 기준을 정립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난관을 하나씩 극복해나가면서 1996년 2월 철골 입주식을 무사히 마쳤고, 이어서 8월에 압연기(Mill Housing) 입주식도 순탄하게 마무리 지었다. 압연기와 함께 연속소둔설비, 전기도금설비, 정정설비 등도 성공적으로 설치 완료했다.

포스코건설은 기전공사에 이어 기자재의 적기 수급을 위해설계, 제작, 시공 TFT를 각각 구성하고 제작사 상주관리, 1일 입고현황 관리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설치 중 발생하는 설계 및 제작 오류를 즉시 해결하는 운영체제도 가동했다. 그 결과 1997년 8월, 광양 4냉연공장이 성공적으로 준공됐다.

광양 4냉연 신설에서 가장 큰 성과로는 포스코가 독자 개발한 두께 및 형상 자동제어시스템 등의 첨단 기술을 채택함으로써 세계 최대치인 두께 0.4~2.3㎜, 폭 700~1860㎜의 후물광폭재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를 통해 제품의 두께 편차를 종전보다 32% 향상시켰으며, 후물광폭재의 평탄도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1994년 12월 출범 이후 3년간 포스코건설은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한 제철 플랜트에서 눈부신 성과를 달성했다. 포스코의 투자가 활발한 가운데 광양 5고로 신설, 광양 1미니밀 신설, 광양 4냉연 신설 등 사업규모가 1000억 원이 넘는 대형 프로젝트를 10여건이나 수행하면서 회사가 성장기반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97년의 경우 회사 전체 수주액이 1조 8000억 수준이었는데, 여기서 제철 플랜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1조 6000억 원 규모로 무려 91%를 차지했다. 이를 기반으로 제철 플랜트는 출범 직후 37위에 불과하던 회사의 시공능력을 7위로 끌어올렸다.

광양제철소 4냉연공장 전경

광양 4냉연공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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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3. 토목과 건축 분야 진출, “출발은 초라해도 꿈은 원대하게!”        

# 남의 떡 넘보지 말고 제철이나 먹고 살아라

1994년이 저물어갈 무렵, 말 많은 건설판에 신생기업이 출몰했다.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영일만 신화의 DNA를 가졌고, 그래서 뭔가 큰일을 낼 그런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시작부터 요란했다. 미국의 벡텔이 되겠다고 호언장담하질 않나, 부패로 찌든 건설판을 확 바꿔버리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이때부터 터줏대감들의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몇 십 년째 안정된 수익을 안겨주던 터줏대감들의 사업체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결국 터줏대감들이 뭉쳤다. 그들은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다졌고, 본때를 보이기 위해 연합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거양개발 시절이나 포스코건설 시절이나 대형 건설회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포스코 발주 물량에 의존하지 말고 일반 건설시장에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쟁업체들의 저항이 거세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수주사업보다 자체 개발사업에 역점을 두고 돌파구를 찾자는 전략을 수립했다. 거양개발 시절 분당 메트로상가, 강남빌딩, 강남역빌딩 등의 실적이 그런 결과물들이었다. 포스코건설 출범 후에도 개발 부지를 확보하는 등 일반 건설업 진출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는데, 그럴수록 경쟁업체들의 견제가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포스코에서 타사와의 과도한 경쟁을 가급적 피하라는 지시까지 내려왔다.” (이정부 전 사장)

이정부 전 사장의 회고에서 나타나듯 토목과 건축 분야 진출은 신생기업 포스코건설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원과제였다. 출범 이후 3년간의 성적표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외형만 따져보면 신생기업치곤 대단한 성적을 올렸다. 수주액 2조 원 시대에 진입했으며, 시공능력으로 평가하는 업계 순위에서도 7위까지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제철 플랜트가 거둬들인 실적이었다는 것이 모두가 우려하던 심각한 문제였다. 포트폴리오 구성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구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를 누구보다도 포스코건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포스코가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 종합준공을 계기로 설비확장을 완료했기 때문에 포스코건설은 출범 전부터 향후 물량 감소를 예측했다. 다행히 철강경기가 좋아서 예측이 살짝 빗나가 포스코가 투자를 확대했고, 포스코건설로서는 운과 때를 잘 만나 빠른 시간에 성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포스코건설은 부단히 토목과 건축 분야 확대를 시도했다. 그러나 부단한 노력에 비해 결과는 좋지 않았다. 실적을 중시하는 업계 분위기 탓에 시장 진입이 쉽지 않았고, 포스코에서 수행한 건축과 토목 실적을 내세워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들이 지역단위의 연고권 위주로 컨소시엄이 구성됐는데, 이를 대형 건설사들이 독식하고 있었다. 여기에 괘심죄에 걸린 포스코건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고, 대형 건설사들이 끼워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출범 직후 제철 플랜트를 싹쓸이 하자 그 불똥이 건축과 토목으로 튀었다. 경쟁사들은 포스코가 문어발식 확장을 한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결국 국민기업의 이미지를 소중히 여기는 포스코가 외부 경쟁 자제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포스코건설이 아니었다. 우선은 토건사업본부를 강구조개발본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포스코의 위신을 세우면서 경쟁사들이 견제를 풀도록 위장전술을 펼쳤다. 건축 분야는 자체 개발사업으로 사업확대를 시도했고, 토목 분야는 민자사업으로 돌파구를 찾아나갔다.

 

#와신상담 건축 분야, 자체 개발사업으로 반전 모색하다
강남빌딩 전경

강남빌딩 전경

실적 부족과 업계의 견제로 사업추진이 여의치 않았던 포스코건설은 자체 개발사업과 포스코 물량으로 건축부문을 근근이 연명해나갔다. 자체 개발사업으로는 거양개발과 PEC가 추진해오던 프로젝트들을 물려받아 수행했다. 거양개발 사업으로는 강남빌딩과 강남역빌딩 프로젝트가 있었고, PEC 사업으로는 충정타워가 있었다. 포스코 관련 사업으로는 직원용 임대아파트인 상록타워가 있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강남빌딩과 강남역빌딩은 포스코건설에게는 최초 오피스빌딩 건설과 최초 민간 수주사업이라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1993년 3월 착공, 1996년 1월 준공한 지하 6층, 지상 21층 규모의 강남빌딩은 동절기 한파 때문에 시공 과정에서 애환이 많았다. 콘크리트 양생(Curing, 養生)을 위해 아래층에 15개의 갈탄 난로를 피우고, 위층에는 3개의 열풍기를 설치하는 촌극을 펼쳤다.

특히 공사지역이 저지대여서 폭우로 인해 전기실이 침수되는 일도 있었고, 준공을 앞두고는 주공정 업체의 부도로 돌관공사(突貫工事)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런 난관을 극복하고 강남빌딩은 강남지역 상권의 중심 건물로 자리잡았다.

1996.01 강남빌딩 준공

1996.01 강남빌딩 준공

강남역빌딩 전경

강남역빌딩 전경

1993년 6월 착공, 1997년 6월 준공한 지하 7층, 지상 20층 규모의 강남역빌딩은 분양사업에 자신감을 심어준 프로젝트였다. 일반 분양을 진행할 경우 적자가 예상되자 포스코건설은 일괄 분양을 추진했다. 매수 희망업체로는 한솔그룹이 나타났는데, 건축주를 비롯해 3자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협상과정에서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2개월에 걸친 협상과정에서 치밀한 계획과 정보수집으로 상대를 이해시키고, 상세한 자료제공으로 신뢰를 얻어 마침내 계약에 성공했다. 그 결과 당초 적자가 예상되던 사업을 흑자로 전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충정타워 전경

충정타워 전경

서울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 입구에 위치한 지하 6층, 지상 15층 규모의 충정타워는 포스코건설 최초의 도심 재개발사업이었다. 사업 구조는 조합원에게 3개층을 대물 보상하고 나머지 12층을 일반 분양하는 것이었다. 시공은 동부건설이 맡았고, 1993년 12월에 착공해 1996년 8월에 준공했다.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서는 세입자와 반대 조합원으로 인해 1년 6개월이나 공사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분양에 성공해 흑자를 기록하고 재개발사업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한 것은 큰 성과였다.

“포스코건설은 철강재를 활용한 프로젝트 발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부산의 광안대교 공사를 수행하면서 콘크리트로 설계된 것을 강교량으로 바꾸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철골조 아파트인 상록타워도 건설했다.” (이정부 전 사장)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지하 2층, 지상 25층 규모의 상록타워는 포스코건설 최초의 아파트 건설이었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철골조를 이용한 주거 전용 아파트라는 점에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포스코 무주택 서울 근무자들을 위한 임대아파트로서 1994년 8월에 착공해 1996년 6월에 준공했다. 포스코건설은 건물 뼈대를 완전히 철골로 구성하는 국내 최초의 철골조 아파트를 준공함으로써 철강재를 이용한 선진기술을 선보였으며, 철골조 아파트 건설 활성화에 의한 새로운 철강재 수요를 창출하고, 건식공법과 관련된 경량 마감자재 산업발전에도 기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최초의 공공사업 광안대교 적자 운영의 눈물 젖은 빵
건설 당시 광안대교

건설 당시 광안대교

“광안대교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강교량을 제작했는데, 이만한 크기의 강교량은 대형 안벽을 갖춘 조선소가 아니면 제작할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1000억 원 정도의 적자가 예상되는 사업이었다. 적자 폭을 줄이려고 중국, 태국, 러시아 등 해외에서 제작해 반입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결국 국내업체인 현대중공업에 제작을 맡겼다.” (박주운 상무, 당시 현장소장)

포스코건설은 적자를 예상하고도 실적을 쫓아 광안대교 건설공사에 참여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해 눈물 젖은 빵을 삼켰고, 그런 노고에 힘입어 적자 폭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다.

부산의 명물인 광안대교는 총 길이가 7.42㎞로 당시로서는 국내 최장의 해상교량이었다. 대규모 사업이었던 만큼 부산시는 5개 구간으로 나누어 공사를 발주했다. 1994년 12월 포스코건설은 울트라건설, 협성종합건설 등과 공동으로 입찰에 참가해 3공구의 시공사로 선정됐다. 경쟁사들의 견제가 심한 당시 상황에서 그나마 포스코 이미지가 좋은 부산지역이어서 참여가 가능할 수 있었다.

3공구는 중앙의 현수교와 조화를 맞추기 위해 360m의 트러스교와 40m의 강상형교를 현수교 좌우측으로 설치하는 공사 구간으로, 전체 시공물량은 트러스교 720m, 강상형교는 80m였다. 시공 과정에서 최대 난제는 초중량 구조물의 설치 작업이었다. 해상 크레인으로는 도저히 설치할 수가 없어 결국 포스코건설은 국내 최초로 잭업다운(Jack-up Down) 가설공법을 선택했다.

특히 성공적인 공사 수행을 위해 포스코 도쿄기술연구소로부터 기술지원도 받았다. 강교량 가조립 테스트에 대한 기술자문을 받았고, 일본 5개소의 사례조사와 강교량 건설 관련 기술도 제공받았다. 무엇보다 이 공법을 교량에 적용한 예가 없어 예행연습이 필요했다. 박주운 상무는 광안대교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이때의 경험을 잊지 못할 한 장면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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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2.09 광안대로 건설 기공식

1998년 1월, 모든 상황을 실제 조건과 동일하게 준비한 다음 예행연습에 들어갔다.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구조물을 탑재하지 않은 3만톤 규모의 바지선이 6시간 만에 광안리 앞바다에 나타났다. 현장에 국내 유일의 초대형 바지선이 도착하자 마치 섬 하나가 떠있는 것 같았다. 이 거대한 배를 구경하기 위해 해변가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기상 악화로 거대한 산 모양의 파도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손 쓸 겨를도 없이 해상작업용 장비들이 파도에 묻혔고, 설상가상으로 섬과 같은 바지선이 교각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2003.01.06 부산 광안대교 개통식

2003.01.06 부산 광안대교 개통식

만약 교각과 부딪친다면 지난 4년간의 피와 땀이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급히 예인선 3척을 동원해 바지선을 먼 바다로 끌어당겼으나 오히려 계속 밀리기만 했다.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던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아무리 당겨도 꿈쩍도 않던 바지선이 서서히 당겨지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현장 직원들과 감리단, 그리고 발주처인 부산시 공무원들까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예행연습과 함께 포스코건설은 1998년 2월 27일 국내 최초로 잭업다운 가설공법을 적용해 트러스교 설치에 성공했다. 1998년 11월과 2000년 10월에도 같은 공법을 적용해 트러스교 설치에 재차 성공함으로써 이 분야에서 다시 한 번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1995년 2월에 착공에 들어간 광안대교는 8년간의 긴 공사끝에 2003년 1월 6일, 마침내 개통됐다.7-1개통식에서 박주운 상무(당시 현장소장)가 대통령 표창인 산업포장을, 김남일 Director(당시 과장)가 발주처인 부산광역시로부터 시장상을 수상했다.

 

 #고육지책 인천공항고속도로, 민원도 두렵지 않다

실적도 없는데다 회사가 대형 건설사들에게 미운 털까지 박혀 토목 분야는 공공사업에서 그야말로 개점휴업 상태나 다름없었다. 건축처럼 자체 개발사업을 추진할 건수도 없었다. 건축이야 부지 확보해서 분양하고 그 자금으로 건물을 지으면 되지만, 토목은 사정이 달랐다. 도로, 철도, 항만 등의 토목사업은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SOC의 영역이었다.

기댈 수 있는 언덕은 오로지 포스코뿐이었다. 제철소가 바다를 끼고 있어 항만공사가 있었고, 제철소를 지을 때마다 부지조성 공사가 있었다. 가장 실속 있는 사업으로는 환경사업이 있었다. 포스코가 친환경을 강조하면서 프로젝트 물량이 많았고, 그 물량만 소화해내도 업계 1위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목을 한다고 말할 때 SOC사업을 빼놓고는 더 이상 논할 수 없다. 하지만 SOC는 공공사업이 대부분이었고, 실적을 요구했으며, 대형 건설사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더구나 견제까지 받다 보니 포스코건설에게 SOC는 진입장벽이 마천루처럼 높았다.

다행히 포스코건설이 출범할 때 민자SOC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정부는 민간 자금을 끌어들여 부족한 재정을 보완하고, 운영면에서는 민간의 창의와 효율을 활용하기 위해 1994년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자유치촉진법’을 제정했다. 이로써 공공사업의 전유물이었던 SOC사업에서 민자사업의 가능성이 열렸다. 포스코건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민자유치촉진법 첫 모델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민자사업으로 나왔다. 민자사업에서 돌파구를 찾은 포스코건설은 1995년 7월 대형 건설업체들이 구성한 컨소시엄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건설 전경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건설 전경

이 프로젝트는 인천국제공항~김포공항~올림픽대로를 연결하는 총 연장 40.2㎞의 6~8차선 자동차전용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사업이었으며, 총 사업비만 2조 62억 원이 투입된 매머드급 프로젝트였다. 포스코건설을 비롯해서 11개 국내 대형 건설회사가 참여해 도로 4개, 교량 3개 등 7개 구간으로 나누어 공사를 시행했다.

“우리가 맡은 3공구는 노선은 길지 않지만 서울시, 경기도, 인천시 등 3개의 행정구역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각종 인허가 및 민원이 다른 공구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어 공사 추진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특히 서울시 강서구 개화마을과 인천시 계양구 하야동의 주택가를 관통하는 바람에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면서 공사를 하느라 곤혹을 치렀다.” (박상곤 전 상무, 당시 현장소장)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고육지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구를 선정할 때 민원이 많고 3개 행정구역이 인접해 인허가 등 행정이 복잡한 곳을 선택했다. 특히 3공구는 다른 공구에 비해 교량, 터널 등 구조물 공사도 많아 대부분의 건설사가 꺼리던 구간이었다. 따라서 3공구의 선택은 실적 쌓기에 급급했던 그 시절의 애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었다.

3공구는 길이가 본선 5.473km와 지선 1.493km로 총 6.966km였으며, 450m의 개화육교 외 8개 교량과 988m의 개화터널이 주요 공사 대상이었다. 1995년 12월 착공에 들어간 포스코건설은 2000년 9월 30일, 착공 5년 만에 4개의 도로 구간 중 가장 먼저 공사를 종료함으로써 대형 SOC사업에서 우수한 프로젝트 관리능력을 입증했다.

2000년 11월 20일,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국내 1호 민자유치 SOC사업인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개통식이 열렸다. 포스코건설은 이 자리에서 철저한 공사 품질관리 등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단체표창을 수상했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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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4. 글로벌 시동, 플랜트 강점 살려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다        

# 신시장을 찾아 중국, 베트남으로 Go Go!

포스코건설이 출범하던 1990년대는 이데올로기 장벽이 붕괴하면서 소위 공산권이라고 불리던 북방국가에서 순풍이 불어왔다. 1992년 한국과 중국,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음으로써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들 국가들은 경제성장의 모델로 한국을 선택하고 한국기업들의 대대적인 투자를 희망해왔다.

포스코건설은 신생기업이었지만 출범 직후부터 해외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여건과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먼저 글로벌 영토 확장에 나서는 든든한 포스코가 있었고, 포스코건설의 전신인 거양개발과 PEC가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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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9.15 베트남 VPS 준공

포스코건설이 집중적으로 개척하고 들어간 시장은 중국과 베트남이었다. 거양개발과 PEC의 경우 베트남시장부터 개척에 나섰다. 거양개발은 1993년부터 비나파이프 건설공사를 수행하고 있었고, PEC는 VPS 압연공장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비나파이프는 1994년 7월에 준공됐고, VPS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바통을 이어받아 1995년 9월에 준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포스코건설은 베트남사업을 확대했다. 출범 직후 베트남 철강기업과 합작으로 포스리라마를 설립하고 철골공장을 건설했다.

제철 플랜트 외에도 거양개발은 자체 개발사업으로 건축사업을 추진했다. 호치민 중심지에 위치한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주상복합빌

딩인 다이아몬드플라자는 1995년 10월에 착공해 2000년 8월에 준공했다. 베트남에 이어 중국에서도 건축사업을 추진했는데, 상하이 중심지의 랜드마크인 포스플라자는 1996년 4월 착공에 들어가 1999년 1월에 준공됐다.

포스코건설 출범 직후 포스코의 주무대는 베트남보다는 중국이었다. 1992년 광양제철소 준공 이후 포스코는 증강된 생산능력을 소화할 만한 시장으로 세계의 공장 중국을 선택하고 집중 투자에 나섰다.

다롄 CGL, CCL 공장 전경

다롄 CGL, CCL 공장 전경

이집트 아르코 특수강공장 전경

이집트 아르코 특수강공장 전경

포스코건설은 포스코의 중국 진출에 따라 포스코 현지법인의 발주 물량을 기반으로 성공적으로 중국시장 개척에 성공했다. 중국시장 첫 프로젝트는 라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 CGL이었으며, 이어서 장쑤성(江蘇省) 장자강(張家港)에 진출해 CGL과 STS 플랜트를 수행했다.

중국, 베트남에 이어 포스코건설의 해외사업은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비롯해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와 브라질로 확대됐다. 이집트 아르코(ARCO) 프로젝트는 PEC가 개발한 사업이었다. 1993년 PEC는 아르코가 14만 톤 규모의 특수강 플랜트 건설을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1995년 2월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이 최저입찰자로 선정됐으나, 프로젝트 컨설팅을 맡은 일본의 NKK가 자격미달을 선언하고 포스코건설을 배제시켰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부당함을 호소했고, 우리 정부도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상황은 포스코건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시가 한-이집트 수교 직전이라 이집트정부가 부담을 느꼈고, 결국 무바라크 대통령이 재입찰을 지시했다. 더욱이 아르코는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 NKK를 컨설팅에서 제외시켰다. 재입찰 결과 1996년 1월 포스코건설은 아르코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베네수엘라 포스벤 공장 전경

베네수엘라 포스벤 공장 전경

베네수엘라 포스벤(POSVEN) 프로젝트도 PEC로부터 출발했다. 1994년 미국의 방산업체 레이시온이 미니밀 고철 대체원료인 HBI 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개발해 PEC에 사업추진을 제안해왔다. 당시 포스코가 2기의 미니밀 건설을 준비 중이어서 사업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마침내 1997년 1월 포스코를 최대주주로 하는 다국적기업 포스벤이 탄생했고,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사업관리와 엔지니어링 분야를 수주했다.

브라질 코브라스코(KOBRASCO) 프로젝트는 포스코 사업이었다. 포스코는 광양 5고로의 조업용 펠릿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1996년 3월 브라질 국영 철광석회사와 합작으로 코브라스코를 설립했다. 포스코건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설계와 설비공급을 맡았으며, 펠릿 공장은 1997년 7월 착공에 들어가 1998년 11월 준공됐다.

이처럼 포스코건설은 신생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제철 플랜트 강점을 십분 활용해 중국과 아시아를 넘어 저 멀리 북아프리카, 지구 끝 남아메리카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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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코브라스코 공장 전경

1998.11 브라질 코브라스코 준공식

1998.11 브라질 코브라스코 준공식

 

 

 

 

 

 

 

# 영일만 철강신화, 베트남에서도 통한다

“우리는 포스코와 박태준의 신도!”

1992년 도무오이 당시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말이다. 국가 쇄신을 위해 ‘도이모이’(베트남 개혁개방 정책)를 외쳤던 베트남이 경제성장 모델로 선택한 것은 한국식 경제개발과 포스코의 철강신화였다. 그들은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먼저 한국과 수교를 맺었고, 포스코를 첫 해외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들에게는 철강산업 육성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도무오이 서기장이 박태준 회장에게 철강산업 투자와 기술지원을 요청해옴에 따라 포스코도 베트남 진출을 준비했다. 1992년 3월 포스코는 베트남 정부와 철강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는 포스코의 베트남 투자가 임박했음을 시사하는 움직임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한 PEC는 조직을 갖추고 프로젝트 수주를 위한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프로젝트의 윤곽은 1993년 들어 더욱 구체화됐다. 1993년 1월 황경로 당시 포스코 회장이 철강산업 협력을 위해 베트남을 방문했다. 베트남 정부는 포스코의 투자결정에 강한 신뢰와 함께 다이아몬드플라자의 공동 추진을 제의해왔다. 다이아몬드플라자는 베트남 정부가 호치민시 중심부에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랜드마크 건축사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말레이시아의 젠팅그룹이 강한 의욕을 가지고 사업 참여를 희망했는데, 베트남 정부는 젠팅을 제치고 철강 프로젝트와 건축 프로젝트를 모두 포스코에 넘겼다. 그 결과 베트남 프로젝트는 원플러스원(1+1) 효과를 가져와 PEC가 철강 프로젝트를, 거양개발이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됐다.

포스코는 베트남과 철강협력 과정에서 베트남철강공사(VSC)와 함께 현지법인으로 VPS(VSC POSCO Steel Corporation)를 설립했다. 따라서 베트남 철강 프로젝트는 일명 VPS 프로젝트로, 7만 톤 규모의 철근과 6만 톤 규모의 선재를 비롯해 총 20만 톤 규모의 압연공장을 건설하는 제철 플랜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수주전에는 PEC 외에도 이탈리아의 다니엘리, 우리나라의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이 참여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PEC는 정확한 정보력과 오랜 준비, 그리고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1993년 11월 지명경쟁 입찰에서 국내외 경쟁사를 물리치고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PEC가 VPS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거양개발이 PEC로부터 시공 부문을 수주함으로써 엔지니어링과 건설을 대표하는 양대 패밀리사가 팀워크를 이뤄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됐다. 더욱이 두 회사의 합병으로 EPC 전문기업이 탄생하고, 이 기업이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함에 따라 VPS 프로젝트는 포스코건설이 처음으로 수행하는 해외사업이란 기록을 남겼다.

1994 베트남 VPS 착공식

1994 베트남 VPS 착공식

VPS 압연 플랜트는 가열로, 압연기, 정정설비의 주설비와 수전설비, 운송설비, 롤숍기기, 수처리 및 계장설비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였다. 1994년 4월 착공에 들어가 1995년 9월 완공됐다. 자국 내 최대 규모인 철강공장인 VPS 압연공장이 본격 가동에 들어감에 따라 베트남의 철강생산량은 연간 50만 톤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의 철강 수요는 연간 90만 톤에 육박했고, 개혁개방과 경제개발 정책에 따라 1996년 이후에는 그 수요가 150만 톤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이를 기회로 보고 베트남에 투자했다. 1994년 12월 베트남 건설성 산하 리라마와 철골 합작사업 계약을 체결하고, 1995년 6월 포스리라마 법인을 설립했다. 이어서 1995년 10월부터 철골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1996년 10월 준공된 포스리라마 철골공장은 총 부지면적 8만여 ㎡, 공장면적 1만여 ㎡에 용접기, 절단기, 프레스 등의 2차 가공제작 설비와 각종 운반장치, 중기, 시험장비 및 다양한 공구를 설치해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를 갖추었다.

공장 준공 이후 포스리라마는 도무오이 서기장이 현장을 방문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할 정도로 베트남 정부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았으며, 베트남 후알론 방직공장 건립공사의 1차 철골제작 설치공사 수주를 비롯해 철골, 배관, 탱크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해나갔다.

 

# 다이아몬드플라자, 도이모이의 상징이 되다

VPS 프로젝트가 포스코건설의 1호 해외사업이었다면 다이아몬드플라자는 해외 건축사업 1호에 해당되는 프로젝트였다.

1995년 4월 포스코건설은 베트남 철강공사 VSC와 합작으로 다이아몬드플라자의 건설과 운영을 위해 IBC(International Business Center)법인을 설립했다. 포스코건설이 투자자금을 출자하고, VSC가 토지를 현물 출자하는 조건이었다. 포스코건설이 40년간 임대 운영한 뒤 VSC에 지분을 무상으로 양도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1995년 10월 착공된 다이아몬드플라자는 지하 2층, 지상 20층 규모에 상가시설과 업무시설, 그리고 주거시설인 아파트로 구성된 복합건물이었다.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주상복합 건물이며, 건물 전체를 철골조로 제작함으로써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었다.

건축 분야 해외 첫 프로젝트였던 만큼 경험 미숙으로 인한 어려움이 많았다. 전반적으로 업무처리가 매끄럽지 못했고, 주요 설비자재를 한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데다 시공방법이 베트남과 상황이 달라 투자비가 상승하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선진기업들을 벤치마킹 하면서 차츰 시행착오를 줄여나갔다.

자금조달도 쉽지 않았다. 1996년 2월 차입을 통해 초기 건설자금은 확보했지만, 이후 베트남 리스크와 저팬 프리미엄에 따라 IBC의 자금 조달여건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이 지원에 나서 전액 지급보증을 함으로써 추가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분양과 준공 마무리였다.

“1998년 8월 1일, IBC 법인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다이아몬드플라자의 상가와 사무실, 그리고 아파트는 준공을 한 후 모두 임대 분양하기로 돼 있었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 게 가장 큰 임무였다. IMF 시절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본사에 있을 때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암 3기이니, 악성 종양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다 보니 호치민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문표 전 전무)

당시 다이아몬드플라자는 공정이 80% 정도 마무리되고 마지막 마감공사가 한창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분양이었다. 마케팅 에이전트인 BHP는 추진력이 부족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영국의 체스터톤으로 교체하고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적극적인 마케팅 결과, 아파트는 오픈 초기부터 인기를 끌어 금새 분양이 완료됐으며, 업무시설도 개관 초기 계약기준으로 입주율이 80%를 넘어섰다. 한국기업들의 의리가 대단했다. KOTRA, SK, 대한석유공사 등은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먼지가 풀풀 날리는 상황도 개의치 않고 즉시 입주해주었다.

그러나 상업시설 분양은 쉽지 않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포스코건설은 현지 자료조사를 통해 상가의 개념부터 재정립했다. 레이아웃과 운영방식을 현지에 맞게 수정했으며, 품질을 위해 인테리어 공사를 추가했다. 무엇보다 기존 개별분양 방식의 상가계획을 전면 수정해 백화점 방식으로 변경했다. 인테리어 공사는포스코건설이 직접 시공했다. 그 결과 베트남 첫 현대식 백화점이 탄생했으며, 준공 시점에서100% 임대 분양에 성공했다.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전경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전경

다이아몬드플라자는 호치민시 최고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옛 대통령궁과 노트르담 성당이 마주보고 있으며, 건물의 3면이 도로와 접한 사통팔달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2000년 8월 25일 준공된 이 복합건물은 미국·베트남 무역협정(2000.7.14), 베트남 증권거래소 개장(2000. 7.20) 등과 함께 베트남 경제개방 3대 상징으로 통한다.

다이아몬드플라자가 종합 준공되던 날, 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이 일대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는 주변 도로와 공원까지 점령했다. 도이모이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급기야 백화점 출입문을 통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사람들은 백화점 입구에 줄을 서 있다가 구경을 마치

2000.08 베트남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준공식

2000.08 베트남 호치민 다이아몬드 플라자 준공식

고 나오는 사람 수만큼만 들어가야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다이아몬드플라자의 성공적 준공으로 포스코건설은 한류 전도사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국 건설의 수준 높은 기술을 베트남에 전파하는 민간외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베트남의 기준을 넘어 국제적 공사품질 관리기준을 준수하는 등 엄격한 시공관리를 통해 현지인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 결과 베트남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골든퀄리티메달(Golden Quality Medal)을 수상하기도 했다.

 

 

# 중국 철강시장에 표면처리 기술 우수성을 알리다

베트남이 도이모이를 외치며 외국 자본을 유혹하기 이전에 이미 중국은 흑묘백묘론(白猫黑猫論)을 앞세워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거대 중국의 이 같은 개혁개방 소식에 전 세계 자본이 앞다퉈 차이나 드림을 좇아 불나방처럼 모여들었다.

포스코와 포스코건설도 전략적 요충지로 중국을 선택하고 만리장성을 넘었다. 포스코의 경우 광양제철소 준공 이후 늘어난 생산물량을 소화해낼 만한 큰 시장이 필요했는데, 거대 시장 중국의 개방과 한중 수교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포스코건설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가 건축 분야까지 노렸다.

베트남 건축 프로젝트 추진으로 자신감을 얻은 포스코건설이 중국 내 건축시장 진출의 타깃으로 삼은 곳은 상하이였다. 당시 상하이는 개혁개방의 선두주자로, 가장 먼저 변신에 나섰다. 영국의 홍콩 반환을 앞두고 중국 정부는 상하이를 제2의 홍콩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으며,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푸동(浦東) 루자주이(陸家嘴) 지구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상하이는 외국인 투자유치가 봇물을 이뤄 점차 세계적 금융과 무역,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로 변모해갔다.

포스코건설은 이 같은 중국시장의 변화를 발 빠르게 읽어내고 한국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단독 투자에 나서 초고층빌딩인 포스플라자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94년 7월부터 사업추진 검토에 들어가 1994년 11월 상하이시와 토지매입 계약을 체결하고 50년간 토지사용권을 취득함에 따라 프로젝트 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건축 프로젝트에 순풍이 부는 가운데 포스코도 계획대로 중국 진출에 성공했다. 먼저 화북, 화동, 화남지역에 3대 거점을 삼각편대로 확보하고 점차 내륙으로 진출한다는 전략을 세웠으며, 그 첫 시작은 화동으로 정했다.

1995년 11월 중국 동북지역 CGL 수급 불균형을 기회로 삼아 랴오닝성 다롄에 컬러강판(CGL)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어서 1996년과 1997년에 장쑤성 장자강에 포항강판(CGL)과 포항불수강(STS) 현지법인을 각각 설립함으로써 화동지역에 코일센터로 구성된 복합 철강 생산단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상의 세 포스코 현지법인이 발주한 공사는 모두 포스코건설이 수주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다롄 CGL은 1995년 11월 착공, 1997년 9월 준공했다. 회사 내부에서는 사업 초기 경험이 부족하니 기본 엔지니어링을 선진기업에 맡기고 프로젝트를 추진하자는 일부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자신들만의 작품을 만들자는 의견이 더 많았으며, 결국 정예 인력을 구성하고 자력 엔지니어링을 실행에 옮겼다.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포스코건설은 경제적 설비 조달에 이어 35일의 공기단축 성과를 달성했다.

1996년 11월 착공, 1998년 5월 준공한 장자강 CGL은 일반 건자재는 물론 가전 용도의 고품질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로서, 중국 내에서 설비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철강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빈번하게 방문하는 CGL의 모범 사례로 인기를 끌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순수 자력 설계로 설비를 공급하고 성능 인증까지 수행함으로써 표면처리 분야 설계기술에 대한 경쟁력을 국제 철강시장에서 드높일 수 있었다.

1999.01.22 장자강 STS 준공식 석상에서 휘호

1999.01.22 장자강 STS 준공식 석상에서 휘호

1997년 2월 착공, 1999년 1월 준공한 장자강 STS는 사업 초기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 문화’라는 암초에 걸려 곤혹을 치렀다. 포스코건설은 만만디로 인한 업무 지연을 막기 위해 강한 의지로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했으며, 그 결과 오히려 착공에서 상용생산에 이르기까지 21개월의 짧은 공기로 중국 내 최대 STS 냉연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자체 기술력 향상은 물론, 국내외에서 다시 한 번 그 기술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중국 진출 이후 3개 제철 플랜트의 성공적 수행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장자강 항만 투자사업에 나섰다. 이 사업은 포스코건설이 수행하고 있던 바로 그 3개의 프로젝트들이 이용할 항만건설 사업이었다. 포스코건설은 1997년 8월 항만 건설을 위한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곧바로 건설공사에 들어가 1998년 7월에 준공했다.

이후 장자강 항만을 1년간 운영하다가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포스코 현지법인인 장자강 포항불수강에 매각했다. 비록 운영 1년에 그쳤지만 이 항만은 포스코건설이 해외에서 첫 SOC사업에 투자했다는 데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 상하이 포스플라자, 입주하려면 자격심사부터 받아라!

중국 내 제철 플랜트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상하이 건축 프로젝트 추진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토지사용권 취득에 이어 1995년 4월 한국은행으로부터 투자 승인을 획득했으며, 6월에는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후 포스플라자 건립을 위해 한국 건설사로는 처음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건설면허를 취득함으로써 향후에 중국 건축시장에 본격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1996년 2월 포스코건설은 중국 정부로부터 프로젝트의 초보설계비준서를 취득했다. 초보설계비준서는 중국의 건축 관련 법규상 착공 허가와 각종 인허가를 얻기 위해 필수적으로 취득해야 하는 사전심사로서 우리나라의 건축허가에 해당되며, 상세설계는 이 초보설계 비준내용을 기초로 해서 진행된다.

초보설계비준서 취득과 함께 건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건설공사에서 토목이나 골조공사는 현지업체가 수행했으나, 당시 중국의 설비기자재나 고급 마감재 기술수준이 부족해 불가피하게 많은 한국업체들이 설비기자재 공급과 시공에 참여했다. 강관파일 원자재와 철골소재는 포스코 제품을, 철근은 인천제철에서 수입했다. 외장 커튼월은 현대알미늄에서 공급과 함께 시공을 맡았다.

시공 과정에서는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파일 신공법을 현지업체와 공동으로 개발해 시공에 적용함으로써 상당한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이 공법은 신기술로 지정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포스코건설은 건축 설계에 심혈을 기울였다.

“상하이는 참 역동적이다. 그러나 건물만 이야기하자면, 시골 처녀가 봄바람이 나서 도시로 나들이를 가고 있는 것 같다.”

포스플라자를 설계한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페이(I.M. Pei)의 말이다. 상하이의 건물이 겉으로 봤을 때는 아름다운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세련되지도 못하고 기능성도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페이의 설계에 따라 포스코건설은 미적인 요소와 함께 기능성을 강조했다. 이중바닥을 설치하고, 기둥 없는 사무공간을 구현했다. 또 중국에서는 최초로 스테인리스 마감재를 활용해 미려한 건물 외관을 완성했다.

포스플라자는 건설 과정에서 품질과 안전관련 수상실적도 12건이나 올렸다. 1997년 상반기 우수현장으로 선정됐으며, 1998년 상하이 건설위원회로부터도 우수현장으로 선정됐는데, 이는 외국기업으로서는 최초의 영광이었다.

중국 상해 포스플라자 전경

중국 상해 포스플라자 전경

1999년 9월 준공과 함께 마침내 지하 4층, 지상 34층 규모의 포스플라자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2000년 5월 포스플라자는 푸동개발 10주년을 맞아 21세기 사무환경에 걸맞는 공간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아 상하이시로부터 건축 금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초기 운영 과정에서는 임대가 잘 안 돼 고민도 많았다.

“포스플라자 완공 직전인 1999년 8월에 상하이로 발령받았다. 포스플라자는 ‘코리아 센터’라는 개념에서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기업을 상대로 임대사업을 하겠다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준공 때까지 입주율이 저조했다. 준공 2개월이 지나도 계약율이 8%에 불과했다.” (박래권 전 상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스플라자 법인은 독특한 전략을 펼쳤다. 기상천외한 입주조건을 내걸었다. 글로벌 500대 기업일 것, IT나 BT 업종일 것, 서양 회사일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면 특별 우대를 하고, 조건 충족에 따라 조금씩 차등을 둔다는 단서도 달았다.

그러자 상하이 부동산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부동산업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포스플라자는 품질에 자신이 있었다. 10년, 15년 앞을 내다보고 설계했으며, 주차장도 법정 규모가 345대인데 790대가 들어가도록 지었다. 사무실 공간도 매우 실용적이어서 같은 분양 평수라도 다른 건물보다 실 평수가 훨씬 더 나왔다. 이런 내용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등 포스플라자는 최고급 전략을 펼쳐나갔다.

효과는 마케팅 5개월만에 나타났다. 미국 컴퓨터의 대명사 컴팩이 들어왔다. 컴팩을 시작으로 GM과 독일상공회의소 등이 속속 입주했다. 뒤이어 코닥과 인텔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텔은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입주하지는 않았지만,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인텔이 OK할 정도로 IT환경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입주가 러시를 이뤘고, 2001년 말 마침내 완전 입주를 달성할 수 있었다.

1994년 말 출범 이후 3년간의 성적을 놓고 볼 때 신생기업 포스코건설은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 중국과 베트남을 시작으로 해외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으며, 그 영역은 아시아를 넘어 북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이르렀다. 국내사업에서도 최고 경쟁력을 확보한 제철 플랜트를 기반으로 건설업계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업계 순위 10위 이내에 진입하며 향후 폭풍 성장을 예고했다.